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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구스족의 이동과 기원 (구전口傳 설화를 중심으로)

(Ранние стадии этногенеза и миграции тунгусов в эпических традициях эвенков)

 

저자: 러시아 문헌학 박사 알렉산드르 바를라모브(Александр Варламов)

게재학술지: 《북동부연합대학교 통보》 (Вестник Северо-Восточного федеральн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имени М. К. Аммосова), №3(19), 2020, 30~40쪽

 

🚩서론

퉁구스-만주 민족의 초기 역사는 오랜 시간 동안 논란이 많은 문제로 여겨진다. 오늘날에는 퉁구스족 기원에 대한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즉, 남부(만주) 기원설, 바이칼 호 기원설, 바이칼 호 동부 기원설 그리고 바이칼 호 서부 기원설이다.

 

거의 모든 학자들은 인류학적 연구와 유전학적 연구 자료에 의거하여 퉁구스-만주 민족의 문화생활과 가치관 토대의 형성에 해당된 시대를 신석기 후기로 간주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접근은 여러 학문의 융합적인 연구라고 했다. 또 다양한 전문 분야의 연구 자료와 더불어 역사적 사실의 출처로서 퉁구스-만주 민족의 구전설화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퉁구스족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서 구전설화 자료를 활용한 것은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실현되고 있다. 러시아 고고학자인 오클라드니코브(1908~1981)와 마진(1938~2008)은 시베리아 신석기 시대 벽화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에벤크족 민간전승, 구체적으로는 영웅 사냥꾼이 사냥무기를 발명한 이야기, 땅을 창조한 이야기, 인간과 동물 간의 동거 이야기 등의 주제를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또 구전설화는 퉁구스계의 여러 역사발달 단계와 민속 전통문화에 해당된, 소련 언어학자인 바실레비치(1895~1971)의 연구를 입증하는데 보충자료가 되었다. 퉁구스-만주계 공동체의 대표적인 구전설화 내용은 높은 역사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러한 연구 접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본 논문의 연구 목표는 퉁구스-만주계 민족의 초기 역사단계에 해당되는 민족 기원 과정과 중요한 문화적 현상을 밝혀내는 것이다. 융합적 연구접근법을 취하는 본 연구에서는 구전설화 자료가 일정한 역사적인 사실을 전해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퉁구스-만주 민족의 서사적 문화는 독특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하여 구전설화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인식하는 주변 환경과 지구와 인간의 진화 그리고 공동체의 발달에 대한 내용이 보존되었다. 대부분 영웅 전설의 내용 전개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동쪽으로 향하는 것과 그 여행의 목표에 대한 것이다. 에벤크족 민간전승은 주로 바이칼 호부터 아무르 강 하류까지의 지역에서 대규모의 교류와 동시에 이루어진 민족 발달에 대한 역사발달 단계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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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사냥 중심인 고대 유목 문화

고대 시베리아 학자들은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시점이 훗날에 시베리아에서 거주할 수많은 민족 형성의 시작점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은 오늘날의 민족들의 깊은 뿌리를 담고 있는 작은 무리 단위의 부족들이 존재한 흔적을 신석기 시대 선사문화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오클라드니코브, 「바이칼 호 서부지역의 신석기와 철기」, 1950).

 

예를 들면 미토콘드리아 DNA의 분석은 북부 아시아 지역의 이주 현상과 민족 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대기를 제공해주었다. 이에 따르면 에스키모알류트족과 축치에스키모족 유전자는 8천 년 전에서 1만 년 전 시대에 해당되고 에벤크족 유전자는 6, 7천 년 전 시대에 해당된 것으로 확인되었다.(떼렌코, 「미토콘드리아 DNA의 가변성 자료에 토대로 북부 아시아 토착민의 분자 계통생물지리학적 연구」, 2010, 8쪽).

 

바실레비치에 따르면, 에벤크인들의 민속학적 문화의 토대를 제공해주는 폭이 넓은 사냥 스키, 에벤크식 요람, 짐을 등에 지고 운반하기 위한 기구 (일종의 지게), 조립식 원뿔 집 등과 같은 것은 이미 기원전 4천 년에서 기원전 3천 년 사이에 세로브스카야(Serovskaya) 문화에서 존재했다고 한다. 이러한 민속학적인 요소가 발명된 것은 고대 퉁구스인 사냥 유목 문화 발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바실레비치의 추정은 언어학적 분석과 바이칼 호 서부 지방에 발굴된 고고학적 문화와의 유사성에 의거한다. 또 그 학자는 무당에게 도움을 주는 보호신(세벤이라고 하는 나무 우상) 사상도 그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바실레비치, 「퉁구스-만주계 민족 기원에 관하여」, 1963, 57~61쪽).

 

바이칼 신석기 시대에 단순궁單純弓과 화살이 발명되고 사슴 사냥 도구가 한층 더 발달되었다. 후에 이동식 사냥 생활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와 함께 복합궁複合弓이 발명되었다. 바이칼 호 서부 지역에 고대 사냥꾼의 거주지에서 발굴된 뼛조각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8천 년 전에서 1만 년 전에 사슴 사냥 비율이 급히 증가하여 전체 발굽동물(유제류有蹄類) 포획에서 70%를 차지한 것으로 밝혀졌다.(클레멩치에브, 「안가라 강 북부 지역의 초기 홀로세 동물상에 대하여」, 2014).

 

사슴 사냥은 유목생활의 기동성뿐만 아니라 새롭고 더 효율적인 사냥 무기를 이용한 것을 요구한다. 이로 인하여 기원전 4천 년에서 3천 년 사이 바이칼 신석기 문화에서 복합 각궁角弓이 발명되었다.(오클라드니코브, 「바이칼 호 서부지역의 신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까지」,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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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의 고 퉁구스인 이주

 

 

(참고: 바이칼 호 신석기 문화는 어부와 사냥꾼으로 구성된, 바이칼 호 서부 지방에 파생된 부족들의 선사 문화를 말한다. 힌스카야 문화(Khinskaya, 기원전 5천 년대), 이사커브스가야 문화(Isakovskaya, 기원전 4천 년대), 세로브스가야 문화(Serovskaya, 기원전 3천 년 상반기), 키토브스가야 문화 (Kitovskaya, 기원전 3천 년 하반기)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시대의 전반적인 상황은 정착생활이 유목생활로 변경된 것과 관련이 있다. 유목생활 방식의 발달로 인해 사냥꾼의 분포 지역이 넓어졌다. 오클라드니코브는 신석기의 시베리아 거주인을 기반으로 최초의 개체군個體群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다른 여러 지역 중에서 특히 바이칼 호 신석기 문화의 분포 지역을 부각시켰다. 이 지역의 경계는 다음과 같다. 서쪽에서는 오비 강과 접근한 예니세이 강의 유역, 북쪽에서는 야쿠티야 숲지대, 인디기르카 강과 꼴르이마 강의 상류 지역, 동쪽에서는 오호츠크 해의 연안, 남쪽에는 몽골 일부 지역과 중국 북부이다. (오클라드니코브,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 민속학적 출처로써 신석기 시대 유산에 관하여」, 1941).

 

신석기 시대 사냥꾼의 이동 흔적은 이 폭넓은 지역을 포함해서 레나 강의 상류와 중류, 아무르 강, 알단 강 유역, 마야 강 유역 그리고 올료크마 강 유역에 발굴된 고고학적 유적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림 1.) 대부분의 신석기 시대 유목민 사냥꾼들은 오늘날의 퉁구스-만주계 민족의 머나먼 조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하여 신석기 암각화 연구자들은 문화적 유사성을 밝혀내기 위해서 주로 에벤크족의 구전설화를 활용하는 것이다. 오클라드니코브와 마진은 올료크마 강 유역의 암각화를 고찰하여 그 주제와 플롯이 에벤크족 신화와 전통 의례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오클라드니코브, 마진, 「알단 강 유역의 벽화 연구」, 1979)

 

고대 퉁구스인들의 이동 경로는 바이칼 호 서부와 동부 지역을 극동 지역과 연결했음이 틀림없다. 이는 에벤크족 구전설화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이야기의 중심 플롯은 주인공이 자신 고향을 떠나 사냥거리가 풍부한 지역이나 자신의 동반자를 찾기 위해서 해가 뜬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구전설화에 나타난 영웅의 이동 방향은 수많은 학자들이 추정하는 바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에벤크족 조상이 바이칼 호 서부와 동부 지역을 떠나 오늘날에 퉁구스-만주계통에 속하는 민족들을 형성했다는 곳, 즉 아무르 강 서부 지역과 연해주 지방 그리고 중국 북부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퉁구스계 민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대규모 민족 간의 상호작용은 퉁구스족 조상과 아무르 강 토착민 간에 발생하였다. 오클라드니코브와 떼레뱡코(1943~2013)는 퉁구스인들의 조상이 아무르 강 지역으로 유입한 시기를 초기철기 시대(기원전 1천 년)로 지정했다. 이에 따르면 유목 사냥꾼들의 남동쪽으로 이주한 방향은 수렵채집 사회구성원들의 생계활동으로 인해 결정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오클라드니코브, 떼레뱡코, 「아무르 강 서부와 연해 지역의 고대 역사」, 1973).

 

신석기 시대에 연해주 지방과 아무르 강 서부 지방에서 북부 유목민이 생활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클라드니코브와 떼레뱡코는 극동 고고 유적지 발굴 과정에 출토된 기원전 1000년경에 해당되는 다양한 유물들을 제시했다. 고대 시베리아 연구자들에 따르면 북부 유목 사냥꾼의 무리는 초기 철기시대부터 남쪽으로 유입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오랜 이주 과정에서 새로운 지역에서 문화의 교류와 민족의 교류가 동시에 발생하면서 유목 사회가 반유목 사회로 전환되었다. 북부 퉁구스족 문화에 해당된 요소는 아무르 강 지역에 거주한 나나이족 문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무르 강 서부 지역과 연해 지역에 출토된 기원전 2천년기 후반에서 기원전 1천년기 초반 사이 고고학적 유물이 이를 증명해준다. 오클라드니코브에 따르면 북서쪽과 북동쪽 시베리아 그리고 북부 지방의 무리는 대규모 이동으로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처음에 아무르강 하류 유역에 유입하고 그 후, 전체 지역으로 확산하였다. (『나나이족 문화역사 (민속학적 자료집)』, 2003, 194쪽).

 

퉁구스계 조상이 대규모로 이동한 시작점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저자에 따르면 기원전 3천 년에서 기원전 2천 년 사이에 시작한  퉁구스계 조상과 그 후손의 이동은 여러 시대에 거쳐 여러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바이칼 호 서부와 동부 지방과 아무르 강 하류 지방을 연결해주는 여러 개의 수로를 통해서 활발한 문화 교류로 양 문화의 요소들이 다른 문화에 유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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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지역의 초기 민족관계

신석기 시대 후기의 퉁구스족 이웃 관계에 대해서는 고대 중국 기록에 나타나 있다. 이에 따르면 기원전 2200년경에 남퉁구스인들이 수로를 통해서 중국 수도를 방문하였다. 이 기록은 민족 간의 무역교류와 정치관계를 밝혀준다. 원래부터 중국인들이 거주한 요동이라는 나라는 남쪽과 북쪽 그리고 동쪽에서 퉁구스인들과 경계를 하므로 이 기록은 지리적으로도 증명이 된다. (비추린, 「고대시대 중앙아시아의 민족에 대한 자료집」, 1951).

 

이로 인하여 신석기 시대에 아무르 강 지역으로 유입한 퉁구스계 조상과 토착민 간의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문화 교류 시대 이후에 남퉁구스와 중국과의 관계가 맺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퉁구스족은 남과 북의 두 갈래로 분리되기 전까지 기초 공동체의 상당히 긴 역사적 발달단계를 거쳤음을 추정할 수 있다.

 

어업생활을 하던 정착민인 니브흐족의 조상은 극동 지역 퉁구스족과 가장 최초의 관계를 맺은 민족이다. 여러 학자들은 아무르 강 서부 지역 민족들이 가진 퉁구스족 문화의 독특한 요소들에 의하여 퉁구스-만주계 민족 형성에 니브흐족이 많은 기여를 했다는 것으로 보았다.(떼베치, 「캄차카 반도의 인류학적 연구」, 1951).

 

퉁구스계 공동체에 새로운 요소들이 유입된 것은 신석기 글라스고브 문화(앙가라 강, 셀렌가 강, 기원전 18~13세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신석기 바이칼 호 서부와 동부 그리고 아무르 강 하류 지역에 거주한 개체군 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퉁구스족의 어업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오클라드니코브, 「바이칼 호 서부지역의 신석기와 철기」, 1950).

 

퉁구스계 조상과 동부 지역 토착민 간의 관계 흔적은 에벤크족 신앙에서도 드러난다. 세벤카 조물주의 보조자인 아비새에 대한 신앙은 바로 그 한 예이다. 아비새 서식지는 숲 지대와 관련이 없으므로 아비새의 가치관은 연해 지역 문화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닥사미, 「아무르 강 하류와 사할린 주민의 여름철 이동수단 구성요소의 유사성에 대하여」, 1976).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원전 3천년에서 기원전 2천년대 사이 아무르 강 하류 지방에서 사냥과 어업을 중심으로 한 정착민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닥사미, 「니브흐족 역사와 민속학적 연구 문제에 대하여」, 1976).

 

에벤크 서사시에서 드러나는 물과 바다신앙에 대한 묘사는 아무르 강 토착민과 퉁구스계 조상의 문화적 교류와 민족적 교류에 대한 상징으로 간주된다. 니브흐족 신앙관에서는 고래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래는 바다의 주인이고 인간에게 도움을 제공해주는 존재이다.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할 때 고래를 만나게 되면 바닷물에 음식과 담배를 던지면서 조상신에게 복을 비는 풍속이 있다. 이 신앙관은 에벤크족 문화에 유입이 되어 구전설화에서 등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퉁구스족 가치관에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고래와 함께 바다 속 존재를 신으로 모시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는 유목사회가 어업 중심 정착사회로 전환되었다는 분명한 흔적이다.

 

민족 간의 상호작용은 주로 혼인 관계를 통해서 드러난다. 닥사미(1931~2014)에 따르면 아무르 강 유역과 사할린에서 다양한 언어권에 속한 종족들이 거주한다. 즉 퉁구스계 나나이족, 네기달족, 울치족, 에벤크족, 오로치족, 윌타족 그리고 다른 언어권인 아이누족과 니브흐족이다. 이 민족 간에 주로 혼인 관계로 드러난 뿌리 깊은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퉁구스계 공동체 형성에는 그 밖에 민족들이 기여를 했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 민족 상호관계는 그 훗날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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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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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치족 제사문화(할린 오로치족, 아무르 강 연안의 울치족과 네기달족,

가린 나나이족, 바이칼호 퉁구스족)

 

상생문화연구소 류한나 연구원

 

** 이 글은 소련 민속학자, 인류학자 바실레브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Vasilev Boris Aleksandrovich, 1899~1976)가 『소련민속학』 (№ 3, 1940, 161~171쪽)에 실은 논문 ‘연해주 오로치족의 전통 사냥 방식(Старинные способы охоты у приморских орочей)’의 내용을 요약, 소개한 것이다.

 

1. 한민족 신관과의 유사성

20세기 초반까지 원시적인 성격을 유지해온 러시아 소수민족인 오로치족과 나나이족의 정신문화는 상고시대 한민족 정신문화와 두 가지 측면에서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다.

 

고대 한민족은 제단을 만들고 우주와 하늘의 통치자이시고 만물을 낳아주신 삼신 상제님을 숭배하는 의식이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로치와 나나이족 또한 제단을 설치하고 부아(Bua) 신 또는 상기 마파(Sangi mafa) 신을 숭배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아신 또는 상기 마파신은 자연과 하늘 그리고 우주의 통치자이신 주신이다.

 

‘자연’이라는 개념은 ‘만물’이라는 개념을 내포하므로 두 어휘를 동의어로 간주하고 두 신앙관 간의 밀접한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삼신 상제님이 무형의 원신과 유형의 주신, 즉 두 가지 성격을 갖는 신관과 마찬가지로 오로치/나나이족 문화에서는 부아(상기 마파) 신은 형상이 없는 무형의 부아 원신과 인격화가 되어 전설속 할아버지 모습으로 나타난 유형의 부아 에드에니 주신의 두 신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

 

오로치족에게는 한민족이 제사의식에 활용한 솟대와 유사한 ‘코볼록토(kobolokto)’가 있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상고시대 한민족은 거대한 나무 앞에서 제사를 올렸다. 소도라고 하는 이 성스러운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서 솟대를 땅에 꽂아 솟대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수단이라고 믿었다. 

 

 

 

두 문화에서 동일하게 큰 나무 밑을 제사 장소로 지정한 것도 유사한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로치족은 제사 준비과정에서 둘레가 큰 나무을 정하여 그 앞에 큰 코볼록토를 세운다. 다음에 설치한 4개의 작은 코볼록토는 제단 기둥의 역할을 한다. 제사 의식을 행할 때 주 코볼록토 아래와 거대한 나무 아래로 제물을 뿌리며 ‘받아주소서’라는 기도를 올린다.

 

또 오로치족은 해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 얕은 물에 설치한 두 개의 코볼록토 사이에 생긴 통로를 통하여 제물을 던진다. 이때는 코볼록토가 솟대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신을 연결을 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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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약 

오로치족은 역사적으로 러시아 땅 먼 국경지역에 거주한 소수민족이다. 외만주와 연해주 지방 거주민들 중에서 오로치족은 가장 접근이 어려운 민족으로 꼽힌다. 이러한 역사적 고립은 사회구조에 영향을 미쳐 오로치족은 20세기 초반까지 재산격차가 거의 없는 부권 중심의 씨족 사회를 유지하였다. 물질문화는 원시적 수준에 머물렀고 산업은 낙후되었다. 소련에 정복되기 한참 전에는 오로지 모피에 관심이 있는 중국 상인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졌지만 이는 오로치족의 사회발전에 전혀 기여를 하지 못했다.

 

오로치족 문화에서는 사냥하기 전에 사냥꾼들이 팀을 꾸려 제단을 만들고 부아 신에게 제를 올린다. 한 오로치인에 따르면, 숲속에 설치된 사냥 텐트에 도착한 팀은 먼저 불을 피워 곡식을 삶는다. 며칠 동안 텐트에서 지내면서 코볼록토와 일라우를 제작한다. 코볼록토는 꼭대기 가지만 남기고 나머지 가지를 잘라낸 작은 소나무이고 일라우는 대패질이 된 나무 조각이다. 이러한 코볼록토는 해마다 새롭게 제작된다.

 

북방 지방 숲, 대패질이 된 나무 조각을 고정시킨 4개의 작은 코볼록토와 1개의 큰 코볼록토를 제작하고 큰 나무 앞에 세운다. 큰 코볼록토의 이름은 ‘노동키 에드에니’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코볼록토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코볼록토를 서로 연결한 다음 그 위에 나무판을 얹어 제단을 완성한다. 제단 앞에는 사냥꾼 수에 맞는 말뚝을 세워 그 위에 향로(키암푸)를 설치하여 숯과 ‘백산차’라는 풀을 올린다.

 

🔍제사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해가 진 후 그날 삶은 곡식에 바다표범 기름을 뿌려 술과 함께 코볼록토 제단에 올린다. 향로에서 백산차로 향을 피워, 연기가 나면 기도를 올린다.

 

“부아 구덴카 (하늘이시여, 살려주소서). 저는 어떠어떠한 부락에서 와서 부아 신께 연기를 올리기 위해 백산차로 향을 피웠습니다.”라는 기도를 드린 후, 텐트로 돌아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제단 앞으로 나온다. 백산차를 태운 다음 술과 삶은 곡식을 위로, 사방으로, 거대한 나무 아래로 그리고 코볼록토 아래로 뿌린다. 그때 비는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부아 바아하 (부아 신이여, 받아주소서). 우스까 바아하 (우스까신이여, 받아주소서), 후투 바아하 (후투신이여, 받아주소서)”라고 하고 그 지역의 다양한 지명과 강 이름을 말한 후 기도를 계속한다. 

 

“코볼록토 바아하(코볼록토신이여 받아주소서), 하 에드에니 바아하 (장소의 주인이신 코볼록토신여, 받아주소서!). 솜보레 바아하 (나쁜 호랑이신이여, 받아주소서!). 짐승을 잡게 해주세요, 돈을 벌게 해주세요. 짐승이 없는 것이 아니잖아요, 짐승은 아까운 것이 아니잖아요. 제가 안 잡으면 다른 사람이 잡아갑니다.”

 

기도가 끝난 후 모두가 텐트에 돌아와 큰 불을 피운다.

불에 술을 뿌리며 “부드야 바아하 (불의 신이여, 받아주소서!)”라고 한다. 텐트 곳곳에 술을 뿌리며 “말루 바아하 (아궁이 뒤쪽 벽 신이여, 받아주소서!), 쪼올로 바아하 (방구석 신이여, 받아주소서!), 우카 큰드르흐 바아하(문 신이여, 문턱 신이여, 받아주소서!), 항야 바아하 (마음신이여, 받아주소서!)”라고 기도를 올린다.

 

그 다음은 백산차 풀 한 다발에 삶은 곡식을 바르고 술을 뿌려 불에 던진다. 불이 타는 동안 ‘암바’라는 악신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기도와 좋은 꿈을 꿀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오로치 사냥꾼은 농산물 즉 피가 없는 제물로 제사를 지내지만 2~3년에 한번은 개를 잡아 바치는 풍습도 있다. 의례를 마친 다음날부터 사냥을 시작한다. 사냥 시즌이 끝나고 나면 작별 제사를 지내며 건강을 비는 기도와 내년에 다시 올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그때는 연기가 많이 나도록 백산차 풀에 기름을 뿌려 태운다.

 

오로치 문화에서 부아 신의 숭배는 다른 신의 숭배에 비해서 독특한 성격을 띤다. 부아 신은 형상, 즉 신상 자체가 없는 것이다. 레브 스턴버그(『타타르 해협의 오로치족』)에 따르면 “오로치 문화에서는 다른 원시적 문화와 마찬가지로 신의 형상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제물은 아무 곳에 던지거나 제물이 되는 개나 곰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신에게 바치게 된다. 오로치 문화에서 주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호랑이의 주인인 두스아 신의 숭배와 곰의 주인인 도온타 신의 숭배는 부아 신 숭배와 달리 샤머니즘의 성격으로 인하여 신상을 제작해야 하였다.

 

스턴버그는 ‘부아’라는 말을 ‘하늘, 우주-세계’로 번역하였고 세르게이 레온토비치(『러시아-오로치어 사전』)는 ‘세계(우주), 좋은 날씨’로 번역하였다. 부아 신에 대한 믿음은 자연과 날씨, 하늘과 땅 그리고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서 분리할 수 없는 신에 대한 원시적이고 범신론적인 신앙이다. 부아는 우주-세계다. 이와 동시에 ‘부아 에드에니’라고 하는 자연의 주인으로서의 인격신이다. 이는 전설로도 입증된다.

 

부아 신관은 수많은 퉁구스-만주 부족 문화  사할린 오로치족, 아무르 강 연안의 울치족과 네기달족, 가린 나나이족, 바이칼호 퉁구스족  에서 나타난다. 나나이 문화권에서 부아 신은 ‘상기 마파’ 또는 ‘삭디 아마’로 불리는 하늘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냥철에 그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하였다.

 

오로치족 문화에서 부아 신을 모시는 제사의식은 나나이족 문화와 세부적으로 유사하다. 이반 코즈민스키(『가린 나나이족의 물질 문화와 신앙 연구의 보고서』)에 따르면, 가린 나나이족 문화권에서는 상기 마파 제사는 마을 주변에 설치된 신의 얼굴을 새긴 말뚝과 성스러운 나무 앞에서 지냈으며 보아 신의 제사는 오로치 문화와 마찬가지로 타이라(tajra)라는 제단이 완성된 후에 사냥하러 나서기 직전에 지냈다.

 

흥미롭게도 의식의 기도문은 나나이어가 아니라 퉁구스어와 비슷한 언어로 올리는 것이다. 또 보아 신에 바치는 제사는 상기 마파 신의 제물과 달리 농산물인 제물로 모시는 고대 퉁구스 신앙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며 그 연원은 상기 마파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물과 불 그리고 하늘-땅(bua)에 제물을 바치는 것은 역사적으로 상고 시대에 해당되고 샤머니즘 의식은 그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나무에 부아 에드에니 형상을 새긴 것은 오로치족 문화권에서 그를 실존하는 인격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오로치족 전설의 마바차 할아버지, 마마차 할머니 그리고 하탈라 딸이 등장하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신이 인격화된 존재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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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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