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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6)고구려의 선인도랑仙人徒郞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소도의 변천사 5️⃣

 

🔍고구려의 선인도랑仙人徒郞(참전參佺과 조의皂衣)

 

단군조선이 말기에 접어들자 중앙집권 세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한다. 그러자 지방 세력들이 새롭게 일어나면서 열국시대列國時代가 전개되는데, 이것이 일명 부여시대夫餘時代이다. 부여에서 신교에 뿌리를 둔 낭가의 맥은 ‘천왕랑天王郞’으로 이어졌지만, 지역에 따라 세속적인 습속과 융합하면서 다소 변전하게 된다. 고구려가 건국되자 낭가의 맥은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이어진다.

 

‘선인도랑’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선인의 도를 닦는 랑郞’이란 뜻이다. 이 말은 고구려의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임 시기에 최고의 재상이었던 을파소乙巴素가 처음으로 썼다.

“을파소가 국상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선발하여 선인도랑으로 삼았다. 교화에 능숙한 자는 참전이라고 하는데, 무리 중에 계를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에 능숙한 자는 조의라 하는데, 지조를 겸하고 계율을 이루어 공익을 위해 앞장서서 나아갔다

 

[乙巴素爲國相 選年少英俊 爲仙人徒郞 掌敎化者曰參佺 衆選守戒 爲神顧托 掌武藝者曰皂衣 兼操成律 爲公挺身也]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어린 영재들로 구성된 고구려의 ‘선인도랑’은 국가에서 인재를 기르는 수행단체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참전參佺’이 되어 ‘계戒’를 잘 고수하고, 지정의知情意를 조화롭게 구비한 선인仙人으로 신교의 진리를 잘 받들고 교화하는 일에 종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일부는 ‘조의’가 되어 참전의 계율을 굳건하게 숭상하면서 무예를 연마하고, 비상시非常時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솔선수범하여 몸을 받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낭가의 맥을 이은 고구려의 ‘선인도랑’은 곧 ‘참전’과 ‘조의’로 실현된다.

 

📑‘참전’의 사명은 무엇인가?

‘참전’이란 말은 제천에서 삼신을 모시고 그 공덕을 기리는 것에서 연유한다.

“신시개천 이래로 매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나라에 큰 축제를 열어 삼신의 덕을 기리고 화합을 제창했다. 어아를 음악으로 삼고 감사를 근본으로 하여 신과 인간을 조화하니 사방에서 이를 본받았다. 이것이 참전계가 되었다

 

[神市以來 每當祭天 國中大會 齊唱讚德諧和 於阿爲樂 感謝爲本 神人以和 四方爲式 是爲參佺戒]”

(『단군세기』).

 

다시 말해서 ‘참전’은 삼신三神의 진리를 깨달아 공덕을 기리고 찬양하는 제천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찬양하는 노래는 ‘어아於阿’이다.

 

‘어아’는 신시神市의 옛 풍속으로 

“태양을 삼신의 모습으로 여기고, 태양의 빛과 열기를 삼신의 공능으로 여기며, 만물이 생겨나 자라고 발전해 가는 모습을 삼신의 심정과 의지로 삼고, 재앙과 행복을 보응하는 것으로써 삼신을 정의한다

 

[以太陽爲儀象 以光熱爲功能 以生化發展爲情志 以禍福報應 爲定義]

(『소도경전본훈』)

 

‘참전계’는 ‘참전이 꼭 지켜야할 계戒’를 말한다. 즉 ‘참전’이란 지智·덕德·체體의 삼육三育을 겸전한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삼신을 모신다는 의미이이고, ‘참전계參佺戒’는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연마하고 지켜야 하는 계율이란 뜻이다. 사실 참전은 이미 배달국의 환웅천황 때부터 있어서 삼신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왔다. 이로부터 고구려 고국천왕 때 재상을 지낸 을파소는 ‘참전계’를 다듬어서 경전으로 집대성하였는데, 「참전계경」이 그것이다. 속설俗說에 「참전계경」은 을파소가 백운산白雲山에서 기도하여 얻은 천서天書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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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은 ‘성誠·신信·애愛·제濟·화禍·복福·응報·보應’의 8강령八綱領, 366가지의 절節과 목目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지켜야할 도덕과 윤리규범이 중심이다.

“‘’은 충심에서 일어나는 것을 혈성으로 지키는 것으로 6체體 47용用의 가르침이고,

’은 천리에 필히 부합하는 것을 인간사에서 이루는 것으로 5단團 35부部의 가르침이고,

’는 본연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어진성품의 본 바탕으로 6범範 43위圍의 가르침이고, 

’는 덕을 겸한 선을 도에 의지하여 널리 펼치기 위한 4규規 32모模의 가르침이고,

’는 악을 부르는 것을 경계하는 6조條 42목目의 가르침이고,

’은 선을 행함으로써 돌아오는 남은 경사로 6문門 45호戶의 가르침이고,

’은 천신이 악인을 화로서 보답하고 선인을 복으로 보답하는 것으로 3계階 30급級의 가르침이고,

’는 악이 악으로써 선이 선으로써 보답 받는 것으로 6과果 39형形의 가르침이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그럼 ‘조의皂衣’는 무엇인가?

‘조의’는 글자 그대로 ‘검은 색깔의 옷’을 뜻한다.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을 통상 조의라 불렀는데, 그 기원은 단군왕조檀君王朝 송하강 아사달 시대에서 비롯된다.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에 의거하면, 4세 오사구 단군께서 “언제나 3월이 되면 마한에 명하여 친히 군대를 사열하시고 사냥을 했다. 16일에 기린굴에서 천제를 올릴 때 조의를 하사하고 갓을 씌우는 예식을 행하고, 이어서 가무와 온갖 놀이를 한 후 파했다[每當三月 命馬韓 閱武田獵. 十六日祭天麒麟窟 賜皂衣加冠지례 仍歌舞百戱而罷]”는 기록이 있다.

의관을 갖춘 ‘조의’는 항상 의젓한 상무정신에 입각하여 화살을 차고 활을 갖고 다닌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는 “이때부터 ‘참전’에게 지켜야할 계가 있고, 조의에게 율이 있어 숭상하는 풍속이 이어졌다. 의관을 갖춘 자는 반드시 궁대를 두르고 활과 화살을 차고 다니고, 능숙하게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반드시 높은 지위를 얻었다. 선한 마음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악의 우두머리로 가정하여 생각하게 되었다[自是 俗尙 參佺有戒 皂衣有律 衣冠者 必帶弓矢 能射者 必得高位 善心 爲修行之本 貫革 爲假想之惡魁]”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에 이르자 조의는 단군시대와 마찬가지로 속칭 ‘검은색 비단옷을 입은 집단’을 가리킨다. 조의가 검은색으로 된 옷을 입은 유래는, 배달시대 때에 천황이 ‘천왕랑天王郞’에게 내려준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는 관례에서 태동하고, 오사구 단군이 천제를 올릴 때 하사한 조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조의는 ‘조의선인皂衣仙人’으로도 불린다. 이는 수행자가 ‘조의’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왕王이나 대가大加 곁에서 가신적家臣的 성격을 가진 자들로 ‘충忠·인仁·의義·지智·예禮’를 덕목으로 삼았다.

 

‘조의선인’은 무사武士의 기능을 하는 ‘조의’와 문사文士의 기능을 하는 ‘선인’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의선인’은 심신을 수련하고, 대체로 문무를 겸비하여 삼신의 덕을 실천하여 국가를 수호하는 종교군대의 성격을 가진다. 그들은 평상시에 왕이나 대가 곁에서 섬기고 돕는 일을 하지만, 때로 편대를 나누어 어느 한 집에 모여 삼신의 진리를 익히기 위해 고사古事를 담론하거나 학예을 익히기도 하고, 무예를 숭상하기 때문에 수려한 산천을 찾아 수련하기도 한다.

 

또한 도로 및 하천을 정비하고, 성곽 등을 건설하고 보수함으로써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일신一身으로 기꺼이 봉사한다. 한마디로 조의는 선善한 마음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고, 무예를 숭상하고, 참전의 계율을 굳건하게 지키고, 비상시에는 민족을 위해 솔선수범하여 몸을 던져 희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의선인의 진가는 전쟁과 같은 국가의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드러난다. 왜냐하면 조의선인은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서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가하여 국가를 수호하는 데에 선봉에 나서기 때문이다. 수나라의 양제梁帝가 113여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당시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대군을 모조리 쓸어버린 역사적인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20여만의 조의선인이 참전하여 혁혁한 수훈을 세웠다고 전한다. 또한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도 대군을 물리치고 궤멸시킨 주인공 또한 조의선인의 후예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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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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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2) 국자랑,천지화랑, 경당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 전하는 소도의 용례 2

 

5️⃣ 소도에 설치된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天指花郞

“(13세 흘달단군屹達檀君은) 재위 20년 무술년에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혼인하지 않은 자제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는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불렀다. 국자랑이 밖에서 돌아다닐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를 꽂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천지화랑이라 칭했다.

 

[戊戌二十年 多設蘇塗 植天指花 使未婚子弟 讀書習射 號爲國子郞 國子郞出行 頭揷天指花 故 時人稱爲天指花郞]”

(『단군세기』)

 

11세 도해단군에 이어 13세 흘달단군 시대에 이르러서 ‘소도 문화’는 절정의 국면에 다다른다. 그 특징을 요약하자면 다음 네 관점이 핵심이다.

✔첫째, 소도는 단군의 명령으로 나라 여러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소도 문화가 지역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 변질되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둘째, 소도 주변에는 단목檀木 대신에 천지화天指花를 많이 심었다는 사실이다. 소도에 머무는 미혼 자제들은 ‘국자랑’, 혹은 머리에 천지화를 꽂고 다녔다는 의미에서 ‘천지화랑’이라 불렸다. 이는 신라시대의 ‘화랑花郞’으로 이어진다.

 

셋째, 소도에 설치된 경당에서는 미혼 자제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가르쳤다. 독서는 전통적으로 소의경전所依經典, 즉 선인仙人 발귀리發貴理가 읊조린 「원방각경」, 환국시대부터 구전되어온 「천부경」과 「삼일신고」, ‘환국5훈’ 등이 중심이다. 후대에 들어오면서 독서는 부여의 ‘삼륜구서三倫九誓’와 고구려의 「참전계경參佺戒經」이 첨가되었다.

 

넷째, ‘국자랑’은 국선國仙 혹은 ‘선랑仙郞’이라 불렸다. 이는 신라시대 ‘화랑花郞’의 모체가 되었다. 국자랑의 전통은 고구려의 조의선인皁衣先人으로 이어지고, 백제의 무절武節이나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나타난다.

 

“(24세 연나단군延那檀君) 재위 2년 신축 년에 여러 왕(칸汗)이 연나단군의 조칙을 받들어 소도를 증설하고, 천제를 지냈다. 국가에 큰일이 있거나 재앙이 있으면 곧 소도에서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아 안정시켰다.

 

[辛丑二年 諸汗奉詔 增設蘇塗 祭天. 國家 有大事異災 則輒禱之 定民志于一]”

(『단군세기』)

 

연나단군 때에는 소도가 더욱 더 많이 늘어났다. 국가의 전쟁이나 재앙 등과 같은 중대한 일이 발생하게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소도제천蘇塗祭天이 시행되었다. 이는 소도가 국가의 치세와 백성들의 안정에 중차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소도는 지방의 여러 제후들을 모아 함께 천제를 지냄으로써 국론을 모으는 장소가 되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안정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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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도에 설치된 경당扃堂(교육기관)

“소도가 건립된 곳에는 모두 계율이 있는데, 충ㆍ효ㆍ신ㆍ용ㆍ인이라는 오상五常의 도가 그것이다.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을 세워 미혼 자제로 하여금 유형무형의 모든 것(사물)을 익히게 했는데, 대개 독서ㆍ활쏘기ㆍ말달리기ㆍ예절ㆍ가악ㆍ권박으로 육예의 종류이다. 모든 읍락에는 자체적으로 삼로를 두었는데, 삼로를 삼사라고도 한다. 어진 덕이 있는 자, 재물을 베푸는 자, 사리를 아는 자를 모든 사람이 스승처럼 섬기는 것이 그것이다.

 

[蘇塗之立 皆有戒 忠孝信勇仁五常之道也. 蘇塗之側 必立扃堂 使未婚子弟 講習事物 蓋讀書習射馳馬禮節歌樂拳搏幷劒術六藝之類也. 諸邑落 皆自設三老 三老亦曰三師. 有賢德者 有財施者 有識事者 皆師事之 是也]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소도에서 가르쳐서 깨우쳐야하는 기본 덕목이 있다. 이는 환국시대에서 연유하는데, 신교神敎의 실천덕목으로 불리는 ‘오훈五訓’이 그것이다.

‘오훈’은 다섯 가지의 가르침

✔ ‘정성과 믿음으로 행하여 거짓이 없는 것[성신불위誠信不僞]’

✔ ‘공경하고 근면하여 게으름이 없는 것[경근불태敬謹不怠]’

✔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함을 거역하지 않는 것[효순불위孝順不違]’

✔ ‘청렴하고 의로움을 지켜 음란하지 않는 것[염의불음廉義不淫]’

✔ ‘겸손하고 화평하게 지내어 싸우지 않는 것[겸화불투謙和不鬪]’

 

단군시대에 소도문화가 정점에 이르자 소도에서 교육을 받는 미혼자제들은 마땅히 따르고 실천해야할 계율戒律이 있었다. 그 계율은 ‘오계五戒’ 또는 실천윤리 덕목으로 ‘오상五常’이라고 불린다. 

 

‘오계’ ‘다물오계’라고도 하는데,

‘효로써 어버이를 섬겨야한다는 사친이효事親以孝’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겨야한다는 사군이충事君以忠’

‘믿음으로써 친구를 사귀어야한다는 교우이신交友以信’

‘전투에 임에서는 결코 물러서지 말아야한다는 임전무퇴臨戰無退’

‘죽이고 살리는 것을 가려서해야 한다는 살생유택殺生有擇’이 그것이다.

 

이는 신라시대의 원광법사圓光法師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알려진 ‘세속오계世俗五戒’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오상은 충성[忠], 효도[孝], 믿음[信], 용맹[勇], 어짊[仁]의 도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사람이 지켜야할 다섯 가지 기본적인 덕목[五常之德], 즉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하는데, 이는 단군시대의 ‘오상의 도’에 근간根幹을 두고 있다.

 

그리고 소도에서는 필수적으로 ‘여섯 가지 기예[육예六藝]’를 가르쳤다. 독서讀書, 활쏘기[습사習射], 말타기[치마馳馬], 예절禮節, 풍류와 노래[가악歌樂], 검술과 씨름[권박拳搏]이 그것이다. 이는 주周나라에서 행해진 여섯 가지 기예[육예六藝], 즉 ‘예학[禮]ㆍ악학[樂]ㆍ활쏘기[射]ㆍ말타기[御] ㆍ서예[書]ㆍ산술[數]’의 근간이 되었다.

 

특이한 것은 각각의 읍락邑落에 백성들의 귀감이 되는 세분의 스승[삼사三師]을 두었다는 것이다. 고려 때에 왕의 고문顧問 역할을 담당하는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는 바로 삼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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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소도에서 단군이 직접 강론한 삼륜구서三倫九誓

“병진년에 삼일신고비를 새겨서 남산에 세우고, 경신년에 벼를 심는 밭을 개간하였다. 기해년에 소도를 세워 삼륜구서의 가르침을 베푸니, 어진정치로 백성을 다스려 이끌어감이 크게 행해졌다.”

 

[丙辰 刻立三一神誥碑於南山. 庚申作稻田. 己亥立蘇塗 施三倫九誓之訓 治化大行]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馬韓世家 上’).

 

기해년은 3세 가륵단군嘉勒檀君 원년이다. 가륵단군은 소도에서 ‘삼륜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베풀었다. ‘삼륜구서’의 가르침은 일찍이 배달 신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단군시대로 전승된 것이다.

 

소도에 설치된 경당에서 단군이 “삼륜구서의 가르침을 강론하게 되자 환국시대의 문명[桓道文明]이 번성하여 국경 밖까지 소문이 나게 되어 중국 하夏나라의 13세 왕 근僅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講三倫九誓之訓 桓道文明之盛 聞于域外 夏主僅 遣使獻方物]”(『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고 한다.

 

‘삼륜’은 무엇인가? 그것은 윤리의 기본 강령[綱]으로

“아버지와 자식은 사랑으로 벼리가 되고[父子愛之綱]”,

“임금과 백성은 예의로 벼리가 되고[君民禮之綱]”,

“스승과 제자는 도리로 벼리가 됨[師徒道之綱]”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윤리규범으로서 ‘삼강三綱’의 근간이 된다. ‘삼강’은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돼야한다는 군위신강君爲臣綱’, ‘아버지는 자식의 벼리가 돼야한다는 부위자강父爲子綱’,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돼야한다는 부위부강夫爲婦綱’이다.

 

‘구서’는 명심해야할 실천윤리규범으로 아홉 가지 경계警戒

“예도를 좇아서 자식은 효도하고 어버이는 자애롭고[孝慈順禮]”,

“어진 마음과 용서로서 친구 간에 화목하고[友睦仁恕]”,

“정성과 근면으로 믿음직하고 착실하고[信實誠勤]”,

“기개와 절도로서 충성과 의리를 가지며[忠義氣節]”,

“삼가와 공손으로 겸손과 사양심을 가지고[遜讓恭謹]”,

“견문과 학식으로 밝은 지혜를 터득하고[明知達見]”,

“무술과 의협심으로 용기 있는 담력을 쌓으며[勇膽武俠]”,

“깨끗하고 맑은 마음으로 청렴과 올곧음을 유지하고[청廉直潔淸]”,

“일반적인 도리에 맞는 정의를 구현하는 것[正義公理]”이다.

 

솔라단군은 소도에 머물면서 예법을 직접 강론하고 신하들과 토의했다. 강의 내용은 소이경전에 있는 실천윤리 규범이 중심이다.

 

예컨대 “(25세 솔나단군率那檀君) 재위 47년 정유년에 임금께서 최상의 소도에서 옛날의 예법을 강론하시다가, 아첨하는 신하와 올곧은 신하로 구분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삼랑 혼운성이 나아가 말하기를, ‘올바른 이치를 굽히지 않고 지키는 자는 올곧은 신하요, 위세가 두려워 뜻을 굽혀 복종하는 자는 아첨하는 신하라고 말했다.” [丁酉四十七年 帝在上蘇塗 講古禮 因問侫臣直臣之分 三郎洪雲性 進大曰 執理不屈者 直臣也 畏威曲從者 侫臣也] (『단군세기』).

 

 

 

8️⃣ 금8조禁八條를 반포하여 소도를 성소聖所로 지정

22세 색불루단군索弗累檀君은 “오월에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여 제도를 고쳤다. 조선은 관경(영토 관할)을 일컫는다. 진조선은 천왕이 직접 다스리는데, 통치영역은 예날 진한의 땅 그대로이다. 정치는 천왕에서 연유하므로 삼한은 모두 하나로 통일되어 천왕의 명령을 받았다. 천왕은 여원흥을 마한왕으로 삼아 막조선을 다스리게 하고, 서우여를 번한 왕으로 삼아 번조선을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이를 총칭하여 단군관경이라 하니 이것이 즉 진국이다. 바로 역사에서 일컫는 단군조선이 이것이다.”

 

[五月 改制三韓爲三朝鮮 朝鮮謂管境也. 辰朝鮮 天王自爲 而地則仍舊辰韓也 政由天王 三韓皆一統就令也. 命黎元興爲馬韓 治莫朝鮮 徐于餘 爲番韓 治番朝鮮 總之 名曰 檀君管境. 是則辰國 史稱檀君朝鮮 是也]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단군조선의 중기에 접어들자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제도화된다. 이는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제도이다. 삼조선은 진조선辰朝鮮, 막조선莫朝鮮, 번조선番朝鮮을 일컫는다. 삼조선은 옛 진한眞韓 땅 그대로이다.

 

진조선은 단군 천황이 직접 다스리고, 막조선과 번조선은 일종의 제후급으로 왕王을 두어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삼한일통三韓一統의 근간이다. 이를 바탕으로 진조선의 색불루단군은 관습법을 넘어서 인류 최초의 성문법이라 불릴 수 있는 ‘금8조禁八條’를 제정하여 삼한의 백성들에게 반포한다. 이는 삼한의 백성들이 모두 평등하고, 질서 잡힌 사회를 구현하여 화평한 삶을 구현하도록 하는 법규이다.

 

색불루단군 “4년 기해년에 진조선이 천왕의 칙문을 전했다. 그 칙문에서 말하기를 ‘너희 삼한은 위로 천신을 받들고 뭇 사람들과 친하게 사귀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예절과 의리, 밭농사와 누에치기, 길쌈, 활쏘기, 자전으로써 백성들을 가르치고, 백성들에게 ‘금8조禁八條’를 제정했다

 

[四年己亥 眞朝鮮 以天王敕文 傳曰 爾三韓 上奉天神 接化羣生. 自是 敎民 以禮義田蠶織作弓矢字書 爲民設禁八條]”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금8조’ 중에 소도를 훼손한 자는 금고형禁錮刑이라는 엄벌에 처한다는 법규가 들어 있다. “백성을 위해 금8조를 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살인한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하고, 도둑질한 자 중에서 남자는 거두어서 집의 남자종으로, 여자는 여자종으로 삼는다. 소도를 훼손한 자는 금고형에 처하고,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역시키고, 게으른 자는 부역에 동원하고, 사악하고 음란한 자는 태형으로 다스리고, 남을 속인 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

 

[爲民設禁八條 相殺 以當時償殺 相傷 以穀償 相盜者 男沒爲其家奴 女爲婢 毁蘇塗者 禁錮 失禮義者 服軍] 不勤勞者 徵公 作邪淫자 笞刑 行詐欺者 訓放”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이와 같이 소도는 신성불가침의 성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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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1)『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

『태백일사』는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 1455~1528)이 1520년 66세의 나이에 찬술纂述한 역사경전이다. 그가 『태백일사』를 찬술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왕조의 10대 임금인 연산군 14년(1503)에 정사의 기록을 맡아 관리하는 춘추관의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면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였다. 그는 또 1504년 충북 괴산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때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비장祕藏의 역사서를 탐독하게 되었으며 이후 11대 임금인 중종 14년(1519년)에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왕실 서고의 귀중한 사료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이맥이 찬술한 『태백일사』는 그 후손인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에게 가보로 전해졌다. 이기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태백일사』를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1864~1920)에게 전해주었는데, 계연수는 『태백일사』를 받아 보자마자 무한한 찬사를 보내면서 ‘손발이 절로 춤추며 흥겨워 외치고 싶어 미칠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태백일사』에 온전하게 실려 있는 두 경전, 즉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는 ‘낭가郞家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유가儒家의 『대학大學』ㆍ『중용中庸』에 비견되는 중차대한 사료史料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계연수는 한민족의 역사경전인 『환단고기』를 편술하게 되는 분수령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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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태백일사』인가?

그것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크게 빛나지만[太白] 숨어있는 뛰어난 역사[逸史]’란 뜻이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역사 교과서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우리 민족의 빛나는 역사사상의 유산이 잘 기록되어 있다.

 

『태백일사』가 편술될 당시의 조선왕조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찌든 유학儒學의 사풍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맥은 동북아 9천년 한민족의 국통國統과 보배로운 환단桓檀의 숭고한 사상을 『태백일사』라는 이름으로 찬술했던 것이다. 이에 운초 계연수는 이맥의 『태백일사』를 중심으로 환단의 옛 기록을 함의하는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이로부터 『태백일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한민족의 역사종통이 그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태백일사』는 총 8권으로 편집되어 있다.

 

제1권은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제2권은 「환국본기桓國本紀」

제3권은 「신시본기神市本紀」

제4권은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제5권은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제6권은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제7권은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제8권은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앞서 『대학』과 『중용』에 버금가는 경전이라고 말한 까닭은 대표적으로 우주만유에 대한 진리의 본원경本源經인 「천부경」과 온전한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해 대광명의 심법을 여는 수행경전인 「삼일신고」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제5권의 「소도경전본훈」은 한민족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라 불린다. 여기에는 배달국 시대 초기에 선인仙人 발귀리發貴理가 제천행사에 참석하고, 의식儀式이 끝난 후 삼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원방각경圓方角經」이 소개되어 있고, 다음으로 환국桓國 시대부터 구전되어오다가 배달국 시대에 문자화된 경전, 즉 우주만물의 근원과 창조변화의 법칙을 1에서 10까지의 상수로 드러낸 「천부경」이 실려 있다. 그리고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 「삼일신고」, 「신지비사神誌祕詞」, 「참전계경參佺戒經」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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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도경전본훈」인가?

그것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소도蘇塗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경전’이기 때문이다. ‘소도’는 바로 수려한 명산에 자리 잡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신성神聖한 곳이다. 상고시대에 한민족은 ‘소도’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직계자손임을 알리는 의식, 즉 ‘삼신일체 하느님’에 대한 제천祭天을 직접 행사하였고, 여기에 설치된 경당扃堂에서는 삼신일체三神一體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기본적인 소의경전이 강론되었다.

 

그래서 ‘소도’는 삼신을 수호하는 종교의식의 중심센터이면서 심신수련의 장場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단군시대 이후에 ‘소도’는 국가를 경영하는 많은 젊은 인재들을 양성養成하여 배출하는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한다. 

 

소도蘇塗 문화의 의미

 

📌그럼 ‘소도蘇塗’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소도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소생하다, 쉬다’를 의미하는 ‘소蘇’와 ‘진흙, 덧칠, 길’이라는 뜻의 ‘도塗’이다. 그래서 소도는 ‘참 진리를 깨우쳐서 오욕으로 덧칠해진 몸과 마음이 새롭게 소생될 수 있도록 하는[修行] 신성한 장소’를 함축한다

 

왜냐하면 소도는 ‘삼신일체 하느님’에 대한 경배의식과 그 종교적인 진리를 깨우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삼신일체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본연의 생명을 회복하도록 단련하는 청정淸淨한 곳이기 때문이다.

 

📌소도는 어떻게 출범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배달국의 환웅천황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에 의거하면, 

“옛적에 환웅천황께서 천하가 광대하여 한 사람이 능이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왕명, 형벌, 질병, 선악을 주관하고, 인간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했다. 책력을 지어 365일 5시간 8분 46초를 1년으로 삼았다. 이것이 삼신일체상제님이 남겨주신 법이다.

 

그러므로 환웅천황은 삼신의 도로 가르침을 세우고, 이에 품고 있는 뜻[念標文]을 지었다. 염표문에 이르길, 일신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 성性은 빛남에 통해 밝고,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치고, 삼신의 도를 널리 펼쳐 인간을 유익하게 한다. 이때부터 소도가 세워져 도처에서 볼 수 있고, 산상과 웅상은 산 정상에 모두 있게 되었다.

 

[昔者 桓雄天王 思天下之大 非一人 所能理化. 將風伯ㆍ雨師ㆍ雲師 而主穀ㆍ主命ㆍ主刑ㆍ主病ㆍ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作曆 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四十六秒 爲一年也 此乃三神一體上尊之遺法也. 故 以三神立敎 乃作布念之標. 其文曰 一神降衷 性通光明 在世理化 弘益人間. 自是 蘇塗之立 到處可見. 山像雄常 山頂皆有]

 

소도는 국가 최고 통치자인 천황의 명령에 의해 아주 신성한 곳[聖地]에 지정되었을 것이다. 국가에 대사가 있을 때 천황은 소도라는 특정한 장소에 왕림하여 삼신일체상제님께 제사를 지내는 일[祭天行事]를 주로 하였고, 거기에서 신교의 진리, 즉 삼신일체상제님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천부경」과 「삼일신고」 등 소의경전을 강론하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소도는 신교문화의 중심지로 삼신일체 상제님을 모시는 국가적인 신앙의 중심지이자 곧 심신수련의 신성한 장소였다.

 

역사상 명실상부한 최초의 소도는 ‘박달나무로 우거진 터[檀木之墟]’에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초대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삼신일체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던 것이다. 이후 단군조선의 11세 도해단군道奚檀君은 전국의 12명산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을 골라 ‘국선소도國仙蘇塗’를 설치하고 주변에 단목을 많이 심었다. 13세 흘달단군屹達檀君도 나라 곳곳에 소도를 많이 설치했고, 24세 연나단군延那檀君은 소도를 더욱 증설增設하기도 했다.

 

소도는 천단天壇을 쌓고 삼신일체상제님께 제사지내는[祭天儀式]의 중심센터이지만, 그 외에도 소의경전이 강론됨으로써 젊은 인재를 양성하는 국가적인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단군시대에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는 이름의 젊은 남녀는 소도에서 독서와 활쏘기 등으로 심신을 단련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도는 교육기관으로서 문무文武를 겸비하는 인재 양성소이기도 하였다. 즉 소도에서의 독서는 문치文治를 위한 인재육성에 기여하게 되고, 활쏘기 등의 무도武道는 국방력 강화를 위한 상무인尙武人의 육성에 기여하였다.

 

소도는 이웃 나라간의 우호를 증진하는 선린善隣과 개화開化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삼신오제본기』에 의거하면,

“소도에서 올리는 제천행사는 바로 구려를 교화하는 근원이 된다. 이로부터 책화 제도로 이웃나라와 선린하고, 있고 없는 물자를 서로 교환하여 문명을 이루어 다스려지니 개화되어 모두가 평등했다. 이에 온 나라에서 이 소도제천을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蘇塗祭天 乃句麗敎化之源也. 自是 責禍善隣 有無相資 文明成治 開化平等 四海之內 莫不崇飾祀典者也]”고 한다.

 

단군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소도는 각 고을에 있는 명산名山마다 설치됨으로써 그 문화가 민간에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소도에 설치된 신단神壇 앞에는 큰 나무기둥이 세워져 있다. 그 나무기둥은, 사실 배달국을 개창한 초대환웅천황이 소도에 납시어 신성한 나무를 신단수神檀樹로 삼아 그 앞에서 천제를 올렸기 때문에, 원래 삼신을 모시는 기둥이었다. 여기에 배달국의 환웅천황을 상징하는 ‘웅상雄像’의 의미가 덧붙여진다. 이는 천자국天子國의 성역聖域으로서 그 위상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기 위한 일환이었을 것이다.

 

신단 앞에 세워진 나무기둥은 소도임을 알리는 삼신문화의 옛 풍습으로 오늘날 ‘솟대[立木]’문화로 남아 있다. 솟대는 조간鳥竿이라고도 불리는데, ‘솟대’ 끝에 새가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새는 곧 삼신일체상제님의 사자使者로 신교문화의 상징물인 삼족오三足烏를 지칭한다.

 

 

 

달리 말하면 솟대는 삼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서로 연결하는 통로이고, 솟대 끝에 앉아 있는 신조는 삼신일체상제님에게 인간의 기원을 전하는 전령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솟대 혹은 조간은 곧 신조神鳥가 앉는 신간神竿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소도에 설치된 단목檀木, 신목神木, 나무기둥에서 기원하는 솟대는 동북아 한민족의 고유한 소도 문화로 정착되었고, 이 문화가 세계로 퍼져나간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의 대륙과 일본, 몽고와 파키스탄, 인도와 티베트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솟대 문화는 바로 한민족의 소도문화가 여러 가지 다양한 신앙형태로 변전되어 남아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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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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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의 길을 추구한 신라의 천재 최치원(도교,선도, 태백일사)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연구위원

 

 

태모 고수부님은 증산도 교단을 처음 세우신 분이다. 증산 상제님이 어천 한 2년 뒤인 1911년의 일이었다. 성도들이 태모님에게 교 이름을 무엇으로 정할지 여쭈었다.

고수부님은 “천하를 통일하는 도인데 아직 때가 이르니 ‘선도仙道’라고 하라. 후일에 진법이 나오면 알게 되리라.”고 하였다. (《증산도도전》 11:29)

 

선도라는 것은 신선을 추구하는 길이 아닌가? 또 태모님은 “내가 하는 일은 다 신선이 하는 일이니 우리 도는 선도니라”고도 하면서 “너희들은 앞으로 신선을 직접 볼 것이요, 잘 닦으면 너희가 모두 신선이 되느니라.”고 증산도가 신선되는 것을 추구하는 도임을 분명히 하였다.

 

신선이란 어떤 존재인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몸과 마음을 닦아 신과 같은 존재가 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옛 한국에는 이러한 신선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중국의 도교도 이러한 한국의 신선문화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에 기록된 《태백일사》에 의하면 중국 도교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황제 헌원에게 도를 전해준 사람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이었다. 자부 선생은 헌원에게 《삼황내문경》이라는 책을 전해주어 헌원으로 하여금 마음을 닦아 의로운 정신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신선 사상은 신라의 화랑도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시대에도 그 명맥이 살아 있었지만 고려에 들어서는 크게 쇠퇴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에 와서는 조선 단학파로 이어져 많은 선인들을 배출하였다.

 

 

 

고운 최치원(857-?)은 이러한 한국의 선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학자로도 유명한데 고려 이전까지 가장 많은 글을 남겨놓은 사람이다. 중국에서 쓴 글들로 이루어진 《계원필경桂苑筆耕》, 신라에 돌아와 왕명으로 편찬한 네 선사들의 전기를 기록한 《사산비명四山碑銘》, 그리고 기타 다양한 여러 글들을 모은 《고운문집孤雲文集》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학자이자 관료, 정치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명성은 중국 사서인  《신당서》 예문지藝文志에 그의 저서가 소개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에 의하면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 20권이 있다고 하였다. 《사륙집》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학자로서의 고운은 유교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으니 유교경전을 통달했던 것은 물론이고 불교에 대해서도 무척 해박하였는데 《四山碑銘》을 비롯하여 그가 쓴 여러 고승들의 전기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의 도교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가 상관으로 모시고 있던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을 위해 쓴 여러 재사齋詞들이 남아 있다. 고변은 도교를 무척 좋아하여 주변에 도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가 몰락한 것도 도교에 탐닉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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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당나라에서 16년을 살다가 28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그는 신라에 온 후 우리나라에도 도교와 비슷한 사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옛적부터 있었고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면서 유불선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선사仙史》라는 책이 있었는데 거기에 풍류의 원천에 대한 서술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선사》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아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풍류의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풍류가 백성을 교화하는 도로서 충효와 겸손, 선행을 가르쳤던 것은 분명하니 풍류는 결코 현실도피적인 사상은 아니었다. 신라가 풍류를 화랑도의 조직이념으로 삼은 것은 풍류의 그러한 현세적 성격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최치원이 말한 것과는 달리 한국의 선도가 중국 도교에서 연원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7세기 초 한무외라는 사람이 지은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이 그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데 19세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이러한 주장이 그대로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신라 말의 김가기, 최승우, 그리고 승려 자혜가 중국도교 8대선인 가운데 으뜸가는 인물이었던 종리권鍾離權으로부터 도를 배웠으며 그 가운데 최승우는 그 도를 최치원에게 전했고 이 도는 조선 중기의 한무외, 남궁두 등에게까지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치원 자신은 중국의 도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나 이러한 도의 전수에 대한 언급은 최치원의 저술들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해동전도록》의 전반적인 서술이 객관적인 서술이라고 보기는 힘든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그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망설여진다. 이 책은 후대의 조선 단학파들이 자신들의 연원을 중국 도교와 연관을 짓기 위해 만든 문헌이라 하기 때문이다.

 

《해동전도록》과 비슷한 시기인 조선 중기에 편찬된 도가서 《청학집》에는 그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선도는 환인으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환웅과 단군을 거쳐 후대에 전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선도는 후일 여러 파로 갈라졌는데 이러한 선파의 하나가 물계자勿稽子 파였다.

 

물계자는 3세기 초의 인물로 신라가 포상팔국과 치른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었지만 전공을 인정받지 못해 불만을 가졌던지 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삼국사기》 물계자전) 《청학집》에 의하면 진평왕 때의 선인인 대세와 구칠, 그리고 후대의 불교승려 도선과 원효 모두 물계자의 유파였다고 한다. 그리고 최치원 역시 이 유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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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선도가 한국 고유의 사상이었다는 것은 고려 시대의 기록들에서도 확인된다. 고려 중기의 시인 이규보는 우리나라의 선풍仙風은 중국의 주나라나 한나라, 그리고 가까이는 당나라와 송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고유의 것이라 하였다.

 

최치원은 귀국해서는 신라 조정의 명을 받들어 여러 가지 문한을 작성하는 일을 하였다. 894년에는 진성여왕에게 신라의 정치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10조의 개혁안을 올렸지만 정적들의 견제로 실현되지 못하여 그는 지방 태수직으로 밀려났다. 여러 군의 태수를 역임하던 그는 수년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가솔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책과 자연을 벗하고 살았는데 민간에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그는 그곳에서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한다.

 

고운은 신선이 되기 위해 수련을 하였는데 어떠한 수련을 하였을까?

도교문헌을 연구한 조선시대 학자 이규경에 의하면 최치원은 중국에서 수련법을 배워왔으나 귀국해서는 잊어버려 그의 외삼촌인 현준으로부터 새로운 수련법을 배웠다고 한다.(《五洲衍文長箋散稿》 2권 경사편, 도장류) 그 수련법을 ‘가야보인법伽倻步引法’이라 하였는데 정확히 어떠한 수련법인지는 모르나 그 이름으로 짐작하건대 가야산 일대에서 도를 닦던 사람들 사이에서 내려오던 고유한 수련법이 아닌가 싶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들어가 중국의 유교와 불교, 도교를 배웠지만 신라에 돌아와서는 우리 고유의 선도를 접하고 그 수련법을 배웠던 것이다.

 

뜻과는 달리 흘러가는 신라의 정치에 관여하기를 포기하고 그는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 같은 삶을 살았다. 당시 신라는 중앙의 권력이 붕괴되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정치적 혼란이 극심한 상태였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그는 전국의 명승지를 떠돌며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신선과 같은 삶을 살았다. 지금도 가야산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곳곳에 그의 행각에 대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 가야산 해인사 입구의 홍류동 계곡 바위에 그가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가야산 독서당에 부침(題伽倻山讀書堂)

바위 사이로 우르르 콸콸 온 산을 포효하니 지척의 사람 말도 못 알아듣겠네. 이러쿵저러쿵 시비 따지는 소리 들릴까 봐서 일부러 물소리로 산을 둘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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