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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은 천부경의 원리. 원방각

---Squid  Game and Corea Bible---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그림(圓方角)은

 코리아 바이블(천부경)의 체계적인 도표와 같다.
The picture that appears in the Squid Game is 

like a systematic diagram of the Corea Bible.

 

오징어게임은 70~80년대에 아이들 놀이로서 생겨났지만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놀이방법은 공격자가 수비의 방해를 뚫고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가거나 수비가 공격자를 쓰러트리게 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오징어게임에서의 특징은 원방각(圓方角)의 구조 속에서 方을 통과해 角에 진입한 후에 圓 속에 있는 삼각형에 도착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법칙은 천부경의 도상인 천부체계도에서도 그대로 실현된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그 의미에 대해 한 번 알아보자.

 

천부경을 하나의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는 천부체계도를 보게 되면 그 시작이 무형과 유형이 혼재된 角(뿔각)의 맨 위의 꼭짓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밑으로 아홉수가 하나의 공간 속에서 모이게 되기에 方을 만들어 놓게 된다. 그러면 圓의 중심으로부터 시작된 꼭지점인 角(뿔각)에 의해 밑으로 方이 펼쳐진다. 이때의 圓(둥글원)은 무형인 하늘이요, 方은 유형인 땅이고, 角은 유형과 무형이 혼재된 근본물질인 일기(一氣)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角의 꼭짓점에 도달해 일기를 회복함은 참나(眞我)를 이루게 됨을 나타낸다.

우리 인간의 태어남은 유형과 무형이 혼재된 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물질계인 지상의 方에 떨어지면서 아홉수의 삶을 살게 되어 있다. 그러다가 아홉수를 채우고 귀일의 열쇠인 10을 얻어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게 될 때에는 아홉수가 주는 모든 단계를 뛰어넘어야만 된다.

아홉수가 되는 方을 지나서 가게 되는 과정은 圓(둥글원)의 안에 있는 삼각형의 꼭짓점에 이르는 일이다. 그런데 이때에는 오징어게임의 그림에서 보듯이 가운데의 좁아진 길을 통해 목적지에 이르게 되어 있다. 이는 내 자신이 순박(醇樸)함의 단계에 이르게 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길이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길이기도 하고,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생명완성을 위한 중일(中一)의 길이기도 하다. 이른바 좌우에 치우치지 않고, 좌우를 장악한 단계에 이르게 될 때에 얻어지는 길이 중일의 길이다.

천부체계도(天符體系圖)

수행자가 중일(中一)을 이루면 드디어 삼각형의 꼭짓점에 이르게 되어 있다. 이와 같기에 오징어게임이나 천부경에서는 아홉단계를 뛰어넘어 중일의 단계에서 원형의 안에 있는 삼각형의 꼭짓점에 이르는 일이 승리하는 일이요, 참나를 성취하는 일이다.

수행자가 참나를 성취하면 드디어 圓과 方의 가운데 위치하게 된다. 이것이 삼각형인 角으로 나타나게 되는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을 이룬 사람으로서의 상징이다. 사람(角)을 가운데 두고 하늘(圓)과 땅(方)이 위치하게 되는 이것이 옳바른 원방각의 완성된 모습이다.

 

 

원방각의 도형에 있어

圓은 영원성을 나타내고

方은 시공간을 나타내며

角은 의지력을 나타낸다.

그런 까닭에 하늘은 우리로 하여금 불멸(不滅)의 삶을 살라하고,

땅은 우리로 하여금 힘써 자아완성(自我完成)을 이루라 하며,

인간 삶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불굴(不屈)의 의지(意志)를 놓치말라 한다.

 

참고문헌 : 수행문화의 원전 천부경 (도서출판 거발환) 

「수행문화의 원전 천부경」은 하나의 그림(圖) 속에 천부경과 삼일신고, 그리고 참전계의 원리를 담고 있다. 그 하나의 그림에 대해 매월당 김시습은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에서 "금척(金尺)의 형상(形象)은 삼태성(三台星)이 늘어 선 것 같으니 머리에는 불구슬(火珠)을 물고 네 마디로 된 다섯 치(五寸)이다. 그 허실(虛實)의 수(數)가 9가 되어 10을 이루니, 이는 천부(天符)의 수(數)다"라고 말하였다.

 

하나의 그림인 천부체계도(天符體系圖)를 보면 알게 되듯이 삼태성이 늘어선 모습은 천지인이 3과 6, 그리고 9로 나란히 펼쳐진 모습이다. 머리 위의 불구슬은 생명의 근원인 일기가 시작되는 용궁(龍宮)이나, 우리의 머릿골인 뇌해에 있는 천궁(天宮)의 모습과도 같다. 네 마디로 된 다섯 치는 천궁의 모습과 수직으로 단계마다 펼쳐지는 3, 6, 9의 네 마디를 말한다. 허실(虛實)의 수가 9가 되어 10을 이룬다는 말은 허조동체인 일기가 9수를 끝으로 10을 이루어 회삼귀일을 하게 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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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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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둥글다(5) - 최상의 놀이(천부경, 태백일사)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Ⅴ. 최상의 놀이

논의를 마무리 하며, 하이데거의 영역 문제와 관련하여 노자의 도道를 상기해 본다. 이는 둘을 비교하여 그들의 관계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각각의 것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얻고자 하는 방편으로서 시도된다.

도의 원래 의미는 ‘길’(Way)이다. ‘가르침’, ‘방법’, ‘원리’, ‘말’ 등의 파생적 의미들을 갖게 되는 것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 생겨난 변화라고 한다. 도의 ‘길’은 당연히 영역에 속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도 그렇다. 모든 것들이 도 안에서 도로부터, 다시 말해 도를 중심으로 존재한다면 도는 이미 지평이나 장의 성격을 갖는다.(「A Comparative Study of Heidegger and Taoism on Human Nature」)

노자는 도를 “유와 무가 상생하며 있는 것[有無相生]”(『노자』 제2장)으로 말한다. 이에 따르면 도의 영역은 ‘천지의 시작인 무’와 ‘만물의 어머니인 유’[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노자』 제1장) 사이의 ‘사이’, ‘사잇길’이 될 것이다.

노자는 또 그에 앞서 “유와 무는 같은 데서 나오며 이 동일성은 현이라 한다[此兩[有無]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노자』 제1장)라고 밝힌다. “유와 무는 같은 데서 나오고”에서 ‘같은 데’는 이미 장소적 개념이다. 그리하여 노자에게서 유무상생은 “지평적으로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동일성과 변화를”(「Typology of Nothing: Heidegger, Daoism and Buddhism」)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자는 논리적인 의미와 무관한, 이때의 동일성을 ‘현玄’이라 부르고 있다. 현은 ‘깊고 심오한’, ‘깊어서 검은’이란 뜻인데, ‘깊이’나 ‘검다’는 말 또한 영역적 성격을 갖는다. 나아가 노자는 그 현을 ‘문門’[衆妙之門]이라는 보다 직접적 영역 개념으로써 표현하고 있다(『노자』 제1장). 현은 유무상생의 동일성이 유지되는 또는 유래하는 ‘사이’ 혹은 ‘중심’ 영역[“같은 데”]인 것이다. 도는 결국 유무 사이의 시원적인 사이, ‘깊어서 검은’ 현인 신비한 골짜기[谷神](『노자』 제6장)이다.

 

하이데거 또한 노자의 시적詩的 사유에서 주도적 단어인 도는 본래 길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성’, ‘정신’, ‘근거’ 등 도에 대한 기존 번역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길[道]이란 말에는 아마도 사유할 가치가 있는 말함이라는 모든 신비 가운데 신비가 감춰져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저 번역어들을 말해지지 않는 것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그렇게 돌아가도록 할 수 있다면 말이다.”(Unterwegs zur Sprache)

한편 장자 또한 앞에서 인용한 바 있듯이, 만물이 길어 나오는 근원 자리인 무유无有를 역시 영역 개념인 ‘하늘의 문[天門]’으로써 설명했다.

유무상생의 사이나 중심으로 있는 도는 유도 아니며 무나 공도 아니다. 유 아니면 무 식의 형식 논리로 보면 도는 붙잡히지 않는다. 도대체 도를 무엇이라 규정할 때는 이미 도가 아닌 것이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그 때문에 도의 신비한 골짜기는 물리적으로나 산술적으로 구획하고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깊어서 검은’ 그 곳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유나 무를 낳는 선행 근거와 같은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도생일道生一’에서 ‘생生’은 도가 시간과 능력에서 앞선 원인으로서 일一을 결과적으로 만들어내는 작용과 같은 것이 아니란 얘기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논리로써 도에 앞서 도를 낳는 또 다른 ‘시작’과 ‘어머니’를 찾아 나서야 한다. 현, 즉 도는 언어가 미치지 않으며 근거만을 안중에 두는 논리적, 인과적 사유에는 자신의 참모습을 감춘다. 그 점에서 현의 골짜기는 근거(Grund)를 거부하는 비非근거(Ab-grund)로서의 심연(Abgrund)이다. 도는 “심연[淵]”처럼 깊다.(『노자』 제4장)

 

 

영역의 주제는 노자에게서 시적詩的 암시로 그치는 반면 하이데거에서는 보다 엄밀한 사유 속에서 다뤄졌다. 이제까지 영역에 대한 하이데거의 얘기는 다음과 같이 종합된다.

존재 진리란 하나의 동일한 영역에서,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존재자의 존재와 인간은 함께 속한다. 나아가 “동일한 것으로부터 그리로” 함께 속한다는 의미로 동일하다. 그리고 둘은 오직 어느 한편으로 기울지 않는, 이 균형 잡힌 영역에서 비로소 각자의 참됨에 이른다.

이와 함께 존재의 존재자인 그 밖의 모든 것들 또한 존재 진리의 밝음 안에 감싸여 비로소 존재자로서 존재한다. 이로써 존재 진리의 영역[시공간] 안에서 그것을 통해, 말하자면 그것의 “마법”(Gelassenheit)으로써 존재와 인간, 그리고 그 밖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어울리며 저의 참됨으로 돌아가 고요히 머무는 것이다.

이는 존재와 무, 존재와 존재자, 존재와 인간 사이의 영역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것, 즉 발현하며 영역화하는 하나의 존재 자체란 점을 지시한다. 존재 자체가 스스로를 열어 밝히며 내주는 심연으로서 벌여져 있는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그 하나이다. 그곳은 내 안에 있는 것도 내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에서 모든 사유는 저 하나의 토포스로 향한다. ‘토포스’란 말의 어원은 창끝이라고 한다.(Unterwegs zur Sprache) 창끝은 모든 것이 하나로 몰려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토포스는 모든 것이 그리로 돌아가는 ‘끝’이자 그곳으로부터 길어 나오는 ‘시작’이다. 그것은 어떤 시작보다도 앞서고 어떤 마침보다도 뒤에 온다.

 

존재가 발현하는 토포스의 심연은 「천부경」에서 말하는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과 ‘일시무시일’의 일과 같다. 그것은 없지도 않지만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나 무마저 사라지는 그 곳은 깊고 검은 영역이며 신비한 골짜기[谷神]이다. “심연은 무도 공도 아니다. 검은[玄] 혼돈이다. 그것은 오히려 발현이다.”(Identität und Differenz)

 

서구 시원의 그리스 사람들은 태초가 시작되는 혼돈(카오스)을 ‘하품’, ‘벌어진 간극’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하품이라면 우주의 하품인 셈이다. 창끝, 골짜기, 심연, 심지어 하품까지, 존재의 토포스를 가리키는 모든 것들이 V나 ▽ 형태의 영역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V, ▽는 ‘생명과 창조의 부호’가 되는 것일까.

 

어떻게 호명되든 존재 진리의 영역은 모든 것들이 비로소 그 자체로 머무는 때/동안, 즉 시공간이다. 우리는 앞서 이에 대해서 ‘die Heitere’의 오래된 의미를 통해 존재의 영역은 맑게 개이고 인간의 정동성情動性도 청량함과 시원함으로 조율돼 그리로 하나가 되는 ‘재색’의 시공간과 유비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천부경」이 수록된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 “소험유시 소험유공 인재기간[所驗有時 所境有空 人在其間]이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인간의 본성은 신령한 조화의 기운인 삼신三神에서 내려 받은 신성으로서, 삼신과 통하는 관문이 된다는 문맥 안에 포함돼 있다. 따라서 이때 경험[驗]은 감각적이거나 체험적인 것이 아니라 내 본성을 찾아 우주의 실상을 자각하는 ‘깨달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험유시 소험유공’은 깨달음이란 모든 것이 참되게 들어서는 자각自覺의 장으로서 시간, 공간[시공간]으로부터 현성함을 말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인재기간’이란 참나로서의 인간, 본질로서의 인간은 저 깨달음이 일어나는 ‘동안의 폭’, ‘폭의 동안’인 영역에서[間] 유래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도 토포스의 심연을 마주한다.

 

그럼에도 이 밝게 트임의 시공간은 형이상학에서 사유되지 않았다. 이는 존재 자체의 운명이지만, 형이상학 자체의 소홀함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형이상학에서 숨겨진 밝게 트임의 시공간은 형이상학이 줄곧 매달려온 근거 찾기의 사유방식으로써는 올바로 들어설 수 없다. 그것은 근거를 거부하는 심연이다. 당연히 마땅한 이름도 없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들 가운데에서 어디에서도 그에 마땅한 보기를 찾을 수 없는, 숨고 드러나고, 나뉘고 속하는, 빛과 어둠이 투쟁하는 존재 진리를 ‘놀이’라고 불렀다. 놀이라면 모든 존재자의 존재가 걸린 유일무이한 최상의 놀이이다. 창끝이며 신비한 골짜기이며 둥근 원인,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의 일과 같으며 ‘태초의 하품’인, ‘놀이’란 말 외에 딱히 이름 부를 수 없는 심연은 비로소 세계가 세계로서 사물이 사물로서 들어서는 영역이다. 뜰에 잣나무가 피고 솔개 날고 물고기 뛰어오르는 그리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고 죽는 곳이다.

 

**부기附記: 우리는 지금까지 영역을 다루는 모든 장에서 존재의 영역이란 시간이자 공간으로서 시간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간략한 소개나 시사에 그쳤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얘기는 시간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여우가 물을 건넸는데 꼬리에 물을 묻힌 격이다. 이미 사유된 것은 아직 사유되지 않은, 그러나 긴박하게 사유되어야 할 것을 지시한다. 길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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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둥글다(1) - 존재 ‘보다’ 존재의 의미를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Ⅰ. 존재 ‘보다’ 존재의 의미를

하이데거는 Was heißt Denken?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존재가 자신을 고유하게 드러낼 때 그 발현發現의 장場이 사유되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도 적절하게 사유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 1929년에 출간된 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현상학의 근본문제들)에서 철학의 근본 과제를 존재 대신 존재 의미를 토의하는(erörtern) 것으로서 제기한다. 사실상 그는 이때도 이미 동일한 얘기를 하고 있다.

 

“철학이 존재에 대한 학문이라면, 다음의 물음이 철학의 시원적이자 궁극적인 근본 물음으로 밝혀진다. ‘존재와 같은 것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가? 도대체 존재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데 존재 진리의 장을 강조하는 앞말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언급하는 뒷말은 어떻게 같다는 것인가?

 

Sein und Zein(존재와 시간)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의미는 “어떤 것의 이해가능성이 머무는”,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영역領域이나 지평을 가리킨다. 어떤 것의 의미를 영역으로 말하는 것은 우선은 생소할 수 있다.

 

‘의미’(Sinn)의 어원에 밝히는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의미는 하나의 사태가 내는 길이며 방향이다. … 의미는 하나의 사태가 자기 본질을 전개하고 동시에 머무는 밝게 트인 영역이다.”

(Vorträge und Aufsätze『강연과 논문』)

 

어떤 것이 지닌, 때로 다소 멀어 보이고 심지어 무관한 듯한 여러 의미들의 범위는 그것의 본질을 지키고 간직하는 영역이란 얘기이다.

 

 

 

예컨대 ‘義[의로움]’란 사태는 「네이버 한자 사전」에 의하면, ‘옳다’, ‘착하다’, ‘맺다’, ‘섞다’, ‘간사하다’, ‘정의正義’, ‘우의友誼’, ‘뜻’, ‘용모’, ‘예절’, ‘인공적인 것’, ‘가짜’ 등 20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다양한 뜻의 스펙트럼, 즉 의미 영역은 의로움의 사태가 걸어온 역사며 길이다. 의로움의 본질은 거기에 머물고 있다. 이 영역은 우리 바깥에 실재하는 객관적인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지어낸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의미 규정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문제 삼는 존재의 의미란 존재가 그 자체로서, 즉 자신의 고유함이나 본질로서 머무는 영역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서 존재 그 자체 또는 존재의 본질은 주지하다시피 은닉으로부터 밝음으로 들어서는 비은폐非隱蔽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진리이다.

 

다시 말해 본래의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며 우리 가까이(an) 머무는(wesen) 현존現存(Anwesen)으로서의 존재이다. 이에 상응하여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의미는 존재가 그 자체, 즉 비은폐로서 현성現成하는 영역으로서 보다 구체화된다.

 

비은폐로서의 존재 진리는 언제나 은닉과 발현의 “어디로부터(Wovon)와 어디로(Wofür)” (Beitgräge zur Philosophie『철학에의 기여』)라는 영역적 성격을 갖는다. 이는 다시 존재는 자신의 진리에서 밝게 트이며 스스로 영역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은폐에는 열린 장이 현성한다.”
(Parmenides『파르메니데스』)

 

그렇지만 비은폐로서의 존재가 그와 같은 이행인 한, 존재는 언제든 다시 은닉 속으로 자신을 감출 수 있다. 그래서 존재가 그 자체를 드러내는 진리 영역은 밝음과 어둠이 투쟁하는 혹은 놀이하는 장이 된다. 여기서 위의 설명과 앞으로의 논의에 용이한 접근을 위해 비非하이데거적 문맥에서 존재의 영역 문제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중용中庸은 만물의 근본[天下之大本]인 중의 발현을 “나는 솔개, 뛰어오르는 물고기[鳶飛魚躍]”라는 『시경詩經의 말[鳶飛戾天, 魚躍于淵]로써 표현한다. 그리고 이 구절에 대해 “이는 위, 아래에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言其上下察也].”라고 부연한다.

 

중국 송(宋) 나라 때 학자 정자程子는 이 구절을 『중용』의 저자인 자사子思(BC 492년 ~ BC 431년경)가 “사람들을 위하여 요긴하게 한 말로서 생동감 넘치는 대목”(중용장구中庸章句)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에 해당하는 『중용의 중은 때에 따라 머물 뿐[隨時而在], 실체적으로 있는 게 아니다[無定體]. 즉 그것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확정된 무엇으로서 있다고도 할 수 없다. 『중용은 유무에 관한 ‘모호한’ 중의 참됨을 위 아래로 열어 밝히며 영역화하는 발현으로 본 것이다.

 


‘일묘연一妙衍(판본에 따라 演).’ 한민족 전래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에 나오는 구절이다. 「천부경」에서 일一 또한 존재자의 존재라는 성격을 갖는다. 「천부경」은 여기 일에 대해 “[모든 것의] 시작이나[一始無始一] 자신은 시작을 갖지 않으며 [모든 것의] 마침이나 스스로는 마침이 없다[一終無終一].”라고 밝힌다.

 

그런데 그러려면 일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동시에 유이면서 무이어야 한다. 단지 유라면 시작과 끝을 가질 터이고 반대로 무일 따름이라면 시작이 될 수 없고, 그러니 끝도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 묘하게 퍼진다[妙衍]는 것이다. 衍(또는 演)은 ‘퍼진다’, ‘부풀어 난다’, ‘통하다’, ‘스며들다’ 등의 뜻을 갖는다. ‘일묘연’ 역시 유무가 뒤섞인 일이 밝게 트이면서 스스로 영역화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철학의 시원적이자 궁극적인 근본 물음”으로 말하는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은 위, 아래에 밝게 열리는 또는 묘하게 퍼지는 존재의 비은폐나 밝게 트임(Lichtung)의 영역 자체를 묻는 것이다. 존재의 빛보다는 그것이 생기生起하고 머무는 장(Ort)을 토의하는(erörtern) 것이다. 다음의 말들은 하이데거 사유의 그같은 성격을 기술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어느 정도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 모든 나타남들을 위한, 폭넓게 이해된 영역, 장 혹은 공간에 대해 기술하는, 숙고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Heidegger and Buddism. On Non-nihilistic Experience of Groundness」)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존재의 진리를 운동으로서 그리고 결국에는 진행 중에 있는 길과 그때그때의 영역으로서 물었다.”(Heidegger and Asian Thought)

 

“존재의 토폴로지에 대한 논의는 주로 1940년대 후반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하이데거 사유의 진행 속에 완성 단계를 나타내는 핵심 주제이다.”(「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의 토폴로지’에 관하여」)

[이때 ‘토폴로지’는 존재의 ‘토포스’(장소, 위상)에 대한 위상학적 탐구를 말하는데, 보다 심화된 관심 속에 존재의 의미나 진리 영역을 다루는 그의 사유를 지칭한다.]

 

그럼에도 “밝게 트임은 이제까지 철학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철학의 역사적 종말에서 미래의 사유를 위한 과제를 의미한다.”(Zur Sache des Denkens『사유의 사태로』)

 


이와 함께 영역의 문제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여기서는 하이데거 사유의 ‘키워드’를 차지하는 밝게 트임이나 토포스를 ‘영역’으로 옮기고 있다. ‘영역’은 측량, 계측할 수 있는 공간과는 달리 열린 개념으로 이해된다.

 

또 ‘영역’은 공간, 시간에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그 점에서 하이데거가 토포스로써 이해하는 사태와 어울린다고 본다. 우리는 또 영역이 이행이며 사건임을 보다 강조할 필요가 있는 문맥에서는 ‘영역화’라는 표현을 함께 쓰게 될 것이다.

 

 

 

존재 의미 존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은 각각 자유롭고 열려 있다는 의미의 ‘밝게 트임’과 그와 같은 열린 장으로써 드러나는 ‘밝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존재 의미와 존재는 환한 터와 그것을 채우는 빛과 같다.

 

“밝게 트임은 현존하고 부재하게 되는 모든 것을 위한 개방된 영역이다.”(Zur Sache des Denkens)

 

나아가 그 장은 스스로 밝게 드러나는 “비은폐의 근거이고 본질 시원이다.”(Parmenides)

 

밝게 트임이 없으면 빛(Licht)도 밝음(Helle)도, 빛의 부재不在인 어둠도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빛을 넘어서 최상의 것은 환히 빛나는 밝게 트임 자체”(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횔덜린 시 해명』)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영역이 존재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근거와 같은 것으로서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영역과 존재[비은폐] 사이는 영역이 근거로서 앞서고 존재가 그 결과로 뒤따르는 인과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역은 근거가 닿지 않으며, 그곳에서는 근거가 사라진다. 영역은 근거를 삼킨다.

 

하이데거는 비근거로서 심연深淵처럼 벌려진 이 열린 영역을 괴테의 말을 빌려 “근원현상”(Urphänomen)(Zur Sache des Denken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영역성은 존재의 본질에 속한다. 영역은 존재가 비은폐로, 즉 자기의 본질이나 진리로 머무는 방식과 지평이다. 그 점에서 영역은 존재 자체이다.

 

 

 

하이데거는 나중에 가서 존재가 존재로서 머무는 영역을 “사역四域”으로 부른다. 이를 통해 그는 존재의 영역적 성격을 보다 분명히 전달한다. 아울러 하이데거는 ‘사역화’(Vergegnis)란 말로써 스스로 발현하며 사역으로 영역화하는 존재의 동사적動詞的 성격을 드러낸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그 존재 발현의 장을 하늘, 땅,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인간이 하나로 어울리며 펼쳐지는 ‘사방 세계’(das Geviert)라고 규정한다. 하이데거에게는 ‘사방 세계’가 어떤 외적 규정도 털어낸 세계로서의 세계 혹은 세계 자체이다. 존재는 비은폐하며 사역화하는데, 그것은 또한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들의 단일함인 사방으로 트이는 영역화라는 것이다.

 

또한 이때 분명히 새겨야 할 것은 영역은, ‘밝게 트임’이란 말의 일상적 쓰임새가 말해주듯, 시간과 공간을 다 같이 지시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밝게 트이는 시간이자 공간으로서 열린다. ‘사역’이나 ‘사방세계’ 또는 ‘토포스’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그것은 존재가 그 자체로서 머무는 ‘동안’(Weile)의 ‘폭’(Weite)이고 ‘폭’의 ‘동안’이다. 즉 시간이며 공간, ‘시공간’(Zeit-Raum)이다.

 

여기서 ‘시공간’은 존재가 스스로를 열어 밝히는 생기의 사건으로서 파악되고 있으며, 그러한 성격에 주목하여 “시간-놀이-공간”(Zeit-Spiel-Raum)(Unterwegs zur Sprache『언어로의 도상에서』)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역은 동안과 폭으로서 … 시간을 부여하는 동시에 공간을 연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후기의 저술들에서 사역을 존재의 ‘시간-놀이-공간’(Zeit-Spiel-Raum)으로 부르고 밝게 트임과 동일시한다.”(Nähe Das Denken Martin Heideggers)

 

이때 시간은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하듯, ‘지금’의 연속이 아니며, 공간 또한 뉴튼식의 물리적 공간(space-container)과 같은 것일 수 없다.  하이데거에게는 ‘동안’이자 ‘폭’, ‘때’이며 ‘곳’인 시공간이 본래적 시간을 형성한다.

 

하이데거는 시간과 공간을 열어 주는 순수하게 밝게 트임이 고어古語 ‘die Heitere’가 가리키는 사태라고 해명한다.(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 오늘날 ‘heitere’는 주로 맑은 날씨를 가리키며, 그 형용사 ‘heiter’는 ‘갠’, ‘맑은’, ‘밝은’, ‘명랑한’, ‘시원한’, ‘찬연한’ 등의 뜻을 갖는다. 이 의미들을 횡단매개하는 공통적 함의는 ‘맑게 갬’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 ‘제색霽色’[비가 온 후 갠 모습]이 그와 같을 것이다.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이 제색의, 즉 비 오고 난 뒤 밝게 트인 인왕산을 그린 작품으로서 보는 사람의 정감을 금세 밝음과 청량감으로 채우는 걸작이다.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리의 기분은 제색으로 조율된다. 존재 진리인 ‘heitere’는 그러한 제색의 시공간에 유비된다.

 

 

한편 존재가 영역화한다는 것은 존재가 개방성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미 지시한다. 자연의 햇빛이 밝게 빛나는 데는 투명한 공기가 있어야 하듯, 영역화하는 것은 본성상 언제나 그 생기와 머묾의 마당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하이데거 사유 초기에 존재가 비은폐된 존재 자체로서 열어 밝혀지는 장은 자기를 넘어[脫自] 초월적으로 존재자와 관계 맺으며 그것의 존재를 이해하는 인간 현존재의 개방성에서 구해졌다. ‘다만 존재 이해란 장이 있는 한 존재는 있다.’ 하이데거 사유의 전개 속에 초기의 존재 이해나 초월을 대신하여 ‘사유’, ‘내맡김’, ‘청종’ 등이 존재 진리가 일어나는 개방성의 자리에 들어선다.

 

그리고 인간이 그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된 존재 진리의 장으로써 존재하는 방식은 그의 본질로서 사유된다.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함은 사유하며, 자기 바깥으로 나아가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 데 있다. 하이데거는 그 인간 본질을 ‘실존’, ‘탈존脫存’, ‘존재의 이웃’, ‘존재의 목자’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이에 따르면 인간 본질은 존재 진리에 속한다. 인간의 고유함은 “영역화하는 것 안에 머묾”(「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인 인간이 존재의 필요에 따라 영역화의 자리로 전용專用되는 일은 그에게는 모든 것에 선행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나 가능성이 거기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 다가올 것을 준비하면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두기로 하자.

1) 존재의 영역은 은닉으로부터 발현하는 존재의 이행과 함께 열린다. 존재 발현은 사역, 사방 세계 등으로써 펼쳐진다.
2) 영역은 존재 자체인 비은폐에 속한다.
3) 영역은 시공간이다.
4) 영역은 그로부터 거기에 머무는 존재에 대해 인과적 의미의 근거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근거이다.
5) 존재는 영역화의 본질로부터 열린 장을 요구한다.
6) 인간이 사유를 통해 자신을 존재 진리의 영역으로서 바치는 것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그의 특기함이다. 그 점에서 인간 본질은 존재에 유래를 둔다.

 

존재는 둥글다(2) - 있는 듯 있지 않은 있는 것 같은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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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지극히 신령스러운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난랑비서문

 

그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실은 삼교를 포함하여

군생을 접화하는 것이다. 

 

들어와서 가정에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과 같은 것이요.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교를 행함은 
노자의 종지와 같은 것이요.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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