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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약속 (4) -진표율사,금산사, 동국이상국집

 

 

상생문화연구소 노종상

 
 
제3장 용의 아들

 

 

차량은 두 대로 움직였다. 나와 미륵팀 총무 정지원이 탄 SUV 차량은 김현 교수가 운전하였다. 아니, 미륵팀이 김교수의 차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서울대 사학과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친 김교수는 전공이 서양사였다. 그는 내가 어느 역사 답사−말이 역사답사이지 내 입장만 보면 불교 성지순례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답사’라고 하자−를 간다고 동행의사를 물어보면 단 한 번도 거절한 일이 없었다.

 

내가 불학을 전공하고 그는 사학을 전공하였으므로 답사에 관한 한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하게 분류해 보면 그는 서양사 전공자이므로 학문적으로 불교 유적지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거절하는 법이 없이 동행하는 것을 보면, 넓은 의미로 사학의 범위에 든다거나, 마음이 바다만큼이나 넓은 호인이거나, 차마 남의 청을 거절 하지 못하는 위인이거나, 사주팔자에 역마살이 많아서 집 밖을 나다니기 좋아하거나, 뭐, 그런 경우 중의 어디에 속하는 사람으로 추측되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추측이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그를 알게 된 지는 10년이 훌쩍 지났으나 화를 내는 것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 생각이지만, 그렇게 보면 그가 호인인 것은 분명하였다. 하긴, 사람은, 모른다. 죽을 때까지 가 봐야 아는 것.

 

우리는 참 많은 곳을 답사한 것 같다. 경주 남산을 비롯하여 화순 운주사와 민불, 남해 보리암,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익산 미륵사, 양주 회암사, 파주 용미리 쌍미륵불…. 뿐만 아니라 일본 교토, 인도 불교 유적지까지도 같이 다녔다. 답사한 곳들을 생각해 보니까, 십중팔구는 불교 유적지인 것이, 아무래도 내 의지가 많이 반영되었던 것 같다. 김교수는, 나한테, 그렇게, 사람 좋기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위인이었다.

 

국내 답사를 갈 때면, 차가 SUV인 탓도 있지만, 김교수가 주로 운전하였다. 종일 운전을 하다가 지칠 때면, 도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잠을 청하는 일이 있어도, 그는 단 한 번도 운전대를 나에게 넘겨준 일이 없었다. 나이 탓도 없지는 않았을 터였다. 생물학적으로 내가 그보다 다섯 살이 위니까, 어쩌면 선배 대접을 해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교수. 요즘 답답하지 않아요?”

며칠 전 나는 그의 연구실로 밀고 들어가서 차를 마시는 도중에 은근히 떠보았다.

 

“어디 답사할 곳이 생겼나 보죠?”

그는 이미 눈치를 챘다는 듯 물었다.

 

💬“예. 내가, 요즘, 누군가에게 꽂혔어요.”

 

“누굽니까, 마교수님의 그 열정을 앗아간 분이?”

 

💬진표율사요!

 

”아. 그분요.“

 

💬“잘 압니까?”

 

“아니요. 조금은 알지요.”

 

💬“내가 또 문자를 씁니다. 역사가 앞에서. 허허.”

 

“역사는. 나야 뭐 서양사 전공인데.”

 

💬“어. 김교수. 축구공만 한 지구를 놓고 서양사는 뭐고 동양사는 뭡니까. 그냥 사학이지. 허허허.”

 

“그런가요. 좋을 대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하하.”

 

우리는 한 바탕 웃었다. 웃는 동안 나는 그의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학문적 호기심이 남다른 김교수의 책장에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 고대사, 신화, 심지어 언어학책도 많이 보였다. 그가 언어학에 관심이 많고 히브리어까지 공부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국내 답사를 자주 다녔으므로 나는 가끔 그가 서양사 전공이라는 사실을 잊곤 하였다. 그런 망각을 나는 애써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에둘러 꾸며대서 웃음으로 덮곤 하였다. 내가 주변을 얼쩡거리자 그는 배부른 고릴라처럼 여유롭게 웃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그의 별명은 ‘고릴라’였다. 그 고릴라를 내가 먼저 붙였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붙였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내 앞에 놓인 빈 찻잔에 보이차를 따라 주면서 중단되었던 얘기를 꺼내 들었다. 

“어딘가요, 진표율사라면, 금산사인가요? 어. 그러고 보니까, 금산사는 마교수님과도 인연이 깊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요. 잊어버렸던 인연이지만.”

 

“잊어버린 인연이라.”

 

💬“아니,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어버렸던, 잊어버리고 싶었던 인연이라고 할까.”

 

“감회가 깊겠군요. 알겠습니다. 금산사라면, 나도 가보고 싶습니다.”

 

💬“아니요. 김교수. 금산사는 며칠 전에 다녀왔어요. 금산사가 아니고, 그 옆에, 행정구역으로는 같은 김제시 지역이지만, 그 옆에 만경읍입니다.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만경읍이라구요! 좋아요. 가는 길에 벽골제, 김제 금산사도 함께 답사하지요. 그래야 징게 맹경 외에밋들을 다 밟는 거 아닌가요!”

김교수는 벌써부터 신이 나는가 보았다.

 

💬“뭐. 그러지요. 징게 맹경 외에밋들을, 답사해 보지요. 허허.”

 

전라북도 김제를 얘기할 때 떠오르는 대표적인 표현이 ‘징게 맹경 외에밋들’이다. ‘징게 맹경’은 김제와 만경을, ‘외에밋들’은 넓은 들녘을 가리킨다.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는 우리나라 최대의 평야로서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호남평야를 이루는 들판이다. 삼한 시대에, 바로 그곳에 물을 대기 위해 조성한 저수지가 벽골제다.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자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삼한 시대 3대 수리 시설로 꼽힌다.

 

“그런데 왜 진표율사에 꽂힌 분이, 만경에 가는 건가요?” 

김교수가 불쑥 물었다.

 

💬“무작정 가는 겁니다. 진표율사 출생지가 기록마다 달라요.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이, 이게 아주 문제야.”

나는 들고 온 책 한 권과 함께 복사물을 김교수에게 건네주었다. 『진표, 미륵 오시는 길을 닦다』(이하 『진표』로 줄임)라는 책과, 복사물은 내가 금산사를 다녀온 뒤부터 수집한 진표율사 관련 문헌자료였다.

 

💬“참고하라고 드립니다. 조사해 보니까, 진표에 대한 전기자료는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어요. 최초의 기록은 중국기록으로 『송고승전』이에요. 거기에 수록된 「진표전」과 함께 원나라 사람 담악(曇噩)이 찬술한 『신수과분육학승전(新修科分六學僧傳)』의 「진표전」 그리고 명나라 태종 성조(成祖)가 지은 『신승전』 권7 「진표」 등이 있어요. 국내 기록으로는 일연이 쓴 『삼국유사』 권4 제5 「진표전간」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이하 「석기」로 줄임)가 대표적입디다.

 

💬전기는 아니지만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남행월일기」도 진표의 행적에 대한 일부를 제공하고 있어요. 그리고, 현재 시중에 진표율사 관련 책은 이 『진표』가 유일합니다. 여기에,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했으니까 한 번 보도록 하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교수의 연구실을 나왔다. 학구열이라면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인 김교수는 연구실을 나서는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방금 내가 전해준 책 『진표』를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내 연구실로 돌아왔다. 

『진표』에는 진표율사의 전기적 생애에 관한 문헌자료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중국기록인 『신수과분육학승전』의 「진표전」은 『송고승전』의 「진표전」을 거의 그대로 옮겨 실었다. 『신승전』의 「진표」 역시 마찬가지다. 『송고승전』 「진표전」의 첫머리에 있는 출가 동기에 대한 부분과 끝부분의 금산사 조성에 관한 부분만 제외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중국기록으로서 전표 전기는 『송고승전』의 「진표전」 한 편으로 귀착된다. … 국내 기록으로서 진표의 전기 두 편이 『삼국유사』에 앞뒤로 실려 있는 것이 시선을 끈다.

 

「진표전간」은 물론 일연이 기록한 것이다. 같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것이라고 해도 「석기」는 기록자가 다르다. 「석기」는 1199년 금강산 발연사 주지 영잠(瑩岑)이 기록한 「관동풍악산발연수진표율사진신골장입석비명(關東楓岳鉢淵藪眞表律師眞身骨藏立石碑銘)」을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1250~1322)이 정리, 수록한 것이다. 「석기」 말미에 “이 기록[『삼국유사』]에 실린 진표율사의 사적[「진표전간」]과 발연사 비석의 기록은 서로 다른 데가 있다. 때문에 영잠의 기록만을 추려서 실었으니 후세의 현자들이 당연히 잘 살피기 바란다. 무극이 기록한다.”고 덧붙여 놓았다.

 

「남행월일기」는 전주목 사록겸서기(史錄兼書記)에 보임된 이규보가 1199년 9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년 4개월여 기간 동안의 외직생활을 통해 얻은 견문을 토대로 1201년에 정리한 일종의 기행수필이다. 당대 최고의 문인 이규보는 전주목 주변을 두로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기록했는데, 여기에 진표에 관한 기록이 들어있는 것이다. 영잠의 「비명」과 같은 해에 쓰였다. 현재 전하는 진표에 관한 국내 기록으로는 「석기」와 함께 최초의 기록이다. 기행수필이므로 진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기는 아니지만 진표의 수행에 관해서는 매우 유용한 자료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전하는 진표에 대한 대표적인 전기는 「진표전간」, 「석기」 그리고 「진표전」 등 3종이 있다. 이들 중 「진표전」이 가장 오래 되었다. 그러나 「진표전」은 중국기록으로서의 한계가 있다. 진표와 전기 찬술자들의 사망연대를 기준으로 「진표전」은 진표 사후 약 230년 뒤에, 「비명」(「석기」)은 약 435년 뒤에, 그리고 「진표전간」은 525년 뒤에 기록되었다.

 

전기물의 평가 대상이 ‘사실성’ 여부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또한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굳이 사실성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진표와의 시간적 거리와 공간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전기물로서의 ‘가치’가 커질 것이다.

 

이 경우 시간적 거리는 「진표전」 〉 「비명」 「석기」 〉 「진표전간」이 되고, 공간적 거리는 「석기」=「진표전간」 〉 「진표전」이 된다.

 

그러나 시간적 거리에서 「석기」의 경우, 원래 영잠에 의해 집필된 「비명」은 「진표전간」보다 앞서지만, 무극에 의해 정리·편찬된 「석기」는 「진표전간」보다 늦다. 스승 일연이 쓴 「진표전간」을 보고 「비명」과 다른 곳이 있어서 제자 무극이 다시 정리하여 「석기」라는 제목으로 「진표전간」 뒤쪽에 수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 3종의 전기가 진표의 행적에 대한 연대를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것은 논의과정에서 검토하겠으나 적게는 10년, 많게는 2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진표의 생애에 대한 접근은 이들 3종의 전기에 대한 종합, 비교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

 

4️⃣

 

진표율사의 출생지에 대한 답사를 떠나기 며칠 전, 미륵팀은 대전 시내의 한 카페에서 모임을 가졌다. 대전천변에 위치한 카페는 보문산 전망대가 한 눈에 올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임시수업 겸 그동안 각자 준비한 내용들을 점검해 보자는 의도였다. 총무인 정지원이 미리 준비해 온 자료를 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진표율사의 생애에 관한 문헌자료였다. 

 

중 진표는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목이다) 만경현(萬頃縣)(혹은 두내산현豆乃山縣 또는 나산현那山縣)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만경의 옛 이름이 두내산현이다. 「관녕전(貫寧傳)」에서는 진표의 고향을 ‘금산현(金山縣) 사람’이라 하였으나, 이는 절 이름과 현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 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요,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며 성은 정씨(井氏)이다.  (「진표전간」)

 

진표율사는 전주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석기」) 

 

그[진표]의 고향은 금산(金山)에 있다. 대대로 사냥을 하며 살았다. 진표는 날쌔고 민첩하였다. 특히 활을 잘 쏘았다. (「진표전」) 

 

“진표에 대한 3종 전기를 검토할 때 가장 먼저 부딪치게 되는 문제는 출생연도와 함께 출생지, 그리고 활동연대가 자료마다 각기 다르다는 점인데요. 중국기록인 「진표전」은 물론이고 『삼국유사』에 앞뒤로 나란히 실려 있는 「진표전간」·「석기」조차도 기록되어 있는 연대가 다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후자는 두 편 모두 어느 정도의 연대가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달라서 오히려 혼란을 부추기는 측면이 없지 않아요. 현재로서는 서로 다른 연대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방계자료도 찾아볼 수도 없구요. 진표의 행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문제점이 있다는 전제 아래에 3종의 전기를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 드려요.”

 

정지원이 설명했다. 나는 말없이 지원을 보았다. 짧은 시간에 참 열심히 준비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시학원 영어강사이기도 한 그가 언제 시간을 내서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했는지 놀랍고 미안하기까지 하였다. 과연 나도 이미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였으나 그녀의 설명대로 진표의 출생연대는 물론 출생지, 활동연대도 정확하지 않았다. 일단 출생지와 출생연도를 확인하면 활동연대는 자연스럽게 확인이 될 터였다.

 

먼저 출생연대의 경우, 정지원이 지적한 것과 같이 3종의 진표 전기에 나타나는 연대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나는 이미 판단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활동연대가 확정되면, 거기에서 출생 연도를 유추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연구논저 『진표』가 퍽 도움이 되었다. 이 책에는 진표의 생애에 관한 대표적인 3종의 진표 전기를 중심으로 연대를 정리해 놓았다. 

 

먼저 「진표전」을 보자. 이 전기에서 나타나는 연대는 출가연도뿐이다. 그것도 “개원중 (중략) 출가의 뜻을 품었다(當開元中 [中略] 因發意出家).”고 하여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다. 개원연간(713-742)은 신라 33대 성덕왕( ? ~ 737) 12년(713)부터 34대 효성왕(737~741)을 거쳐 35대 경덕왕 1년(742)까지 30년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결국 이 전기의 연대 기록만으로 진표의 출가연도를 알기는 어렵다.

 

「진표전간」의 사정은 조금 나은 편이다. 이 전기에는 진표가 선계산 부사의암에서 14일 동안 수행을 하다가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정계(淨戒)를 받은 것이 23세 때, 개원 28년 경진년(740, 효성왕 4)이라고 했다. 그 후에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이르러 어별들 위해 설법하고 계를 준 것이 천보(天寶) 11년 임진년(752, 경덕왕 11)이다.

 

「석기」에 따르면 진표가 변산 부사의암에 들어간 것이 27세 때인 상원(上元) 원년 경자년(760, 경덕왕19), 그로부터 3년 뒤인 임인년(762, 경덕왕 21)에 지장·미륵 두 보살로부터 계법을 얻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진표전간」에 따르면 진표가 지장보살로부터 계를 받은 것은 23세 때, 740년이구요. 12세 때 출가했다고 했으므로 출가연도는 729년, 출생연도는 717년이 돼요. 「석기」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겠죠. 변산 부사의방으로 들어가던 해가 27세 때인 760년이므로 출가하던 12세 때는 745년, 다시 출생연도는 733년이 됩니다. 문제는 두 전기 「진표전간」과 「석기」 사이에 출생과 출가 연대 기록이 16년의 차이가 난다는 점이구요.”

 

나는 물론 미륵팀원들은 모두 정지원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내용도 그렇지만, 그의 열정적인 모습에 모두 기가 죽었다는 표정들이다.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열쇠로서 진표의 출가 나이를 주목합니다. 「진표전간」과 「석기」에서 출가연도는 각기 다르지만 나이는 12세로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진표의 출가 연도기록―729년(「진표전간」), 745년(「석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정확할지 알 수는 없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열쇠가 추가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진표전」의 출가연도인 개원연간(713~741)이 그것이다.

 

이 출가연대와 앞의 두 전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출가연도가 합쳐지는 것이 「진표전간」의 729년이랍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진표전간」의 연대를 기준으로 잡는 이유이기도 해요. 이에 따르면 진표는 성덕왕대에 출생하여 효성왕대에 출가하여 경덕왕대를 중심으로 혜공왕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교화를 떨치다가 입적하였다는 결론이 내려지구요.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유의해야 하답니다.”

 

정지원이 발표를 마치자 나는,

💬“좋아. 아주 고생이 많았어.”

격려하였다. 

 

💬“다음 주제는 뭔가? 응. 진표의 가계와 출생지로군.”

 

“예. 한상수 동학님이 발표할 겁니다.”

 

💬“그런가!”

 

나는 정지원 옆에 앉아 있는 한상수 학생에게 눈길을 가져갔다. 박사 1학기인 그는 희끗희끗한 백발에 노익장인 듯싶지만 피부에 윤기가 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50대 중, 후반의 장년 정도로 보였으나 공무원 정년퇴직을 하고 가는 세월이 아까워서 한류대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포부를 밝힌 노신사였으나, 그는 수행에도 관심이 많아서 미얀마의 양곤(Yangon)에 있는 마하시명상센터(Mahawi Sasana Yeiktha Meditaion Centre)에 가서 한 달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올 정도로 멋진 노년을 보내는 늦깎이 학생이었다. 

  

━━━━⊱⋆⊰━━━━

 

5️⃣

 

한상수가 『진표』를 중심으로 준비해 온 진표율사의 가계는 이러하였다.

진표의 아버지는 진내말, 어머니 길보랑 정씨라고 했다. ‘진내말’은 내마(奈末) 또는 나마(柰麻)인 신라의 11등급 관직명에 성씨인 ‘진’을 앞에 붙인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제3대 왕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재위 24∼57) 9년에 17등급의 관위를 설치하였다. 법흥왕 7년(520) 율령 공포 때에 제정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7관등 중에 1관등 이벌찬에서 5관등 대아찬까지는 진골만이 받을 수 있다. 11관등은 나마라 하여 중나마(重奈麻)부터 칠중나마(七重奈麻)까지 두었다.

 

오늘날 한국의 성씨에는 보이지 않는 진씨는 백제의 대표적인 여덟 귀족 성씨―백제의 대성팔족(大姓八族) 가운데 하나였다. 백제의 대성팔족은 ‘8개의 큰 성씨’라는 뜻으로 백제 후기의 대표적인 귀족가문 8개를 아울러 가리키는 말이다. ‘대성팔족’은 『수서』 등을 비롯한 중국 역사서의 “[백제] 나라 안에 큰 성씨로서 8개 집안이 있으니(國中大姓有八族)…”라는 문장에서 비롯된 말이며, 『삼국사기』 등 국내 역사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백제의 대성팔족에 대해 기록한 중국역사서는 『수서』, 『북사』, 『신당서』, 『통전』 그리고 「괄지지」를 인용한 『한원(翰苑)』 등이다. 8개 성씨에 대한 내용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삼국사기』 등의 국내기록에는 진씨와 백씨가 자주 나온다.

 

말하자면 진표율사의 집안은 신라 5두품 계급에 속하는 유력가문이었다. 5두품은 신라시대 골품제도 중 하나의 신분계급으로서 성골·진골·6두품 다음의 계급이다. 밑으로 4두품이 있었다. 원래 신라의 골품제에 포함되는 자는 왕경인(王京人)에 한하는 것이었고, 5두품은 중앙관직에 임명되므로 지배자집단에 속하는 계급이었다.

 

『삼국사기』는 진촌주(眞村主)를 5두품과, 차촌주(次村主)를 4두품과 동일하게 파악하고 있다. 진촌주와 차촌주가 어떤 신분에 속하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촌주는 촌락의 장이었으며 여러 개의 촌을 다스리고 있었다.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까지 오를 수 있었다. 다만, 대나마에서 더 관등을 올려야 할 경우 중대나마에서 9중대나마까지 중위(重位)를 내려주었으며, 제9관등인 급벌찬 이상으로는 승진시키지는 않았다.

 

따라서 진표는 한 고을을 장악하고 있는 유력한 지방호족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법상종 연구』라는 논문에 따르면 ‘내마’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귀족에게 관직을 나누어줄 때 3등급인 은솔(恩率)을 강등하여 수여한 관직명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진표는 옛 귀족가문이지만 백제멸망 후 신라에서도 우대를 받았던 가문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진표의 출생지에 대해서도 3종의 전기가 일치하지 않다는 것은 정지원 총무가 나눠준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다들 자료를 보면서 토론을 이어 나가도록 합시다. 먼저 「진표전간」에서는 진표의 출생지가 완산주 만경현라고 했는데, ‘만경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였어요. ‘혹은 두내산현이라 하고 혹은 나산현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만경의 옛 이름이 두내산현’이다. 그리고, 「석기」에는⋯.”

 

한상수는 뒷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흘끔 본 뒤에 다시 굵고 침착한 어조로 발표를 이어 나갔다. 이어지는 그의 발표를 요약하면 이러하였다.

 

「석기」에는 진표율사가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 사람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진표가 완산주 두내산현 도방산촌 대정리, 오늘날의 전북 김제시 만경읍 대정리에서 출생하였다는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다만 『동국여지승람』 ‘만경현’조에 “본시 백제 두내산현豆乃山縣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김제군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고 하였으므로 「석기」의 ‘도나산촌’이 아니라 ‘도나산현’이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말예요. 여기에는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돼요. 현재 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진표의 출생지에 대한 전북 김제시 만경읍 대정리 설은 두 진표 전기를 논의의 편의에 따라서 비빔밥처럼 잘 버무린 결과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완산주는 지금의 전주를 가리킵니다. 『동국여지승람』 ‘전주부’ 조에 따르면 본래 백제의 완산이며 신라 진흥왕 때 완산주를 둔 이후에 부침을 거듭하다가 조선 태종 때 전주부로 고쳤어요. 같은 책 ‘김제군’ 조에는 ‘본래 백제의 벽골군인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전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인종 21년에 현령을 두었다’고 했어요. 지금 제시한 검증자료에 따르면 학계의 결론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긴 해요.

 

그렇지만, 문제가 남아 있어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오늘날 김제지역의 지명은 원래 벽골(또는 소골疎骨), 두내산(豆乃山, 흑은 두내지豆奈知), 수동산(首冬山), 무근촌(武斤村), 야서이(也西伊) 등 여러 가지 지명들이 변천을 거듭해 왔어요. 그러다가 757년 벽골이 김제로 개칭되었고 두내산은 만경으로 개칭되었어요. 또한 수동산은 평고(平睾)로, 무근촌은 무읍(武邑)으로 각각 개칭되어 모두 김제군의 속현이 되었거든요. 따라서 벽골=김제, 두내산=만경은 각기 다른 지명인데 위의 두 진표 전기에는 같은 행정구역으로 기록하였고, 현재 학계에서는 진표의 출생지를 전북 김제시 만경읍 대정리 설로 마치 전주비빔밥처럼 얼버무려 놓았단 말입니다.”

 

“⋯.”

 

자료를 들이대고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냉정하게 비판하는 한상수의 결론에 미륵팀원들은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린 듯 입을 열지 않았다. 분위기는 이미 무거워졌다. 

 

💬“예. 발표 잘 들었어요. 수고했습니다. 진표율사의 출생지가 현 학계에서 주장하는 만경읍 대정리 설이 과연 전주비빔밥처럼 얼버무린 것인지 아닌지 결론은⋯.”

내가 상체를 앞으로 당기면서 말했다. 

 

💬“현장에 가서 확인하는 것이 어떨까요? 비록 1천여 년이 지났으나 현장은 기록에서 발견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지도 모르니까. 현장에 간다고 해도, 지명이라는 것이 있다가도 없어질 수도 있겠지만.”

 

토론 결과, 이번 답사가 결정되었다.

세종 시내를 벗어난 차는 대전-당진 고속도로의 짧은 구간을 지나 곧장 호남고속도로로 꺽어들었다. 운전하는 내내 김현 교수는 말이 없었다. 이따금 창밖을 흘끔거리는 정지원도 조용하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나는 진표율사의 전기 자료를 검토하였다. 

차는 여산 휴게소 앞을 지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너른 들판이 달려왔다. 그 너머로 흰 구름이 둥실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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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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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천년의 약속 (3)

 

 

상생문화연구소 노종상

 
 
제2장 출가

 

 

━━━━⊱⋆⊰━━━━

 

 

3)

 

진표율사에 대한 전기는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국내 기록으로는 고려시대의 고승 일연이 쓴 『삼국유사』 권4 제5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이하 「석기」로 줄임)가 대표적이다.

 

전기는 아니지만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도 진표의 행적에 대한 일부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기록에는 송나라 찬영贊寧(930∼1001)이 쓴 『송고승전』 권 제14 「당백제국금산사진표전唐百濟國金山寺眞表傳」(이하 「진표전」으로 줄임), 원나라 사람 담악曇噩이 찬술한 『신수과분육학승전新修科分六學僧傳』의 「진표전」 그리고 명나라 태종 성조成祖가 지은 『신승전神僧傳』 권7 「진표」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중국기록인 『신수과분육학승전』의 「진표전」은 『송고승전』의 「진표전」을 거의 그대로 옮겨 실었다. 『신승전』의 「진표」 역시 마찬가지다. 『송고승전』 「진표전」의 첫머리에 있는 출가 동기에 대한 부분과 끝부분의 금산사 조성에 관한 부분만 제외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중국기록으로서 전표 전기는 『송고승전』의 「진표전」 한 편으로 귀착된다.

 

금산사를 다녀온 뒤에 나는 꽤 열심히 자료를 수집하였다. 국내 도서관은 물론 인터넷을 통해 모은 국내외 자료도 제법 쌓였다. 그 결과를 연구노트에 정리하고 있을 때, 학생들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이번 학기에 나한테 수강하고 있는 ‘한류반’ 학생들이었다.

 

💬“어서들 오게.”

나는 학생들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 “뭐하셨어요? 지난번에 금산사 다녀오신 뒤로 엄청 바쁘신 것 같던데요. 역시, 진표율사인가요!”

 

💬“음. 맞아. 내 나름대로 진표율사에 관한 전기를 수집하다 보니까 말이야. 아주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네.”

 

- “뭔가요, 교수님?”

 

💬“『송고승전』에 실려 있는 「진표전」은 송나라 단공端拱(988~989) 원년에 찬술되었단 말이야. 진표 전기의 찬술시기로는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오래되었지.”

 

- “그 말씀은…, 진표율사 전기가 중국에서 먼저 기록되었다는.” 석사과정 2학기인 여학생 정지원이 말했다. 그는 불제자로서 이번 학기에 내가 강의하는 과목은 물론, 특히 내가 관심을 두고 진표율사 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맞아. 바로 그 점일세.”

- “….”

 

💬“문제를 좀 더 확대시키면 더욱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네.” 나는 어조에 힘을 주면서 정지원을 보았다. 그의 지식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 “네. 교수님. 진표율사는 신라 시대 다른 고승들과 같이 당나라에 구법 유학을 하지도 않았고, 또한 직접 집필한 저술도 남기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까지 알려져 그의 전기가 국내보다도 먼저 중국에서 『송고승전』을 비롯한 몇 편의 고승전에 실려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아.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네.”

 

-“굳이 비교하자면 원효와 같은 인물이군요,” 박사과정 1학기에 재학하고 있는 송진호가 메모지를 무릎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 원효 역시 당나라에 유학하지 않은 고승으로서 『송고승전』을 비롯하여 각종 중국의 고승전에 입전되었으니까.”

나는 송진호와 정지원을 번갈아 보며 일단 송의 의견에 일단 동의를 하였다.

 

- “교수님. 하지만 진표와 원효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정지원이 반대의견을 들고 나왔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였다.

 

💬“응. 말해보게.”

 

- “원효는 많은 저술을 남겨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심지어 중국에까지 영향을 주었잖아요. 그러니까 중국 고승전에 입전될만하죠. 또, 원효는 두 차례나 당나라 구법 유학을 시도했었잖아요.”

 

정지원이 지적한 것처럼 원효가 두 차례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 것은 학계에서 인정하고 있다. 원효가 당나라에 유학하려고 했던 이유는 유식학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유식학의 중국(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전래는 세 단계에 걸쳐 전해졌다.

 

첫째는 보리유지菩提流支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의 한역, 둘째는 진제眞諦의 『섭대승론攝大乘論』의 한역, 셋째는 현장玄奘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성유식론成唯識論』의 한역이다. 이러한 유가유식사상의 한역으로 종파가 발생하여 『십지경론』의 지론종地論宗을, 『섭대승론』은 섭론종攝論宗을, 그리고  『유가사지론』과 『성유식론』은 법상종法相宗을 발생시켰다.

 

이 가운데 보리유지와 진제가 전한 유식학을 구유식, 현장의 유식학을 신유식이라고 하였다. 이 유가사상은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의 유가유식은 세 차례에 걸쳐서 도입되었고, 또 유가사상과 함께 미륵신앙을 도입한 이들 세 종파는 눈부신 신앙운동으로 유가사상의 보급과 함께 미륵신앙도 토착화시키게 된다.

 

중국에 전해지고, 발생한 유가유식은 신라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신라에는 유식학자가 많았다. 섭론종에 속했던 원광법사와 법상종에 속하는 원측법사를 비롯하여 원효, 도증道證, 승장勝莊, 신방神昉, 순경順璟, 경흥憬興, 둔륜遁倫, 태현太賢 등이 그들이었다. 이 가운데 원효가 처음 접한 유식은 구유식이었다. 원효와 의상義湘은 중국에 전해진 신유식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신라 불교계에서 하나의 신사조에 다름없었다. 원효와 의상은 그 신사조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을 향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는 고구려의 국경에서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두 번째 시도는 뱃길이었다. 오늘날의 충남 당진인 당주항唐州港에서 중국 배를 기다리면서 어떤 묘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한밤중에 원효는 갈증이 났다. 물을 찾다가 근처의 샘에서 물을 달게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샘을 찾은 그는 자신이 간밤에 마신 감로수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구토가 일어났고 그 순간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당시 원효가 읊었다는 오도송이 전한다.

마음이 일어나는 까닭에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감龕과 분墳이 둘이 아니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며, 모든 현상은 의식의 전변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달리 [마음 밖에서] 구하겠는가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동행하였던 의상은 홀로 당나라로 구법 유학을 떠나 정작 당나라 수도 장안에 가서는 유식학이 아닌 화엄학을 공부하여 해동 화엄학의 개조가 되었다.

 

💬“그런가. 그렇군. 허허.” 나는 정지원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그렇다면, 진표율사가 당시 유행이다시피 한 당나라 유학도 하지 않고, 저술도 남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고승전에 입전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 “자명하지 않을까요. 진표의 교화력과 명성이 국내 신라는 물론 중국까지 명성을 떨쳤던 까닭이겠지요. 결국 진표율사의 교화력이라고 봐요.”

 

💬“교화력이다!”

 

- “저도 동의합니다. 무엇보다도 진표율사가 추구했던 미륵신앙과 참회교법 등에 의한 교화와 대승보살로서의 실천적 삶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송진호가 말했다.

 

💬 “대승보살로서의 실천적 삶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 바꾸어 말하면 대중적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애기였을 테구 말이야.”

 

나는 두 학생의 토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말하자면 그들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자. 그럼 다음 발표는 누구 차례인가.”

 

━━━━⊱⋆⊰━━━━

 

4)

 

국내 기록으로서 진표의 전기 두 편은 『삼국유사』에 앞뒤로 실려 있다. 앞에 실려 있는 「진표전간」은 물론 일연이 기록한 것이다. 같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진표전기라고 해도 「석기」는 기록자가 다르다. 「석기」는 1199년 금강산 발연사 주지 영잠瑩岑이 기록한 「관동풍악산발연수진표율사진신골장입석비명關東楓岳鉢淵藪眞表律師眞身骨藏立石碑銘」(이하 「비명」으로 줄임)을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1250~1322)이 정리, 수록한 것이다.  「석기」 말미에 다음과 같이 덧붙여 놓았다.

 

이 기록(『삼국유사』)에 실린 진표율사의 사적(「진표전간」)과 발연사 비석의 기록은 서로 다른 데가 있다. 때문에 영잠의 기록만을 추려서 실었으니 후세의 현자들이 당연히 잘 살피기 바란다. 무극이 기록한다(此錄所載眞表事跡 與鉢淵石記 互有不同 故刪取瑩岑所記而載之 後賢宜考之 無極記).

 

『삼국유사』에는 ‘무극기無極記’라고 덧붙인 곳이 두 군데가 있다. 『삼국유사』라는 제목은 일연이 붙였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제자 무극에 의해서 책으로 간행되었다.

 

「남행월일기」는 전주목 사록겸서기史錄兼書記에 보임된 이규보가 1199년 9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년 4개월여 기간 동안의 외직생활을 통해 얻은 견문을 토대로 1201년에 정리한 일종의 기행수필이다. 당대 최고의 문인 이규보는 전주목 주변을 두로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기록했는데, 여기에 진표에 관한 기록이 들어있다.

 

이 기록은 영잠의 「비명」과 같은 해에 쓰였다. 현재 전하는 진표에 관한 국내 기록으로는 「석기」와 함께 최초의 기록이다. 기행문이므로 진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기는 아니지만 진표의 수행에 관해서는 매우 유용한 자료다.

 

학생들이 내가 준 프린트 복사본을 읽는 동안 나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정원사 황세운씨는 오늘도 정원수 정지작업을 하다가 휴식 시간에는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각자 읽었던 프린트 물을 앞에 놓고 고개를 드는 학생들을 나는 천천히 둘러보았다.

 

💬“정리를 하면 이렇다네.

 

현재 전하는 진표율사에 대한 전기는 「진표전간」, 「석기」 그리고 「진표전」 등 3종이 있네. 이들 중 「진표전」이 가장 오래 되었지. 그러나 「진표전」은 중국기록으로서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단 말이야.

 

진표율사와 진표전기 찬술자들의 사망연대를 기준으로 「진표전」은 진표 사후 약 230년 뒤에, 「비명」(「석기」)은 약 435년 뒤에, 그리고 「진표전간」은 525년 뒤에 기록되어 있어요. 전기물의 평가 대상이 ‘사실성’ 여부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또한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굳이 사실성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진표와의 시간적 거리와 공간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전기물로서의 ‘가치’가 커질 것이고. 이 경우 시간적 거리는 「진표전」〉「비명」「석기」〉「진표전간」이 되고, 공간적 거리는 「석기」=「진표전간」〉「진표전」이 되지.

 

그러나 시간적 거리에서 「석기」의 경우, 원래 영잠에 의해 집필된 「비명」은 「진표전간」보다 앞서지만, 무극에 의해 정리·편찬된 「석기」는 「진표전간」보다 늦어. 스승 일연이 쓴 「진표전간」을 보고「비명」과 다른 곳이 있어서 제자 무극이 다시 정리하여 「석기」라는 제목으로 「진표전간」 뒤쪽에 수록한 것이기 때문이지.”

 

- “문제는 이들 3종의 전기가 진표율사의 행적에 대한 연대를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20년 정도의 차이가 납니다. 따라서 진표의 생애에 대한 접근은 이들 3종의 전기에 대한 종합, 비교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데요.”

정지원이 지적했다. 

 

-“제가, 어떤 논문을 읽었는데,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박사과정 3학기 백기영이 입을 열었다.

 

“한 인물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인물의 직접적인 활동 행적을 통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인물이 남긴 ‘말씀’을 통하는 길이지요. 특히 종교인의 사상은 그 인물의 삶 자체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 인물이 남긴 ‘말씀’ 또한 중요합니다. 종교인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진표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전기는 3종이 있지만, 그가 남긴 ‘말씀’의 기록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표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그에 관한 3종의 전기를 통해 그의 ‘말씀’과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 “그렇습니다. 신라 중대 불교사상을 연구할 때 진표율사만큼 논란이 많았던 인물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진표의 행적이 ‘신이神異의 사事’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존하는 진표 전기 가운데 최초의 기록인 「진표전」이 실려 있는 『송고승전』은 신비주의 성향이 특히 강한 문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표전」뿐만 아니라 두 국내기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 명나라 태종 영락제가 편찬한 『신승전』은 마등摩騰으로부터 원元의 첨파瞻巴까지 신이를 행한 승려 208명의 전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진표의 전기가 실리게 된 이유도 ‘신이의 사’가 큰 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송진호가 말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나카리야 가이텐忽滑谷快天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진표전간」과 「석기」는 모두 황당한 기사로 채워져 있다. 『송고승전』에도 진표의 전기가 실려 있지만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노트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던 정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 “그와 같은 비판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진표율사는 고대 신라시대의 종교인입니다. 종교인의 행적에 신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종교인’이기를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닐까요. 또한 ‘신이의 사’라고 지적하는 기준도 모호해요. 결국 잣대는 과학적 합리성, 실증성이라는 것일 텐데. 아무리 학문적 접근이라고 해도 그것이 만능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 생각에 진표 전기에서 신비주의는 불교 나름의 ‘종교적’인 범위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신이의 사’로 기록된 진표의 행적에서 역사적 진면목을 찾아내는 것은 바로 연구자의 몫이 아닐까요.” 정지원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

 

5)

 

묵은 해가 가고, 다시 새해가 왔다.

봄볕이 완연하다.

4월 하순을 지났을 무렵이다. 모내기철이다. 이제부터 들판은 차츰 바빠지기 시작한다.

엄뫼는 온통 푸른 옷으로 갈아입은 지 오래였다.

 

- “잡아랏. 놓치면 안 된다.”

그날 사냥에 나선 진내마가 쩌렁 소리 질렀다. 사슴이었다. 지난해 가을에 놓친 사슴이 생각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잡자.”

진표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 “와아, 와아―.”

몰이꾼으로 나선 노비들이 고함을 질러댔다.

 

진표는 말을 몰았다. 그해에도 그의 작은 흑마는 바뀌지 않았다. 복보를 두 발로 차면서 채찍을 휘둘러댔으나 아무리 빨라도 아버지가 타고 있는 백마를 따라잡기에는 턱도 없었다. 그래도 흑마는 나름 달린다고 혼신을 다 해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신나게 달렸는데 사슴은커녕 아버지가 탄 백마는 물론이고 몰이꾼들도 보이지 않았다. 숲속에서 진표 혼자 남은 셈이었다.

 

말은 이미 지쳤는지 걸음이 더뎠다. 진표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숲속의 싱그런 봄내음이 좋았다.

 

- “도련님 아닌감요?”

그때 판돌이 울먹이는 소리로 길을 막았다. 같은 또래인 판돌은 진표에게 친구나 다름없는 노비였다.

💬“판돌이구나. 혼자 남은 거냐?”

“근당게요.”

 

💬“다들 어디로 갔지?”

“나도 모르것는디요. 함께 달려왔는데, 눈뜨고 보니께 혼자 아닙뎌.”

 

💬그러냐. 어여 타거라.”

진표는 말을 세우고 뒤쪽으로 턱짓을 하였다. 뒤에 타라는 것이었다. 판돌은 얼른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뭐하냐. 내 뒤에 타라구.”

“안되어라 잉.”

판돌이 뒷걸음질을 하였다. 자신의 신분이 노비임을 잊지 않은 까닭이었다.

 

💬“누가 보믄 어쩔라구.”

“보긴 누가 본다고. 어여 타기나 해.”

 

진표가 윽박지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인집 도련님의 명이다. 그제야 판돌은 진표의 뒤에 올라탔다. 작은 말은 힘겹다는 듯 절룩거리면서도 어딘가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낯설지만 낯선 것 같지 않은 숲속 길이다. 진표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말이 가는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해는 이미 중천에서 많이 기울었다.

 

개굴, 개굴―.

얼마나 갔을까. 진표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가까운 곳에 개울이 있었다. 볕이 잘 드는 아늑한 숲속 개울이다. 그러고 보니까 퍽 눈에 익은 숲속이었다. 진표는 개울가로 말을 몰았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제법 요란하였다. 개구리 울음소리만 제외하면 숲속은 정적이 흘렀다. 잠시 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진표는,

💬“쉬었다 가자.”

하고 판돌의 대답을 들을 사이도 없이 말에서 뛰어 내렸다. 판돌도 말에서 내려 뒤따라 왔다.

- “….”

 

바로 그때였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따라 물속을 들여다보던 진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몰속을 보고 있는 눈이 의심스러운 까닭이다.

“도련님, 이거슨.”

판돌이 뒤에서 소리 질렀다.

 

💬“앗. 아아.”

진표는 말없이 탄식을 삼켰다. 맞다. 판돌이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개구리 꿰미였다. 작년 가을에 사냥을 왔다가 진표의 요구로 일행이 잡아서 물속에 담가 두었던 바로 그 개구리 꿰미였다. 개구리 꿰미는 진표가 물속에 담가 둔 그대로 놓여 있었다. 진표는 꿰미 끝에 눌러놓은 돌들을 치우고 개구리 꿰미를 들어 올렸다. 거기에는 줄잡아서 30마리 가량의 개구리가 아직까지 살아서 퍼덕거렸다. 5, 60마리는 잡아 두었는데, 그렇다면 절반 정도는 죽었다는 얘기였다.

 

개구리 꿰미를 들고 한참 동안 바라보는 진표의 눈가에 안개가 피워 올랐다. 목안이 울컥했다.

―내 잘못이다. 내 욕심으로 이 개구리 절반을 죽였구나.

개구리 꿰미에서 눈을 떼지 않는 진표의 두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참회의 눈물이다.

―괴롭구나. 괴로워. 어찌 입과 배가 저같이 꿰어 해를 넘기며 괴로움을 받는고!

진표는 무거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며 스스로 책망하여 말했다. 한동안 괴로워하던 진표는 버들가지를 끊어 살아있는 개구리들을 모두 놓아주었다.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굳은 표정을 하고 말위에 올랐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이후 진표는 도통 말이 없었다. 아예 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벌써 달포가 지났다.

그날 밤, 늦게 진표는 안방을 찾아갔다.

 

“표야. 이 밤중에 네가 웬일이냐?”

💬“아버지,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전에 없이 깍듯하게 경어를 쓰는 열두 살 아들을 보고 진내마와 어머니 길보량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아들을 바라보았다.

 

💬“소자는, 중이 되고자 합니다.”

잠시 동안 뜸을 들이던 진표가 뚜벅 말했다. 열두 살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모는 금방 알아차렸다. 철없는 것 같지만 속이 깊어도 한없이 깊어 부모조차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아들이었다. 아들이 이 정도의 얘기를 한다면, 그것은 어떤 권위와 회유를 가져온다고 해도 도저히 물릴 수 있는 결심이 아니라는 것을. 더구나 진내마 내외는 원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불심이 깊은 청신사, 청신녀였다. 아무리 그러하기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선뜻 출가하도록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여라.”

진내마 내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물론 그 말조차도 형식적임을 모르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들이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죽은 나무 가지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것을 부모는 모르지 않았다.

 

진표 역시 부모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안방에서 물러 나왔다. 7일 뒤, 진표는 다시 안방을 찾았다. 그날도 부모는 완곡하게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그렇게 부모를 설득하기를 세 번, 진표는 다시 안방을 찾았다.

 

- “어디로 가겠느냐?”

뜻밖에도 진내마가 먼저 말했다.

 

💬“금산사 숭제스님 문하에 들고자 합니다.”

- “알았다.”

 

진표는 마침내 부모의 허락을 받았다. 그러니까 진표는 개구리 사건을 계기로 출가의 뜻을 품게 되었고, 다음날 모악산 금산사로 들어가 숭제법사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그의 나이 열두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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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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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천년의 약속 (1)

 

 

상생문화연구소 노종상

 
1️⃣ 화두

 

 

━━━━⊱⋆⊰━━━━

 

1)

💬 “따라서 현재의 한류 현상이 크게는 지구화(globalization), 문화의 혼성화(cultural hybridity) 또는 세역화(glocalization), 문화생산과 수용의 권역화(regionalization), 문화적 근접성(cultural proximity) 그리고 문화수용의 능동성(active reception)이라는 다섯 가지의 서로 관련 혹은 대립하는 힘들의 중층적 영향/결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한 연구자의 지적에 일단 동의하고자 합니다. 한국 대중문화가, K-Pop이 현재의 한류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는 주장도 없지 않지만, 나는 일단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한류 문화의 저변에 대한 확충을 다각도로 점검해보자는 것이죠. 한류의 미래! 한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리고 나의 과제가 되겠지요. 자.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여섯 명의 학생들이 연구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물고 창가로 갔다. 머리가 복잡했다. 아니, 혼란스러웠다. 두 번째 강의였다. 아직도 강단이 낯설었다. 과연 이 직업이 나에게 어울리는 옷일까. 담배 연기를 온몸 깊숙이 삼켰다가 창문을 향해 훅 뿜어냈다. 담배 연기는 안개처럼 사방으로 번졌다.

 

나는 꿈을 꾼다. 내 기억이 처음 열린 그때부터 지금까지 꿈을 꾸며 살았다. 살고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누구나, 꿈을 꾸며 산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도. 인간은 누구나 꿈을 꾸며 살고 있다. 과연 꿈꾸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뭐,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살아온 그때까지, 참, 혹독한 꿈을 꾸며, 꿈속에서 살아왔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을 당위로 알았다. 꿈꾸지 않는 자는 죽음이다. 주검이다. 과연, 그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 “선생님은 빨갱이 소설 쓰잖아요. 이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소설은, 안 됩니다.”

 

평소 잘 알고 있었던 출판사 사장의 그 말 한마디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 바뀐 세상! 내가 꿈꾸었던 완전한 그런 세상은 아니었지만, 당장에는, 차선책은 된다고 생각하였고, 나는 그 세상을 위해 참 무던하게도 모진 꿈을 꾸며 살아왔는데. 아니, 꿈만이 아니었다. 작가로서, 기자로서 나는 현실을 피하지 않았고, 덕택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하였던가.

 

벌건 대낮의 대로상에서, 그것도 다섯 살난 아들이 보는 앞에서 너댓 명의 괴한들에게 불법납치당해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서초동 검찰청 어느 검사 앞에서 조사받기도 했으며, 재판정에 불려가 판사 앞에서 괜스레 가슴 조여 보기도 했고, 그리고, 또, 감옥에 끌려가 몇 년을 썩고, 삭여야 했던가.

 

뜻밖에도 돈이 좀 모였을 때는 좀, 생뚱맞게도, 신문사를 차려 온통 그 꿈꾸는 곳에 집중하기도 하였다. 뭐, 대가를 바라고 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꿈꾸고, 투쟁했던 그런 세상에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며칠 뒤, 나는 꿈 하나를 접었다. 절필이다. 참, 부질없이, 많은 글을 남발해왔다. 변명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투쟁을 위한 무기였다.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니! 동기부터가 불순했던 것 같기도 하였다. 그것을, 나는 성스러운 것이라고 포장해 왔다. 나는 물론 내 가족을 먹고 살게 하는 글이니, 얼마나 성스러운가. 

 

또 있다. 내 소설은 민주주의를 위한 무기다. 오. 나는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다. 틀렸다. 틀려도 참, 많이 틀렸다. 내, 오만을, 나는 그렇게 포장했던 거다. 죄송하게도 그분, 붓다의 말씀을 빌린다면, 나는 한 마디의 글도 쓰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그동안 내가 쓴 글을, 하나도, 쓰여서는 안 되는 글이었다. ‘빨갱이 소설’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서가 아니다. 물론 그 소리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계기는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달 동안 아파트 방구석에 틀어박혀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병이 찾아왔다. 참, 무지막지한 병이었다. 며칠 동안을 끙끙거리며 신열을 앓았다. 죽을 고비라는 생각이 몇 번씩이나 들었다. 그러나, 무식하게도 버텼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속셈이었다.

 

고개 하나를 넘으면 큰 병원이 있었다. 원자력병원이다. 암 전문 병원이지만, 뒷날 아내에게 들었던 소리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긴 기껏해야 1km 남짓 떨어진 병원을 119구급차에 실려 갔을 정도였다니까.

 

병원에 실려 온 그날부터 나는 또 하나의 경계와 싸워야 했다. 아니, 경계 앞에 혼자 괴로워하며 몸부림쳐야 했다.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게 된 나는 2인실에 강제 입원을 당했다. 문제는 입원 첫날부터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7월의 여름 날씨는 지상의 모든 것이 불타는 듯한 무더위였다. 

 

그런데, 병실에는 에어컨조차 틀 수 없었다. 같은 병실에 입원한 환자가 찬 기운을 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암 환자였다. 강원도 강릉에서 왔는데, 30년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달 앞두고 암으로 판정받은 환자였다.

 

그는 1주일 만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퇴실했다. 다음에 들어온 환자도 암 환자였다. 그렇게 한 달여를 입원하는 동안,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암 환자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랬는데, 회진 나온 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 “정밀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것을 알겠지만, 암일 수도 있습니다.”

 

뒤에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면 의사는 아주 틀린 얘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암일 수도 있다고 했지, 암이라고 하지는 않았지 않은가. 다만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는 소리를 좀 과하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와 아내의 귀에는 왜 암이라는 진단으로 알아들었을까. 지레 겁을 먹은 탓인지 몰랐다.

 

원자력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여 동안 우리는 적지 않은 암 환자의 최후를 목격하였다. 오늘 밤에 살아서 우리와 얘기를 나누었던 환자가 다음 날 아침에는 주검이 되어 사라졌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따라서 회진 의사의 그 말 한마디는 우리에게 일종의 사형선고와 같은 울림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간호하던 아내는 벌써 훌쩍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냥, 진공상태에서 한동안 멍하니 어두컴컴한 병실 천정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1주일 뒤에 나온 결과는, 엉뚱하게도, 늑막결핵이라는 판정이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원자력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는 동안, 나는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서울을 떠나는 꿈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에 온 이후 20년이라는 세월을 서울에서 살았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참, 오래 살았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절필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앞으로 소설을 쓰지 않겠다. 내 결심을, 각오를 들은 아내의 얼굴에는 벌써 걱정의 빛이 완연하다.

 

그때 나는 아내에게 가장 무책임한 말을 툭 내뱉었다.

💬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 되겠지.”

 

아내는 반응이 없었다. 늘 그랬으니까. 아내의 바로 그런 점이 나를 옭아매는 무기가 되었다. 차라리, 아니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앙칼지게 부정이라도 한다면, 나는 더욱 강하게 튀어 나갔을 터다. 그러나 아내는 어떤 일이 닥치면 천 근 바윗덩어리같이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침묵 앞에 무릎을 꿇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모든 것을 털고 나니까 홀가분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는데, 승리의 여신이 아내의 머리 위에서 흰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때 나에게 손을 내민 것은, 대전 근교 계룡산 천왕봉이 한눈에 올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한류문화대학원대학교(이하 ‘한류대’로 줄임)라는 긴 이름을 가진 대학원대학교 교수 자리였다. 앓고 있는 병이 완치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나는 복부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차를 직접 몰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

 

2)

 

늦여름의 해는 정오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더위는 마지막 작열하는 기세로 한여름 무더위보다 더욱 날카롭게 내리쬐었다. 금산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주위에는 퍽 낯익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보제루를 나온 나는 정면에 보이는 대적광전과 오른쪽 미륵전 건물을 향해 합장을 올린 뒤에 곧장 설법전 건물 앞을 지나갔다. 다른 사람이 나를 눈여겨보았다면 퍽 익숙한 몸놀림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 터다.

 

💬 “혹시, 원명스님, 아직도, 계십니까?”

 

적묵당 앞으로 다가선 나는 굳게 문이 닫혀 있는 건물 쪽을 흘끔거리면서 맞은 편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홍안의 한 노승에게 짐짓 떨리는 음색으로 말을 걸었다. 적묵당은 주지를 비롯한 삼직 스님의 거주처이자 후원 요사의 중심 건물이다. 일반 요사와는 달리 공양하고 예법을 갖추는 대중방(큰방)이 있는 수행 전용 건물이다. 그리고 맞은편에 ‘참석 수행중’이라는 검소한 팻말 하나가 결려있는 안쪽 건물은 화림선원이다. 일반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스님들의 선방이다.

 

- “누구?”

 

노승이 물었다.

 

💬 “원명스님이라고.”

 

“그놈을 왜 찾누.”

 

💬 “그게, 저.”

 

“죽었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승은 뒷짐을 진 채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망연한 눈빛으로 비틀거리며 사라지는 노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나는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원명스님은 내 도반이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내가 한 때는 출가인이었다는 얘기부터 하는 것이 순서겠지. 그것도 바로 이곳 금산사에서 행자 시절을 보냈고 사미계를 받았다. 원명은 나보다 1년 늦게 머리를 깎았다. 그렇다고 해도 같은 나이인 우리는 도반이자 친형제와 같았다. 속가의 표현대로라면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꿈 탓이다. 정확하게는, 소설가 탓이었다. 내가 원명과 헤어지게 된 것은.

 

- “이눔아. 소설가라니. 중이 소설가가 되겠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은사 스님은 단호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소설가와 스님은 좀 거리가 있었다. 차라리 시인이면 또 모를까. 전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문학 동아리에 가입했다. 촛불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신석정 시인이 지도교사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시인이 꿈이었다. 그 꿈이 지금까지 유지되었다면, 나는 은사 스님의 바람을 굳이 저버리지는 않아도 좋았을 텐데.

 

그런데 나는 언제인가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설가의 꿈을 꾸었다. 은사 스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는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명을 통해 편지 한 통을 남겨 놓고, 어느 날 새벽예불을 마친 뒤에 나는 줄행랑을 치듯 금산사를 떠났다.

 

반면, 원명은 은사 스님의 착한 제자였다. 그는 은사 스님의 바람대로 선승이 되었고, 몇 년 전에 들리는 소식으로는 아직도 금산사에서 가부좌가 터지도록 정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지금도 화림선원 한쪽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지 몰랐다.

 

나는 미륵전으로 향했다. 삼 층의 육중한 건물이다. 위풍당당한 미륵불상을 보며 나는 마치 고향에라도 온 듯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삼배를 올린 뒤에, 잠시 미륵불상을 우러러보았다. 예나 다름없이 자비로운 모습 그대로였다. 오, 부처님. 미륵부처님.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문득 내가 부처님을 찾아온 거지 아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화경』 「신해품」에서는 ‘장자궁자의 비유’가 나온다. 부자 아버지 장자와 거지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하여 타향객지를 떠돌다가 거지가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다른 곳에 머물면서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있는 성으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가 찾지 못하여 한 성에 머물면서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장자로 불렸다.

 

장자는 아들 생각에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다. 어느 날 거지가 된 아들이 장자 저택에 품팔이를 왔다. 아들은 으리으리한 집에 보배로 치장한 주인이 바라문과 왕족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두려움을 느껴 품팔이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달아났다.

 

장자는 그 거지를 보고는 그렇게도 찾아 헤맸던 아들임을 알았다. 그는 옆에 시위하고 있던, 옷을 잘 차려입은 시종을 보내 데려오도록 했다. 잡혀 온 거지 아들은 자신은 이제 죽게 될 것이라 지레 겁을 내어 기절하였다.

 

장자는 아들이 심지가 얕고 졸렬하여 자신을 어려워함을 알고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을 알아보게 했다. 이번에는 방편을 써서 허름하게 생긴 시종을 보내 거지 아들을 꾀어오게 했다. 주인댁에 품팔이할 일이 있으니 같이 가서 똥치는 일을 하면 품삯을 배로 준다는 것이었다. 거지 아들은 똥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화려한 옷을 벗어놓고 초췌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오른손에는 똥치는 그릇을 들고 아들이 일하는 곳으로 가 게으름피우지 말고 일하라고 하였다.

 

그 후 장자는 아들을 불러 아들 같은 친근감을 느낀다고 하면서 칭찬해 주며 집안일을 도우라고 하였다. 아들은 마지못해 시키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일이 지난 후에 주인댁에 대한 신뢰감이 싹터 출입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 후 장자는 집안의 재물과 창고를 모두 거지 아들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아들은 여전히 대문 밖에 살면서 자기 재물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장자는 아들의 마음이 점점 커 감을 알고 재물을 물려주기 위해 국왕과 친족들을 불러 놓고 선언했다. 이 아이는 나의 아들이고 그동안 50여 년을 떠돌다가 돌아와 살게 되었으니 이제 모든 집과 사람들을 모두 아들에게 맡긴다고. 그제야 거지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기뻐하며 한량없는 보배를 얻게 되었다.

 

절집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장자궁자의 비유’는 우리가 누구이고 부처가 중생들을 어떻게 교화하는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이 비유에서 장자는 부처를, 거지 아들은 중생을 뜻한다. 아들이 원래 장자의 아들이었듯이 우리 중생들도 원래 부처인 불성을 갖고 있는 불자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하여 50여 년을 떠돌며 거지가 되었듯이, 중생들도 자신이 불자임을, 부처임을 잊어버리고 오도(五道,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를 윤회하며 생로병사의 고통을 받은 중생이 되어버렸다. 거지 아들이 큰 저택에 살고 있는 장자를 차마 자신의 아버지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부처는 원래 다른 존재요 우리 자신이 곧 불도를 이룰 불자라는 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금산사 미륵부처의 입장에서는 내가 거지 아들로 비추어질지 모르겠으나,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장자를 피해 다니는 거지 아들이 차라리 부러웠다. 머리로는 ‘장자궁자의 비유’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으나, 내가 금산사 미륵전을 찾은 것은 거지아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것이었다. 나는 돌아온 궁자가 아니었다. 또한, 원명을 만나기 위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원명도 관련이 있었다.

 

금산사 행자 시절 원명은 대적광전, 나는 미륵전 소제 담당이었다. 금산사에는 많은 전각이 있었으나 특히 미륵전은 내게는 안방이요, 놀이터와 다름없었다. 나는 행자는 물론 사미 시절 대부분을 미륵전에서 보냈다. 행자 시절 나는 스님들 몰래 미륵불상 뒤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때로는 미륵불상 발뒤꿈치에 기대어 잠을 자기도 하였다. 얼마나 달콤했는지. 그곳은 나의 비밀 ‘아지트’였다.

 

현재 미륵보살이 천상 사람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는 도솔천과 같은 정토였다.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금산사 미륵불상에 몸을 기대고 잠을 자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그것은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었다. 아니, 금산사 대중 가운데 딱 한 명,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원명이었다. 

 

반대로 대적광전 상단 밑 공간이 원명의 비밀 아지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때로는 원명과 나, 둘이 같이 미륵불상 뒤편이나 대적광전 상단 밑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예불 시간을 놓쳐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날이면 스님에게 불려가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혼이 나나 일쑤였다. 그러나 개구쟁이들의 반성이란 그때뿐이어서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 “원광이 너는, 하던 일을 계속하도록 해라.”

 

나는 행자 시절 3년을 꼬박 미륵전 소제 담당으로 보냈다. 그리고 사미계를 받은 뒤에 주지 스님이 내가 준 소임은 여전히 미륵전 소제 담당이었다. 대개 소제는 행자들이 담당하고, 사미는 강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지만, 내가 주지 스님에게 미운털이 박혔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미륵전 소제 담당은 그대로였다.

 

- “공부도 게을리하지 말고.”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주지 스님은 마지막 어조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 “예. 스님.”

 

나는 내심 여유를 갖고 대답했다. 주지 스님이 나에게 미륵전 소제 임무를 계속 맡기는 것은, 그가 나의 은사 스님이었으므로 다른 대중에게 보여 주려는 특별한 배려(?)임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주지 스님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사미가 되었다고 해도 나는 나의 정토 미륵전을 떠나기 싫었다.

 

미륵전 미륵불상 뒤편이야말로 나만의 세계를 즐길 수 있는 나만의 정토였다는 것을 은사인 주지 스님은 몰랐을 터다. 그런 내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은 역시 원명이었다. 그는 주지 스님이 내가 계속 미륵전 소제를 담당하라는 명이 떨어지는 순간, 나를 향해 부럽다는 표정을 한껏 담아서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원명을 향해 나는 말없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원명아. 원명아. 걱정일랑 꼭 붙들어 매 두거라 잉. 언제라도 우리 아지트로 오면 되는 거싱게. 나는 그런 얘기를 침묵으로 속삭였다. 실제로 그 후에 원명은 자주 나를 찾아 미륵전으로 왔다.

 

우리는 행자 시절과 전혀 달라 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행자 때는 우리들의 정토가 두 곳이었는데, 사미가 된 뒤에는 한 곳으로 줄어들었다는 점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미륵불상 뒤편에서 자주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랬는데, 달포 전에, 한류대 정원사 황세운씨가 내게 건네준 책이 잠자는 나의 추억의 사자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

 

3)

 

정원사 황세운씨가 내게 먼저 책을 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고, 내가 그의 작업실에 찾아가서 책을 빌려왔다. 나는 연구실에서 수업을 마치면 담배를 물고 창밖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그 버릇 한 부분을 황세운씨가 가로채 갔다.

 

그는 내가 창밖으로 시선을 주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시간에 맞추어 자신도 휴식 시간을 가졌고, 그때마다 나무 밑이나 정원석 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몇 번씩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으므로 나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그의 휴게실로 찾아갔다.

 

💬 “무슨 책을 그렇게 보세요?”

 

내가 물었다.

 

- “뭐, 이것저것.”

 

내가 찾아온 것이 뜻밖이라는 듯 그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 “교수님같이 젊은 분이야 실감이 안 나겠지만, 늙으면, 급해지는 법이지요. 밀린 독서를 하는 중이랍니다.”

 

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

 

나는 말없이 휴게실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말이 휴게실이지 정원사 일에 필요한 도구들이 한 쪽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것이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 “정원사 일은 오래 하셨는가요?”

 

- “운이 좋아서, 은퇴 후에 재취업을 한 게지요.”

 

💬 “그렇군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휴게실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 “책을 찾는군요?”

 

백발에 온몸이 삭정이처럼 마른 그는 앙상한 손으로 캐비닛 속에 있는 책을 꺼내 주었다. 그의 손등에서 거머리 같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잠시 동안 그를 보던 나는 책으로 눈길을 가져갔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가죽 표지가 닳아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제법 두툼한 책이다.

 

💬 “뭡니까. 『증산도 도전』이군요.”

 

나는 3분의 1정도는 날아간 금박의 제목을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학 때 일부 동학들이 민족종교 단체인 증산도의 동아리 활동을 하던 일이 떠올랐다. 마침 내가 활동하고 있는 불교 동아리방과 이웃하고 있어서 이따금씩 그들의 활동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나도 몇 번 그들의 모임에 참석한 경험이 있었다. 일반 동아리 활동과는 달리 그들은 매우 열심히 공부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진리 공부를 하였다. 지금도 인상에 남은 것은 ‘우주 1년’이라는 도표였다. 지구의 1년 사계절과 같이 우주에도 1년 사계절이 있다는, 그런 내용을 그린 도표였다.

 

💬“증산도 신도입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아니지요.”

 

그의 대답은 이외로 단호했다.

 

💬 “그럼?”

 

- “나는, 모든 성인의 가르침을 존중합니다. 다 믿지요.”

 

💬 “그렇군요.”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라고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게실 안은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자초한 면이 있었다.

 

💬 “그런데, 저기 오래된 책은.”

 

내가 캐비닛 속에 꽂혀있는 책 한 권을 보고 물었다. 내 질문에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의도가 섞여 있었다.

 

- “아. 저거요. 어디 보자.” 황씨는 꾸역 일어나 책을 꺼내왔다. “이건, 『대순전경』이라는 책인데.”

 

💬 “『대순전경』이라구요.” 나는 황씨가 들고 있는 두 책을 번갈아 보았다.

 

- “증산도 신도들이 신앙하는 증산 상제의 행적을 기록한,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순전경』은 그 초기 기록이구.”

 

“….”

 

- “초기 기록들은 『대순전경』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지요. 『도전』은 초기 기록들을, 다시 일일이 답사하고 관련자 후손들의 증언을 취재하여 다시 정리한 경전입니다. 일종의 종합경전이라고 할까요.”

 

💬 “그렇군요. 그런데 증산 상제가 누구입니까? 증산도 신도들이 신앙한다면 증산도 도조인가요?”

 

-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내가 아직 지식이 짧지만서도, 얘기하자면, 그분은 19세기 말, 그 나라 안팎으로 혼란한 시기에, 또한 우주사적으로는 우주의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기에 사람 농사를 결실하기 위해 인간으로 온 우주 주재자이자, 통치자입니다.”

 

💬 “우주 주재자…통치자…라구요.” 나는 황씨가 했던 말을 뇌었다. “우주의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기에 인간으로 온, 우주의 주재자라.”

 

- “그 분을, 상제라고 하지요.”

 

💬 “상제! 와. 세군요!” 나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리고 미륵불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의 부처인.”

 

황씨는 내가 전직 승려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미륵불에 힘을 주어 말했다. 황씨의 얘기대로 미륵불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보살 가운데 하나로 석가모니 부처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를 가리킨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이트레야(Maitreya)이며,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지타(Ajita, 아일다阿逸多)이다. 성인 미륵은 자씨(慈氏)로 번역되어 흔히 자씨보살로도 불린다. 불전에 의하면 그는 인도의 바라나시국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

 

그는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56억7천만 년이 되는 때에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라고 하는데, 그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전까지는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이후는 미륵불이라 한다.

 

💬 “미륵불이라구요!”

 

나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움푹 들어간 황씨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흔들리는 것은 내 마음이었다. 미륵불! 그것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내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사자를 깨우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나의 뇌리에는 금산사 미륵불이 번갯불처럼 스쳤다. 나의 도반 원명의 얼굴과 함께.

 

- “내 말이 아니랍니다. 증산 상제, 당신이 직접 자신의 신원을 그렇게 밝혀 주었어요. 여기, 보세요.”

 

황씨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혀끝에 침을 묻힌 뒤에 『도전』을 재빠르게 넘겼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내가 미륵이니라.”(증산도 도전 2:66:5)라는 글자가 분명히 적혀 있었다.

 

- “여기도…여기도요.”

 

황세운씨는 『도전』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지 곧장 그가 원하는 부분을 찾아내어 손가락 끝으로 꾹꾹 짚어 나갔다. 과연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도전』 곳곳에서 증산 상제(당신을 신앙하는 분들의 입장을 존중하여 ‘증산 상제’로 표기한다)는 자기가 미륵이라고 자기의 신원을 밝혀 놓고 있었다. 나에게, 문제는 그 미륵불 증산 상제가, 어느 먼 곳에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

 

4)

 

황세운 씨에게 『도전』이란 책을 빌려온 나는 며칠 동안 밤을 새우다시피 읽어 내려갔다. 그중에서도 내 어린 시절의 추억과 직접 관련이 있는 내용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좀 길지만 있는 대로 인용한다. 

 

상제님께서 임인(壬寅 : 도기道紀 32, 1902)년 4월 13일에 전주 우림면 하운동(全州 雨林面 夏雲洞) 제비창골 김형렬의 집에 이르시니라. 이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심회를 푸시고 형렬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조화로써 천지운로를 개조(改造)하여 불로장생의 선경(仙境)을 열고 고해에 빠진 중생을 널리 건지려 하노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본래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개탑(天蓋塔)에 내려와 천하를 두루 살피고 동양 조선국 금산사 미륵전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다가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내려왔나니, 이제 주인을 심방함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2:1:1-85)

 

나의 일은 비록 부모, 형제, 처자라도 알 수가 없나니 나는 서양 대법국 천개탑 천하대순이로다. 동학 주문에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나니 천지간의 모든 신명들이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나에게 탄원하므로 내가 천조(天朝)의 대신(大臣)들에게 ‘하늘의 정사(政事)를 섭리하라.’고 맡기고 서양 천개탑에 내려와 천하를 둘러보며 만방의 억조창생의 편안함과 근심 걱정을 살피다가 너의 동토(東土)에 인연이 있는 고로 이 동방에 와서 30년 동안 금산사 미륵전에 머무르면서 최제우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주었더니 조선 조정이 제우를 죽였으므로 내가 팔괘 갑자(八卦甲子)에 응하여 신미(辛未 : 道紀 1, 1871)년에 이 세상에 내려왔노라.
(증산도 도전道典 2:94:1-7)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 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하늘의 모든 신성과 부처와 보살이 하소연하므로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이마두가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내려와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둘러보며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중 진표(眞表)가 석가모니의 당래불(當來佛) 찬탄설게(讚歎說偈)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至心祈願)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甲子 : 道紀前 7, 1864)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辛未 : 도기 1, 1871)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수운가사(水雲歌詞)에서 말하는 ‘상제’는 곧 나를 이름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2:30:8-17)

 

자신이 미륵불이라고 스스로 밝힌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온 과정을 밝힌 기록들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전체 내용도 그렇지만, 특히 나를 놀라고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미륵불인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온 과정에서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상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렀다는 부분이었다.

 

내가 행자와 사미 시절을 포함하여 6년 동안 매일 쓸고 닦았던 금산사 미륵전, 바로 그곳에 증산 상제가 30년 동안 임하였다가 인간으로 왔다! 이 밖에도 『도전』에는 증산 상제가 금산사 미륵불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은 많았다. 그렇게 인간으로 와서 당신의 일을 마친 증산 상제는 다시 금산사 미륵전을 통해 천상으로 환궁하였다. 다시 인간으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너무 악하여 몸둘 곳이 없으므로 장차 깊이 숨으려 하니 어디가 좋겠느냐?” … 잠시 후에 “나는 금산사에 가서 불양답(佛糧畓)이나 차지하리라.” 하시니라.

 

또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미륵이니라. 금산사 미륵은 여의주를 손에 들었거니와 나는 입에 물었노라.” 하시고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 미륵불을 보라. 금산사 미륵불은 육장(六丈)이나 나는 육장 반으로 오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10:33:1-7)

 

『도전』 기록에서 나는 더욱 놀라고 당혹스럽게 만든 다른 구절은 “중 진표가 석가모니의 당래불 찬탄설게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이라는 부분이었다. 금산사 중창조로서 진표율사라면 나로서는 행자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터라 모를 리 만무하였다.

 

그러나 위의 구절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바로 그 금산사에, 금산사 미륵전과 미륵불에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떠났다는 자책감에 젖어 들었다. 나는 기자 시절 익힌 감각이 발동하였다. 금산사 미륵불상을 세운 진표율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도전』에는 「미륵불의 동방 조선 강세의 길을 연 진표 대성사」라는 제목으로 진표율사에 대한 행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놓았다. 

 

동방 조선 땅의 도솔천 천주님 신앙은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영글어 민중 신앙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

 

진표는 12세 때 부모의 출가 허락을 받고 김제(金堤) 금산사(金山寺)의 숭제법사(崇濟法師)로부터 사미계(沙彌戒)를 받으니라.

 

법사가 진표에게 가르쳐 말하기를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님 앞으로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하여 친히 미륵님의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 하매 이로부터 진표가 미륵님에게 직접 법을 구하여 대도를 펴리라는 큰 뜻을 품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더니

 

27세 되는 경자(庚子, 760)년 신라 경덕왕 19년에 전북 부안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 들어가 미륵불상 앞에서 일심으로 계법을 구하니라.

 

그러나 3년의 세월이 흘러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하자 죽을 결심으로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니 그 순간 번갯빛처럼 나타난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살며시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놓고 사라지더라.

이에 큰 용기를 얻어 서원을 세우고 21일을 기약하여 생사를 걸고 더욱 분발하니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온몸을 돌로 두들기며 간절히 참회하매 3일 만에 손과 팔이 부러져 떨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거늘 7일째 되던 날 밤 지장보살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며 와서 진표를 가호하니 곧 회복되니라.

 

21일 공부를 마치던 날 천안(天眼)이 열리어 미륵불께서 수많은 도솔천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대광명 속에서 오시는 모습을 보니라.

 

미륵불께서 진표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시기를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戒)를 구하다니.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 참회하는구나. 내가 한 손가락을 튕겨 수미산(須彌山)을 무너뜨릴 수 있으나 네 마음은 불퇴전(不退轉)이로다.” 하고 찬탄하시니라.

 

이 때 미륵불께서 점찰경(占察經) 두 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를 진표에게 내려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것으로써 법을 세상에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으로 삼으라. 이 뒤에 너는 이 몸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도솔천에 태어나리라.” 하시고 하늘로 사라지시니라.

 

원각(圓覺) 대도통을 한 뒤, 닥쳐올 천지 대개벽의 환란을 내다본 진표 대성사(大聖師)는 온 우주의 구원의 부처이신 미륵천주께서 동방의 이 땅에 강세해 주실 것을 지극정성으로 기원하니 이로부터 ‘밑 없는 시루를 걸어 놓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고 4년에 걸쳐 금산사에 미륵전을 완공하니라.

 

이 뒤에 진표는 미륵불의 삼회설법의 구원 정신을 받들어 모악산 금산사를 제1도장, 금강산 발연사를 제2도장, 속리산 길상사를 제3도장으로 정하고 용화도장을 열어 미륵존불의 용화세계에 태어나기 위해 십선업(十善業)을 행하라는 미륵신앙의 기틀을 다지고 천상 도솔천으로 올라가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1:7:1-19)

 

미륵전에는 마침 찾아오는 불자도 없어서, 한참 동안 말없이 미륵불을 올려다보던 나는 와르르 무너지듯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도전』을 읽었던 그때부터 나는 과거의 포로가 되었다.

 

내 십 대 시절을 오롯이 하였던 금산사와,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을, 그리고 진표율사를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춰 주었다. 당신들을 몰랐다는 것은 곧 나를 몰랐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금산사에서 보낸 내 십 대 시절은, 행자 시절은, 사미 시절은 무엇인가.

 

『금강경』에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는 문구가 있다. 꿈이나 환영,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다는 의미다. 그런가! 그런가! 그때부터 내 머리는 복잡해졌다. 『금강경』에서의 그 온전한 문장의 가르침은 내 입장과 달랐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현상계의 모든 법은 꿈이나 환영,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같이 볼지니라.

 

부처님은 그렇게 설하셨다. 죄송하지만, 나는 금산사 미륵전에서 보낸 내 행자 시절을, 사미 시절을 꿈이나 환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 있는 실체라는 것을 확인하게 위해서 이곳 금산사를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반개한 눈가에 힘을 주었다. 눈언저리가 파르르 떨렸다.

 

 

[장편소설] 천년의 약속 (1)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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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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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율사와 김제 금산사 미륵불 이야기

 

 

 

김제 금산사에 가보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으로 생각되는데, 왜 금산사에 있는 미륵불은 시루위에 만들어진 걸까요?

오늘은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표율사는 부사의방장에서 미륵불을 친견하리라 고 다짐을 하고, 수도를 시작했는데요. 

 

바로 망신참법이라는 수도법으로 수도를 하였습니다. 망신참법이란, 온몸을 돌로 찧는 수행법을 말하는데요. 생각만해도 아찔합니다만.. 그 정도의 굳은 마음가짐으로 진표율사는 수행을 하였다고 하네요. 

그렇게 수행을 하다보니 3일만에 팔과 손이 부려졌다고 합니다. 

 

이 수행일 21일이 끝난 그때에, 진표율사는 하늘의 도솔천에서 많은 백성들을 거느리고 오신 미륵님을 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에 나타나신 미륵부처님께서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다니 신명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 참회하는구나.
내가 한손가락을 튕겨 수미산을 무너뜨릴 수 있으나 네 마음은 불퇴전이로다.

 

라고 크게 칭찬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밑없는 시루를 걸어두고 당신의 모습대로 불상을 세우라! 고 말씀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한 계시를 받고 진표율사가 세운 곳이 바로 김제 금산사의 미륵불입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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