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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다시보기 | 상징으로 보는 여행 13회

- 무의식의 세계, 초현실주의 (1)

데이비드 호크니,지그문트프로이트

 

[STB하이라이트]
 
상생방송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지난 프로그램과 회차는 《한문화중심채널 STB상생방송》 공식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 : 타이틀> 캡션: 강사: 오동석 인문여행작가
 
 
 
●프로그램명 : 상징으로 보는 여행
●방송시간 : 30분 / 제작 : STB상생방송
●소 개 : 〈상징으로 보는 여행〉은 세계 여행 전문가 오동석 작가와 함께 세계 곳곳의 주요 유적과 유물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여행지와 보물들의 숨겨진 상징들에 대해 시청자들에게 쉽고 흥미롭게 전달해 드리고자 기획된 프로그램입니다.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란 무엇일까요?
초현실주의는 현실이 아닌 세계, 무의식의 세계와 같습니다.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내가 아닌, 나의 의지와 나의 생각을 배제한 상태에서 무의식의 세계를 그리는 겁니다. 메디테이션Meditation을 하는 이유가 나를 잃어버리는 게 목적인데 명상을 통해 힐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초현실주의자들입니다. 오늘은 초현실주의가 왜 나왔고,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그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볼까 합니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페인 북동쪽에는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해서 카탈루냐Catalonia 지역이 있는데 이 지역에는 독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건축가로 유명한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가 있고 가우디의 영향을 받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가 있고 달리, 호안 미로Joan Miró와 같은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나왔습니다.


우선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한테 이런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미술관을 왜 갈까요?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미술관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은 「걸작(Masterpiece)」이라는 이름의 작품인데, 이 작품이 걸려 있다고 하면 보러 가시겠습니까? 보기에는 만화의 한 부분을 갖다 놓은 것 같은데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등 안에 드는 작품입니다. 열 번째로 비싼 그림이죠.

 

이것을 만든 사람은 미국의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입니다.
이 그림이 얼마나 비싸냐면 2,180억 원입니다.


아홉 번째는 굉장히 유명한 모딜리아니의 「누드」로 2,215억 원입니다.



그러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그림 중의 하나인 레오나드로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모나리자」는 얼마일까요? 추정치로 1조 원 정도가 되지만 판매하지는 않는 작품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판매되는 그림들은 시장에 나와 있기 때문에 판매가 되는 것이고 1804년 나폴레옹이 전쟁을 하던 시기에 그림들은 박물관에 거의 다 들어가 있었습니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들 중에 아직 시장에 안 나온 것도 많을 겁니다. 그래서 1804년 이전의 그림들 대부분은 다 미술관, 박물관에 있습니다.


그래서 미술사나 역사를 따져 봤을 때 어떤 왕조의 왕이나 황제 혹은 굉장히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미술 작품이나 상징성이 있는 것들을 수집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데 현대사회에 들어와서는 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특히 중국이나 인도의 부자들이 미술 작품을 구하려고 뛰어들면서 작품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습니다.


미술, 예술의 역사를 보면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신전 건물이 지금의 건축 문화가 됐는데 그런 것들이 기독교 성당 문화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 잘 만들어진 건축들은 다 신전입니다. 성당이나 불교의 정각 등 이런 건물들이 최고의 건축물이 되고 그 안에 신상이나 조각들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 후에 그 신神에 대한 일대기를 설명하거나 성경 속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린 그림들이 지금의 회화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그림을 사기 시작합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투자를 위해서 그림을 많이 구입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한 장도 안 팔리던 그림들이 수집가들로 인해 팔리기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미술관이 많이 생기면서 회화가 천정부지로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 있는 화가들이 세상의 추세를 좇아서 추상화를 많이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살아 있는 화가의 회화는 얼마일까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수영장의 두 사람」이라는 작품인데 1,000억 원이 넘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사진작가이자 설치 미술가이면서 화가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사진을 찍고 나서 그림으로 그린 겁니다. 사실 아무런 사상이나 상징은 없습니다. 일종의 팝 아트(Popular art)라고 해서 대중 미술을 그리는 사람의 그림인데 저렇게 잘 팔린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초현실주의로 넘어가겠습니다.
추상주의 그림에 영향을 끼쳤던 초현실주의는 무엇일까?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내가 없는 상태에서 그린 그림입니다. 초현실주의를 만든 사람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이라고 하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입니다.


1차 세계대전 때 정신과 의사로 참전을 했다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심리학, 무의식 세계에 관한 내용을 듣고 ‘1차 세계대전 때 벌어진 상황을 두고 혁명적인 뭔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 이 사람이 만들어 낸 겁니다. 화가들도 참여하고 문인들도 굉장히 많이 참여를 해서 이 초현실주의를 만들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냐 하면 모든 걸 다 부정했습니다. 전쟁 당시, 전 세계 90개 국가가 참여했고 스페인 독감에 의해서 5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든 걸 다 파괴해 버리는 물질 만능주의, 과학에 의존하는 세상에서는 현재 상황을 타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모든 걸 다 부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운동이 나옵니다.
 

아방가르드는 무엇이냐. 프랑스 말로 적진 앞에 나선 초병을 이야기합니다. 전선에 뛰어들어 선두에서 모든 것을 헤쳐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에서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같은 것들이 모두 아방가르드 운동인데,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오기 시작합니다.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새로운 예술 운동들이 나와야 하는데, 이것이 되려면 무의식의 세계가 작동을 해야 하고, 내가 아니라 자동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것은 순수한 신명의 자동주의를 통한 것으로
말하든, 쓰든 진정한 사고 활동에 의한 표현을 목적으로 한다.
아무런 이성의 통제가 없는 가운데
모든 미적, 도덕적 선입견에서 벗어난 사고를 기록한다.”
- 앙드레 브르통 -
 


그래서 사람들은 상층은 현실이고, 하층은 초현실이라고 나눕니다. 수면에 잠겨 있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는 하층이며 나타난 현실은 ‘현실’, 감춰진 현실은 ‘초현실’이라고 했습니다. 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표현을 하는 것이 초현실입니다.

미술이 이렇게 비싸진 것은 사회적인 현상, 정치, 문화와 같은 것들을 함축해서 한 번에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미술로서의 표현이 굉장히 직관적으로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초현실주의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굉장히 낯설게 하는 것입니다.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않고, 상식적으로 보이는 세상을 왜곡해서 아주 낯설게 하는 것입니다. 사물의 본래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것이죠. 깬다는 것은 다시 창조를 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방법, 이것은 현대 문명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스마트폰처럼 전화기 속에 컴퓨터를 집어넣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너무 이상하죠. 그런데 이런 생각이 나오기 시작한 게 초현실주의의 발상입니다.
 



또 하나의 표현 방법은 편집광적인 왜곡입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대표적인 표현 방식으로 그는 콤플렉스complex에 대한 표현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굉장히 약한 사람인데 그러니까 무의식 세계 속에서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펴는 거예요. 꿈속에서 나왔던, 상상했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후 유럽에서 활동하던 초현실주의자들이 미국으로 잠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 가장 큰 미술 시장이었던 뉴욕으로 가서 활동을 하는데, 미국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상징으로 보는 여행 시즌 2』를 시청하시려면?
매주 월요일 오전 9시, 오후 6시
온 가족이 함께 보면 더 좋은 방송 STB상생방송!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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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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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자료, 보천교(증산도의 전신)는 600만 신도

 

 

영상보기 ▼

 

보천교에 대해서는 일본 도쿄의 학습원 대학에 기록이 남아있었는데요. 동양문화연구소에 있는 자료에 의하면, 

 

미즈다 나오마사라는 조선총독부의 예산을 짠 인물이 보천교에 대한 기록을 책 한권 분량으로 작성해 두었다고 합니다. 

 

 

 

이 자료들은 상당히 높은 지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자료라서 극비라는 표시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일반인의 눈에 띌 일이 없는 자료들이라고 하네요. 

 

 

이자료에서는 보천교를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1926년, 포교에 노력한 결과 한때 600만의 교도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인구가 1800만명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노인이나 아이들을 빼면 대부분이 보천교를 신앙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독립자금 지원의 산실 보천교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 1945년 광복 후 백범 김구가 정읍을 방문했을 때 이 말을 했다고 하는데, 탄허 스님을 통해 전해 들은 사위 서상기가 증언한 내용입니다. 한국 불교계의 거성 탄허 스님의 선친인 율재 김홍규金洪圭는 보천교 재무 담당으로 차경석을 보좌하는 수석 참모였다. 김홍규는 보천교 입교 전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서 자신을 국내 독립군 지금책으로 파견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매우 열성적인 애국지사였습니다.

차경석 교주가 그를 보천교 재무 담당 겸 자신을 보좌하는 최고위 직인 목木 방주로 임명하였다고 하니 차 교주의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보천교가 상해 임정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 활동에 거금을 제공한 사실이 연구자들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제공

백야 김좌진 장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군대를 증파하였고 재 만주 한인들에 대한 보복성 횡포와 만행이 극심하였죠. 이러한 결과 만주 지역의 독립활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김좌진 장군은 1922년 초 국내로 유정근 밀사를 파견하여 보천교 교주 차월곡에게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여 군자금을 제공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때 김좌진 장군이 보천교로부터 받은 금액이 2만여 원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11월의 다른자료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동녕부에 근거를 둔 김좌진은 9월 상순 태을교(보천교) 교주 차월곡으로부터 5만 원을 받아 동녕부의 옛 부하를 소집하여 무력 행동에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만 원일 경우, 이 금액을 현재 시가로 환산한다면 20억 정도로 추정되는 큰 금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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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40회 충주 지씨




프로그램 소개


〈한국의 성씨〉는 나의 존재의 근원이자 근본 뿌리인 성씨姓氏에 대해 그 기원과 틀을 바르게 알아보고 자신의 뿌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방영 정보


시청등급 : 일반 / 방송시간 : 30분 / 제작국가 : Korea / 담당PD : 김내연 / 제작 : STB 2020

충주 지씨忠州池氏 현황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지’로 발음되는 성은 ‘연못 지池’ 자를 성으로 쓰는 지씨池氏와 ‘지혜 지智’ 자를 성으로 쓰는 지씨智氏가 있습니다. 이 중 96%는 연못 지의 지씨池氏이고 지혜 지의 지씨智氏는 6,070명으로 4% 정도가 됩니다. 지금의 ‘봉산 지씨鳳山智氏’가 ‘지혜 지智’ 자를 성으로 쓰는 지씨智氏이며, 고려의 명장 지채문智蔡文을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연못 지池’의 지씨池氏는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89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충주忠州를 비롯하여 청주淸州⦁경주慶州⦁광주光州⦁홍농弘農 등 7본이 전해집니다. 이 중 ‘광주 지씨光州池氏’는 후백제 견훤의 사위인 지훤池萱을 시조로 모시고 ‘홍농 지씨弘農池氏’는 중국 명나라 홍농에서 조선 인조 때 귀화한 지명천 장군의 셋째 아들 지시염을 중시조로 모십니다.


‘충주 어씨忠州魚氏’는 충주 지씨忠州池氏에서 분적한 성씨입니다. 충주 어씨의 시조 어중익魚重翼은 본래 충주 지씨의 6세손 지중익池重翼으로 겨드랑이에 크고 빛나는 비늘이 있어 고려 태조 때 충주 어씨로 사성賜姓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충주 지씨忠州池氏는 어떤 성씨일까요?


충주 지씨는 충청북도 충주시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입니다. 충주는 원래 고구려 때 ‘나라의 벌판’이란 뜻으로 국원성國原城이라 불렀고 신라 때는 처음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이라 부르다가 후에 ‘가운데의 벌판’이란 뜻으로 중원소경中原小京이라 불렀습니다. 충주忠州란 지명은 서기 940년 고려 태조 23년에 처음 사용했고 이후 여러 차례 지명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1956년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95년 다시 통합되어 현재의 충주시가 되었습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충주 지씨忠州池氏는 약 15만 3천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으며 전체 지씨池氏의 96.5%를 차지하여 지씨池氏의 거의 대부분은 충주 지씨라 할 수 있습니다.

 

계파는 크게 충의군파忠義君派⦁충무공파忠武公派⦁충의공파忠義公派를 비롯하여 11개 파로 나뉘어 있는데 그 아래 다시 나누어져 총 43개 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집성촌을 살펴보면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판운1리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장천 마을 가장리 중산 마을을 비롯하여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대덕1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초평리 등 전국에 크고 작은 집성촌이 있습니다. 이 중 영월군 주천면 판운1리는 병자호란 때 순절한 충성군 지계최池繼催의 고향이고, 여수시 율촌면의 집성촌은 임진왜란 때 24세손 지달사池達四가 양주에서 여수로 피난을 온 뒤에 형성되었습니다.

시조 소개


충주 지씨의 시조는 송나라 태학사인 지경池鏡입니다. 그는 서기 960년, 고려 광종 11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이 땅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인물일까요?


지경池鏡, 903~1003(충주 지씨 시조)
서기 960년(고려 광종 11년) 송나라 단명전端明殿 태학사太學士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들어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보太保 평장사平章事 벼슬을 역임하고 고려에 정착하였다.



충주 지씨의 시조 지경池鏡은 중국 송宋나라(북송北宋) 홍농弘農 출신입니다. 당시 관직은 지금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고려의 왕(고려 광종)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신으로 와서 “말은 있으나 글이 없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를 형성하기 어려우니 빠른 시일 내에 말과 글이 형성되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고려의 왕이 지경을 붙잡았지만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 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문학적으로 뛰어난 지경池鏡의 모습을 보고 고려에서 송宋으로 다시 사신을 보냈습니다. 이후 고려에 글을 만들어 주라는 명을 받은 지경은 ‘나를 포함한 여덟 명의 학자가 건너가 학회를 만들어 연구하겠다.’고 하며 고려에 오게 되었습니다. 지경과 함께 넘어온 여덟 명이 8학사八學士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충주 지씨 인물 소개


충주 지씨는 고려조에서 36명의 평장사平章事*1)와 24명의 대장군을 배출할 정도로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조에서도 충절忠節을 지킨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탄생하였습니다. 충주 지씨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을까요?

*1) 평장사平章事 : 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급. 충주 지씨는 고려 시대에 대대로 36명의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였다.



지문4걸池門四傑 : 지윤⦁지용기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지용기池湧奇는 시조의 17세손으로 고려 말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지윤池奫은 시조의 15세손으로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지문4걸池門四傑 : 지용도⦁지용수

충의공忠懿公 지용도池龍圖와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는 형제간으로 고려 말 국난기에 많은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지석영池錫永지석영池錫永은 구한말 개화기 인물로 우리나라에 우두법牛痘法을 최초로 보급하였습니다. 그는 1855년 지금의 서울 낙원동에서 가난한 양반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한의학에 정통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한학과 의학을 배우게 되고 서양 의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879년 전국에 천연두天然痘가 창궐하여 수많은 아이들이 생명을 잃자 서양의 종두법을 도입하려 애를 썼습니다.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병원인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우두법을 배우고 이듬해 26세 때는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직접 건너가 두묘痘苗*2)의 제조와 저장법 등을 완전히 습득하였습니다. 귀국한 뒤 그는 전주와 공주를 필두로 전국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우두 접종을 시행하였습니다.

1883년 고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동래부사를 지내고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승정원 좌승지와 한성부윤에 올랐습니다. 이때 그는 전국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우두를 의무적으로 접종하게 하여 19세기 말 수많은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의학 교육에도 헌신하는데 1899년 최초의 의학교인 ‘경성의학교*3)’를 설립하여 10년간 교장으로 있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글 보급에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지석영은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1905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인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하여 시행케 했습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여생을 보내며 1914년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 진료소를 차려 평생 아이들의 건강을 돌보다 생을 마쳤습니다.

*2) 두묘痘苗 : 두창에 걸린 소에서 뽑아낸 천연두 백신
*3) 경성의학교 :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지청천池靑天지청천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일본군 중위로 복무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부대를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합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독립군은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의 근간이 되어 마침내 봉오동과 청산리 대첩의 쾌거를 이루어 냅니다.

지금까지 중국의 송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선의공宣懿公 지경池鏡을 시조로 모시는 충주 지씨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한국의 성씨』를 시청하시려면?
매주 화요일 오후 3시, 오후 10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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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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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상생방송 프로그램 한국인의 성씨 - 온양 방씨溫陽方氏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의 방씨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모 방方 자를 쓰는 온양 방씨溫陽方氏 80,445명, 군위 방씨軍威方氏 6,454명, 기타 방方씨 7,932명으로 총 94,831명이다. 그 외에 방 방房 자를 쓰는 성씨로는 남양 방씨南陽房氏 27,454명, 남원 방씨南原房氏 3,539명, 기타 방房씨 2,527명까지 총 33,520명으로 조사되었다. 1985년 중앙일보사 자료에 의하면 나라 방邦 자를 쓰는 방씨, 클 방龐 자를 쓰는 방씨도 조사된 바 있다.


방씨方氏의 연원


방方씨의 시조는 신라 시대에 당唐나라 문화 사절로 왔다가 귀화한 방지方智이다. 〈신유보辛酉譜〉 세록世錄 편에 보면, 그는 중국 하남성 출신인데 신라 문무왕 9년(서기 699) 중국한림학사中國翰林學士로 우리나라에 와 설총薛聰과 더불어 예의禮儀를 강론하고 선교宣敎와 학업을 가르쳐 ‘동방문교東方文敎의 종宗’이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당시 신라는 북쪽의 고구려 및 백제와 빈번하게 충돌하고 있었으므로, 친당 정책을 쓰면서 당의 문화를 수입하기에 열을 올렸고 이것이 이 땅에 방씨를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선대, 그러니까 방씨의 원시조는 중국 신화 시대의 제왕으로 전하는 염제신농炎帝神農씨의 11세손 뇌雷이다. 그가 하남河南의 방산方山을 봉토로 받은 연유로 방씨 성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신라에 온 방지方智는 뇌雷의 133세손인 군강君講의 차남이라고 방씨의 족보는 적고 있다.

씨족사의 개요


온양 방씨는 시조 방지方智 이후 중간 대의 실기失記로 방지의 후손인 온수군溫水君 방운方雲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잇는다. 온양 외에 상주尙州⋅신창新昌⋅군위軍威로 본관을 따로 쓰기도 했으나 모두 온양으로 합본했다. 어쩌다 아직 합본하지 않은 방씨가 눈에 띄지만 모두 한 시조의 후예다.

온양 방씨 가문 흥성興盛의 주역들중시조 방운方雲은 상주 출신으로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2차 견훤甄萱(후백제) 정벌에서 공을 세워 고려 광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의 벼슬에까지 이르렀다. 왕은 만년의 그를 지금의 온양溫陽(당시의 지명은 온수溫水)에 있는 과안산過雁山에 살게 하고는 온수군으로 봉하고 이 산의 이름을 배방산拜方山이라 고쳐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방씨는 온양을 세거지로 삼았다. 시조의 아들 방헌주方軒柱 이후 관향으로 삼아 온 상주尙州를 버리고 온양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방운 이후 후손들은 선대의 후광에 힘입어 고려조에서 대대로 벼슬길에 해 질 날이 없었던 명문으로 등장한다.

방씨는 무예도 뛰어나 온수군溫水君의 손자 방휴方休는 고려 현종 9년(서기 1018) 거란의 장수 소배압蕭排押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귀주대첩龜州大捷의 명장으로 기록됐고, 공민왕 10년(서기 1361)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1등 공신으로 올랐던 방절方節 등 숱한 맹장들이 나왔다.

또 숙종 때 문하성평장사門下省平章事와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던 6세손 방유方裕와 희종 때 상서령尙書令과 상서낭성찬성을 지냈던 11세손 방만년方萬年 등은 명재상으로 당대를 휘어잡던 인물이었다.


배방산拜方山은 온양 방씨의 터전
배방산은 온양 방씨와 관련이 많은 산이다. 충남 천안에서 아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산으로, 당나라 한림학사인 방지의 6세손으로 전하는 방운이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서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60여 년간 6대의 왕을 섬기면서 무훈을 세워 온수군에 봉해졌고 온양, 신창, 아산 3읍을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그가 살고 있던 온양 팔동리 과안산은 ‘방씨를 우러러본다.’는 뜻으로 배방산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산 북쪽 성재산에는 길이 약 1,500m의 석축으로 이루어진 석성이 있다. 대부분 무너져 돌무지만 보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배방산성의 둘레가 3,31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두 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도 건물지로 추정되는 여러 곳이 있으며, 성내에서 백제 시대 토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시대에 축성된 듯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한다.



원나라와의 인연온양 방씨는 중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 13세손 방신우方臣佑는 충렬왕 때 원元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평장사 등 요직을 지내고 그 후 충선-충숙왕 대에 걸쳐 원나라를 왕래하며 대원 외교에 공헌한 외교가이기도 했다. 그는 안평공주安平公主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망고태忙古台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의 시중을 들어 평장사에 올랐다. 충선왕 때 홍중희洪重喜가 고려의 비행을 원제에게 상소하자, 무고임을 밝히고 그를 귀양 보냈다. 1310년 태후太后의 명으로 고려에 파견된 그는 승속僧俗 300여 명으로 금자장경金字藏經의 사서寫書를 완성, 이를 신효사神孝寺로 옮겨 태후의 명복을 빌었다.

태정황후泰定皇后 때에도 총애를 받아 저경사사儲慶司使를 지냈는데, 때마침 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편입시키려는 논의가 있자 고려는 땅이 협소한 데다 산이 많고 들이 적으므로 불필요하다고 원제元帝에게 건의, 그 논의를 철회케 했다. 충숙왕 때 그 공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신에 올랐으며, 1330년 귀국하여 신흥사神興寺를 중수하였다.

그의 아우 방신제方臣悌도 충렬왕 때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금자광록대부평장사金紫光祿大夫平章事라는 큰 벼슬을 지냈고, 그곳에서 다시 귀화하여 오늘까지 그의 후손들이 번성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고려조高麗朝의 영화 속에 번성을 이룩해 온 방씨 가문은 이성계李成桂 혁명의 추종을 거부하고 조선 초기 한때 화를 입기도 했다.

수난으로 시작되었으나, 조선 사회에 큰 공헌을 하다고려조 절신節臣 방순方恂은 공민왕 때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를 지낸 인물로, 조선이 들어서면서 이태조(이성계)가 예조 참의 벼슬자리를 남겨 두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

15세손 방유정方有程 역시 이태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이태조는 고려 광종이 방씨 가문에 내린 온양의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내려 준 땅)를 몰수하는 한편, 방씨 일문의 혼이 담긴 배방산拜方山을 방씨를 배척한다는 뜻에서 배방산排方山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 배방산排方山은 숙종에 이르러 ’방方‘ 자 위에 초두머리(艹)를 붙여 배방排芳으로 고쳐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조에서 방씨 가문은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으나 조선에서 최초로 문과에 급제한 17세손 방강方綱을 비롯해 18세손 방련方鍊 등 초기 급제자들이 유배를 당하는 등 빛을 보지 못해 큰 벼슬길에 오른 인물은 흔치 않았지만, 방유녕方有寧은 일세의 대유大儒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종 20년 과거에 급제, 대사간⋅대사헌에까지 올랐다.

역사상 훌륭힌 무장들을 배출무장으로는 정조⋅순조 때의 방우정方禹鼎이 있다. 홍경래洪景來의 난亂 때 정주성定州城을 함락시킨 선봉장이며, 그가 홍경래의 난 평정에 참가했을 때 쓴 「서정일기西征日記」는 그 방면의 귀중한 자료로 쓰인다.

또 구국의 명장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바로 22세 방진方震(보성군수)의 사위로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의 처숙뻘인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을 비롯, 방응원方應元 등 방씨 가문의 남아들이 이충무공의 선봉장으로 분투하며 함께 싸우다 1598년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를 하기도 했다.

온양 방씨 가문 효자 인맥문무文武의 인맥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방씨 가문의 효자孝子 인맥으로 방득정方得正⋅방치정方致正⋅방희설方希說⋅방국형方國亨⋅방맹方萌⋅방계종方繼宗 등이 있다. 그중에도 ’하늘이 낸 효자‘ 방수간方秀幹의 설화가 전한다. 중시조의 24세 손인 그는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는데 어느 해 엄동설한에 병석의 노모가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한겨울에 수박을 구할 길이 없어 애타는 마음으로 하늘에 빌던 중 그 정성에 하늘이 감응했던지 밖에서 돌연 “수박 사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먹음직스러운 수박 한 덩이가 문간에 놓여 있었다는 효행담이다. 방태유方鮐維, 방원필方元弼, 방시중方時中 등도 모두 방씨 가문의 효자들로 기록돼 있다.

다양한 구국 항쟁 전개방씨 일문은 근세에 특히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독립운동가 방기전方基典, 방경호方敬鎬, 방창근方昌根, 방성도方聖道, 방인근方麟根 씨와 6.25 때 납북된 전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방응모方應謨 씨 등이 그중에도 두드러진다. 그중 방기전은 1910년 망국 후 만주로 이주, 은양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과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족회韓族會에 가담하여 유서柳西 지방 총관으로 무력 항쟁에 나섰다가 전사한 항일 운동의 숨은 별이다.

방응모는 1932년 운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에 거액을 투자해 인수하고 운영하다가, 1946년 8월 조선총독부에게 강제 폐간되자 출판사인 조광사朝光社를 경영하기도 했다. 8⋅15 광복과 동시에 조선일보를 복간, 민족 언론의 창달에 노력해 오다 1950년 납북되었다. 이후 경영을 맡은 방일영方一榮 회장 방우영方又榮 사장은 바로 그의 손자들이다.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방순희方順熙 씨는 일제 시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의 유일한 여성 의원이다. 당시 충칭重慶 방송을 통해 국내의 항일 운동과 독립 정신을 고취한 여걸이었다. 해방 후 서울대 교수로 국어국문학 연구에 공적을 남긴 방종현方鍾鉉 씨는 일제하 한글학회(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우리말을 통해 민족혼을 지키는 독립 투쟁에 숨은 공을 세웠다. 『훈민정음통사訓民正音通史』, 『조선민요집성朝鮮民謠集成』 등의 저서는 그의 애국적 우리말 문학 연구의 결정이다.


어린이들의 큰 별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일제 치하 민족의 암흑기에 이 나라 어린이들에게 횃불을 쥐어 준 소년 문화 운동의 선구 방정환方定煥은 방씨 가문이 낳은 큰 별이자 그의 이름처럼 사라질 수 없는 ‘어린이’라는 낱말과 함께 이 민족의 정신 속에 항상 살아 숨 쉬는 혼이다. 짧은 인생 역정 속에 시대를 앞서 걸으며 봉건 구조의 가족 관계에 억눌려 있던 여성과 어린이를 해방시킨 사상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아동문학가이기도 하다.

소파는 서울 토박이로 서울 한복판 ‘야주개’(지금의 당주동唐珠洞)에서 1899년 11월 9일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는 방경수方慶洙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이미 동네 친구들과 ‘소년입지회’를 조직했을 만큼 일찍 깬 소년이었던 그는 19세에 천도교주 의암 손병희의 사위가 됐다. 의암은 ‘옆얼굴만 보면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며 사람 가리는 법으로 써 왔다는데 소파의 무사 원만한 옆얼굴을 감정하고는 두말없이 셋째 딸 용화溶嬅를 맡겼다고 한다.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은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신청년〉, 〈신여자〉, 〈녹성〉 등의 잡지 편집을 하였고, 3⋅1운동 때는 오일철吳一澈 등과 함께 집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찍어 돌리다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해에 일본에 건너가 일본동양대학 문학과에서 아동문학에 전심하였던 그는 1922년 〈어린이〉를 발간,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손진태孫晋泰, 윤극영尹克榮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정했다. 어른들에게는 어린이들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고, 어린이에게는 앞날의 주인공임을 강조해 주는 뜻깊은 날로, 그때 소파는 어린이날 노래를 짓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문학가로서 일생 동안 어린이를 위해 헌신한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소파상小波賞이 제정되었다.

온양 방씨 세계도



가문의 역사상 주요 인물방강方綱(1400 ~ ?) 조선의 문신, 자字는 군필君弼, 호號는 경재敬齎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때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 참의를 역임한 방순方恂이고, 할머니는 조선 개국공신 윤호尹虎의 장녀 파평 윤씨이다. 1447년(세종 2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사성司成⋅정언正言⋅흡곡현령⋅사간司諫⋅이천부사를 역임하고, 1454년(단종 2)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방륜方輪(1464 ∼ 1534) 조선의 무신, 자字는 중여仲與, 호는 송강松江이다. 계림군雞林君에 봉군되고,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아들 방호의는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방진方震(1514 ~ ?) 보성군수를 역임한 조선의 무관이다. 사위는 이순신 장군이며, 영의정이었던 이준경과 친분이 있었다. 방진은 온양 방씨 판서공파로 온양 방씨 중시조 온수군溫水君 방운方雲의 22세손이다.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방영민方榮玟(1948 ~ )은 대한민국의 관료 출신 금융인, 기업인이다. 행정고시를 통해 관계에 입문한 재무 관료 출신으로, 대통령비서실 부이사관, 재정경제부 경제정책심의관, 공보관, 금융정보분석원장, 금융감독원 감사 등을 거쳐 서울보증보험 사장을 역임했다.

방효충方孝忠(1964 ~ ) 대한민국의 항공우주공학자이자 대학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A&M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해군대학원 연구조교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 충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KAIST 항공우주공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구관측 위성 및 정지궤도 위성의 자세제어 연구 전문가이다.

방기선方基善(1965 ~ ) 대한민국의 경제 관료다. 제13대 기획재정부 제1차관을 역임했고, 제8대 국무조정실장이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온양 방씨 등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온양 방씨溫陽方氏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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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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