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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계급투쟁으로 해석한 카를 마르크스 (2)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2️⃣ ‘종교와 정치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할 24살의 젊은이’

 

1835년 17세가 된 그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처음엔 본으로 간다. 그러나 1년 후 그는 법학을 공부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다시 베를린으로 갔다.

 

하지만 법학 공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다른 재미있는 유흥거리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밤새워 술을 마시고 빚을 지기도 한다. 일종의 학생서클에 가입하고, 불법 무기를 소지한 죄로 고발당하기도 하며 음주 때문에 구류처분을 받기도 한다.

 

아들에 거는 기대가 큰 만큼, 이를 매우 근심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나는 내가 너처럼 자비로운 보호 아래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내게서 성취되었을 것을 너에게서 보고 싶다.”

 

아버지는 자식의 광폭함과 (“마치 우리가 부자라도 되는 양”) 과도한 지출을 꾸짖으며 거친 젊은이에서 절도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새롭고 더 나은 욕망을 가져보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역정을 살만한 일을 많이 하면서도 부모가 기뻐할 만한 일은 거의 않거나 아예 안하고 있다는 책망이 마르크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는 베를린에서 참회가 담긴 고백의 편지를 써 보낸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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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학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사이 법률가가 되겠다는 계획을 포기했고, 그래서 국법과 형법에 관한 지루한 강의를 계속 들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었다.

 

대신에 시인이 되고자 하여 시를 썼다. 대개는 감상적인 시들이다. 그 중 읽을 만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하는 시를 들 수 있다.

“결코 나는 평온한 가운데 실행할 수 없네. / 내 영혼이 강렬하게 붙잡은 것을. / 결코 나는 차분하고 평화롭게 있을 수 없네. / 난 쉼 없이 성나 날뛰네.”

 

그는 자기가 쓴 시의 대부분을 ‘트리어의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 예니 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에게 보낸다. 마르크스보다 네 살 위인 그녀는 명망 있는 관리 집안 출신이다. 그녀의 오빠는 프로이센의 내무 장관 지위에까지 오른다.

 

카를 마르크스는 1836년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소중하고 영원히 사랑하는 예니와 약혼을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약혼에 대해 회의적이다. 변호사는 자기 아들이 진정한 인간적, 가정적 행복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에게 철저한 자기 검증 끝에 그래도 네가 정말로 (결혼을) 원하는 것이라면 너는 당장 한 사람의 남자가 돼야 할 것이라고 당부한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자기 마음을 신중하게 따져보는 그런 유형의 사람도 아닐 뿐더러 더욱이 그럴 시간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사이 무엇보다도 철학과 씨름하려는 내부의 충동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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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한 그의 열정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박사클럽에 가입하면서부터이다. 박사클럽은 베를린의 젠다르멘마르크트(Gendarmenmarkt)에 있는 슈테헬리(Sethely)란 카페에서 격렬한 토론을 주도하던 자유주의적인 대학생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전적으로 5년 전에 죽은 철학자 헤겔의 영향 안에 있었다. 이들의 반항 정신은 헤겔의 위력적인 사유 체계에서 불붙은 것이다.

 

프로이센의 지도적 사상가였던 헤겔은 가공할 경찰 체계를 가지고 있고, 체제에 반하는 사상가를 탄압하는 공권력의 국가를 진리의 최종 단계라 여겼던 것이다. 헤겔에게 강력한 권력 국가는 마치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해 이성적인 것과 같은 어떤 것이었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적 출발점에 기초하여 이같은 기이한 느낌을 주는 판단에 이르렀던 게 분명하다. 말하자면 그는 인류의 역사는 동시에, 성경의 신과는 대조적으로, 여전히 실현의 과정에 있는 신의 역사이기도 하다란 입장을 갖고 있었다. 곧 생성하는 신(세계정신)은 점점 더 높은 이성의 형태에로 자기를 관철시키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세계정신, 곧 신적 이성은 수천 년 전에는 아직 거의 발전되지 못한 채로 있었다. 세계의 초기 정치 체제들은 이에 상응하였다. 무리를 지워 살았던 당시 사람들은 이성적 법률도 알지 못했고, 뚜렷한 윤리나 도덕도 갖고 있지 못했다.

 

헤겔은 의당 원시적 형태의 공동생활에 비하면 국가는 더 높은 이성의 단계로 보인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철학자는 헌법을 갖춘 국가를 세계정신이 나타나는 최고의 형태라고 생각했다. 국가보다 더 높거나 더 이성적인 정치 형태를 그는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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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클럽의 지적 반항아들은 역사란 한 역동적 원리를 따른다는 헤겔의 생각에는 매료되었지만, 하필 자유롭지 못한 프로이센에서 정신이 그 현존에서 완전히 실현된다는 헤겔 사상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은 밤을 새는 토론들을 거치면서, 헤겔의 이론을 시대에 부합되게 하고, 또한 이성은 프로이센과 같은 군주제 국가 형태까지도 넘어설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이론을 정치적 다이너마이트로 바꿔 버린다. 이들은 스스로를 청년 헤겔학파라고 칭함으로써, 거장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표방한다.

 

물론 클럽 내에서 마르크스는 19세로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날카로움이나 논쟁의 열정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모임의 구성원들은 감탄 속에서 그가 “발상들의 황소 머리”이며 “사유의 잡지”란 점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공산주의라든지 또는 국가의 종식 같은 개념들은 아직 그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에게 모자라는 것은 박식함, 다시 말해 학위를 받은 그의 친구들이라면 능히 가지고 있을 법한 지식이다. 그래서 그는 철학에 달려들어 왕성한 지식욕으로 희랍 사상가들, 특히 데모크리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의 작품들을 공부한다. 이어 라이프니츠, 칸트, 피히테, 셸링 등 독일 철학자들의 작품들을 그리고는 다시 자신에겐 마치 기괴한 바위의 울림처럼 들리는 헤겔의 작품들을 읽어 나간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모습을 감춘다. 지적 욕구로 왕성한 그의 정신이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대학 수업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약혼녀 예니와 이들의 은밀한 약혼을 이미 오래전에 눈치 채고 있던 그녀의 부모들이 그를 다그쳐 마침내 졸업 시험에 통과하도록 만든다. 11학기를 보낸 후인 1841년 그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 철학의 차이”란 제목의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한다.

기원전 460년에서 370년까지 살았던 데모크리토스는 유물론과 원자론의 창시자로 꼽힌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으로부터 고유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페르시아의 왕이 되기보다 인과율을 발견하는 쪽을 택하겠다는 말은 데모크리토스에게서, 또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위안을 주는 말은 에피쿠로스에게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다면 더 이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의 나쁜 평판 때문에, 논문 제출자가 출석하지 않고서도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예나 대학에 4월 6일 논문을 제출한다. 10일 후 마르크스는 자신을 박사라고 칭할 수 있게 된다. 반면 베를린 대학의 졸업증서는 전혀 기뻐할 만한 게 못된다. 거기엔 그의 품행에 대한 비우호적인 소견들이 적혀 있다. 예를 들어 그가 빚 때문에 수차 고소당한 바 있다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교수가 되고 싶어 한다. 본 대학 교수직에 뜻을 두지만 이뤄지지 않는다. 박사클럽 시절부터 그를 알고 있고, 그를 위해 그 자리를 주선해줄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가 그때 마침 교수직을 잃었다. 바우어의 해직 이유는 그가 성경의 복음서들을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학문의 최고 지위에 대한 불운한 시도는 마르크스의 지적 명성을 감소시키지 못한다. 친구들은 그가 그의 길을 가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를테면 모제스 헤쓰(Moses Hess)란 기자는 한 친구에게 흥분을 감추지 않은 채 이렇게 편지를 쓴다.

“당신은 조만간 전 독일의 시선을 한 몸에 집중시킬, 아마도 현존하는 철학자 중 유일하게 진정한 철학자일 한 사람을 만나게 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우상은 마르크스 박사라 불립니다. 그는 기껏해야 24살 정도의 아직 새파란 젊은이지만, 그는 중세의 종교와 정치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깊은 철학적 진정성과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날카로운 기지를 갖추고 있습니다. 루소, 볼테르, 홀바흐, 레싱, 하이네, 헤겔이 단지 뒤범벅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치된 한 인간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바로 마르크스 박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헤쓰는 또한 직업이 없는 자기 우상에게 1842년 쾰른의 진보적 신문인 ‘라인 신문’(Rheinischen Zeitung)의 기자직을 주선해준다. 마르크스의 운명적인 전환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중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현실은 그에게 특별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론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이른바 물질적 이해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확산되는 삼림 도벌을 둘러 싼 라인 지방의회의 논쟁도 그러한 사유의 충격들 중 하나이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이 범법 행위에 대한 책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있다는 대담한 입장을 전개한다. 국가가 시민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신문’(Augsburger Allgemeine Zeitung)이 쾰른의 경쟁지에게 공산주의에 은밀하게 동조하고 있다라는 혐의를 둘러씌운다. 당시 공산주의는 채 발효되지 않은 사유 소재이다. 엄격한 검열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동조란 혐의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교묘한 논리로 자신이 속한 신문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그는 조리 있는 논리로 공산주의적 사상은 국가에게 본질적인 위험이 됐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상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쓴다.

 

그는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의 기사는 주목을 끌고 신문의 발행 부수를 늘린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주필로 승진한다. 그러나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당국은 곧 이 신문을 ‘라인의 창녀’라고 부르면서 폐간을 거듭 시도한 것이다. 6주후 마르크스는 당면한 검열을 이유로 손을 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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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크로이츠나흐 온천으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7년의 약혼기간 끝에 여전히 아름다운 약혼녀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 사이 아버지는 죽고(1838), 어머니와의 사이는 완전히 금이 간 상태였다. 게다가 새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란 기대도 전혀 가질 수 없다. 그는 아내와 함께 파리로 가서 새로운 삶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수도를 지배하고 있던 자유주의적 정신은 비단 마르크스만을 끌어들인 것은 아니다. 대개는 지식인들인 약 8만 5천명의 독일인들이 센 강변에 살고 있었다. 하인리히 하이네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마르크스는 하이네와 교분을 맺는다. 또 “사유私有는 절도다.”란 말을 남긴 프랑스인 프루동(Proudhon) 같은 사회주의자들과도 사귄다.

 

마르크스는 철학적 야심이 담겨 있었지만 단명에 그치고 만 잡지『독불연감』에 기고하고, 생활비를 줄일 목적으로 이 잡지의 출판인인 아르놀트 루게(Arnold Ruge)와 일종의 실용적 공동체를 유지하며 함께 생활한다. 그러나 둘 사이엔 곧 불화가 발생한다. 자유주의적인 루게로서는 갈수록 자기 동료의 정치적 견해에 동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사이 마르크스에게는 그 중요성이 비단 그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전환이 일어났다.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좌파들이 대중의 비참한 현실에서 자극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낳게 될 그의 결정들은 분명 심정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물론 그 역시 파리 노동자 집회에 참석하고 거기서 노동으로 강건해진 육체들에서 인간의 고상함이 빛나고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기도 하지만, 말하자면 그의 머릿속에서 폭발한 새로운 사상은 바노가街에 있는 서재에서 떠오른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헤겔의 철학을 거꾸로 세운다.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해석한 카를 마르크스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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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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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논리학을 창안한 헤겔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프로이센에 내려앉은 세계이성

 

헤겔 변증법은 존재-무-생성이란 근본 개념들에 상응하여 3단계의 틀로 이뤄져 있다. 이 세 근본 개념들로부터 그밖의 다른 모든 개념들이 발전돼 나온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 개념들은 동시에, 별들의 운행에서부터 인류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세계 과정을 지배하는 총체적 원리를 형성한다.

 

헤겔은 한 예를 통해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준다.

모든 꽃봉오리에는 그 꽃봉오리의 변화를 야기시키는, 다시 말해 꽃봉오리를 존재 속에 머물게 하지 않는 하나의 힘이 간직돼 있다. 꽃봉오리는 오히려 무로 떨어진다. 그렇지만 꽃봉오리 대신, 헤겔이 “더 우월한 성질”이라고 표현한 꽃이 생겨난다. 그러나 꽃에도 이미 “부정(否定)”이 숨어 있다. 부정의 힘이 꽃에서 열매가 생기도록 함으로써 꽃을 사라지게 한다. 이때 열매는 다시금 더 우월한 단계를 뜻한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내모는 힘(부정)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려고 하는, 자신을 전개하는 정신(신)이다. 정신은 자연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자신으로부터 외화外化되어 있다. 그렇지만 정신은 생명 없는 질료 안에서 소멸되는 게 아니라 식물, 동물, 인간으로 이뤄진 세 단계를 거치면서 자신을 끌어올려 다시금 자연을 넘어선다.

 

이제 생성하는 신은 인간의 의식에서 인식하는 정신(또는 인식하는 이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3단계의 변증법적 보행步行이 새롭게 시작된다.

 

이렇게 볼 때, 헤겔의 체계는 3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뉜다.

즉자적卽自的이고 대자적對自的인 이념에 대한 학문, 말하자면 세계 창조에 앞선 신의 생각을 사유하는 논리학, 타자적他者的 존재(달리 있음)로 있는, 즉 외화되어 있는 이념에 대한 학문인 자연철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화로부터 그 자신으로, 즉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이념에 대한 학문인 정신철학.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인 정신철학의 가장 낮은 단계는 개별 인간에 상응한다. 개별 인간에게 있어 생성하는 신은 아직 “주관적인 정신”이다. 이에 반해 가족, 사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생성하는 신은 “객관적” 형태를 갖는다. 이때 국가는, 헤겔 변증법의 틀에 따르면, 개별 인간보다 “더 우월한 성질”을 의미한다. 국가는 주관적인 도덕과 자신의 특수한 욕구를 가진 개인과는 대조적으로 객관적인 법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생성하는 신은 예술과 종교, 철학 안에서 발전의 최종 단계에 이른다. 이 영역들에서 생성하는 신은 자기의 이성을 “절대적으로” 실현한다. 그래서 헤겔은 최종 단계의 신을 또한 “절대적 정신”이라고 부른다.

 

정신이 예술과 종교, 철학에서 궁극의 단계에 이르는 것은 이 영역들이, 특히 철학이 모든 학문들보다 우월하게 세계의 대립들을 화해시키고 이들을 조화로운 전체로 변화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곧 예술 등 세 영역들의 목적은 전체 진리와 이성 그리고 그와 함께 자유의 전개라는, 생성하는 신의 목적에 상응한다.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이란 두 작품은 헤겔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816년이 돼서야 비로소 헤겔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로 임용된다. 헤겔의 교수 임용이 이렇게 늦은 것은 애매하고 이해하기 힘든 그의 문체 탓이다. 대학의 총장들은 그가 학생들에게 무리한 이해력을 요구하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헤겔은 8년간 김나지움의 교사로 강의한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비로소 그같은 의구심들을 지울 수 있게 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있는 동안 헤겔은 『엔치클로페디(Enzyklopädie der philosohischen Wissenschaften)』를 출간한다. 철학적 관점 아래에서 당대의 총체적인 지식을 기술하고 정리한 책이다. 헤겔은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 네카어강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삶”을 그는 흡족하게 여긴다. 한 일화에 따르면, 그는 몇 시간 동안을 산책하면서 구두 한쪽을 잃어버리고도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신의 사유에 골몰한다.

 

그렇지만 하이델베르크 생활은 그의 삶에서 ‘막간극’일 따름이다. 1818년 드디어 그는 베를린 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고, 철학자 요한 고트리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의 후임 교수가 된다.

 

이때 그의 나이 48세이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고액의 연봉(2,000 탈러의 연봉)을 받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가족과 함께 라이프치히가街로 이사하고, 나중에 다시 학교에서 4천2백보 떨어진 쿠퍼그라벤에 있는 집으로 옮긴다.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헤겔에게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도시에는 약 18만 명의 주민이 거주한다. 당시 한 사람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240분이면 이 수도를 다 둘러볼 수 있다”. 쿠퍼그라벤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이다. 슈프레 강의 한 지류에는 배들이 미끄러지듯 떠다니고, 큼직한 분수가 있는 공원은 산책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비록 그의 강의는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지만 헤겔은 이제 수강생의 숫자가 적은 것에 대해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주당 약 10시간씩 강의한다.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소령들, 대령들, 추밀고문관들”이 그의 강의를 들었다. 그의 명성은 높아가고 당대의 지도적 인사들이 그를 방문한다. 베를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철학의 독재자”라고 부른다. 헤겔은 어떤 이의제기들이나 의심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자기 이론의 참됨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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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렵 헤겔의 주요한 관심분야는 법과 역사이다. 이 연구의 결과는 『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와 『역사철학강의(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란 저술 안에 정리된다. 그는 여기서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명제를 선언한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

 

이때 그는 이성 개념을 개별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다시금 생성하는 신으로 이해하고 있다. 생성하는 신은 진리와 오류가 맞서 투쟁을 벌이는 세계사의 피로 얼룩진 법정을 자신의 이성을 관철시키는데 이용한다. 그렇기에 “세계사의 주된 내용은 이성적이며 또 이성적이어야 한다.”

 

이 철학자는 세계사에서는 또한 비이성적인 힘들이 승리하기도 한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의 기교를 부려 물리친다. 그는 이성이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곧잘 이용하는 “이성의 간계”에 대해 말한다. 이런 뜻이다.

역사에서 천인공노할 불의가 득세하는 시대는 생성하는 신이 자기실현으로 가는 길에 거치는, 말하자면 단지 우회로일 뿐이란 것이다. 따라서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은 언제나 또한 이성적이다란 말은 원칙적으로는 타당하다. 그것은 절대 이성의 진로에서 한 걸음의 전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관이 헤겔로 하여금 세계 이성을 항상 권력이 승리를 구가하는 곳에 옮겨 놓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나폴레옹이 세계정신의 육화肉化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다가, 그가 패배하자 이번에는 세계이성이 방향을 바꿔 프로이센 국가로 내려앉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헤겔은 대뜸 프로이센을 신적 이성의 최종 단계로 간주한다. 그는 세계정신이 프로이센에서 자신의 목적, 즉 절대 진리의 전개를 달성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철학자는 또한 국가를 찬양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주관적 바람과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란 아주 사소한 존재라는 점을 주지시키는 일에 진력한다. 오직 “국가의 시민”이란 자격으로만 시민에게 의미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헤겔은 또한 1819년 3월 23일 칼 루드비히 잔트(Karl Ludwig Sand)란 대학생이 작가인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August von Kotzebue)를 살해한 이후에도 프로이센 국가에 대한 숭배를 거두지 않았다.

 

이 사건은 독일 역사에서 비극적인 한 획을 그은 사건이다. 가까스로 지속되던 자유화가 이를 계기로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부는 칼스바트에서 언론의 자유를 폐지하고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 교수들을 해직시키기로 결정한다(칼스바트 결의). 독일 동맹에서 비판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

 

헤겔은 정부 편에 선다. 한 동료 교수가 정치범 잔트의 어머니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는 이유로 해직 여부가 당국의 결정에 맡겨지게 되자, 헤겔은 이를 지지한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는 자신의 학문적인 적대자를 제거할 목적으로 정부와의 관계를 이용하기조차 하였다. 프리드리히 에두아르트 베네케(Friedrich Eduard Beneke)란 강사는 헤겔의 이론을 전혀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 때문에 강사 자격을 잃게 되었다.

 

슈바벤인人[헤겔]은 13년간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총장이 되고, 그리고 곧 사람들은 그를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라고 불렀다. 그의 영향력은 독일의 다른 대학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생성하는 신, 세계 정신에 대한 자신의 이론이 거의 모든 철학과의 수업계획에 포함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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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예기치 못하게 그는 1831년 11월 14일 죽었다. 그의 사인은 콜레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은 자고 있는 그를 엄습하였던 것이다. 그의 시신은 전염의 위험 때문에 “콜레라 묘지”에 묻히게 되어 있었지만, 영향력 있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는 오라니엔부르크 성문城門 앞에 있는 도로텐 시립묘지에서 마지막 안식을 얻었다.

 

서구 철학에서 그는 한편으로는 그때까지 사유의 전 역사를 자신의 체계 안에 담고 한 시기를 종결시킨 아마도 가장 포괄적인 사상가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뒤이은 거의 모든 위대한 사상가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출발점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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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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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둥글다 (2)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Ⅱ. 있는 듯 있지 않은 있는 것 같은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너♪”

2014년에 발매된 ‘썸’(some)이란 노래의 가사 일부이다. 서로 호감을 갖고 있고, 또 때로 특별한 구속 없는 만남도 이뤄지고 있지만 사랑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남녀 사이를 ‘썸’이라 부르며 그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남녀 가수의 듀엣곡인 이 노래는 발표 당시 8개 음원 사이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등 대박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보다 더 히트인 것은 노래가 나오고 나서 ‘썸’은, 원래 그런 뜻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아직은 분명하지 않지만 막 사랑이 움트는 사이를 가리키는 말로 엄청난 유행어가 되었다. 생각하면 그런 단계를 가리키는 우리말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말이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런 사이라는 게 딱 꼬집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모호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 노랫말은 상대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온몸이 파릇파릇 반응하면서 때론 달콤하고 때론 쌉싸름한, ‘사랑이 (아직) 아니다.’는 말은 부족하고 ‘(이미) 사랑이다.’는 말은 과한 남녀관계를 말로써 나타내고 있다. 정작 노래를 부른 남자 가수는 처음 그 부분을 듣고 “말장난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불확정적인 썸의 ‘사랑’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이라 할 존재가 그렇다. 존재는 ‘있는 듯 있지 않은 있는 것 같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유야무야有耶無耶하다.’ 현명한 사람들이 굳이 유무 중 하나를 택해 말하지 않음도 따지고 보면 그에 연유할 것이다.

“순수 존재는 순수 무와 같다.”(헤겔)


“현묘한 이치는 없고 없고 있고 있고 있고 없는 중中에 있다 [妙妙玄玄玄妙理 无无有有有无中].”(일부一夫 김항金恒)


“브라만은 존재로도 무로도 말해질 수 없다.”(바가바드기타)


“지극한 큰 하나[大一其極]는 … 무와 유가 뒤섞여 있다[無有而混].”(발귀리發貴理) 등.

 

그러면 존재는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하이데거는 194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 취임 강연인 Was ist Metaphysik?(『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4판을 출간하면서 ‘Nachwort[後記]’를 추가한다. 그는 그곳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모든 존재자와 단적으로 다름은 존재자-아님(das Nicht-Seidende)이다. 그러나 이 무는 존재로서 현성한다. 만일 우리가 무를 단순한 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것이라고 소박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이다.

 

우리는 그렇게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고 무의 난해하고 다양한 의미를 포기하지 말며, 무에서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것[존재]의 영역성(Weiträumigkeit)을 경험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무에서 경험하는 것은 바로 존재 자체이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무란 존재로서 나타나는데, 이는 존재가 스스로를 펼치는 영역화의 사태란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존재 물음에 올바로 들어서기 위한 준비가 될 것이란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 사유에서 우주의 궁극적 목적이나 존재의 최종 근거를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에게 존재는 근거가 아니며 신神은 더욱 아니다. 존재는 도대체 어떤 무엇으로 있는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님’(das Nicht-Seidende)으로서 무와 같다. 이때의 무는 전통 형이상학이 이해하듯, 존재자 전체의 부정이나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게 아니다.

 

불교 및 인도 철학자인 Zhihua Yao는 지금까지 동서 사유에서 논의된 무 개념을 다음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Typology of Nothing: Heidegger, Daoism and Buddhism」)

1) 일반적으로 부재不在로 알려진 결여적 무
2) 부정적인 무 혹은 총체적 무
3) 본래적 무, 즉 존재와 존재론적으로 등가等價인 무.

1)의 무는 예컨대 그림자, 차가움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결핍의 그것이다. 그림자는 빛의 결여이고 후자는 따뜻함의 부재不在이다. 노자의 ‘무위無爲’나 ‘무명無名’에서의 무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2)의 무는 칸트가 개념이 없는 빈 대상이라고 가리키는 것으로서 “논리적 불가능성”을 말한다. “자기 모순적인 개념의 대상은 무이다. 왜냐하면 이런 개념은 없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부정적 무)이기 때문이다.”(Kritik der reinen Vernunft) 예컨대 ‘불임不妊인 여자의 아들’, ‘둥근 사각형’과 같이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3)의 무는 텅 비어있지만 동시에 존재 분만分娩의 가능성으로써 충만돼 있다. 존재로서의 무이다. 예컨대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의 근원인] 천문天門은 무유无有며 만물은 이로부터 나온다[天門者无有也, 萬物出乎无有].”(『장자』 「경상초庚桑楚」)

 

또한 불교의 공空 개념이 이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공은 ‘고유한 본성의 결여[無自性]’를 가리킨다. 중관학파, 유가학파 등 여러 종파들 사이에서 공에 대한 해석은 차이를 보이나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진여眞如, 즉 절대적 실재가 공 개념을 통해 드러난다는 이해가 지배적이다. 이른바 이 묘유진공妙有眞空의 공 또한 본래적 무이다.

 

하이데거에서 무는 위 유형론에 따르면 세 번째의 무, 즉 본래의 무 또는 존재로서의 무에 해당한다. 그는 유와 무가 공속성共屬性을 이룬다고 해명한다. 이는 확고한 배중률排中律의 형식논리로써는 하이데거의 유무 문제에 올바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명제와 그것의 부정 둘 가운데 하나가 반드시 참이라는 배중율에 따르면 유 아니면 무일 뿐이지, 유무 양립을 말하는 3)의 이해란 부조리하거나 기껏 ‘신비한’ 소리이다. 이는 공속성으로 있는 유무의 사태는 개념이나 논리로써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명백한 것들의 여백에 있음을 지시한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제시하는 무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기술한다.

“무는 하나의 대상도 하나의 존재자도 아니다. … 무는 존재자에 대한 반대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존재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 존재자의 존재에 무의 무화無化가 일어난다.”


“사유가 존재를 사유하기 때문에 사유는 무를 사유한다.”


“존재자의 타자로서의 무는 존재의 면사포(Schleier des Seins)이다.”


“존재와 무는 서로 나란히 병렬적으로 생기하지 않는다. 하나의 친족 관계 속에서 일방은 타방으로 향하고 있다. … 무가 존재자로서 존재하지 않는 그만큼 존재도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한다.”(이상 Wegmarken『이정표』)

 

따로 설명이 요구되는 말들이지만, 하이데거는 존재와 무를 함께 속하는 것으로 또는 등가적等價的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비교적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무에서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것[존재]의 영역성을
경험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무에서 경험하는 것은 바로 존재 자체이다.”

 

여기에 이르러 앞의 인용문에 담긴 의미는 다음과 같이 좀 더 구체화된다.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하며, 나아가 이 공속성은 둘 사이의 ‘사이’를 이루는 존재 자체의 영역으로부터 성립한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유와 무의 동일성과 그것의 영역적 성격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미 말한 대로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본질은 은폐와 어둠, 즉 비진리로부터 비은폐와 밝음의 진리로 자신을 펼치는 일어남, 사건으로 이해돼야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본질’(Wesen)은 ‘현성하다’(wesen)라는 동사적 사태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 망각은 그렇게 생기하는 현성함으로서의 존재를 바라보지 못한 데 있다. 그 대신 형이상학은 개념적으로, 명사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예컨대 이데아, 실체, 정신과 같은 존재자성性(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을 존재로 여긴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물음에 답하면서 이것[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앞서 존재를 표상하고 있다.

 

… 그렇지만 형이상학은 존재 자체를 언어로 이르게 하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형이상학이 존재를 진리에서 사유하지 않고 진리를 비은폐로서 그리고 비은폐를 본질에서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발언들은 “그 형이상학의 시작에서 완료에 이르기까지 기이한 방식으로 존재와 존재자의 철저한 혼동 속에 움직이고 있다.”

(이상 Was ist Metaphysic?『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존재 자체가 발현의 사건으로 밝혀짐에 따라, 존재와 상반되는 무는 존재 진리의 숨김과 감춤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이데거에서 유와 무는 곧 감춤과 밝힘, 은닉과 발현의 문제가 된다. 때문에 무와 존재는 따로 떨어진 것일 수 없다.

 

존재는 은닉으로부터 비은폐로 환히 트임인 한, 그것은 언제든 다시 은닉과 부재로 달아날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은닉은 발현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며 발현은 은닉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은닉으로서의 무는 존재를 존재로서 열어 보여주는 가능성으로서 “근원적으로 [존재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Wegmarken) 무는 존재를 감추면서 동시에 내보이는 “존재의 면사포”이다. 반면 존재의 편에서 보면 존재는 은닉의 면사포, 부재의 어둠을 뚫고 밝게 드러나는 것이다. 존재는 무로부터의 탈은폐脫隱蔽로서 무에 속한다.

 

그리하여 은현동시隱現同時, 은닉과 비은폐는 동시적이며 함께 속하는 것이다. 곧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존재와 무는 마치 산과 골짜기처럼 서로를 포함한다.

“존재자의 개방성은 필연적으로 그 자체 은닉의 극복이다. 마치 계곡이 산에 속하듯이 비은폐에는 은닉이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이다.” (Vom Wesen der Wahrheit『진리의 본질에 대하여』)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한다.” 둘 사이에는 “어떤 매개도, 어떤 이행도 없다. 왜냐하면 둘은 그 자체 그들의 본질에 따라 직접적으로 서로 속하기 때문이다.”(Parmenides)

존재로서의 존재는 유도 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둘 다이다. 존재는 ‘썸’이다.

 

이로써 존재와 무의 사이를 이루면서 둘을 동시에 붙잡고 있는 것은 밝게 트이며 영역화하는 존재 진리, 그 비은폐성의 열린 영역으로서 밝혀진다. 즉 둘의 중심이나 사이 영역은 은닉으로부터 발현하며 다시 은닉으로 달아나는 존재 자체의 진리 방식과 지평이다.

 

무에서 경험하는 영역성은 존재 자체이다. 존재 자체가 영역화하는 것이다. 그 영역은 존재의 진리가 머물고, 그럼으로써 존재와 무의 공속성이 일어나는 ‘동안의 폭’이자 ‘폭의 동안’으로서 시공간이다.

 

 

존재는 둥글다(3) - 사방四方으로, 둥글게 트이는 존재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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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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