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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찾도 TV '독립운동하다 쫄딱 망한 종교'?

 

얼마전 8.15 광복이 지났습니다. 올해가 광복 73주년이라고 하는데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 독립운동가 중 마지막 생존자인 이우석 선생님이 24년 전인 1994626,

8평짜리 무허가 단칸방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 쓸쓸히 눈을 감았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목숨 걸고 나라 지킨 분이 생활고라니요.

사실 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삶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독립운동사의 비하인드 스토리~! 독립운동하다 졸딱 망한 종교~!?

함께 보시죠.

 

# 민족종교의 독립운동

을사오적 처단, 무오독립선언, 3.1운동, 6.10만세 운동, 상해임정수립,

청산리, 봉오동전투 등 굵직한 독립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종교인들, 특히 민족종교인들 이었습니다.

 

당시 종교는 유교, 불교, 기독교, 천주교를 비롯해 천도교, 대종교, 보천교라는 민족종교가 있었습니다.

종교계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당시 조선일보 항일운동 기사를 보면 알 수 있구요,

특히 민족종교에서 많은 독립운동을 펼쳤는데요.

우리 민족의 혼과 정신이 그대로 담겨있는 민족종교는 당시 핍박받는 조선민중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민족통합에 큰 역할을 했죠.

 

# 독립운동의 중심, 보천교

이 중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항일운동건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 있어요. 바로 보천교였습니다.

유교, 불교, 기독교는 알겠는데 보천교는 좀 생소하죠?

보천교는 증산상제님을 모시던 차경석성도가 상제님의 후천개벽을 성취하기 위해

도세를 일으킨 민족종교입니다.

당시 인구 1800만 중 3분의 1 600만 이상이 신앙을 했어요.

인구의 3분의 1이 신앙했으니 엄청났죠.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의 조상님들 중 분명 보천교신앙을 하셨던 분이 있었을거예요.

보천교의 항일운동건수가 압도적으로 많을 수 밖에 없죠.

 

엄청난 교세를 자랑했던 보천교는 당시 조선민중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희망과

독립을 할 수 있다는 확신과 비전을 제시하며 그 어떤 종교보다도

주체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 보천교의 독립운동 1 - 무오법정사항일운동

그럼 보천교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을까요?

인구의 3분의1이 신앙했는데 조직력이며 경제력이며 엄청났죠.

보천교의 독립운동은 곳곳에서 진행되었는데요. 대표적으로 몇 개만 알려드릴게요.

 

먼저 무오법정항일운동이 있습니다. 1918년 제주도에서 엽총과 농기구로 무장한

사람들이 중문 주재소를 불 지르고, 주재소장과 일본경찰들을 구타한 사건입니다.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 항일운동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인데요.

불교에서 일으킨 운동으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보천교와 불교의 연합투쟁이었습니다.

이 일로 보천교는 지도자와 간부들이 구속, 수배되는 등 큰 탄압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보천교인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았죠.

 

# 보천교의 독립운동 2 물산장려운동

이에 보천교는 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국권상실 후 우리민족의 경제권을 살리기 위한 중요한 독립운동의 요소로서

보천교의 조직과 자금이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보천교는 대흥리에 유리공장, 직조공장, 농기구공장 등을 지어

물산장려운동을 촉진하게 됩니다.

 

# 보천교의 독립운동 3 독립운동자금지원

보천교는 특히 독립운동자금을 굉장히 많이 지원했습니다.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한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요.

1921916일 보천교의 재무담당이었던 김홍규의 집에서 열린

간부회의에 일본 경관들이 습격하게 됩니다.

 

김홍규를 비롯한 여러 간부들이 체포 되면서 가택수사까지 당하게 되고

이 때 마루 밑에서 10만 원가량이든 항아리가 발견되었는데 이 돈은 상해임시정부로

전달될 군자금이었습니다. 모두 압수당하게 되죠.

 

1924년엔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2만원을 지원했고,

자금이 없어 부대를 해체 할 상황에서 보천교의 지원 덕에 청산리 전투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보천교 본소를 자주 드나들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받았다는

기록들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김구선생님은 광복직후 보천교 본소가 있던 정읍에 방문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

 

 

(자료) 화폐가치 (쌀을 기준으로 환산)

1920년대 10만원 2017년 기준 약 8(791,349,250)

2만원 2017년 기준 약 12(122,954,363)

 

 

 # 일제의 민종종교 탄압 유사종교 정책

그런데 왜 우리는 보천교를 전혀 알지 못할까요?

일제는 1915년에 불교, 기독교를 제외한 조선의 모든 민족종교를

유사종교’, 사이비종교로 격하시켜 감시하고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 한민족의 정신을 담은 민족종교가 민족운동의 원천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일제에 의해 민족종교는 유사종교, 사이비라는 누명을 쓰고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민족종교라는 말이 생소하고 어색한 이유가 여기 있는 거죠.

 

# 일제의 보천교 탄압 - 보천교의 해체

그중에서도 보천교는 일제탄압의 1순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의 계속된 탄압을 받던 보천교는 교단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과 타협점을 찾게되는데요.

바로 시국대동단이라는 것을 함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국대동단은 일제가 보천교를 완전히 파괴하기위한 계략이었습니다.

시국대동단 취지 연설에서 모인 사람들 중 보천교 단원이 한 명도 없고

친일인사들만 모아놓은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보천교는 일본에 의해 유사종교로 뿐만 아니라 친일단체라는 오명까지 쓰고

단체가 해체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보천교 실제 사진과 평면도>

<보천교 십일전 해체당시 모습 실제 사진>

그리고 보천교 본소건물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어 전국 사찰들로 옮겨졌습니다.

십일전이라고 하는 보천교 본소는 규모가 경복궁 근정전보다 크고,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까운데요.

 

십일전의 본전 기둥을 사용해서 지은 것이 조계사 대웅전입니다.

뭐 독립운동하다 집까지 다 뜯겼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이후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신사참배압력에 굴복했지만

보천교 간부는 단 한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 마무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이였고 조선의 혼이고 희망이었던 보천교.

수많은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제의 탄압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부활하여 증산도로 맥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보천교를 신앙하시던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께서 광복이후

증산상제님 신앙을 부활시켰고, 후천개벽을 최종적으로 완성한다는 사명으로

탄생한 것이 증산도입니다.

 

요즘 사회곳곳에서 크고 작은 적폐청산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은페된 독립운동사가 바로서야만 뿌리부터 정의로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상으로 내찾도TV였습니다.

 

*내찾도 TV 영상볼 수 있는 사이트 : https://youtu.be/0uQ7hFYmc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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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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