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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증산도 삼랑대학 교육 / 9월 청소년포교회⋅어린이포교회 삼랑대학 교육

 
[포토&뉴스]

9월 증산도 삼랑대학 교육



●일시 : 도기 153년 9월 17일(일)
●장소 : 증산도 교육문화회관 상생관 / 온라인 줌, 도무넷



도기 153년 양력 9월 17일 증산도 교육문화회관 상생관에서 9월 삼랑대학 교육이 진행되었다. 코로나19 상황 등을 고려하여 당일 현장교육에는 본부 및 태전 지역 책임자만 참석하였으며 현장 진행 상황은 온라인 도무넷 방송과 줌을 통해 전국 및 해외로 송출되었다.

이날 일정은 먼저 본부 전재우 수호사의 천상 태라천 신선궁 특별 수행 ⟨조화신선 도통수행 법전 공부⟩에 대한 세 번째 교육으로, 수행 및 법전 공부의 중요성에 관한 종도사님의 도훈 말씀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사천벌용도장 최숙자 태을랑과 통영도장 김곡분 태을랑의 사례 발표가 있었다. 이후 종도사님 도훈 말씀이 이어졌다.

종도사님께서는 “상제님의 천지공사 중 태인 숙구지 도수 공사 내용은 아주 중요하고 가을개벽 실제 상황 속에서 유일한 생존의 길이다. 지구촌 80억 인류를 구원해 내는 깊고 깊은 구원의 섭리가 다 들어 있다. 숙구지 도수는 새울 도수와 음양 짝으로 되어 있다. 숙구지 도운이 우주 원리의 기초, 근본, 결론, 최종 핵심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거다.

그것은 술戌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우주의 조화가 북방 해자수亥子水 물로 마무리되는 근원을 술오공戌五空이라고 한다. 숙구지는 변방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인데, 그곳에서 빠져나와 우주 창조의 본체 역할, 세상 문명의 역할을 하게 되고 간艮 도수와도 연결되어 있다. 국통맥을 보면 상제님이 동방 땅, 인간의 역사 속에 오시는 머나먼 여정이고 태모님도 상제님을 따라서 오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들 각자가 숙구지 도운의 개척과 창업의 주역이 된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우리 한국의 시원 태고 역사에서부터 쭉 국통맥을 따라오다가 현주소를 보면 국통이 부정되어 있다. 이 역사의 틀을 바로 세우는 것, 국통맥의 종통 대세를 전해 주는 것과 조화 도통 수행법을 제대로 전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와 원류 문화 핵심을 모르면, 삼신 망량 문화를 모르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상제님 집이 지어지면 계룡산이 태봉산太鳳山으로 바뀐다. 후천 5만 년 조화선경, 조화신선 도통 사회의 통치 사령탑이기 때문에 태봉산이 된다. 그것은 도통과 종통, 모든 걸 상징한다. 지금 하는 수행은 나 홀로 하는 수행이 아니고 모두와 함께 하는 수행이다. 숙구지 도통문을 여는 수행은 지구촌 80억 인류가 함께 하는 수행이다. 상제님, 태모님의 도를 제대로 받는 사람이 아니면 신앙인이 아니다.

도생들이 100만 당적은 할 줄 알아야 한다, 상제님 도문에 들어와서 그런 의식이 없다면 그건 제대로 된 교육이 아니다. 역사는 궁극의 전환기의 성령적 사태가 벌어지는 것인데, 최종적으로 정리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여느라고 변혁이 오는 것이다. 선천에서는 마지막 봉사고 인류를 위한 봉사다.”라는 말씀을 전하시며 삼랑대학 교육 일정을 마무리하셨다.


9월 청소년포교회⋅어린이포교회 삼랑대학 교육



●일시 : 도기 153년 9월 16일(토)
●장소 : 증산도 교육문화회관 상생관 / 온라인 줌, 도무넷



도기 153년 양력 9월 16일 태전 증산도 교육문화회관에서는 9월 청소년포교회, 어린이포교회(이하 ‘청포’, ‘어포’) 삼랑대학 교육이 진행되었다. 코로나19 상황 등을 고려하여 당일 현장 교육은 본부 및 태전 지역 책임자만 참석하였으며 현장 진행 상황은 온라인 도무넷 방송과 줌을 통해 전국 및 해외로 송출되었다.

●9월 청소년포교회 삼랑대학청포 삼랑대학 교육은 먼저 ‘증산도 일꾼의 사명’이라는 제하의 상생방송 태상종도사님 대도말씀 도훈을 경청한 후, 본부 어청포 팀장 정의환 수호사가 도정공유를 통해 ‘상제님의 일은 초립동들이 주인공이다.’라는 소초동 도수 말씀과 ‘상제님의 집 태라천궁은 상제님의 통치 본부다.’라는 종도사님 말씀을 정리했고, 이어 신안 공부 운영 방안과 대한사랑 청소년단 해외 역사 탐방에 적극적 동참을 권유하는 내용의 네 가지 사항을 전달했다.

다음은 본부 교육국 강윤성 수호사가 ‘마음의 근력을 키우자.’라는 주제로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근력 훈련을 다룬 김주환 교수의 저서 『내면소통』 내용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나는 나의 몸이다, 나의 몸보다 더 소중한 게 없다. 이것이 천고의 명언이다.“라는 종도사님 말씀을 바탕으로 전체 흐름과 주요 핵심을 공유하였다.

끝으로 본부 포교원장 김남운 수호사가 ‘태라천궁 시대의 주역인 초립동이 되자!’라는 주제로 정리 교육을 가졌는데, 소초동 도수의 정신은 상제님을 능가하는 일꾼이 되는 것이며 우리는 인류를 구원하는 자, 가을 천지개벽의 대사역자, 인류사의 꿈을 완성하는 자임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며 청포 삼랑대학 교육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9월 어린이포교회 삼랑대학어포 삼랑대학 교육 일정은 먼저 본부 어청포 팀장 정의환 수호사가 도정공유를 통해 ‘상제님의 일은 초립동들이 주인공이다.’라는 소초동 도수 말씀과 상제님의 집 태라천궁은 ‘상제님의 통치 본부다.’라는 종도사님 말씀, 그리고 신안 공부 운영방안 등 세 가지 사항을 전달했다.


이어 ‘증산도 일꾼의 사명’이라는 제하의 상생방송 태상종도사님 대도말씀 도훈을 받든 이후, 광주상무도장 김재숙 지도교사가 태상종도사님 도훈을 정리해 주었다.

다음으로 태전대덕도장 조선미 수석 천록포감이 ‘영화로 보는 개벽 상황’을 진행하여 개벽의 전개 과정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며, 경주노서도장 전형아 상임포정이 ‘우리들의 역할과 사명’이라는 주제로 천지부모의 꿈과 우주 이상을 완성할 유일한 존재요 희망이며 태일 인간인 삼랑이 되어 가기를 당부하는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어포는 인류의 태양이다.’라는 종도사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날 어포 삼랑대학 교육 일정을 마쳤다.

● 어청포 삼랑대학 태상종도사님 도훈 정리“우리는 천지의 공인이요 천지의 역사를 대신하는 대역자다. 하느님의 성스런 진리로 천지에서 개벽할 때 내가 살고 내가 사는 성스런 진리로 남을 살려 준다. 대우주 만유의 생명체라는 것은 열매를 맺고 결실⋅통일을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천지 우주도 사람 농사를 지어서 가을철이 되면 사람 씨종자를 추리는 인간 결실을 한다. 그게 바로 우주정신이요 천지의 이법이다.

천지도 목적이 있어서, 초목을 보면 봄에 물건 내서 여름철에 길러서 가을에 열매 하나 맺기 위해서 봄여름이 있었다. 만일 가을철에 열매 하나 맺지 못한다면 봄여름이라 하는 것은 있어야 한 푼어치도 필요치 않은 과정이다.

우주의 결실, 천지의 열매가 뭐냐. 군사부 문화다. 군사부 진리가 우주의 정신이다. 천지의 목적이 군사부 진리, 하나인 진리만 있을 뿐이다. 증산도는 선천 세상에서 후천으로 가는 생명의 다리이며, 상제님의 진리로써 도성덕립이 된다. 우리는 천지의 공인이다. 상제님 진리의 길잡이가 된다. 천지의 사역자, 천지의 역군이 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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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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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의 진리 8장 | 도운공사道運公事 (1)-2

 

제2절 제1변 도운 개창사 : 낙종과 이종 도운의 전개


태모 고 수부님께서 정읍 대흥리에서 도문을 열고, 첫째 살림을 시작하심으로써 낙종 도수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차경석 성도의 배신과 야욕으로 오랜 세월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하셔야만 했다. 수부님께서는 본소를 조종리로 옮겨 둘째 살림 시대를 여셨다. 고 수부님은 그곳에서 어머니 하느님으로서 ‘10년 천지공사(1826~1935)’을 선언하시고, 상제님의 천지공사가 실현될 수 있도록 정음정양의 새 질서를 천지에 질정하셨다. 그러나 조종리 신도들의 불의와 무지로 수부님은 다시 본소를 옮겨야 했고 이후 용화동에서 셋째 살림 시대를 새로 시작하셨다. 그곳에서 22년에 걸친 세 살림 도수를 마치고 옥체가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수부님은 오성산으로 옮겨 은거하시며 10년 천지공사를 모두 마무리하시게 된다.

1. 낙종 도운과 수부님의 세 살림


1) 제1 변 도운의 개창(낙종 도운) : 첫째 살림 정읍 대흥리 도장 [신해(1911) 10월 초 ~ 무오(1918) 10월 중순]
신해(1911)년 9월에 상제님의 성령 감응으로 대도통을 이루신 수부님은 그다음 달 10월에, 정읍 대흥리大興里 차경석 성도의 집을 본소本所로 정하시고 포정소布政所 문을 열어 도장 개창을 선언하셨다. 이로써 수부님의 첫째 교단 살림 시대가 열려 제1변 도운 가운데 ‘낙종 도운’이 시작되었다. 당시 성도들이 교명을 무엇으로 정할지 여쭈자, 수부님은 “천하를 통일하는 도인데 아직은 때가 이르니 ‘선도仙道’라고 하라.”라고 명하셨다(도전道典 11:29).

도문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를 중심으로 교세가 날로 커져 갔다. 그런데 차경석 성도가 도욕이 앞서, 혈통으로는 이종 누님이고 법통法統으로는 도道의 스승인 수부님을 배반하고 교권을 자신에게 집중시켰으며, 수부님과 신도 사이를 이간하여 인맥을 끊었다. 그리고 이때를 전후로 하여 상제님께서 공사 보신 도운 개창 도수와 같이 초장봉기지세楚將蜂起之勢로 도운이 벌어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2) 둘째 살림: 김제 조종리 교단 [무오(1918) 10월 중순 ~ 기사(1929) 9.11]차경석 성도가 통교권統敎權을 장악한 병진(1916)년 동지 이후, 수부님은 신도들을 만나지 못하여 답답한 심정으로 세월을 보내야만 하셨다. 2년 뒤 무오년 9월 19일 수부님은 모든 일을 정리하시고, 이틀 뒤 21일 새벽 김제군 공덕면 공덕리孔德里 송산松山 마을 천종서의 집으로 거처를 임시로 옮기셨다. 10월 중순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祖宗里에 사는 강씨姜氏 신도들이 수부님을 모시고자 찾아왔고, 수부님께서는 “다른 것은 없고 다만 성씨姓氏 하나 보고 가노라.” 하시며 허락하셨다. 이로써 수부님의 둘째 살림이 본격화되었다.

수부님께서는 조종리에 오신 지 9년째 되던 병인(1926)년 3월 5일에 10년 천지공사(1926~1935)의 시작을 선언하셨다. 그 첫 공사가 칠성七星 도수였다. 칠성 도수는 칠성의 조화 성령 기운을 받아 선천 인간을 후천 가을 인간으로 낳아 기르는 도수이다. 이 도수에 따라 장차 제3변 도운에서 상제님 일을 매듭짓는 지도자와 일꾼이 나와서 가을 대개벽기에 육임 의통구호대를 조직하게 된다. 육임 구호대가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고 선천 역사를 종결하여 후천 가을의 조화 선仙 문명을 열어 나감으로써 칠성 도수가 완결된다.

또한 장차 추수 도운에서 대두목이 상제님 진리를 정립하고 일꾼 양육을 통해 도성덕립을 성취할 수 있도록 어머니 하느님으로서 천지공사를 집행하셨다. 바로 병인(1926)년 상제님의 무극대도를 세상에 뿌리내려 육임 의통구호대의 조직 틀을 짜는 도체道體 조직 공사이다. 도체는 천지일월의 성령을 받아 상제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 상제님의 도권을 쓰는 ‘도의 주체’ 세력을 말한다. 상제님 일꾼은 육임 조직을 완수하고 의통성업을 집행하면서 도체의 심법을 온전히 전수받게 된다(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제10장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상제님 진법을 여는 도체 조직을 인사 도수로 구체화하심에 따라 장차 육임 도군 조직이 현실 역사 속에서 지구촌을 상제님의 무극대도로 통일하게 된다.

또한 1928년에는 당시 가장 유명한 화가였던 정산定山 채용신蔡龍臣(1850~1941)을 불러 상제님 어진御眞을 그리게 하셨는데, 태모님께서 어진을 세 번 감수하신 끝에 3월 26일 태모님 성탄치성 때 봉안하셨다.

그리고 상씨름판의 추수 도운을 일으켜 장차 마지막 상씨름판 과정에서 판몰이의 기틀을 마련하는 대두목을 수부님은 ‘잠자는 개(壬戌)’로 비유하셨고, 잠든 개를 깨우는 공사를 태인 숙구지宿狗地에서 보셨다(도전道典 11:215). ‘잠자는 개’는 천지의 1 태극수 물[水] 기운을 갖고 오는 술戌생의 대두목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수부님은 상제님과 당신님의 말씀을 성편하는 공사를 보셨다. 기사(1929)년 6월에 이상호가 『대순전경大巡典經』을 간행하지만, 여기에는 고의적으로 종통에 대해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태모님이 상제님의 종통 대권 계승자임에도 ‘고부인’이란 호칭을 쓰면서 종통을 숨기고 왜곡했다. 상제님과 태모님의 행적은 제3변 추수 도운에서 천지부모 하느님의 천지공사 내용과 말씀을 집대성하여 『도전道典』으로 성편되었다.

3) 셋째 살림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 왕심리 도장 [기사(1929) 9, 21 ~ 신미(1931) 11.15]수부님께서는 병인(1926)년에 칠성용정 공사를 보신 뒤로 수석 성도인 고민환 성도에게 도무를 위임하셨다. 그러나 조종리 강씨 신도들은 친목단을 조직하고 그동안 자신들의 공로와 신앙 경륜을 내세우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후 수부님이 간부 조직을 개편하시자, 이에 노골적으로 반동하고 아예 도문을 떠나 버리기도 하는 등 갖은 공작을 하며 도장 운영을 방해했다. 기사(1929)년에는 강응칠이 조종리 도장을 제멋대로 팔아 버리는 이른바 ‘도집 재판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에 수부님은 상제님 성탄치성을 봉행하시고 21일 조종리를 떠나 순흥 안씨順興安氏의 집성촌인 정읍 왕심리旺尋里로 옮겨 가셨다. 오직 담뱃대 하나만 들고 몇몇 성도들과 함께 상제님 어진을 모시고 가셨는데, 이때 강씨 신도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불의함과 배신할 것을 미리 아신 수부님은 “새우젓과 같이 오장五臟이 곯도록 썩어야 한다.”는 말씀을 내려주셨다(자세한 내용은 도전道典 11:43 참조)

왕심리로 거처를 옮기신 수부님은 모든 원혼신寃魂神을 해원시키는 공사를 보시느라 친히 병고를 겪기도 하셨다. 이 무렵인 무진(1928)년에서 기사(1929)년 사이에 지방의 보천교 신도들이 대흥리와 그 부근 마을로 대거 이사를 왔다. 그전부터 교단에서 이주자의 자립 경제를 위해 직물 공장을 운영해 왔으나, 갑자기 늘어난 수천 가구의 생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차경석 성도가 신도들 구제 목적으로 벽곡辟穀을 장려했지만, 기아자가 속출하였다.

보천교 신도들이 굶주림을 참다못해 왕심리에 계신 수부님께 찾아와 배고픔을 호소하자, 수부님은 그들을 모두 거두어 구제하셨다. 신미(1931)년 정월 18일에는 세 명의 성도에게 대흥리에서 싸전을 운영하게 하시어 굶주리는 보천교인들의 끼니를 이어 주셨고, 굶어서 죽은 순교자들을 해원시키기 위해 치성을 올리게 하셨다.

이때 수부님을 모실 뜻을 밝힌 인물이 일찍이 보천교 간부로 있다가 사직한 후, 동화교東華敎를 연 이상호李祥昊(1888~1966)이다. 수부님은 그의 뜻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상호는 세 살림 도수를 언급하고, 고민환 성도가 세 살림 도수의 도국 변천道局變遷이라 생각하여 수부님께 간곡히 청하자, 할 수 없이 허락하셨다.

4) 셋째 살림 : 김제 용화동 교단 [신미(1931) 11.15 ~ 계유(1933) 11.5]수부님께서는 신미(1931)년 동지 전날에 용화동龍華洞으로 이사하시고, 다음 날 새벽에 동지치성을 봉행하셨다. 그리고 도장 조직을 새롭게 구성하심으로써 수부님의 셋째 살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호를 주축으로 한 용화동 신도들이 수부님의 가르침을 받들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수부님의 위격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유교 의식에 사로잡혀 수부님이 행하시는 신정神政 공사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호, 이성영 형제가 수부님을 모신 본래 의도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수부님의 신권을 등에 업고 교세를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모시고 보니, 수부님이 신도神道로써 행하시는 천지공사와 언행을 이해할 수 없었고, 무당짓으로만 여겼다. 그래서 이런 수부님의 행동이 외부에 알려져 교단의 품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수부님을 고립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부님은 천하 창생의 죄를 대속하시느라 당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해 옥체가 점점 쇠약해졌다.

당시 용화동 교단은 조종리 도장에서 온 신도들과 동화교 출신 신도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양측 신도들의 신앙 의식이 크게 달라 교리 해석과 도장 운영 방식이 맞지 않았다. 조종리에서 온 신도들이 떠난 뒤 도장은 쇠퇴하였고, 이상호가 고민환 성도를 시기하여 해치려 하자 수부님은 늘 고민환을 당신 곁에 붙어 있게 하셨다. 비통과 의분을 참지 못하고 고민환 성도는 고향 옥구로 돌아가 도체 조직 작업을 진행하였고, 1932년 옥구군 성산면 오성산五聖山에 기지를 정하였다. 중도에 재정난으로 도장 건물이 중단되었지만, 수부님께서는 오성산에서 동지치성을 봉행할 것이라며 오성산 도장 완공을 재촉하셨다. 이에 이진묵이 자신의 집을 팔아 비용을 충당하여 공사를 속행했지만, 시간이 촉박해 수부님이 거처하실 큰 방 하나만 정리하여 모셨고, 이듬해인 갑술(1934)년에 비로소 완공되었다. 수부님께서는 오성산으로 떠나시기 전, 당신의 도업을 이어받을 추수 도운의 주인공이 용화동을 발판으로 하여 일어날 것을 공사로 처결하셨다.

이것이 바로 용봉기龍鳳旗 공사이다. 용화동을 떠나시기 전 용봉기를 꽂아 두시고, 이상호에게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 하고 다짐을 받으셨다(도전道典 11:36). 용봉기는 상제님 도업을 성사시키는 두 인물을 상징한다. 이 두 인물을 상제님은 ‘용화동 계룡봉’(도전道典 6:66)에 비유하셨다. 계룡봉에서 계鷄는 봉황[鳳]을 뜻하므로, 두 지도자를 용과 봉으로 상징하여 말씀해 주신 것이다.

5) 수부님의 오성산 도장 은거와 선화仙化 [계유(1933) 11.5 ~ 을해(1935) 10.6]계유(1933)년 동짓달 5일에 수부님은 파란만장한 세 살림을 뒤로 하시고 오성산 도장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이때 수부님은 온갖 고초를 겪으신 터라 옥체가 쇠약해지신지라 한 성도의 등에 업히신 채 간신히 도장으로 가셨다. 이곳에서 태전 콩밭 도수를 집행하셨다(도전道典 11:365, 11:413).

오성산에 은둔하신 지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흐른 을해(1935)년. 수부님은 성도들에게 “너희들은 집안만 잘 지키고 있으라. 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빨리 가야 너희들이 잘될 것이라.”, “내가 올 적에는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고 오리라.” 하시며 당신님께서 곧 천상으로 올라가실 것을 암시하셨다. 또 “너희들이 죽으면 혼신魂神이라도 잘되게 해 주마.”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도전道典 11:414).

10월 5일 저녁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성도들에게 마음을 잘 고치라는 당부의 말씀을 남기신 수부님은 한 많은 세월을 뒤로하신 채 천상으로 떠나시니 성수聖壽 56세이셨다. 때는 단군 기원 4268년, 을해년 10월 6일, 서력기원 1935년 11월 1일 축시丑時였다.

수부님께서는 천지신명과 억조창생의 어머니로서 세 살림 도수를 맡아 도문을 개척하심으로써 100년 도운의 역사를 열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10년(1926~1935) 천지공사를 집행하시어 상제님 천지공사 내용이 현실 속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후천 5만 년 새 역사의 운로를 질정하셨다. 수부님의 세 살림 개척 과정은 천하 창생을 위한 어머니 하느님의 희생과 대속의 기나긴 여정이었다. 장차 수부님의 22년 세 살림 도수의 공력과 정성 기운을 따라, 상제님 도의 종통 계승이 이루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추수 일꾼들이 나와서 지구촌 80억 인류의 생사를 매듭짓고 상제님 대업을 성취하게 된다.

2. 이종 도운과 도운의 대 부흥기, 보천교普天敎


수부님께서 정읍 대흥리에서 첫 교단을 개창하시어 상제님 도의 낙종落種 도운이 열린 이래, 조선의 삼남 지역과 서남해 일대를 중심으로 상제님 무극대도 포교 대부흥이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러나 차경석 성도가 수부님의 교권을 장악하면서 낙종 도운이 마무리되고 도운의 씨를 옮겨 심는 이종移種 도수가 실현되었다.

월곡月谷 차경석 성도는 상제님께서 자신의 집 벽에 ‘천고춘추아방궁千古春秋阿房宮이요. 만방일월동작대萬方日月銅雀臺’(도전道典 3:187)라고 써 붙이신 글을 잘못 해석하였다. 글의 주인공인 진시황과 위 무제 조조가 각각 ‘영嬴’과 ‘여呂’, ‘하후夏候’와 ‘조曺’라는 두 성姓을 가졌던 것처럼, 차씨인 자신의 성이 실제로는 정씨鄭氏임을 암시하신 말씀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 해석을 바탕으로 ‘곧 새 왕조가 들어서고 자신이 천자로 등극한다.’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새 시대에 대한 큰 포부와 열망을 지닌 차경석 성도는 상제님 공사에 따라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에 맞서 도운을 크게 일으키며, 수부님이 뿌리신 도운의 씨를 전국 방방곡곡에 옮겨 심는 이종 도운을 크게 열어 나갔다.

신도 6백만 도세를 일군 차경석 성도의 보천교을묘(1915)년부터 교권을 차지하려 시도했던 차경석 성도는 병진(1916)년 동지에 드디어 통교권統敎權을 장악하고, 수부님을 용화동 교단으로 모셨던 이상호와 문정삼, 채규일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상제님의 종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부님의 사명은 자신에게 상제님 도를 전하는 데 있으며, 이제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상제님의 도통을 이어 세계를 경략하는 대사명을 실천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통교권을 장악한 차경석 성도는 조직 체계를 새롭게 정비하여, 24방위에 따라 24방주제方主制를 조직하여 방주의 책임 아래 모든 교단 내 업무를 진행하게 했다. 이듬해 정사(1917)년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을 떠돌며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무오(1918)년 말에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스페인 독감이 조선에도 창궐하여 7백만 명이 감염되고, 14만 명이 비참하게 죽어 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개벽기에 사람 살리는 생명의 주문인 태을주가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갔다.

기미(1919)년 9월에 이르러 차경석 성도는 24방주제를 확대하여 60방주제를 조직하고 경남 함양 대황산大篁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봉행하였다. 그 후 불과 반년 사이 교인이 수십만에 이르더니 경신(1920)년에는 간부 숫자만 55만 7천7백 명이 되었다. 세계 종교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한 교세 확장을 이룬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상제님이 짜 놓으신 동학 역신 해원 도수 때문이다. 수십만에 달하는 동학의 원혼들이 차경석 성도에게 붙어 원한을 푸는 과정이었다(도전道典 5:205). 둘째, 방주제라는 비밀 조직으로 교단을 운영해 일제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제 강점의 폭압과 암울한 삶을 살던 때에 ‘지상 선경 세상’이 열린다는 교리는 조선의 독립과 새 왕조 건설이라는 희망의 소식으로 민중들 가슴에 강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민중은 조선 독립과 새 왕조 건설의 꿈을 실현할 주인공을 차경석이라 믿었고, ‘차천자車天子’라고 부르며 구름같이 모여든 신도들이 약 6백만 이상에 달했다. 당시 조선 인구가 2천만 정도이니, 가히 국교國敎라 할 만하였다. 당시 기독교 신자는 1920년에 약 30만 정도였다. 1921년 월곡 차경석 성도는 경남 함양군 황석산黃石山에서 고천제를 올려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라 하고 국호를 ‘시국時國’이라 선포하였다.

일제 탄압과 차경석 성도의 상제관 오도誤導, 그리고 변심그 무렵 핵심 간부였던 이상호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교단 공개를 권고받고 석방된 일이 있었다. 차경석 성도는 이상호에게 교단 공개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였다. 이상호는 임술(1922)년에 천자를 상징하는 ‘보화普化’ 대신 ‘보천교普天敎’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에 교단을 등록하였다. 이로써 세상에 보천교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교단을 쇠퇴의 길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교단 공개로 일제의 감시와 통제의 손길이 미치면서 교단의 권위와 교세가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보천교의 막강한 교세를 두려워하여 회유책에 비중을 두던 일제는 민심이 돌아서는 틈을 타서 소위 ‘유사종교類似宗敎’라는 언어를 만들어 매도하면서 적극적인 탄압과 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을축(1925)년에 짓기 시작한 대성전인 십일전十一殿이 기사(1929)년 3월 16일 낙성落成에 맞춰 천자 등극식을 거행하려 했으나, 일제는 일본 황실에 대한 불경 행위라며 행사 자체를 금지했고, 보천교 관련 건물을 폐쇄하고 전국 교인들을 검거해 고문하였으며 집회를 금지했다. 이후 교단은 빠른 속도로 와해되어 갔다.

특히 십일전 완공 1년 전인 무진(1928)년 정월 초삼일, #부인 전주 이씨#는 차경석 성도에게 “영안靈眼으로 보니 상제님께서 보좌를 떠나시고,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가 보좌에 들어왔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혹한 차경석은 신앙 대상을 차치구로 바꾸고 유교에 가깝게 교리를 바꾸며 교단을 해산하려 하였다. 당시에 상제님 신앙을 유교 부흥 운동으로 왜곡해 활로를 모색하려 한 발상은 일제의 지속적 탄압에 직면한 보천교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꺼내 든 궁여일책의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간부와 신도들은 이에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벌였고 교단은 분열되었다.

이때 수부님은 1928년 9월 21일 보천교 본소 앞에서 춤을 추시며, 증산 상제님을 믿어야 흥한다는 뜻의 ‘흥강가興姜歌’를 노래하시며 공사를 보셨다. 차경석 성도의 사명과 임무는 막중했지만, 이종 도운에서 그의 역할은 무진년 태모님의 ‘흥강가興姜歌 공사’를 기점으로 서서히 저물기 시작하였다.

결국 일제의 집요한 음해 공작과 강력한 탄압으로 차경석 성도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조선 민중에게서 신망을 잃고 쇠락의 세월을 보내다가, 수부님께서 선화하시고 6개월이 지난 병자(1936)년에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일제는 증산 상제님을 신앙하는 모든 교단의 활동을 준독립 운동으로 규정하고 대폭압 명령을 내렸다. 보천교 본소를 접수하고 해체를 명령했으며, 건축물을 강제로 경매⋅처분하였다. 당시 조선 내 독립 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인 십일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은 헐값에 처분되어 조계사 대웅전과 내장사 대웅전, 전주 역사驛舍 등을 짓는 데 쓰였다. 보천교 신도들은 신앙을 포기하거나 비밀리에 신앙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탄로가 난 신도들이 검거되어 온갖 고문과 취조를 받고 비극적으로 죽어가는 참사를 당하면서 보천교는 민중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 갔다.

보천교, 이종 도운의 역할과 사명보천교는 최근에 와서야 그 역할이 재조명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왜곡하여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의 모든 것에 경멸적인 혐오감을 느끼게 하고, 조선인의 생각과 사상 그리고 생활 양식을 일본화시켜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였다. 당시 조선 사회는 일제 식민 교육으로 말미암아 우리 전통문화를 모두 미신이나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보천교는 북두칠성에 계신 상제님과 내 마음을 하나로 맞춘다는 의미를 지닌 상투를 틀었고 흰옷과 도포를 입었으며, 우리 고전을 연구하고 풍물놀이 등 전통음악을 진흥하였다. 또 민족대학 설립을 추진하고, 조선물산장려회가 추진한 토산품 애용과 물자 절약 운동인 물산장려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정읍 대흥리 일대에 직물 공장, 갓 공장 등 현대적인 생산 시설도 갖추어 자급자족할 경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보천교 교단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60방주제를 통해 독립 자금을 상해임시정부와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조달하였다. 왜곡되긴 하였지만, 상제님 성훈이 담긴 『천지개벽경天地開闢經』을 집필한 이중성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밀사였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2만 원(현재 가치 약 4억 정도)을 지원하였다. 이런 독립운동을 포착한 일제는 보천교를 협박하고 탄압했다.

보천교의 발흥과 몰락은 모두 상제님 천지공사에 따라 일어난 일이며, 차경석 성도는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나라의 주권이 빼앗긴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이종移種 도수를 맡아, 수부님께서 뿌리신 진리의 씨앗을 옮겨 심어 크게 성장시키는 대역사를 펼쳤다. 약 20년(1916~1936) 동안 정읍 대흥리에 수부님이 뿌리신 도운의 씨를 전국 방방곡곡에 옮겨 번성시키는 이종 도수의 사명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차경석 성도는 ‘추수할 사람’에게 종통 맥이 이어지게 하는 도맥의 고리 역할을 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차경석 성도에게 ‘달의 골짜기’를 뜻하는 ‘월곡月谷’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는데, 이는 천지일월 사체 가운데 달[月]로 상징되는 추수판 도운의 창시자에게 도맥이 이어지게 할 것임을 알려 주신 것이다. ‘경석京石’이라는 도명道名도 후천 5만 년 새 세상의 주춧돌이 되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차경석 성도의 본명은 ‘윤홍輪洪’이다.

제3절 제2변 도운 개창사와 상제님의 종통 도맥

1. 제2변 초기 추수 도운 개창사


태모님과 차경석 성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정축(1937)년부터 세운에서는 총각판 씨름인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상제님 교단에 대폭압 명령을 내리고, 유사종교 해산령을 내려 민족 종교를 모두 해체했다. 이에 상제님 ‘대나무 공사’에 의해 종도들이 개척한 교단도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암울한 침체기를 보내고 마침내 대망의 을유(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고, 상제님 도운은 새로운 추수판 도운의 부흥을 맞게 되었다.

1) 용화동에서 열린 초기 추수판 도운●추수 일꾼 출세에 이바지한 이치복 성도
상제님께서 어천하시던 해인 기유(1909)년 전라도 부안扶安 출신 이치화李致和 성도가 도문에 들어왔다. 상제님께서 ‘큰 일꾼’이 들어왔다고 하시며 절을 받으시고, ‘치화’라는 자字를 ‘복이 이른다’는 뜻의 ‘치복致福’으로 고쳐 주셨다. 상제님께서 ‘큰 일꾼’이라 하신 것은, 추수 도운을 여는 인물이 출세하는 데 결정적 이바지를 할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이후 이치복 성도는 차경석 성도의 전횡으로 성도들이 수부님 곁을 떠날 때 가장 나중에 나와서, 제화교濟化敎를 열어 포교 활동을 하였다. 1918년경 충남 태안 안면도安眠島에서 존성 안安씨요, 성휘 병炳 자, 욱彧 자인 태상사부太上師父님(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의 부친)을 만나 상제님 도를 전하였다. 이후 태상사부님께서 보천교 신앙을 하시게 됨에 안 운雲 자 산山 자 태상종도사님은 어린 시절부터 집에 드나드는 수많은 신도가 나누는 도담을 들으면서 증산 상제님 진리를 스스로 터득하셨다.

태상종도사님 성수 7세 되시던 무진(1928)년에 수부님께서는 “이제 때가 멀지 않으니 자는 개를 깨워야겠다.”(도전道典 11:215)라고 하시며 숙구지宿狗地 공사를 보셨다. 이 공사는 1922년 임술생壬戌生으로 오신 대두목에게 종통이 전수될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수부님께서는 “숙구지 공사를 보아야 한다.”라고 성도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는데, 이때 비로소 ‘자는 개를 깨우는 공사’를 보신 것이다.

태상종도사님은 9세 때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 청풍명월금산사淸風明月金山寺”, ‘만국을 살려 낼 활방은 오직 남쪽 조선에 있고 맑은 바람 밝은 달의 금산사로다(도전道典 5:306:6)’라는 상제님 말씀을 입춘서로 써서 집 안 상기둥에 붙이셨다. 태상종도사님은 어린 나이에도 이 열넉 자 대구對句가 전하는 뜻을 훤히 아셨다. 그리고 12세 때에는 2주 동안 수련을 하셨는데, 3일 만에 홀연히 하늘의 대광명이 열리는 큰 체험을 하시고 상제님 대도의 개척 사업이 당신께서 받은 천명임을 아셨다. 그로부터 평생을 이 대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시고, 십 대부터 광복이 되던 이십 대 초반까지 전국 팔도와 만주, 북지北支(중국 화북 지역) 등을 주유하며 일제 치하에서 한민족이 겪는 수난과 세상의 물정을 두루 체험하셨다.

●광복 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태상종도사님
마침내 광복이 되자 태상종도사님은 “일실건곤一室乾坤을 평화낙원平和樂園 하리라.”, ‘온 우주촌에 세계 가족을 건설하고 평화 낙원을 만들리라.’라는 평생시에 담으신 당신의 원대한 꿈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나서셨다. 성수 24세 때부터 보천교를 비롯한 상제님 신앙 단체들이 모두 망한 가운데 혈혈단신으로 전 국민을 상대로 포교의 문을 여셨다. 이로써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어릴 적부터 꿈꾸어 오시던 상제님 천지 사업을 드디어 시작하셨다.

상제님과 태모님의 종통 대권을 계승하신 태상종도사님은 먼저 제1변 도운 때 신앙하던 신도들을 규합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다니셨다. 그때 박공우 성도의 제자 송종수宋宗守를 만났는데, 당시 의통인패醫統印牌를 준비하고 있던 그는 태상종도사님의 옥골풍채의 풍모와 대인의 인품에 감화되어, 대도 사업을 함께 하기를 간청하였다.

이 무렵 태상종도사님은 상제님과 태모님의 행적을 편찬한 공덕이 있는 이상호를 만나고 정읍 대흥리에 남아 있던 보천교 교당에서 상제님 대도 사업을 시작하셨다. 하지만 이른바 ‘보천교 혁신운동’으로 보천교에 큰 해를 입힌 이상호와 옛 보천교 신도들 사이의 불협화음 때문에 1년 만에 조직이 흩어졌다.

이후 태상종도사님은 개인 재산을 털어 김제 용화동에 있던 구舊 옥성 광산 사무실을 매입하여 도운 중창의 새 역사를 개척하셨다. 상제님 도운의 씨가 처음 뿌려진 정읍 대흥리에서 포교를 시작하시고, 수부님께서 ‘용봉기를 꽂고 사람을 잘 맞이하라.’ 하신 용화동에서 제2변 도운의 역사를 새롭게 개창하신 것이다. 이때부터 마치 구름이 일듯 교세가 크게 일어나고, 도운을 크게 부흥시킨 총사수總師首요 실질적인 도의 뿌리이며 연원淵源이신 태상종도사님은 교명을 ‘증산교甑山敎’라 정하셨다.

●상제님 진리의 진액, 우주 1년 도표

당시 포교 방법은 태을주 수행으로 개안開眼을 시켜 신도 세계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대중의 진리 의식을 열어 줄 수 없었다. 이에 태상종도사님은 해방 다음 해인 병술(1946)년에 상제님 진리의 큰 틀을 누구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우주 1년 도표’를 그리시어 인류 역사에 처음으로 공포하셨다. 이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상제님 가르침의 진액을 뽑아 정리한 도표로 우리가 상제님 진리를 처음 만날 때 듣게 되는 내용 중 하나이다. 여기에는 인간 농사를 짓는 우주 1년 사계절의 변화와 이를 주재하는 상제님의 지상 강세, 그리고 가을철 통일 문명의 도래 소식을 담고 있다. 이는 동방의 우주 사상과 인류 문명사에 대한 깨달음의 총결론이며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실로 놀랍고도 명쾌한 가르침이다.

2)‘독행천리 백절불굴’의 태상종도사님그러나 해방 이후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정부 당국은 증산교 활동을 공산주의 활동으로 의심하였다. 이런 사상적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정부 당국까지 홀로 상대하시며 모든 난관을 극복하신 태상종도사님은 독행천리獨行千里 백절불굴百折不屈, ‘혼자 천 리를 가는데 백 번 넘어져도 굽히지 않고 가고 또 가는’ 정신으로 금일에 충청도, 명일에는 경상도로 다니시면서 포교 사업에 혈성을 다 바치셨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과 금력을 멀리하고 불고가사不顧家事하시며 쌓아 올린 전도傳道의 금자탑은 남북 상씨름의 서곡인 한국전쟁이라는 벽에 부딪혀 크게 흔들렸다. 여기에 교권에 대한 야심이 가득했던 이상호는 ‘금산金山(모악산의 옛 이름)을 얻기가 어렵다.’라는 말씀과 ‘용화동이 상제님의 기지基址(이 말씀은 도성덕립이 된 후에 비로소 성취된다)’라는 상제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용화동으로 신도들을 집단 이주시키고자 했다. 태상종도사님께서 “내가 판을 일군 사람으로서 신도들 고생시키는 일은 할 수 없다.”라고 하시며 만류하였으나, 이상호가 주장을 굽히지 않아 큰 갈등이 빚어지고 교세도 위축되었다. 결국 한국전쟁 발발이라는 외부 요인과 이런 내부 문제가 맞물려 제2변 초기 추수 도운은 일단락 짓게 되었다.

3) 추수 도운의 마무리 판을 준비하는 20년 휴계기休契期국운과 그 흥망을 함께 한 초기 추수판 도운은 3년간의 한국전쟁 끝에 완전히 문을 닫고 20년(1954~1973) 대휴계기로 접어들었다. 상제님께서는 이런 휴계기의 도래를 말도末島 도수(도전道典 6:22)로 처결하신 바 있다.

말도는 전북 군산시 고군산열도 선유도 인근 서쪽 끝에 있어 끝섬이라고도 불리지만, 그 형상이 말[馬]이 꼬리를 치켜든 형국이라 하여 말도라 불린다. 상제님이 외딴 섬 말도로 들어가시어 20일 동안 온갖 고생을 다 치르고 나오신 공사에 따라, 태상종도사님은 초기 추수판 도운을 문 닫고 20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시며 은둔하셨다. 마치 정배定配를 당하신 것처럼 초야에 묻혀 자식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셨다.

1태극 대두목을 상징하는 지지地支의 ‘술戌’ 자리에는 일정한 처소를 정해 귀양 간다는 ‘정배定配’의 뜻이 있다. ‘술’은 모든 생명 활동을 마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들어앉아 있는 이름 없는 서북방 구석 자리이다. 이처럼 태상종도사님께서 말도 도수를 받으신 것은 전쟁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온 국민이 먹고살아 갈 수 있는 경제 재건의 시간이 필요했던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태극의 술戌이 지닌 이런 천지 변화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

●역사의 준비 기간, 20년 휴계기
이 20년이라는 기간은 상제님 도정의 새 시대를 열어, 추수 도운을 마무리 지을 새로운 인물을 낳고 기르는 준비의 시간이었다. 태상종도사님은 “갑을甲乙로서 머리를 들 것이요, 무기戊己로서 굽이치리니”(도전道典 6:109:6)라는 상제님 말씀을 좌우명으로 써 붙여 놓고 때를 기다리시다가 드디어 갑인(1974), 을묘(1975)년을 맞이해서 갑오생 아들과 함께 상제님 사업의 포문을 다시 여셨다.

태상종도사님은 갑오생 아들과 함께 먼저 용화동 신도들을 다시 찾았으나, 그들은 태상종도사님으로부터 직접 도를 받았음에도 삿된 욕망에 사로잡혀 도리어 스승 노릇을 하려는 불의와 배은망덕을 저질렀다. 그들과 새로운 역사를 열 수 없음을 확인하신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용화동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새 판을 여시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상제님의 말도 공사에 의해 전개된 20년 대휴계기는 태상종도사님께서 당신의 분신이자 수화水火 일체의 관계로 도정의 새 시대를 열어 갈 지도자를 길러 내고, 도정의 사령탑을 새로운 곳으로 옮기기 위한 역사의 준비 기간이었던 것이다.

2. 상제님과 수부님의 뜻을 성취하는 대두목


상제님께서는 어천 당시 상제님 대업을 이룰 ‘두 사람’이 나와서 당신의 천지 대업을 마무리 짓는다고 말씀하셨다(도전道典 10:27). 이 ‘두 사람’은 상제님과 태모님을 계승하여 그 뜻을 도운道運의 인사人事로 펼칠, 진리의 눈을 상징하는 일월日月의 지도자, 즉 태극太極과 황극皇極의 지도자를 말한다.

상제님은 가을 천지 대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고 후천 선경을 건설한 인사의 지도자를 ‘대두목大頭目’이라고도 하셨는데, ‘대두목’은 큰 대大, 머리 두頭, 눈 목目 자로, 글자 그대로 가장 큰 지혜와 안목眼目을 가진 상제님 진리의 우두머리이며 상제님 대도 진리를 세상에 밝히는 최고 지도자(The Supreme Leader)를 말한다.

이 대두목이 맡은 역할과 사명은 이러하다.
첫째, 상제님과 수부님의 인사 대권자로서 두 분을 대행하여 당신의 뜻과 이상을 펼치고 집행한다.
둘째, 상제님 진리를 밝혀 진법을 드러내고 천지대업을 이루는 일꾼을 길러낸다.
셋째, 인류를 구원할 의통을 준비하고 가을 대개벽 상황에서 의통성업醫統聖業을 집행한다.
넷째, 후천 선경의 주역들에게 도통을 내려주는, 종통 도맥의 주인공이다.

건곤 천지이신 증산 상제님과 고 수부님께서는 감리坎離 일월日月의 역할을 하는 음양일체의 두 인물이 나와서 태극과 황극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천지공사를 집행하셨다.

1) 십일성도하는 1태극 대두목우리는 앞서 『증산도의 진리』 제4장(천지개벽과 역수의 변화)에서 10무극과 1 태극이 결합하여 우주 창조의 이상과 세계 역사를 완성하는 십일성도十一成道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사의 주재자인 1태극 대두목은 상제님과 수부님이 짜 놓으신 설계도(도수)에 따라 현실 역사 속에 후천 선경을 건설할 바탕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7화火의 황극 대두목이 상제님 무극대도의 이상을 실현하게 된다. 이것이 십일성도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2) 후천 통일을 성취하는 5(五,午)황극 대두목우주 생명이 생장 분열하는 선천의 전체 과정을 매개하여 현실 속에 무극과 태극의 이상을 온전히 드러내는 주체가 바로 황극皇極이다. 황극 지도자는 10무극 상제님과 1태극 대두목의 이상을 역사 속에 실현하게 해서 후천 5만 년 광명의 선경 세상을 여는 주인공이다.

이 인물을 1태극 대두목이 길러 내고 지켜 주게 되는데, 그 이치는 황극[火]이 태극[水]을 근본으로 하여 나와서(水生火) 태극의 대업을 인사로 성취하기 때문이다. 선천과 후천의 세상 중심에는 황극이 작용하고, 황극으로 작용하는 지지地支는 7오화午火이며 말[馬]로 상징이 된다. 예로부터 동방 배달의 신교神敎에서는 북두칠성을 하느님이 타는 하늘의 수레(제거帝車)라 불렀다. 말(午)이 수레를 끌고 가는 것과 같이 7오화午火(七火, 七星) 기운을 지니고 오는 진리 주인공이 상제님 대도 문명을 여는 조화 광명의 수레를 이끌고 간다. 이로써 세계가 구원받고 온 세상이 상제님의 한마음(일심一心)으로 통일되어 인류는 후천 선경 낙원의 조화 문명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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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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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적 인간, 인간 꽃 어트겅자르갈 증산도 태전보문도장 입도



“사람을 살리려고 그런다.”라며 웃는 회사 동료의 눈빛은 진심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실제로 실천하며 남을 위해 사는지, 눈앞에 보이는 그들이 점점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보면 볼수록 예쁜 인간 꽃이 진정 그들이었습니다.



어트겅자르갈(여, 46세) / 태전보문도장 / 도기 153년 음력 5월 입도

종교에 대한 불확실성


1990년 봄 몽골에서 민주화 바람이 일어나 사회가 크게 흔들렸던 시절 저는 열두 살의 소녀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몽골 사회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들이 생겨났습니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계획경제 제도를 채택했던 몽골은 이때부터 엄청난 혼란을 겪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린 열두 살의 저한테는 마트 진열대에 소금 외에 아무것도 없었던 현상이 제일 강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거리에는 승복을 입은 사람들이 종종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저의 외할아버지도 승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언제부터 중이었는지 그때 왜 승복을 입었는지, 원래부터 입었는지도 저는 잘 모릅니다. 그저 중이 된 할아버지 집에 가면 할아버지는 종일 불경을 외우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약을 지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전에 친할머니가 아침에 끓인 차를 떠서 집에 있는 신단 같은 곳에 올려놓는 것을 본 것이 전부였던 저에게는 종교의 얼굴을 처음 본 경험이었습니다.

나중에 어른이 된 후에도 제가 처음 보던 그 종교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중이 아니면 불경을 볼 일도 없습니다. 그저 일이 생기거나 필요하면 절에 가서 돈 내고 중에게 불경을 외우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절에서 가져온 향을 피우거나 청수로 세수를 하는 것이 몽골인들의 대표적인 종교 예식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러한 환경을 보고 자라서 종교에 대한 큰 인식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돌아가시기 직전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종교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세상 종교들은 그저 서로를 부인하고, 필요하면 전쟁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는 괴물들 같았습니다. 그들의 말은 인류 평화를 외치지만 행동은 인류를 갈라놓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종교는 저에게 매력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신비함으로 가득 찬 곳


하지만 그런 저한테도 신관은 있었습니다. 즉 신神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자연과 주변의 모든 것이 신기해도 너무 신기했기 때문입니다. 절대 저절로 생겨나고 물리학적인 변화에만 의지해 생긴 것으로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나만의 신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숨을 불어넣어 준 그 진짜 주인공은 나의 신이었습니다. 세상 종교는 다 헷갈려서 그 주인공의 이름을 다양하게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가끔 그 신을 향해 기도도 했습니다.

2013년 셋째 언니가 또 정신을 잃고 병원에 옮겨졌습니다. 이번에는 심장 멈춤도 있었고 증상이 심각하다는 의사의 말은 가족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날 큰언니가 이상한 말을 꺼냈습니다. 셋째 언니가 신을 내려 받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숨을 이어 가기가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들었다고 했습니다. 식구들이 신을 받을까 말까 이야기하는 중에 저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학교 앞에서 그러고 있는 식구들을 친구들하고 비웃다가 일을 당할 뻔했습니다. 갑자기 미끄러져 오는 차 밑으로 다리가 쑥 들어가 버렸습니다. 다행히 차가 멈춰 무사히 지나갔지만 말을 잘못해 벌을 받는가 싶었습니다. 이를 식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이후 언니의 신 받음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저 또한 적극 지원했습니다. 신을 받은 언니가 진짜인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영혼에 대해, 귀신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신을 받은 언니를 체험하면서 신명의 세계가 한없이 궁금해졌습니다. 서서히 사후 세계를 믿게 되었고 귀신의 존재도 믿게 되었습니다.

나의 신관이 깨지면서


2014년 8월 8일 출근하는 남편을 보내고 오전 일과를 보는 중 셋째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버지가 더 이상 볼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부터 원망을 했습니다. 전날 밤 왠지 모르게 아버지한테 너무 가고 싶어 남편에게 빨리 와 달라고 했는데 동료를 바래다주고 오는 바람에 다음 날로 미룬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지도 못하고 보내 하늘이 멀고 땅이 단단했습니다.

그때 저는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습니다. 충격으로 양수가 터지고 병원으로 옮겨져 미숙아를 안은 탓에 병원에서 정신없이 지내는 사이 식구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 마지막 모습도 못 보고 보내 드렸습니다. 이렇게 남편이 아빠가 된 날 저는 아버지를 영원히 잃었습니다. 뵙지 못해서 그런지 아버지는 어딘가 있을 것만 같아 찾아다녔습니다. 아버지 집에도 갔고 언니 집에도 갔습니다. 아버지가 오르던 산을 오르고 거리를 걸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잘 보이는데 아버지만 안 보였습니다.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수행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2016년에 둘째를 낳고 석사 과정을 공부할 좋은 기회가 생겨 한국에 왔습니다. 석사 공부를 하면서 저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신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세계주의이며 온 인류가 한 덩어리로 평화롭기만 했으면 하는 마음이 그러한 세계주의로부터 나온 생각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신념관을 가진 종교들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증산도는 알지도 못했습니다. 일상도 바쁘고 깊은 관심은 두지 않았습니다.

상제님 진리를 향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난 과정은 아마도 상제님의 진리를 만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종교에 매력을 잃은 것, 저만의 진짜 신을 믿었던 것, 명색이 종교라면 지구 인류를 갈라놓으면 안 된다는 굳은 생각,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싸움 없이 한 공동체로 잘 지내기를 바라는 세계주의, 신명 세계에 대한 큰 관심, 수행에 대한 관심, 이 모든 것이 상제님께서 남기신 길을 제가 함께 걸어갈 준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생각이 2020년 상생문화연구소에 입사하고 나서 더 굳어져 갔던 것 같습니다. 입사하기 전에 상생문화연구소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유튜브 영상에서 수행하는 장면이 나와 더욱 좋았습니다. 입사하고 나면 이 사람들하고 수행한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입도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입사하고 나서도 수행은 하고 싶은데 입도와 연결될 우려가 있어 갈피를 못 잡고 많이 헤맸습니다.

그런 와중에 연구소에 수행방이 열려 수행할 좋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수행을 시작하고 얼마 후 제사상 같은 것이 보이는 한편 저도 모르게 입에서 제사라는 말이 불쑥 나왔습니다. 잠깐 졸았나 싶어 신경 안 쓰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생각나 찜찜해서 제사를 올렸습니다.

이후 신도 체험 등은 크게 없었지만 수행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를 심신의 상태를 통해 많이 느꼈습니다. 수행을 지속적으로 하면 확실히 덜 피곤하고 심리적으로도 긍정적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수행을 통해 좋은 결과를 얻고 싶은 욕심도 생기고 수행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시간이 흘러갈수록 제 마음은 생각과 다르게 움직였습니다. 『도전道典』 속 내용도 제가 기존에 가졌던 신관과 똑같고 신명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신비로웠습니다. 저에게 연구소는 마치 동화 속 신비의 나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과 함께


그런데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연구소에 있는 봉직자분들을 보면 처음에는 신기했다가 나중에는 존경스러웠습니다. 최의철 실장님, 김동영 부장님 등 여러 봉직자분들과 이사장님께 평생 은혜로 생각해도 넘침이 없을 정도로 감사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점심 먹으러 나가다가 회사 문 앞에서 양섭용 차장님이 “사람을 살리려고 그런다.”라며 웃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하며 남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어떻게 버리고 살 수 있는지, 눈앞에서 보이는 그들이 점점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보면 볼수록 예쁜 인간꽃이 진정 그들이었습니다.

점점 제 마음의 물은 자꾸 생각과는 달리 거꾸로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이어 가기 위해서라도 입도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인간 꽃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수행을 인도해 주신 최의철 실장님께 입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남편한테 말했습니다. 남편이 하는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정리되었습니다.

“당신은 그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뺏긴 거야.”

마음의 물이 흐르는 대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신비한 나라의 매력적이고 착한 백성들과 그 멋진 활동은 따라 하지 못해도 흉내라도 내며 늘 응원하고 정성 신앙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전 세계가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상제님과 태모님, 그것을 이어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는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 사모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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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헤매던 진리, 증산도 외 (고OO, 김OO, 김OO)

 
[입도수기]

 

 

“신기한 것이 뭐냐면, 다른 곳은 방문해도 그저 그런 느낌이었는데, 도장에서는 청수를 모시는 것이나 수행을 하는 것이 낯설지 않고 자꾸 오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점이었습니다.”



고OO(여, 66) / 안양만안도장 / 도기 153년 음력 4월 입도

치유의 삶이 있는 동방신선학교에 가다


저는 인천에서 2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공부를 좋아했고 어려서부터 하나를 들으면 기억을 잘했고 특히 핵심을 잘 정리하였습니다. 친구들에게도 부기를 쉽게 가르쳐 주며 가르치는 것에 소질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집안이 어렵다 보니 동생들 공부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찍부터 사회에 나가 직장을 잡고 일을 하였습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였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평소에 불의함을 보면 참지 못하며 대응하였고, 부당한 대우나 차별을 하는 윗사람들을 보면 용납하지 않고 단호히 지적하며 맞섰습니다.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고 올바르게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 강하게 비치기도 하였습니다. 저의 이러한 신념과 태도 때문에 제가 직접 하는 일이나 맡은 일은 항상 똑 부러지고 완벽하게 처리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제 삶에 대한 허전함을 채울 무언가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불교 신앙과 기독교 신앙을 해 보았고 무속인도 찾아보았으나 그 무엇도 저를 채워 주지 못하였고,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진리와 부합되지 않는 부당함에 분노하며 또다시 갈급증을 갖고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랑하는 딸이 원광대에 진학하였고 혼자 몰래 증산도에 입도하여 신앙하고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딸, 아들이 함께 운영하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중 딸은 증산도 태을궁에서 행사를 하니 꼭 같이 참여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딸의 간절한 권유에 참여를 해 보았고 불교 신앙을 40여 년 이상 하였기에 그때까진 크게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수년이 흐르고 학원 생활의 일상에 지쳐 주말이면 피로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고 집에서 쉬는 것이 유일한 휴식이었던 저에게 딸은 혼자 할 수 있는 치유 수행법이 있다며 유튜브 시청을 권하였습니다. 동방신선학교에서 치유 수행법을 누구나 쉽게 따라 해 보도록 알려 주는 영상이었습니다. 살펴보니 체험 사례도 놀랍고 해서 건강을 위해 관심을 갖고 따라 해 보았습니다. 집인 안양에서 인천 학원까지 한 시간 이상이 걸리는 출퇴근 시간에 주문 수행도 하고 조화광채 치유 수행의 전 과정을 다 따라 해 보았습니다. 점차 몸이 가벼워지고 종도사님의 말씀이 가슴에 조금씩 와닿아 점점 마음이 열렸고 언젠가는 증산도에 입도할 것이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올수록 정이 드는 곳, 도장


2022년 12월 25일 증산도 안양만안도장에서 선려화를 전수받을 수 있다고 하여, 딸과 함께 도장에 참여하여 전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인천 송도 선려화 전수식과 서울 조화선 명상포럼에 참여하며 일이 없는 토요일에 본격적인 교육을 받고 수행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증산도 안양 만안도장의 송영대 수호사님은 매주 토요일마다 알기 쉽게 교육을 해 주셨고 단단한 믿음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과 더욱더 돈독하게 지내고 싶었기에 입도를 결심하였습니다. 신기한 것이 뭐냐면, 다른 곳은 방문해도 그저 그런 느낌이었는데, 도장에서는 청수를 모시는 것이나 수행을 하는 것이 낯설지가 않고 자꾸 오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점이었습니다.

상제님이 인간으로 오신 참 하느님이심을 인식하고 진리를 알면 알수록 내가 그토록 갈급증을 갖고 찾아 헤매던 참진리가 증산도구나 하는 걸 느낍니다. 드디어 진리를 제대로 만났다는 점에 감사를 드리고, 증산도를 알게 해 준 사랑하는 딸(신연옥 도생)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저와 같이 진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려화를 심어 주고 상생방송도 소개하며 상제님 진리를 전하겠습니다. 더 열심히 봉사하고 참여하며 보은하겠습니다.


마고 대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의 신선꽃



“찾아가는 동방신선학교에 참여한 그날 저녁 꿈에 황금 같은 커다란 빛이 나는 존재가 나타났는데, 제가 아픈 옆구리에 빛을 비춰 달라고 했더니 바로 빨간 꽃, 파란 꽃이 제 앞에 있었습니다.”


김OO(여, 62) / 구미원평도장 / 도기 153년 음력 4월 입도

남편과 아들의 건강을 찾았어요


저는 김천시 농소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위로 오빠 두 명, 언니 한 명이 있습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김천시 남면에서 다녔으며 이후에도 김천과 구미에서 쭉 살아왔습니다. 지금은 구미 원남동에서 남편 그리고 2남 1녀의 자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증산도를 만난 것은 신기한 체험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친구 옆에 있었던 김련순 부포감님이 저의 시아버지가 누군가에게 후손을 살려 달라고 비는 모습을 영안으로 봤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하고 있었던 그 시간에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크게 다칠 뻔했는데 조상님의 기도 덕분인지 많이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남편이 비교적 무사한 것에 대해 조상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저의 시아버지를 보았다는 김련순 부포감님이 궁금하여 남편과 친구 세 명이 함께 그분이 신앙한다는 증산도 도장에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진중한 상담 끝에 정성 수행을 하기로 날짜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병원에서 검사를 받다가 몸속에 담석이 있는 것이 발견되어 바로 일정을 잡아 수술을 하였습니다. 저는 수술실에 들어간 남편이 걱정되어 김련순 부포감님께 기도를 부탁했고, 저도 함께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수술은 잘되었고, 회복도 빨랐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편은 죽을 뻔한 일이 잘 풀려서 조상님께 감사하고 있었고, 기도를 하러 도장에 간다고 해도 별말 없이 지지를 해 주었으며 청수를 모신 복록수도 항상 마시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7일 동안 정성 공부를 하기로 했었는데, 막내아들인 동수도 제가 권해서 도장에 나오게 된 터라 같이 21일 정성 수행을 하였습니다. 동수는 태어났을 때부터 눈이 안 좋아서 백내장 수술과 사시 수술을 하였습니다. 안압도 높아서 28까지 올라갔는데 수행을 하니까 안압이 지금은 21로 떨어졌습니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안압이 더 높아지면 실명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수행을 한 덕분인지 떨어지기 어렵다는 그 안압이 21까지 떨어진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와 마냥 감사하기만 했습니다.

마고 대성모님께 받은 흰 꽃으로 치유하다


증산도에 오기 전에 꿈을 꿨는데 큰 산이 다 무너지고 사람들이 날아오는 돌에 맞아서 다 쓰러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동수의 옛날 모습인 다섯 살 정도의 아이와 같이 그 현장에 있었는데 저와 동수는 돌에 맞지 않고 무사했습니다. 그것이 개벽 꿈이라는 것을 나중에 8관법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찾아가는 동방신선학교에 아들과 두 번 참여하였는데, 첫 번째 참여한 그날 저녁 꿈에 황금 같은 커다란 빛이 나는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제가 그 빛을 보면서 옆구리가 아프니 그곳에 빛을 비춰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빨간 꽃, 파란 꽃이 제 앞에 있었습니다. 커다란 빛이 나는 존재는 마고 할머니가 주신 흰 꽃이고 빨간 꽃과 파란 꽃은 궁희 마마와 소희 마마님이 주신 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요즘은 집에서 아침저녁으로 청수를 모시고 수행을 하는데 집에서 수행할 때나 도장에서 수행할 때나 항상 몸에서 열이 납니다. 그리고 손이 저도 모르게 저절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기가 통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좋은 현상인 것 같습니다. 저는 몸이 여기저기 아픈데 기가 통하는 것을 보니 곧 건강해질 것 같은 희망이 생깁니다. 가족들도 다 건강해지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김련순 부포감님을 통해 상제님 진리를 만나게 되어 정말 감사하고 교육을 해 주신 수호사님, 포감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조상님께 보은하는 마음과 자손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항상 상제님 신앙을 일심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보은!


조상님의 고향은 증산도



“저는 병마에 시달려 예전의 밝은 모습이 사라지고 웃을 줄 모르는 사람으로까지 비쳐졌지만, 도장에서 수행을 하면서 건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에 어두웠던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도 편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김OO(여, 62) / 안산상록수도장 / 도기 153년 음력 4월 입도

투병 중 만난 친구가 인도한 증산도 진리


저는 중국 연변에서 태어나 살다가 2009년에 한국으로 왔습니다. 중국에서는 석유, 지유, 가스, 기름을 생산하는 직원이 1,000명이 넘는 큰 공장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2006년에 공장 경영이 어려워져 500명을 감축하였는데, 마침 저의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아 감축 인원에 포함되고 말았습니다. 공장에서 나온 이후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 중국 남방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언니가 한국으로 가서 취직을 할 수 있는 비자를 받는 시험이 있으니 연변으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연변에 돌아와서 비자 시험을 신청하였으나 누락이 되어 세 번째 만에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40일 뒤에 합격하였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한국에 갈 수 있다는 통지가 왔고 어느 날까지는 여권과 비자가 나올 것이라고 하여 비자가 나오기도 전에 예정된 날의 다음 날로 항공권을 예약하였고 드디어 5월 31일 한국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조상님들의 고향으로, 나의 고향으로 온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생활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스트레스로 불면증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2018년 1월에 중국에 가서 건강 검진을 했는데 뇌경색 판정을 받았습니다. 작년에 3차 코로나 백신을 맞고 난 후에는 손이 갑자기 떨려 아산충무병원에서 CT를 찍었는데 큰 병원으로 가 보라고 했습니다. 순천향대학교 병원에서 MRI를 촬영해 보니 파킨슨병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파킨슨병이 어떤 병인지를 인터넷과 TV를 통해 알아보았더니 병이 악화되면 근육이 굳어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열심히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창생인 허옥자 포감이 잘 지내고 있냐며 안부 전화를 해 왔습니다. 아파서 병원에 다니고 있고 파킨슨병이라고 했더니 친구가 운동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자신이 하는 마사지를 받으러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미안해서 안 갔는데 살려면 당장 오라고 해서 친구 집에 찾아갔습니다. 그다음에 갔을 때는 친구가 자기가 다니는 증산도만이 너를 살릴 수 있다며 그곳 건물 4층에 올라가 보라고 해서 그날부터 증산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친구가 집에 증산도 STB 상생방송이 나오는지 보라고 해서 채널 확인 후 방송 시청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병마를 이겨 내게 해 준 신선 공부


저는 시간이 날 때면 동방신선학교 수행을 따라 하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도생들이 수행한 체험을 소개할 때 처음에는 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방송을 보면서 한 달 정도 수행을 따라 했습니다. 16년 전부터 비염이 있어 점점 심해지더니 코가 꽉 막혀 숨을 쉬기도 힘들었는데 며칠 전부터는 숨쉬기가 편해지고 비염 증상이 호전되었습니다.

저는 증산도 수행을 하면서 언니에게도 상생방송 동방신선학교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라고 전화로 권유하였습니다. 또 조카가 건강이 좋지 않아 진리를 소개하려고 『증산도 기본 교리』 책을 선물하였으며, 조카가 잠을 못 잔다고 해서 잠자기 전에 누워서 시천주주, 태을주 주문을 읽으라고 알려 주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증산도를 100% 믿고 입도하여 진리 공부와 수행을 할 것입니다. 입도하고 수행도 열심히 하여 제 몸의 질병을 깨끗이 치료하고 건강한 몸이 되어 예전의 웃는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친구에게 마사지를 받으러 가면 친구는 병마에 시달려 예전의 웃던 모습이 사라지고 우울한 모습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친구에게 마사지를 받으러 오는 손님들도 웃을 줄 모르는 사람 같다고 할 정도로 표정이 굳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장에서 수행을 하면서 건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에 어두웠던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도 편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얼굴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앞으로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저처럼 건강해질 수 있도록 증산도를 많이 전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수행과 공부도 열심히 하여 증산도 진리를 더 깊이 알고 병도 치료하여 건강한 몸으로 일도 다시 하고 싶습니다.

상제님, 태모님, 태상종도사님, 종도사님, 조상님 감사합니다. 끝으로 동창생인 허옥자 포감은 저를 하루빨리 병마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마사지를 하며 치료도 해 주고 쌀 조청까지 달여 먹이며 지극정성으로 챙겨 주고 있습니다. 또한 도장으로 인도해서 증산도 진리를 공부하고 수행을 할 수 있게 해 주어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보은!


© 월간개벽 7월호.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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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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