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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6)고구려의 선인도랑仙人徒郞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소도의 변천사 5️⃣

 

🔍고구려의 선인도랑仙人徒郞(참전參佺과 조의皂衣)

 

단군조선이 말기에 접어들자 중앙집권 세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한다. 그러자 지방 세력들이 새롭게 일어나면서 열국시대列國時代가 전개되는데, 이것이 일명 부여시대夫餘時代이다. 부여에서 신교에 뿌리를 둔 낭가의 맥은 ‘천왕랑天王郞’으로 이어졌지만, 지역에 따라 세속적인 습속과 융합하면서 다소 변전하게 된다. 고구려가 건국되자 낭가의 맥은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이어진다.

 

‘선인도랑’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선인의 도를 닦는 랑郞’이란 뜻이다. 이 말은 고구려의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임 시기에 최고의 재상이었던 을파소乙巴素가 처음으로 썼다.

“을파소가 국상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선발하여 선인도랑으로 삼았다. 교화에 능숙한 자는 참전이라고 하는데, 무리 중에 계를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에 능숙한 자는 조의라 하는데, 지조를 겸하고 계율을 이루어 공익을 위해 앞장서서 나아갔다

 

[乙巴素爲國相 選年少英俊 爲仙人徒郞 掌敎化者曰參佺 衆選守戒 爲神顧托 掌武藝者曰皂衣 兼操成律 爲公挺身也]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어린 영재들로 구성된 고구려의 ‘선인도랑’은 국가에서 인재를 기르는 수행단체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참전參佺’이 되어 ‘계戒’를 잘 고수하고, 지정의知情意를 조화롭게 구비한 선인仙人으로 신교의 진리를 잘 받들고 교화하는 일에 종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일부는 ‘조의’가 되어 참전의 계율을 굳건하게 숭상하면서 무예를 연마하고, 비상시非常時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솔선수범하여 몸을 받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낭가의 맥을 이은 고구려의 ‘선인도랑’은 곧 ‘참전’과 ‘조의’로 실현된다.

 

📑‘참전’의 사명은 무엇인가?

‘참전’이란 말은 제천에서 삼신을 모시고 그 공덕을 기리는 것에서 연유한다.

“신시개천 이래로 매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나라에 큰 축제를 열어 삼신의 덕을 기리고 화합을 제창했다. 어아를 음악으로 삼고 감사를 근본으로 하여 신과 인간을 조화하니 사방에서 이를 본받았다. 이것이 참전계가 되었다

 

[神市以來 每當祭天 國中大會 齊唱讚德諧和 於阿爲樂 感謝爲本 神人以和 四方爲式 是爲參佺戒]”

(『단군세기』).

 

다시 말해서 ‘참전’은 삼신三神의 진리를 깨달아 공덕을 기리고 찬양하는 제천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찬양하는 노래는 ‘어아於阿’이다.

 

‘어아’는 신시神市의 옛 풍속으로 

“태양을 삼신의 모습으로 여기고, 태양의 빛과 열기를 삼신의 공능으로 여기며, 만물이 생겨나 자라고 발전해 가는 모습을 삼신의 심정과 의지로 삼고, 재앙과 행복을 보응하는 것으로써 삼신을 정의한다

 

[以太陽爲儀象 以光熱爲功能 以生化發展爲情志 以禍福報應 爲定義]

(『소도경전본훈』)

 

‘참전계’는 ‘참전이 꼭 지켜야할 계戒’를 말한다. 즉 ‘참전’이란 지智·덕德·체體의 삼육三育을 겸전한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삼신을 모신다는 의미이이고, ‘참전계參佺戒’는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연마하고 지켜야 하는 계율이란 뜻이다. 사실 참전은 이미 배달국의 환웅천황 때부터 있어서 삼신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왔다. 이로부터 고구려 고국천왕 때 재상을 지낸 을파소는 ‘참전계’를 다듬어서 경전으로 집대성하였는데, 「참전계경」이 그것이다. 속설俗說에 「참전계경」은 을파소가 백운산白雲山에서 기도하여 얻은 천서天書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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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은 ‘성誠·신信·애愛·제濟·화禍·복福·응報·보應’의 8강령八綱領, 366가지의 절節과 목目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지켜야할 도덕과 윤리규범이 중심이다.

“‘’은 충심에서 일어나는 것을 혈성으로 지키는 것으로 6체體 47용用의 가르침이고,

’은 천리에 필히 부합하는 것을 인간사에서 이루는 것으로 5단團 35부部의 가르침이고,

’는 본연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어진성품의 본 바탕으로 6범範 43위圍의 가르침이고, 

’는 덕을 겸한 선을 도에 의지하여 널리 펼치기 위한 4규規 32모模의 가르침이고,

’는 악을 부르는 것을 경계하는 6조條 42목目의 가르침이고,

’은 선을 행함으로써 돌아오는 남은 경사로 6문門 45호戶의 가르침이고,

’은 천신이 악인을 화로서 보답하고 선인을 복으로 보답하는 것으로 3계階 30급級의 가르침이고,

’는 악이 악으로써 선이 선으로써 보답 받는 것으로 6과果 39형形의 가르침이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그럼 ‘조의皂衣’는 무엇인가?

‘조의’는 글자 그대로 ‘검은 색깔의 옷’을 뜻한다.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을 통상 조의라 불렀는데, 그 기원은 단군왕조檀君王朝 송하강 아사달 시대에서 비롯된다.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에 의거하면, 4세 오사구 단군께서 “언제나 3월이 되면 마한에 명하여 친히 군대를 사열하시고 사냥을 했다. 16일에 기린굴에서 천제를 올릴 때 조의를 하사하고 갓을 씌우는 예식을 행하고, 이어서 가무와 온갖 놀이를 한 후 파했다[每當三月 命馬韓 閱武田獵. 十六日祭天麒麟窟 賜皂衣加冠지례 仍歌舞百戱而罷]”는 기록이 있다.

의관을 갖춘 ‘조의’는 항상 의젓한 상무정신에 입각하여 화살을 차고 활을 갖고 다닌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는 “이때부터 ‘참전’에게 지켜야할 계가 있고, 조의에게 율이 있어 숭상하는 풍속이 이어졌다. 의관을 갖춘 자는 반드시 궁대를 두르고 활과 화살을 차고 다니고, 능숙하게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반드시 높은 지위를 얻었다. 선한 마음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악의 우두머리로 가정하여 생각하게 되었다[自是 俗尙 參佺有戒 皂衣有律 衣冠者 必帶弓矢 能射者 必得高位 善心 爲修行之本 貫革 爲假想之惡魁]”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에 이르자 조의는 단군시대와 마찬가지로 속칭 ‘검은색 비단옷을 입은 집단’을 가리킨다. 조의가 검은색으로 된 옷을 입은 유래는, 배달시대 때에 천황이 ‘천왕랑天王郞’에게 내려준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는 관례에서 태동하고, 오사구 단군이 천제를 올릴 때 하사한 조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조의는 ‘조의선인皂衣仙人’으로도 불린다. 이는 수행자가 ‘조의’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왕王이나 대가大加 곁에서 가신적家臣的 성격을 가진 자들로 ‘충忠·인仁·의義·지智·예禮’를 덕목으로 삼았다.

 

‘조의선인’은 무사武士의 기능을 하는 ‘조의’와 문사文士의 기능을 하는 ‘선인’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의선인’은 심신을 수련하고, 대체로 문무를 겸비하여 삼신의 덕을 실천하여 국가를 수호하는 종교군대의 성격을 가진다. 그들은 평상시에 왕이나 대가 곁에서 섬기고 돕는 일을 하지만, 때로 편대를 나누어 어느 한 집에 모여 삼신의 진리를 익히기 위해 고사古事를 담론하거나 학예을 익히기도 하고, 무예를 숭상하기 때문에 수려한 산천을 찾아 수련하기도 한다.

 

또한 도로 및 하천을 정비하고, 성곽 등을 건설하고 보수함으로써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일신一身으로 기꺼이 봉사한다. 한마디로 조의는 선善한 마음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고, 무예를 숭상하고, 참전의 계율을 굳건하게 지키고, 비상시에는 민족을 위해 솔선수범하여 몸을 던져 희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의선인의 진가는 전쟁과 같은 국가의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드러난다. 왜냐하면 조의선인은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서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가하여 국가를 수호하는 데에 선봉에 나서기 때문이다. 수나라의 양제梁帝가 113여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당시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대군을 모조리 쓸어버린 역사적인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20여만의 조의선인이 참전하여 혁혁한 수훈을 세웠다고 전한다. 또한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도 대군을 물리치고 궤멸시킨 주인공 또한 조의선인의 후예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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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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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5)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소도문화의 변천 3️⃣

 

🔍대시전의 환웅전, 국조삼신을 모시는 삼성전三聖殿, 불교의 대웅전大雄殿

 

소도로 지정된 산골짜기에는 신단이 있다.

“산골짜기에 나무를 심고 토단을 쌓는 것을 신단이라고 말한다

[在山谷而植木爲土壇者 曰 神壇]”

(『태백일사』 「신시본기」).

 

신단은 삼신의 공덕을 기리고 모시는 제단이다. ‘임자년에 4세 오사구단군烏斯丘檀君은 마한馬韓 왕에게 명하여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께 제사드리는 일을 돕도록 했다[壬子 韓以命 入常春 助祭三神于九月山]’(『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는 기록이 있다.

 

“삼신은 우주만물을 능히 이끌어 내고, 각기 타고난 성품을 온전하게 하니,

신의 오묘함을 백성 모두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神者 能引出萬物 各全其性 神之所玅 民皆依恃也]”

(『단군세기』).

 

그런데 신단에 역대 천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삼신전三神殿’을 세우고 신주神主를 모시기 시작한 것은 2세 부루단군扶婁檀君 때이다. 『단기고사檀奇古史』에 의거하면, ‘부루단제가 삼신전을 세우고, 환인, 환웅, 단군의 성조를 봉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위성조三位聖祖는 바로 인류최초의 시원국가로 알려진 환국의 환인천제, 그 국통을 계승하여 배달국을 창업한 환웅천황, 그리고 배달의 국통을 계승하여 법도를 실현한 단군조선의 단군왕검이다. 또한 5세 구을단군丘乙檀君은 “재위 16년에 장당경에 몸소 행차하여 삼신단을 봉축하고 환화를 많이 심었다[丁丑十六年 親幸藏唐京 封築三神壇 多植桓化]”(『단군세기』).

 

소도에 성조의 유상遺像을 모시고 직접 제사를 지내는 풍속은 11세 도해단군道奚檀君에서 비롯된다.

도해단군은 

“재위 원년인 경인년에 오가에게 명하여 12명산 가운데 최고로 빼어난 곳을 찾아 국선소도를 설치하고, 둘레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었다. 가장 큰 나무를 선택하여 환웅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니 그 이름을 웅상이라 했다

 

[庚寅元年 帝命五加 擇十二名山之最勝處 設國仙蘇塗 多環植檀樹 擇最大樹 封爲桓雄像而祭之 名雄常]”

(『단군세기』)

 

 

 

같은 해 도해단군은 ‘대시전大始殿’을 세우고, 거기에 환웅천황의 유상을 봉안하여 모시기 시작했다.

도해단군은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건립하도록 명하였다. 대시전이 완성되니 지극히 웅장하고 화려했다. 천제환웅의 유상을 받들어 안치하니 머리위에는 광채가 찬란하여 마치 태양이 온 우주를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

[冬十月 命建大始殿 極壯麗 奉天帝桓雄像而安之 頭上 光彩閃閃 如大日有圓光 照耀宇宙]

(『단군세기』).

 

대시전은 환웅천황의 유상을 모신 누각이다. 대시전이 바로 ‘환웅전桓雄殿’인 것이다. 그런데 이후에 소도제천이 역대歷代로 내려오면서 삼신전과 환웅전이 통합하여 명칭이 ‘삼성전三聖殿’으로 바뀐다. 삼신전이 곧 삼성전인 셈이다.

 

왜냐하면 삼신이 우주만물을 이끌어내어 각기 부여된 성품을 온전하게 하지만, 국조삼성으로 말미암아 그 공덕이 더욱 빛나고 성대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신전은 곧 동북아 한민족의 국조삼성, 즉 환국을 건국한 환인천제, 배달국을 개창하여 문명화에 힘쓴 환웅천황, 환국과 배달의 국통과 법통의 맥을 이어 동북아 제국을 건설한 단군왕검의 공덕을 봉안하여 모시는 삼성전으로 자연스럽게 바뀐 것이다.

 

삼신전이 곧 삼성전이라는 사실은 33세 감물단군甘勿檀君이 제사를 지낼 때 지은 ‘서고문誓告文’에서 알 수 있다.

세분 성조의 존귀함은 삼신과 더불어 공덕이 같고, 삼신의 공덕은 세분 성조로 말미암아 더욱 성대하도다. 비어있음과 거칠게 있음은 한 몸이요, 낱개와 전체는 하나이니, 지혜와 생명을 함께 닦으면 내 몸과 영혼이 함께 뻗어나가네. 참된 가르침이 정해지고, 믿음이 오래되면 자명해지고 세력을 타면 높아지나니, 빛을 돌려 몸을 돌아봄이로다. 저 높은 백악산이여 만고에 변함이 없이 푸르고, 역대성조께서 대를 이어 예악을 부흥시켰으니 규모가 그토록 위대하여 도술이 깊고도 광대하도다. 하나를 잡으면 셋을 머금고 셋이 모이면 하나가 되나니, 하늘의 계율 널리 펴서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

 

[三聖之尊 與神齊功 三神之德 因聖益大 虛粗同體 個全一如 智生雙修 形魂俱衍 眞敎乃立 信久自明 乘勢以尊 回光反躬 截彼白岳 萬古一蒼 列聖繼作 文興禮樂 規模斯大 道術淵宏 執一含三 會三歸一 大演天戒 永世爲法]”

(『단군세기』)

 

삼성전은 세 분 성조聖祖, 즉 환인천제, 환웅천황, 단군왕검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이를 ‘삼성사三聖祠’라고 한다. 삼성전의 명칭이 삼성사로 바뀐 것은 감물단군 “재위 7년 무자 년에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 아래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드렸다[戊子七年 寧古搭西門外甘勿山之下 建三聖祠 親祭]”(『단군세기』)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군조선이 무너지자 만주 상춘지역의 구월산九月山에 있던 삼성전은 고려에 이르러 다시 삼성사를 지어 이를 계승하게 된다. 오늘날 까지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는 “인웅검 삼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조자용, 『삼신민고』, 169쪽).

 

문제는 환웅전桓雄殿이 삼신전과 통합되면서 한편으로는 삼위성조를 모시는 삼성전으로 바뀌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의 본존本尊을 모시는 ‘대웅전大雄殿’으로 둔갑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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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전은 어떻게 해서 대웅전이 되었을까?

대웅전이라는 명칭은 환웅이 ‘대웅천大雄天’이라는 사실과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융합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단군조선의 삼조선三朝鮮 관경체제가 무너지자 삼국三國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와중에 외래종교인 불교가 들어와 한민족의 생활문화 속으로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불교는 전통적인 민족 신앙인 신교와 대립하게 되는데, 이것을 ‘신불상쟁神佛相爭’이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불교는 한민족의 토속신앙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여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신불융화神佛融和’라 한다.

 

신불융화의 과정에서 불교는 본존을 모신 불당佛堂을 ‘삼성전’이 아니라 ‘대웅전’이라 호칭했고, 그리고 삼신전이란 이름은 본당에서 뒷전으로 밀려나 작은 규모로 지어진 ‘삼신각三神閣’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에 산재해 있는 사찰寺刹은 대부분 대웅전이란 간판이 붙어 있고, 그 안에는 삼존불三尊佛, 즉 본존불인 석가불釋迦佛,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수행을 상징하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사실 대웅전은 불교의 용어가 아니다. ‘대웅大雄’이란 말은 ‘크게 뛰어남’을 뜻한다. 그래서 대웅전은 문자적으로 크게 뛰어난 인물을 모시는 전각이란 뜻이다. 이 말의 직접적인 기원은 ‘대웅천大雄天’에서 비롯한다. ‘대웅천’의 주신은 ‘환웅’이다.

 

이에 대해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는

“그러므로 말하기를 사람과 만물이 모두 삼신에서 생겨나니, 삼신이 바로 한 뿌리의 조상이다. 환인은 역시 삼신을 대행하여 환국의 천제가 되었다. 후에 나반을 대선천이라고 부르고, 환인은 대중천이라고 불렀다.

 

환인은 환웅과 치우와 더불어 삼황이 되고, 환웅을 대웅천이라 부르고, 치우를 지위천이라 불렀다. 이것이 『황제중경』이 만들어진 유래이다[故 曰人物 同出於三神 以三神 爲一源之祖也. 桓仁 亦代三神 爲桓國天帝. 後 稱那般 爲大先天 桓仁 爲大中天, 桓仁 與桓雄治尤 爲三皇 桓雄 稱大雄天. 治尤 爲智偉天 乃皇帝中經之所由作也]”(「三神五帝本紀」)라고 한다.

 

따라서 대웅전은 바로 환웅전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본존을 모시는 불전佛殿은 환웅전이라 하지 않고 대웅전이라 했을까? 이는 ‘신불융화’의 과정에서 불교가 신교의 토속신앙을 수용하는 일환으로 전각의 명칭만 차용해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 의거하면,

“불상이 처음 들어오자 절을 세우고 이를 대웅이라 호칭했다. 이것은 승도들이 옛 풍속을 세습으로 인하여 부르는 칭호이지 본래 승가의 말이 아니며, 또한 이르기를 승도와 유생이 모두 낭가에 예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佛象始入也 建寺稱大雄 此僧徒之襲古仍稱而本非僧家言也, 又云僧徒儒生皆隷於郞家以此可知]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

 

그러므로 한민족의 세속적인 신교문화는 소도에 있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세속적인 신교문화와 결합하게 되고, 소도가 있을 만한 곳에는 대체로 불당이 세워지게 된다. 이때 대시전에 모셔진 환웅천황의 유상은 바로 불상으로 대체되었다.

 

다시 말하면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신교의 신앙문화와 불교가 습합되면서 불전은 옛 풍속으로 전해오는 환웅의 이름을 따서 ‘대웅전’으로 부르게 되고, 그 안에 본존을 모시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불교문화와 전통적인 신교문화 간에는 이질감이 다소 해소되고, 친화성이 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찰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신각이나 칠성각 등과 같은 신당神堂은 곧 신불융화의 과정에서 남아 있는 신교문화의 잔영殘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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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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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4)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소도문화의 변천 2️⃣

 

🔍제천의식祭天儀式의 변화 

상고시대에 한민족의 제천의식은 하늘에 계신 지존의 삼신일체상제님을 주신主神으로 숭상하고, 신을 맞이하는 종교적인 행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통國統과 종통宗統의 계승자로 ‘천제의 아들[天帝之子]’임을 천명하는 정치적인 전례典禮이기도 했다.

 

제천의식에서 단군왕검은 천제를 집전執典하는 신교의 대제사장大祭司長이면서 천자임을 천명했다. 그래서 단군왕검은 민족단위의 국가를 설립하여 번창한 신시배달의 국통과 종통을 계승하고, 옛 법통을 되살려 세상을 다스렸던 것이다.

 

“배달신시개천 1565년 10월 3일에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백명을 거느리고 단목 터에 와서 백성과 더불어 삼신일체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 왕검께서 지극한 신의 덕성과 성스러움을 겸한 인자함으로 능히 환인·환웅의 성조를 받들어 개천을 계승하니, 그 공덕이 높고 커서 찬란하게 빛났다. 이에 구환의 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진실로 복종하여 천제의 화신으로 여기고 임금으로 추대하니, 이분이 바로 단군왕검이다. 왕검께서 신시배달의 법도를 되살리고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를 세우니 조선이라 하였다

 

[至開天一千五百六十五年上月三日 有神人王儉者 五加之魁 率徒八百 來御于檀木之墟 與衆奉祭于三神 其至神之德 兼聖之仁乃能奉詔繼天 巍蕩惟烈 九桓之民 咸悅誠服 推爲天帝化身而帝之 是爲檀君王儉 復神市舊規 立都阿斯達 建邦號朝鮮]

(『단군세기』)

 

그런데 제천의식은 후대로 전해지면서 점차 확대 변화되어 갔다. 국통과 종통의 계승자임을 확인하고, 조상 제사와 신을 맞이하여 찬양하는 대동축제가 그것이다.

 

16세 위나尉那 단군은

 

“재위 28년 무술년에 구환족의 모든 왕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삼신일체상제님께 천제를 올릴 때 환인, 환웅, 치우를 배향하고 단군왕검께 제사지냈다. 5일간 백성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히고 밤새워 천부경을 노래 부르고 마당 밟기를 했다. 한쪽에 횃불을 줄지어 밝히고 다른 쪽에서 둥글게 춤을 추며 애환가를 함께 불렀다

 

[戊戌二十八年 會九桓諸汗于寧古搭 祭三神上帝 配桓因桓雄蚩尤 及檀君王儉而享之 五日大宴與衆 明燈守夜 唱經踏庭 一邊列炬 一邊環舞 齊唱愛桓歌]

(『단군세기』)

 

여기에서 영고탑寧古搭은 소도제천의 장소로, 북을 울리며 신의 강림을 맞이하는 영고제迎鼓祭를 지내던 곳이다. 그런데 영고탑迎鼓搭이라 하지 않고 영고탑寧古搭이라고 한 까닭은 한자어 영고迎鼓가 영고寧古로 바뀌고 터가 탑搭으로 음사되면서 영고탑寧古搭이 된 것이다.

 

위나단군은 영고탑에서 삼신일체상제님께 제천하고 선령先靈께 제사한 후, 5일 동안 백성들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것은 제천의식이 신과 함께 모두가 즐겁게 노래하고 즐기는 축제의 장場으로 점차 확대 변화되어 감을 함축한다.

 

 

 

 단군조선의 말기에 삼조선[진조선辰朝鮮, 막조선莫朝鮮, 번조선番朝鮮] 체제가 무너지자 제천의식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祭政分離]되어 나타난다. 특히 삼조선이 망하게 되면서 각 지역에는 새로운 군장君長들이 우후죽순 등장하여 관할하게 된다. 이에 제천의식은 천황天皇이 아니라 천군天君이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가 되고, 그리고 각지에 있는 소도에서 종교의식이 거행될 때에도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변모되기도 했다.

 

✔ 단군조선의 국통을 이은 부여夫餘에서 제천의식은 거국적으로 참석하는 국중대회國中大會의 형식으로 거행되면서 모두가 한 마음으로 즐기는 축제祝祭 분위기로 이어진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 의거하면, 부여夫餘에서는 음력으로[殷曆] 정월正月에 국가적인 행사로 신을 맞이하는 영고제迎鼓祭를 열어 북을 치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모두 함께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었다고 한다.

 

중국 돈황문서인 『토원책부兎圓策府』에 의거하면, 동예東濊에서는 10월에 행해진 무천舞天이라는 제사의식이 거행되었는데, 밤낮으로 마시고 춤추며 노래하였고, 전쟁이 있을 때에는 출정出征에 앞서 소를 잡아 그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는 우제점牛蹄占도 행했다고 한다.

 

✔ 부여大夫餘의 종통宗統을 계승한 고구려高句麗는 단군시대의 옛 영토를 회복하면서 분열된 여러 족속들을 통합한다. 통합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제도에 있어서 천왕天王이 있고, 천왕의 중심에는 계루부桂婁部, 절노부絶奴部, 연노부涓奴部, 관노부灌奴部, 순노부順奴部라는 5부족 연맹체가 있으며, 천왕의 직속신하로는 상가, 패자, 고추가,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료를 두었다.

 

천왕은 이들 제가회의를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10월에는 동맹東盟이라는 제천행사를 개최했는데, 이는 고구려 국조신에 대한 제사의식으로 동명東明으로도 불린다. 그래서 고구려의 동맹은 조상 제사 및 일종의 추수감사제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 고려高麗에 이르자 제천의식은 고구려의 동맹을 계승하면서 토속신앙의 종교의식과 불교의식이 결합된 팔관재八關齋의 형식으로 변질된다. 『송사宋史』 「고려전高麗傳」에 의거하면, 고려에서는 “10월 보름에 나라 동쪽에 있는 굴窟의 세신歲神을 모셔다 제사하는데 이를 팔관재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팔관재는 팔관회八關會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도참사상圖讖思想이 첨가되어 천령天靈 및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겼다. 한마디로 고려의 팔관재는 조상제祖上祭의 성격을 표면화하면서 천하태평과 군신화합을 기원하는 민족적 연중행사로 발전된다.

 

✔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국가제도는 전적으로 유학儒學의 이념으로 무장된다. 이로부터 전통적인 제천행사는 사라지게 되고 겨우 기우제祈雨祭의 형식만이 남아 있게 된다. 또한 고대의 소도문화에서 출원한 신앙의식은 본질적으로 변질되어 세속화된 흔적만이 남아 있게 되는데, 신목神木을 모신다든가, 신당神堂에서 삼신을 모신다든가, 당산제堂山祭를 지낸다든가, 당집에서 액厄막이 굿을 한다든가, 소원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의 의식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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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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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3)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소도문화의 변천

 

단군조선의 말기에 접어들자 소도문화는 시대적 상황에 걸맞게 점차 확대 분파分派되고, 여러 지역으로 뻗어나가 토착화되면서 지역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전變轉되기에 이른다.

 

변전의 중요한 특징은 크게 세 관점, 즉 천단天壇의 구조형식의 변화, 대시전大始殿 명칭의 개칭, 낭가문화郞家文化의 변천이라는 관점에서 약술해볼 수 있다.

 

✔첫째는 소도에 마련된 제천단의 설치구조가 변경됐다는 것이다. 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보듯이, ‘천원지방’의 우주관을 표출하고 있는 제단의 구성형식은 위쪽에 원형圓形으로, 그 밑에는 방형方形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구조형식이 바뀌어 위쪽에는 방형이고 그 밑에는 원형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삼신일체상제를 모시는 신교의 제천의식은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즐기는 축제문화의 장場으로 변질되어 갔고, 또한 소도에 건립된 대시전大始殿은 환웅전桓雄殿으로 바뀌었다가, 환국ㆍ배달ㆍ단군조선을 창업하여 다스린 국조삼신을 모시는 삼신전三神殿으로 변경되었고, 고려가 들어서자 불교가 들어오면서 환웅전이 불상을 모시는 대웅전大雄殿으로 둔갑됐다는 것이다.

 

✔셋째는 소도에 세워진 경당扃堂으로부터 낭가문화가 정착되었는데, 이는 시대를 거듭하면서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문사文士와 무사武로 구분되는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국선國仙과 낭도郎徒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신라의 화랑도花郞徒, 그리고 근대 조선의 선비[士] 정신으로 변천되면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1️⃣ 제천단의 구조변화 

제천祭天은 글자 그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이는 창세기 인류 최초의 국가 환국桓國의 원형문화에서 기원한다. 그 문화의 중심에는 신교神敎가 있다. 신교는 본래 제정일치 시대에 하늘, 땅, 인간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삼신일체상제님을 받들어 모시고, 그 덕화德化의 가르침을 받아 내려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천은 신神을 맞이하는 제사의식이다. 이는 환국桓國 말기에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개창할 때,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신시神市를 열고 천제를 올린 사실이나,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할 때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천제를 올린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환국-배달-조선으로 이어지는 국통國統의 계승이나 종통宗統을 승계 받는 국가의 주요 대사가 있을 때, 천황天皇은 거국적인 제천을 필히 거행했다. 그런데 제천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단이 마련되어야 한다. 제단은, 모든 것이 음양 짝으로 존재하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대대待對하여 쌍으로 건립된다. 지존의 삼신일체상제님을 모시는 천단과 반대쪽에 제신諸神을 모시는 신단神壇이 그것이다. 

 

그래서 소도가 있는 곳에는 천단과 신단이라는 두 개의 제단이 설치됐던 것이다. 

“산꼭대기에 땅을 파서 성단聖壇을 만드는데, 이를 천단天壇이라 하고, 산골짜기에 나무를 세워 토단을 쌓은 것을 신다神壇이라 한다[在山頂而塹山爲城壇者 曰天壇, 在山谷而植木爲土壇者 曰神壇”]

(『태백일사』 「신시본기」).

 

천단은 우주만유를 총괄하여 주재하는 삼신일체상제님을 모시는 곳이기 때문에 하늘[天], 땅[地], 인간[人]이 하나가 됨을 상징하는 형태로 건립돼야 한다. 그 모습은 하늘의 도道가 원만함을 상징하는 둥근 원형으로 된 구조형식을, 땅의 도가 방정함을 상징하는 네모진 방형으로 된 구조형식을, 전체적으로 하늘의 원만함과 땅의 방정함을 본받은 사람의 도가 삼위일체로 하나 됨[각角]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건립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원·방·각’의 구조형식으로 건립된 천단이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우주관을 표상하는 ‘천원지방’의 꼴로 이루어져 있다.

 

 

 

천원지방의 구조형식으로 만들어진 인류최초의 천단은 중국 적봉赤峯 일대의 우하량유적牛河梁遺跡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지역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유물 유적이 발굴된 곳이다. 이것들이 출토되자 중국정부는 아무런 역사적인 전거가 없다는 의미에서 ‘신비의 문명’, 혹은 일대가 붉은 산이라는 의미에서 홍산문명紅山文明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 문명을 일으킨 주체는 동이족이다. 그들은 바로 배달국 시대에 살았던 동북아 한민족의 조상이었음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홍산문명의 3대 요소로 꼽히는 유적은 제천하기 위해 3단으로 건립된 천단天, 그리고 여신묘와 적석총이 대표적이다. 천단은 주로 산을 끼고 건립되었는데, 그 구조는 원형과 방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하면 천단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天圓地方]’는 뜻의 구조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위쪽에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으로 된 터가 자리하고 있고, 바로 그 아래에 땅을 상징하는 방형으로 된 터가 위치해 있는 흔적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천단의 반대편에는 조상신과 제신諸神을 모시는 신단神壇이 설치되었던 터가 있다. 천원지방의 구조형식으로 건립된 제천단은 오늘날 중국 북경에 있는 천단이나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천제를 올리기 위해 건립한 서울의 환구단圜丘壇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북경의 천단이나 서울의 환구단보다 더 오래전에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제천단이 한국 땅에 현존한다. 바로 단군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塹城壇이다.

 

 

 

“초대 단군왕검은 재위 51년 무오년에 운사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郎城을 건설하게 하시고,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게 하니 지금의 참성단이 곧 그것이다[戊午五十一年 帝命雲師倍達臣 設三郎城于穴口 築祭天壇於摩璃山 今塹城壇 是也]”

(『단군세기』).

 

그러나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은 홍산문명에서 보는 제천단, 중국 북경의 천단이나 서울에 있는 환구단의 구조형식과는 사뭇 다르다. 참성단은 천원지방의 구조형식이 아니라 천원과 지방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건립돼 있기 때문에 ‘지방천원地方天圓’의 구조형식이다.

 

한마디로 참성단은 위쪽에 땅의 도를 상징하는 방형이 자리하고 아래쪽에 하늘의 도를 상징하는 원형이 위치해 있다.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이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역학易學에서는 ‘천지비괘天地否卦’의 ‘상象’을 나타내는 구성형식이라고 하고, 반대로 땅을 상징하는 방형이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지천태괘地天泰卦’의 상을 나타내는 구성형식이라고 한다.

 

역학에서 ‘천지비괘’는 하늘이 최고인줄만 알고 땅과 서로 사귀지 않는 형국을 상징한다. 이는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이 서로 통하지 않음[불통不通]을 나타낸다. 달리 말하면 하늘이 땅을 비천하게 여기는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사상을 나타내는 괘상卦象이다.

 

‘천지비괘’의 내용은 남존여비나 약육강식의 사회적 제도로 나타난다. 반면에 ‘지천태괘’는 하늘이 스스로 낮추어 땅과 조화를 이루는 형국을 상징한다. 이는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이 서로 조화롭게 소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달리 말하면 하늘이 땅을 존귀하게 여기는 정음정양正陰正陽의 사상을 상징하는 괘상이다. ‘지천태괘’의 내용은 남녀평등이나 약강조화의 사회적 제도로 나타난다.

 

문명사에서 볼 때, ‘천지비괘’는 선천先天의 상극질서相克秩序를 표상하지만, ‘지천태괘’는 후천의 상생질서相生秩序를 표상한다. 문명의 창세기에 건립된 제천단의 구성형식은 선천先天의 세상을 표징表徵하지만, 단군시대에 건립된 마리산 참성단의 구성형식은 후천後天의 세상을 표징한다. 따라서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뀜을 상징하는 마리산의 참성단은 양도시대陽道時代에서 음도시대陰道時代로의 전환, 선천에서 후천으로 변천, 강자가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약자와 서로 소통하여 천하 태평한 세상이 열리게 됨을 함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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