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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둥글다 (4)-발현 혹은 심연,하이데거, 파르메니데스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Ⅳ. 발현 혹은 심연

존재와 하나의 특출한 존재자인 인간의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관계 또한 공속성의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없으면 존재가 없고, 따라서 ‘둥근 원’이나 사방으로 트이는 존재와 존재자의 함께 속함 같은 것도 일어날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에 속한다.

둘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해명될 수 있다. 존재의 본질이 비은폐란 규정은 존재란 언제나 은닉으로부터 밝게 드러남이란 점과 아울러 그 발현이 일어나 머무는 장, 말하자면 발현이 담길 ‘그릇’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존재는 비은폐로서 영역화하는 한, 개방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은닉으로부터 발현하는 또는 은닉으로 “물러남으로써 우리를 매혹하는 것”(Was heißt Denken?)은 오직 개방된 여지가 허락될 때 열어 밝혀지고 자유롭게 된다. 그리고 존재가 자신의 본질로부터 필요로 하는 개방성을 떠맡는 것은 사유하는 인간 혹은 인간의 사유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유를 통해 존재 진리의 장으로 쓰이는 데 있다.

“인간의 특출함은 그가 사유하는 본질로서 존재에 열려 있고, 존재 앞에 세워져 있으며, 존재에 관련된 채 머물면서 그렇게 존재에 상응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본래 이 상응의 관련(Entsprechung)으로서 있으며, 다만 그것이다.”(Identität und Differenz)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로서의 사유가 왜 존재 진리가 현성하는 ‘그릇’이 될 수 있는가?

그릇의 ‘미덕’은 텅 빔에 있다. 사유가 존재에 상응하려면, 다시 말해 존재로서의 존재가 체류할 개방성이 되려면 스스로를 비워 그로부터 그리로 존재 발현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인간의 사유는 어떤 식으로 그렇게 수행되는가?

하이데거는 ‘마음’, ‘심정’, ‘진심’을 뜻하는 ‘Gedanc’란 독일어 고어古語의 의미로부터, 사유를 “기억”(Gedächtnis)과 “감사”(Dank)로서 설명한다. 이때 기억은 단순히 상기하고 보존하는 인지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유의 본질을 이루는 기억이란 근원적으로는 그것이 향해 있는 것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그리로 마음을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기억은 “[사유거리로] 마음을 불러 모으는 것”(Die Versammelung des Denkens)(Was heißt Denken?)이다. 그럼으로써 기억은 자기 바깥으로 향하며 붙잡는 바 사유거리를 우리 가까이 이르게[현존] 한다. 사유거리들은 이를 통해 간수되고 지켜진다.

 

예컨대 내가 마음을 오롯이 기울여 기억 속에 지키는 것은 내 옆을 지나가는 아무개보다 또 내 앞에 놓인 어떤 것보다 ‘더 가까이’ 있다. 이에 따르면 기억으로서의 본래적 사유란 사유하는 바가 비로소 그 자체로 있도록 마음을 모아 간수하여 지키는 마음챙김(Mindfulness)과 같은 것이다.

 

이때 마음을 불러 모아 간수하여 지킴이란 단지 능동적이거나 단지 수동적인 게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향해 마음을 씀과 물러나 그것을 받아들여 감내하는 지킴이 ‘~이자 또한 ~인’의 방식으로 서로 결속돼 하나를 이루고 있다. 물러나면서 사유거리로 마음을 쏟고, 또한 동시에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물러서 그것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본래적 사유란 자기 밖으로[脫自] 앞으로 나아감이자 뒤로 물러섬, 정확히는 양자가 서로 속하는 합일의 구조로 이뤄져 있음을 말해준다.

그와 같은 역동적, 원환적 성격의 맞이가 그리고 오직 그러한 것만이 자신을 비워 사유거리가 현존하는 장을 내줄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물러서고 물러나는 동시에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개방성이 밝게 열리는 것이다. 본래적 사유는 그 개방된 여지에서, 또한 그것으로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은 영역화하는 존재 진리를 영접하는 마당으로서 존재하는 특별한 존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 사유는 존재자의 존재를 대상화하여 어떤 무엇임으로 이러저러하게 규정하는 방식의 사유와 무관하다. 존재가 그 자체, 즉 비은폐로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저 표상적인 방식의 사유를 포기해야 한다.

 

표상함은 인간이 스스로를 세계의 주체나 중심으로 여기면서, 모든 현실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붙잡아 이론적, 개념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자를 이성적으로 자신의 고려 안에 두는 계산적 사유이다. 계산적 사유가 꼭 수數와 관련된 작업을 하거나 계산기나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계산적 사유는 계산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보다 유망하고 경제적인 가능성들을 계산한다. 계산적 사유는 하나의 전망에서 다음 전망으로 분주히 뛰어다닌다. 계산적 사유는 결코 멈추지 않으며 마음이 모여져 있지 않다.”
(「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

 

근세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된, 표상적이며 계산적인 사유 방식의 밑바탕에는 모든 것을 파악 가능하고, 장악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권력 의지가 숨어 있다.

“계산적 사유는 무엇보다 의지의 사유며 모든 것의 계산된 조작에 겨냥돼 있다.”
(「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

 

 

존재에 올바로 상응하기 위해서는 모든 현존하는 것들을 무제약적으로 대상화하려는 지배 의욕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의욕하지 않음(Nicht-Wollen)을 의욕해야 한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인간 본질의 연관인 사유는 표상적 대상화의 사유에 비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다. 하이데거는 Gelassenheit(『내맡김』)에서 앞으로 나아감의 개방성과 뒤로 물러섬의 수용성으로써 수행되는 존재 사유를 ‘내맡김’(Gelassenheit)이라 부른다.

이곳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진리인 “사역에 적합한 [인간의] 관련”, 다시 말해 사역에 대한 “상응”을 우리 가까이 영역화하는 사역을 향해 자신을 ‘내맡김’으로서 규정한다. 그는 또 대상을 언제나 모종의 셈법 아래 넣어 놓으면서 의지의 무제약적 확장을 기도하는 일체의 ‘형이상학적’ 유위有爲를 포기하는, 그로부터 물러서는 ‘내맡김을 “기다림”과 같은 것으로 말한다.

 

과학자, 학자, 스승 세 사람이 들길을 산책하며 (얘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기술된 「내맡김의 토의」(이상 Gelassenheit)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있는가? 과학자와 학자는 의문을 갖는다.
여기에 스승은 말한다. 우리는 기다림 외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에서 내맡김의 기다림이란 존재를 위해 자신을 버리며 마냥 수동적인 상태로 ‘무기력하게’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존재 진리인 사역의 개방된 여지로 들어서 그것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맡김은 우리를 향해 펼쳐지는 것을 향해 마음을 모아 앞으로 나아감과 동시에 뒤로 물러남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내맡김은 그러한 방식으로 개방된 자리를 열어 영역화의 이행인 사역의 존재가 그리로부터 그리로 현성하게 한다. 모든 것들은 사역의 존재 발현에서, 그것을 ‘터전’으로  비로소 존재자로서 있게 된다. 그러기에 사역의 영역은 사물들이 표상의 대상으로서 우리 앞에 마주 서있는 공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이윽고 저의 본성과 기원에 머무는 개방된 장이다. 그 점에서 사역을 향한 내맡김의 ‘무위’는 또한 최상의 ‘유위’이다.

 

이러한 사태는 이미 존재와 인간은 함께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존재를 향해 사유로써 자신을 바치고 존재는 그 사유의 개방성에서 자신을 열어 밝히며 내준다. 존재와 인간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함께 속한다. 나아가 이 둘은 동일하다.

이때의 동일성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부터 그리로”(Identität und Differenz) 함께 속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동일한 것’은 존재 진리의 영역이자 사유의 개방성으로서 존재와 인간 사이의 ‘사이’며 중심을 가리킨다. 그곳은 “존재와 사유가 서로를 제 것으로 삼으면서 함께 속하고 그것들의 본질적 관계에 이르는 균형 잡힌 영역이다.”(Identität und Differenz)

 

이러한 동일성 개념은 일찍이 파르메니데스가 그의 『단편들』에서 마치 ‘화두話頭’와 같이 내건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이기도 하다.

 

 

존재와 인간은 이러한 함께 속함에서 각자의 본질에 이른다. 존재는 인간의 사유에서 자신의 참됨인 비은폐로서 머문다. 동시에 인간은 그렇게 존재 발현의 장으로 사용됨으로써 ‘존재를 지키는 목자’, ‘존재의 가까움에 거주하는 이웃’이라는 자기 고유함에 이른다.

존재에 대한 ‘다만 상응의 관련’일 따름인 그의 본질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 진리에 자신을 내맡기는 일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 인간의 본성인 사유가 거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존재 진리는 본질로서의 인간,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살고 죽는’ 곳이다.

 

이에 따라 인간을 향한 존재의 요구는 인간에게는 강요나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본질을 최고도로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마음을 모아 존재 진리의 장으로서 바치는 기억의 사유는 동시에 자신의 본질 유래에 머물도록 한 호의와 은총에 대한 감사함이다.

 

여기서의 ‘본질에 이르게 함’ 역시 형이상학적 혹은 과학적 의미에서의 근거지음과 무관하다. 존재와 인간이 이윽고 참됨으로 있는 곳은 존재와 인간보다 시간에서 선행하고 능력에서 우월한 근거가 아니다. 존재 발현의 영역은 근거를 거부하는 비근거(Ab-grund)로서 심연(Abgrund)이다.

발현이 지배하는 저 사이 영역은 스스로 밝게 트이는 ‘폭’[사이]인 동시에 그 영역화가 견지되는 ‘동안’[사이], 즉 시공간 또는 ‘시간-놀이-공간’이다. 시간과 공간 사이의 ‘놀이’는 시공간을 열어 존재와 존재자, 존재와 인간의 단일함 또는 둘의 균형을 붙잡으면서 존재의 진리를 나르는 일을 말할 것이다.

 

존재는 둥글다(5) - 최상의 놀이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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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둥글다(3) - 사방四方으로, 둥글게 트이는 존재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Ⅲ. 사방四方으로, 둥글게 트이는 존재

전통 형이상학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하이데거에서도 존재는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존재하게 함’이다. 즉 존재는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존재의 본질이 ‘밝게 드러남’의 비은폐인 만큼, ‘존재하게 함’의 사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일어난다

·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면서 그 빛 안에 존재자를 간수하여 비로소 존재자로서 있게 한다.
· 여러 존재자[多]는 그 하나의 존재 진리[一] 안에서 비로소 존재자로서 들어선다.
·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존재하게 함’은 존재가 자신을 환히 드러내는 밝게 트임 안에서 그리고 그 밝게 트임으로부터 끊임없이 존재자에게 고유하게 존재하도록 수락하고 베푸는 방식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존재하게 함’은 당연히 창조나 제작, 산출 등 인과론적 문맥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비은폐론적으로 이해돼야 한다. 그에게서 존재는 없던 것을 처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본연의, 그러나 숨겨진 자기됨으로 새롭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존재자는 존재의 존재하게 함에서 비로소 그 자신으로 자유롭게 된다.

 

심지어 하이데거는 존재 문제를 이해하는 첫 번째 관건은 존재가 마치 존재자인 양 그것의 근거를 구하고, 다시 이 근거의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얘기하지 않는 데 놓여 있다고 말한다.(Sein und Zeit)

 

달리 말하면 ‘무엇은 무엇이 낳고 이 무엇은 또 다른 무엇이 낳고 … ’ 하며 계보를 따지는 논리를 가지고서는 자신의 사유를 올바로 적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서 산과 집은 존재의 광휘 안에서, 말하자면 그 빛의 ‘은총’ 안에서 ‘왜’란 물음을 거부하며 각기 산과 집으로서 고유하게 머문다. 뜰의 잣나무도 그렇게 ‘이유 없이’ 서 있다.

 

 

 

하이데거는 비은폐론적 존재하게 함에 대해서 Identität und Differenz(『동일성과 차이)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존재자의 존재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Sein, welches das Seiende ist)를 가리킨다. 이때 ‘ist’(‘존재하게 하는’)는 타동他動, 이행(넘어옴)의 의미로 말한다. … ”


한편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에 속한다는 의미로 존재자의 존재이다. 그래서 “[존재의 이행은] 마치 존재자가 존재 없이 있다가 비로소 이 존재에 의해 관여되는 것처럼”, 존재가 따로 떨어진 그의 자리를 떠나 존재자로 넘어오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넘어서, 탈은폐하며 [존재자로] 넘어온다. 그러한 넘어옴을 통해 존재자는 비로소 그 스스로부터 비은폐된 것으로서 도래한다(ankommen). 이때 도래란 존재의 비은폐 안에 간수됨, 그렇게 간수된 채 가까이 머묾, 존재자로 존재함(Seiendes sein)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자로부터 존재자로 넘어오는 존재의 이행은 존재가 자신을 열어 밝히면서 영역화하는 사건을 말한다. 존재자의 존재는 밝게 트임의 영역 안으로 존재자를 감싸 현존하도록 하는(entlassen in das Anwesen) 것이다.

다시 말해 열어 밝혀지며 영역화하는 존재의 환한 ‘조명’ 아래 존재자는 비로소 이러저러한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서 들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영역적 존재는 불러 모으는 장(Ort)으로서 “스스로에게 불러 모으고 그렇게 모인 것을, 꿰뚫어 비추고 밝히면서, 간수하여 그것을 비로소 본질로 있도록 한다.”(Unterwegs zur Sprache『언어로의 도상에서』)

 

이와 같이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로 향하고, 존재자는 그 존재의 탈은폐 안에 간수돼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둘은 동시에 서로를 향한다. 그럼으로써 존재자의 존재와 존재의 존재자는 서로로부터 나뉘면서도 서로에게 속하며 단일함, 동시성을 이룬다. 이 단일함, 동시성의 사태 혹은 그 단일함이 일어나는 사이 영역이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에서 정작 사유돼야 할 ‘차이 자체’이다.

“존재자 전체 한 가운데는 하나의 개방된 자리가 현성한다. 밝게 트임이 있다. 이 밝게 트임은, 존재자로부터 사유해보면, 존재자보다 ‘더 있다’(seiender). … 이 환히 트이는 중심 자체가 마치 무(Nichts)와 같이 … 모든 존재자를 둥글게 감싼다.”(Holzwege『숲길』)

 

하이데거는 탈은폐의 밝음인 존재가 스스로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하나로 불러 모으는, 또 그렇게 불러 모여 하나를 이룸을 “모든 존재자를 둥글게” 감싸는 사태라고 말하고 있다. 존재의 밝게 트임은 원만한 원圓으로 영역화한다는 것이다. 또 Identität und Differenz에서도 존재와 존재자의 함께 속함을 붙잡고 있는 사이 영역은 원으로 표현된다. “하나의 원을 이룸, 존재와 존재자가 서로를 향해 번갈아 돎”

 

 

하이데거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가 서구 시원에 벌써 탈은폐하는 현존이란 의미의 존재를 영역적, 위상학적으로 이해하면서, “둥근 공”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파르메니데스는 본래적인 존재로서의 현존을 “어디서나 동일한 것 것으로서 고유한 중심에 있으며 이 중심으로서 원”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은 “포괄해나가는 회전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을 환히 밝히면서 간수하는 탈은폐의 중심에 존립한다.” 즉 둥근 존재는 “탈은폐하며 밝게 트임”(Holzwege)의 사건을 말한다.

존재와 존재자의 공속성[혹은 둘의 차이 자체]은 존재를 세계로, 존재자를 사물로 사유하는 곳에서도 반복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사물’이라는 것을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즉 이러저러한 자기 외적인 견해나 관점들을 모두 떨친 순수한 존재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그리고 세계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들의 총체가 아니라 세계로서의 세계를 말한다.

 

하이데거에서 세계 그 자체, 즉 본연의 세계란 하늘, 땅, 죽을 자들인 인간, 신적인 것들이 각자의 고유함을 견지하는 가운데 하나로 어울리면서 밝게 열리는 사방四方으로서의 세계다. 이 세계는 “존재의 진리가 비대상적으로 머무는”(Vorträge und Aufsätze ), “존재의 진리를 인간 본질에 접근시켜주는”(Die Technik und die Kehr『기술과 전향』) 열린 장이다.

 

반면 사물의 본질이란 세계를 자기 곁에 불러 모아 깃들게 하는 데 있다. 사물의 사물성은 ‘세계 사방’이 펼쳐지도록 하는 데,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분만分娩에 있다는 것이다. 존재 진리는 사물을 ‘장소’로 삼아 세계 사방으로 영역화되는 것이다. 동시에 사물의 편에서는 사방의 단일함으로 밝게 트이는 “세계의 광휘 안으로”(Unterwegs zur Sprache) 간수됨으로써 비로소 사물이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과 세계는 사방으로 환히 트이는 존재 진리에서, 그 장을 중심으로 서로 나눠지면서도 서로에게 향함으로써 함께 속하며, 각기 그 자체로서 존립하는 것이다. 이로써 존재 진리는 존재자와 존재 또는 사물과 세계가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로 있는 단일함을 떠받치는 둘 사이의 ‘사이’가 된다. 하이데거에게 게오르그 트라클의 ‘어느 겨울 저녁’이란 시, 특히 2절의 마지막 두 행은 바로 그러한 존재 진리를 말하고 있다.(Unterwegs zur Sprache)

 

<어느 겨울 저녁>

 

눈이 창문에 내리고,

저녁 종이 길게 울리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식탁이 차려지고

집은 잘 정돈된다.

 

방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어두운 좁은 길 위의 문에 이른다.

대지의 서늘한 수액樹液으로부터 

은총의 나무는 금빛으로 무성하게 피어난다. 

 

방랑자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선다;

아픔은 문지방을 석화石化시켰다.

거기 순수한 밝음 안에서

식탁 위의 빵과 포도주는 환하게 빛난다. 

 

“대지의 서늘한 수액樹液으로부터 / 은총의 나무는 금빛으로 무성하게 피어난다.” 나무는 ‘땅’에 굳건하게 뿌리박고 있으며, 그것의 무성한 개화開花는 햇빛, 비, 바람 등 ‘하늘’의 축복을 향해 열려 있다. 나무의 활짝 핀 꽃에는 열매가 간직돼 있다. 그 열매는 죽을 자들인 ‘인간’을 먹여 살리는 ‘성스러운’ 것이다.

 

금빛으로 피어난 “은총의 나무”에는 이렇듯 하늘, 땅, 신적인 것들 그리고 죽을 자들의 어울림인 “세계-사방”이 불러 모여 있는 것이다. 동시에 금빛 광채와도 같은 세계의 밝음은 하나의 사물인 나무를 감싼다. 나무는 그 품 안에 간수되며, 참됨으로 고요히 머문다.

 

세계와 사물이 하나로 어울리는 혹은 서로에게 향함이 교차하는 ‘중심’인 ‘사이’는 금빛 광채의 세계로 열리는 존재 진리이다. 그리고 이때 둥글게 트이며, 존재와 존재자, 세계와 사물의 단일성, 동시성을 실어 나르는 ‘사이’ 영역은 존재가 그 자체로서, 다시 말해 비은폐로서 머무는 ‘동안의 폭’이자 ‘폭의 동안’으로서 ‘시공간’의 성격을 갖는다.

 

존재는 “존재와 존재자의 시공간적 동시성”(Beiträge zur Philsophie)으로 발현하는 것이다. 존재와 그 진리에서 간수되는 존재자 사이 “하나의 원”은 “시공간적 동시성”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이 시공간적 동시성이 본래적 의미에서 시간의 힘이며 시간 자체이다. 그래서 존재자의 존재는 시간으로부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하이데거 대표작의 제목이기도 한 ‘존재와 시간’에서 둘 사이 ‘와’의 형세가 어떤 것인지 눈짓한다.

 

존재는 둥글다(4) - 발현 혹은 심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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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둥글다(1) - 존재 ‘보다’ 존재의 의미를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Ⅰ. 존재 ‘보다’ 존재의 의미를

하이데거는 Was heißt Denken?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존재가 자신을 고유하게 드러낼 때 그 발현發現의 장場이 사유되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도 적절하게 사유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 1929년에 출간된 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현상학의 근본문제들)에서 철학의 근본 과제를 존재 대신 존재 의미를 토의하는(erörtern) 것으로서 제기한다. 사실상 그는 이때도 이미 동일한 얘기를 하고 있다.

 

“철학이 존재에 대한 학문이라면, 다음의 물음이 철학의 시원적이자 궁극적인 근본 물음으로 밝혀진다. ‘존재와 같은 것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가? 도대체 존재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데 존재 진리의 장을 강조하는 앞말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언급하는 뒷말은 어떻게 같다는 것인가?

 

Sein und Zein(존재와 시간)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의미는 “어떤 것의 이해가능성이 머무는”,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영역領域이나 지평을 가리킨다. 어떤 것의 의미를 영역으로 말하는 것은 우선은 생소할 수 있다.

 

‘의미’(Sinn)의 어원에 밝히는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의미는 하나의 사태가 내는 길이며 방향이다. … 의미는 하나의 사태가 자기 본질을 전개하고 동시에 머무는 밝게 트인 영역이다.”

(Vorträge und Aufsätze『강연과 논문』)

 

어떤 것이 지닌, 때로 다소 멀어 보이고 심지어 무관한 듯한 여러 의미들의 범위는 그것의 본질을 지키고 간직하는 영역이란 얘기이다.

 

 

 

예컨대 ‘義[의로움]’란 사태는 「네이버 한자 사전」에 의하면, ‘옳다’, ‘착하다’, ‘맺다’, ‘섞다’, ‘간사하다’, ‘정의正義’, ‘우의友誼’, ‘뜻’, ‘용모’, ‘예절’, ‘인공적인 것’, ‘가짜’ 등 20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다양한 뜻의 스펙트럼, 즉 의미 영역은 의로움의 사태가 걸어온 역사며 길이다. 의로움의 본질은 거기에 머물고 있다. 이 영역은 우리 바깥에 실재하는 객관적인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지어낸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의미 규정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문제 삼는 존재의 의미란 존재가 그 자체로서, 즉 자신의 고유함이나 본질로서 머무는 영역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서 존재 그 자체 또는 존재의 본질은 주지하다시피 은닉으로부터 밝음으로 들어서는 비은폐非隱蔽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진리이다.

 

다시 말해 본래의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며 우리 가까이(an) 머무는(wesen) 현존現存(Anwesen)으로서의 존재이다. 이에 상응하여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의미는 존재가 그 자체, 즉 비은폐로서 현성現成하는 영역으로서 보다 구체화된다.

 

비은폐로서의 존재 진리는 언제나 은닉과 발현의 “어디로부터(Wovon)와 어디로(Wofür)” (Beitgräge zur Philosophie『철학에의 기여』)라는 영역적 성격을 갖는다. 이는 다시 존재는 자신의 진리에서 밝게 트이며 스스로 영역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은폐에는 열린 장이 현성한다.”
(Parmenides『파르메니데스』)

 

그렇지만 비은폐로서의 존재가 그와 같은 이행인 한, 존재는 언제든 다시 은닉 속으로 자신을 감출 수 있다. 그래서 존재가 그 자체를 드러내는 진리 영역은 밝음과 어둠이 투쟁하는 혹은 놀이하는 장이 된다. 여기서 위의 설명과 앞으로의 논의에 용이한 접근을 위해 비非하이데거적 문맥에서 존재의 영역 문제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중용中庸은 만물의 근본[天下之大本]인 중의 발현을 “나는 솔개, 뛰어오르는 물고기[鳶飛魚躍]”라는 『시경詩經의 말[鳶飛戾天, 魚躍于淵]로써 표현한다. 그리고 이 구절에 대해 “이는 위, 아래에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言其上下察也].”라고 부연한다.

 

중국 송(宋) 나라 때 학자 정자程子는 이 구절을 『중용』의 저자인 자사子思(BC 492년 ~ BC 431년경)가 “사람들을 위하여 요긴하게 한 말로서 생동감 넘치는 대목”(중용장구中庸章句)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에 해당하는 『중용의 중은 때에 따라 머물 뿐[隨時而在], 실체적으로 있는 게 아니다[無定體]. 즉 그것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확정된 무엇으로서 있다고도 할 수 없다. 『중용은 유무에 관한 ‘모호한’ 중의 참됨을 위 아래로 열어 밝히며 영역화하는 발현으로 본 것이다.

 


‘일묘연一妙衍(판본에 따라 演).’ 한민족 전래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에 나오는 구절이다. 「천부경」에서 일一 또한 존재자의 존재라는 성격을 갖는다. 「천부경」은 여기 일에 대해 “[모든 것의] 시작이나[一始無始一] 자신은 시작을 갖지 않으며 [모든 것의] 마침이나 스스로는 마침이 없다[一終無終一].”라고 밝힌다.

 

그런데 그러려면 일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동시에 유이면서 무이어야 한다. 단지 유라면 시작과 끝을 가질 터이고 반대로 무일 따름이라면 시작이 될 수 없고, 그러니 끝도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 묘하게 퍼진다[妙衍]는 것이다. 衍(또는 演)은 ‘퍼진다’, ‘부풀어 난다’, ‘통하다’, ‘스며들다’ 등의 뜻을 갖는다. ‘일묘연’ 역시 유무가 뒤섞인 일이 밝게 트이면서 스스로 영역화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철학의 시원적이자 궁극적인 근본 물음”으로 말하는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은 위, 아래에 밝게 열리는 또는 묘하게 퍼지는 존재의 비은폐나 밝게 트임(Lichtung)의 영역 자체를 묻는 것이다. 존재의 빛보다는 그것이 생기生起하고 머무는 장(Ort)을 토의하는(erörtern) 것이다. 다음의 말들은 하이데거 사유의 그같은 성격을 기술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어느 정도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 모든 나타남들을 위한, 폭넓게 이해된 영역, 장 혹은 공간에 대해 기술하는, 숙고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Heidegger and Buddism. On Non-nihilistic Experience of Groundness」)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존재의 진리를 운동으로서 그리고 결국에는 진행 중에 있는 길과 그때그때의 영역으로서 물었다.”(Heidegger and Asian Thought)

 

“존재의 토폴로지에 대한 논의는 주로 1940년대 후반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하이데거 사유의 진행 속에 완성 단계를 나타내는 핵심 주제이다.”(「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의 토폴로지’에 관하여」)

[이때 ‘토폴로지’는 존재의 ‘토포스’(장소, 위상)에 대한 위상학적 탐구를 말하는데, 보다 심화된 관심 속에 존재의 의미나 진리 영역을 다루는 그의 사유를 지칭한다.]

 

그럼에도 “밝게 트임은 이제까지 철학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철학의 역사적 종말에서 미래의 사유를 위한 과제를 의미한다.”(Zur Sache des Denkens『사유의 사태로』)

 


이와 함께 영역의 문제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여기서는 하이데거 사유의 ‘키워드’를 차지하는 밝게 트임이나 토포스를 ‘영역’으로 옮기고 있다. ‘영역’은 측량, 계측할 수 있는 공간과는 달리 열린 개념으로 이해된다.

 

또 ‘영역’은 공간, 시간에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그 점에서 하이데거가 토포스로써 이해하는 사태와 어울린다고 본다. 우리는 또 영역이 이행이며 사건임을 보다 강조할 필요가 있는 문맥에서는 ‘영역화’라는 표현을 함께 쓰게 될 것이다.

 

 

 

존재 의미 존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은 각각 자유롭고 열려 있다는 의미의 ‘밝게 트임’과 그와 같은 열린 장으로써 드러나는 ‘밝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존재 의미와 존재는 환한 터와 그것을 채우는 빛과 같다.

 

“밝게 트임은 현존하고 부재하게 되는 모든 것을 위한 개방된 영역이다.”(Zur Sache des Denkens)

 

나아가 그 장은 스스로 밝게 드러나는 “비은폐의 근거이고 본질 시원이다.”(Parmenides)

 

밝게 트임이 없으면 빛(Licht)도 밝음(Helle)도, 빛의 부재不在인 어둠도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빛을 넘어서 최상의 것은 환히 빛나는 밝게 트임 자체”(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횔덜린 시 해명』)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영역이 존재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근거와 같은 것으로서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영역과 존재[비은폐] 사이는 영역이 근거로서 앞서고 존재가 그 결과로 뒤따르는 인과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역은 근거가 닿지 않으며, 그곳에서는 근거가 사라진다. 영역은 근거를 삼킨다.

 

하이데거는 비근거로서 심연深淵처럼 벌려진 이 열린 영역을 괴테의 말을 빌려 “근원현상”(Urphänomen)(Zur Sache des Denken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영역성은 존재의 본질에 속한다. 영역은 존재가 비은폐로, 즉 자기의 본질이나 진리로 머무는 방식과 지평이다. 그 점에서 영역은 존재 자체이다.

 

 

 

하이데거는 나중에 가서 존재가 존재로서 머무는 영역을 “사역四域”으로 부른다. 이를 통해 그는 존재의 영역적 성격을 보다 분명히 전달한다. 아울러 하이데거는 ‘사역화’(Vergegnis)란 말로써 스스로 발현하며 사역으로 영역화하는 존재의 동사적動詞的 성격을 드러낸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그 존재 발현의 장을 하늘, 땅,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인간이 하나로 어울리며 펼쳐지는 ‘사방 세계’(das Geviert)라고 규정한다. 하이데거에게는 ‘사방 세계’가 어떤 외적 규정도 털어낸 세계로서의 세계 혹은 세계 자체이다. 존재는 비은폐하며 사역화하는데, 그것은 또한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들의 단일함인 사방으로 트이는 영역화라는 것이다.

 

또한 이때 분명히 새겨야 할 것은 영역은, ‘밝게 트임’이란 말의 일상적 쓰임새가 말해주듯, 시간과 공간을 다 같이 지시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밝게 트이는 시간이자 공간으로서 열린다. ‘사역’이나 ‘사방세계’ 또는 ‘토포스’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그것은 존재가 그 자체로서 머무는 ‘동안’(Weile)의 ‘폭’(Weite)이고 ‘폭’의 ‘동안’이다. 즉 시간이며 공간, ‘시공간’(Zeit-Raum)이다.

 

여기서 ‘시공간’은 존재가 스스로를 열어 밝히는 생기의 사건으로서 파악되고 있으며, 그러한 성격에 주목하여 “시간-놀이-공간”(Zeit-Spiel-Raum)(Unterwegs zur Sprache『언어로의 도상에서』)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역은 동안과 폭으로서 … 시간을 부여하는 동시에 공간을 연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후기의 저술들에서 사역을 존재의 ‘시간-놀이-공간’(Zeit-Spiel-Raum)으로 부르고 밝게 트임과 동일시한다.”(Nähe Das Denken Martin Heideggers)

 

이때 시간은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하듯, ‘지금’의 연속이 아니며, 공간 또한 뉴튼식의 물리적 공간(space-container)과 같은 것일 수 없다.  하이데거에게는 ‘동안’이자 ‘폭’, ‘때’이며 ‘곳’인 시공간이 본래적 시간을 형성한다.

 

하이데거는 시간과 공간을 열어 주는 순수하게 밝게 트임이 고어古語 ‘die Heitere’가 가리키는 사태라고 해명한다.(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 오늘날 ‘heitere’는 주로 맑은 날씨를 가리키며, 그 형용사 ‘heiter’는 ‘갠’, ‘맑은’, ‘밝은’, ‘명랑한’, ‘시원한’, ‘찬연한’ 등의 뜻을 갖는다. 이 의미들을 횡단매개하는 공통적 함의는 ‘맑게 갬’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 ‘제색霽色’[비가 온 후 갠 모습]이 그와 같을 것이다.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이 제색의, 즉 비 오고 난 뒤 밝게 트인 인왕산을 그린 작품으로서 보는 사람의 정감을 금세 밝음과 청량감으로 채우는 걸작이다.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리의 기분은 제색으로 조율된다. 존재 진리인 ‘heitere’는 그러한 제색의 시공간에 유비된다.

 

 

한편 존재가 영역화한다는 것은 존재가 개방성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미 지시한다. 자연의 햇빛이 밝게 빛나는 데는 투명한 공기가 있어야 하듯, 영역화하는 것은 본성상 언제나 그 생기와 머묾의 마당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하이데거 사유 초기에 존재가 비은폐된 존재 자체로서 열어 밝혀지는 장은 자기를 넘어[脫自] 초월적으로 존재자와 관계 맺으며 그것의 존재를 이해하는 인간 현존재의 개방성에서 구해졌다. ‘다만 존재 이해란 장이 있는 한 존재는 있다.’ 하이데거 사유의 전개 속에 초기의 존재 이해나 초월을 대신하여 ‘사유’, ‘내맡김’, ‘청종’ 등이 존재 진리가 일어나는 개방성의 자리에 들어선다.

 

그리고 인간이 그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된 존재 진리의 장으로써 존재하는 방식은 그의 본질로서 사유된다.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함은 사유하며, 자기 바깥으로 나아가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 데 있다. 하이데거는 그 인간 본질을 ‘실존’, ‘탈존脫存’, ‘존재의 이웃’, ‘존재의 목자’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이에 따르면 인간 본질은 존재 진리에 속한다. 인간의 고유함은 “영역화하는 것 안에 머묾”(「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인 인간이 존재의 필요에 따라 영역화의 자리로 전용專用되는 일은 그에게는 모든 것에 선행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나 가능성이 거기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 다가올 것을 준비하면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두기로 하자.

1) 존재의 영역은 은닉으로부터 발현하는 존재의 이행과 함께 열린다. 존재 발현은 사역, 사방 세계 등으로써 펼쳐진다.
2) 영역은 존재 자체인 비은폐에 속한다.
3) 영역은 시공간이다.
4) 영역은 그로부터 거기에 머무는 존재에 대해 인과적 의미의 근거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근거이다.
5) 존재는 영역화의 본질로부터 열린 장을 요구한다.
6) 인간이 사유를 통해 자신을 존재 진리의 영역으로서 바치는 것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그의 특기함이다. 그 점에서 인간 본질은 존재에 유래를 둔다.

 

존재는 둥글다(2) - 있는 듯 있지 않은 있는 것 같은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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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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