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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둥글다(5) - 최상의 놀이(천부경, 태백일사)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Ⅴ. 최상의 놀이

논의를 마무리 하며, 하이데거의 영역 문제와 관련하여 노자의 도道를 상기해 본다. 이는 둘을 비교하여 그들의 관계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각각의 것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얻고자 하는 방편으로서 시도된다.

도의 원래 의미는 ‘길’(Way)이다. ‘가르침’, ‘방법’, ‘원리’, ‘말’ 등의 파생적 의미들을 갖게 되는 것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 생겨난 변화라고 한다. 도의 ‘길’은 당연히 영역에 속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도 그렇다. 모든 것들이 도 안에서 도로부터, 다시 말해 도를 중심으로 존재한다면 도는 이미 지평이나 장의 성격을 갖는다.(「A Comparative Study of Heidegger and Taoism on Human Nature」)

노자는 도를 “유와 무가 상생하며 있는 것[有無相生]”(『노자』 제2장)으로 말한다. 이에 따르면 도의 영역은 ‘천지의 시작인 무’와 ‘만물의 어머니인 유’[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노자』 제1장) 사이의 ‘사이’, ‘사잇길’이 될 것이다.

노자는 또 그에 앞서 “유와 무는 같은 데서 나오며 이 동일성은 현이라 한다[此兩[有無]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노자』 제1장)라고 밝힌다. “유와 무는 같은 데서 나오고”에서 ‘같은 데’는 이미 장소적 개념이다. 그리하여 노자에게서 유무상생은 “지평적으로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동일성과 변화를”(「Typology of Nothing: Heidegger, Daoism and Buddhism」)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자는 논리적인 의미와 무관한, 이때의 동일성을 ‘현玄’이라 부르고 있다. 현은 ‘깊고 심오한’, ‘깊어서 검은’이란 뜻인데, ‘깊이’나 ‘검다’는 말 또한 영역적 성격을 갖는다. 나아가 노자는 그 현을 ‘문門’[衆妙之門]이라는 보다 직접적 영역 개념으로써 표현하고 있다(『노자』 제1장). 현은 유무상생의 동일성이 유지되는 또는 유래하는 ‘사이’ 혹은 ‘중심’ 영역[“같은 데”]인 것이다. 도는 결국 유무 사이의 시원적인 사이, ‘깊어서 검은’ 현인 신비한 골짜기[谷神](『노자』 제6장)이다.

 

하이데거 또한 노자의 시적詩的 사유에서 주도적 단어인 도는 본래 길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성’, ‘정신’, ‘근거’ 등 도에 대한 기존 번역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길[道]이란 말에는 아마도 사유할 가치가 있는 말함이라는 모든 신비 가운데 신비가 감춰져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저 번역어들을 말해지지 않는 것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그렇게 돌아가도록 할 수 있다면 말이다.”(Unterwegs zur Sprache)

한편 장자 또한 앞에서 인용한 바 있듯이, 만물이 길어 나오는 근원 자리인 무유无有를 역시 영역 개념인 ‘하늘의 문[天門]’으로써 설명했다.

유무상생의 사이나 중심으로 있는 도는 유도 아니며 무나 공도 아니다. 유 아니면 무 식의 형식 논리로 보면 도는 붙잡히지 않는다. 도대체 도를 무엇이라 규정할 때는 이미 도가 아닌 것이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그 때문에 도의 신비한 골짜기는 물리적으로나 산술적으로 구획하고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깊어서 검은’ 그 곳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유나 무를 낳는 선행 근거와 같은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도생일道生一’에서 ‘생生’은 도가 시간과 능력에서 앞선 원인으로서 일一을 결과적으로 만들어내는 작용과 같은 것이 아니란 얘기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논리로써 도에 앞서 도를 낳는 또 다른 ‘시작’과 ‘어머니’를 찾아 나서야 한다. 현, 즉 도는 언어가 미치지 않으며 근거만을 안중에 두는 논리적, 인과적 사유에는 자신의 참모습을 감춘다. 그 점에서 현의 골짜기는 근거(Grund)를 거부하는 비非근거(Ab-grund)로서의 심연(Abgrund)이다. 도는 “심연[淵]”처럼 깊다.(『노자』 제4장)

 

 

영역의 주제는 노자에게서 시적詩的 암시로 그치는 반면 하이데거에서는 보다 엄밀한 사유 속에서 다뤄졌다. 이제까지 영역에 대한 하이데거의 얘기는 다음과 같이 종합된다.

존재 진리란 하나의 동일한 영역에서,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존재자의 존재와 인간은 함께 속한다. 나아가 “동일한 것으로부터 그리로” 함께 속한다는 의미로 동일하다. 그리고 둘은 오직 어느 한편으로 기울지 않는, 이 균형 잡힌 영역에서 비로소 각자의 참됨에 이른다.

이와 함께 존재의 존재자인 그 밖의 모든 것들 또한 존재 진리의 밝음 안에 감싸여 비로소 존재자로서 존재한다. 이로써 존재 진리의 영역[시공간] 안에서 그것을 통해, 말하자면 그것의 “마법”(Gelassenheit)으로써 존재와 인간, 그리고 그 밖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어울리며 저의 참됨으로 돌아가 고요히 머무는 것이다.

이는 존재와 무, 존재와 존재자, 존재와 인간 사이의 영역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것, 즉 발현하며 영역화하는 하나의 존재 자체란 점을 지시한다. 존재 자체가 스스로를 열어 밝히며 내주는 심연으로서 벌여져 있는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그 하나이다. 그곳은 내 안에 있는 것도 내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에서 모든 사유는 저 하나의 토포스로 향한다. ‘토포스’란 말의 어원은 창끝이라고 한다.(Unterwegs zur Sprache) 창끝은 모든 것이 하나로 몰려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토포스는 모든 것이 그리로 돌아가는 ‘끝’이자 그곳으로부터 길어 나오는 ‘시작’이다. 그것은 어떤 시작보다도 앞서고 어떤 마침보다도 뒤에 온다.

 

존재가 발현하는 토포스의 심연은 「천부경」에서 말하는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과 ‘일시무시일’의 일과 같다. 그것은 없지도 않지만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나 무마저 사라지는 그 곳은 깊고 검은 영역이며 신비한 골짜기[谷神]이다. “심연은 무도 공도 아니다. 검은[玄] 혼돈이다. 그것은 오히려 발현이다.”(Identität und Differenz)

 

서구 시원의 그리스 사람들은 태초가 시작되는 혼돈(카오스)을 ‘하품’, ‘벌어진 간극’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하품이라면 우주의 하품인 셈이다. 창끝, 골짜기, 심연, 심지어 하품까지, 존재의 토포스를 가리키는 모든 것들이 V나 ▽ 형태의 영역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V, ▽는 ‘생명과 창조의 부호’가 되는 것일까.

 

어떻게 호명되든 존재 진리의 영역은 모든 것들이 비로소 그 자체로 머무는 때/동안, 즉 시공간이다. 우리는 앞서 이에 대해서 ‘die Heitere’의 오래된 의미를 통해 존재의 영역은 맑게 개이고 인간의 정동성情動性도 청량함과 시원함으로 조율돼 그리로 하나가 되는 ‘재색’의 시공간과 유비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천부경」이 수록된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 “소험유시 소험유공 인재기간[所驗有時 所境有空 人在其間]이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인간의 본성은 신령한 조화의 기운인 삼신三神에서 내려 받은 신성으로서, 삼신과 통하는 관문이 된다는 문맥 안에 포함돼 있다. 따라서 이때 경험[驗]은 감각적이거나 체험적인 것이 아니라 내 본성을 찾아 우주의 실상을 자각하는 ‘깨달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험유시 소험유공’은 깨달음이란 모든 것이 참되게 들어서는 자각自覺의 장으로서 시간, 공간[시공간]으로부터 현성함을 말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인재기간’이란 참나로서의 인간, 본질로서의 인간은 저 깨달음이 일어나는 ‘동안의 폭’, ‘폭의 동안’인 영역에서[間] 유래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도 토포스의 심연을 마주한다.

 

그럼에도 이 밝게 트임의 시공간은 형이상학에서 사유되지 않았다. 이는 존재 자체의 운명이지만, 형이상학 자체의 소홀함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형이상학에서 숨겨진 밝게 트임의 시공간은 형이상학이 줄곧 매달려온 근거 찾기의 사유방식으로써는 올바로 들어설 수 없다. 그것은 근거를 거부하는 심연이다. 당연히 마땅한 이름도 없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들 가운데에서 어디에서도 그에 마땅한 보기를 찾을 수 없는, 숨고 드러나고, 나뉘고 속하는, 빛과 어둠이 투쟁하는 존재 진리를 ‘놀이’라고 불렀다. 놀이라면 모든 존재자의 존재가 걸린 유일무이한 최상의 놀이이다. 창끝이며 신비한 골짜기이며 둥근 원인,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의 일과 같으며 ‘태초의 하품’인, ‘놀이’란 말 외에 딱히 이름 부를 수 없는 심연은 비로소 세계가 세계로서 사물이 사물로서 들어서는 영역이다. 뜰에 잣나무가 피고 솔개 날고 물고기 뛰어오르는 그리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고 죽는 곳이다.

 

**부기附記: 우리는 지금까지 영역을 다루는 모든 장에서 존재의 영역이란 시간이자 공간으로서 시간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간략한 소개나 시사에 그쳤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얘기는 시간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여우가 물을 건넸는데 꼬리에 물을 묻힌 격이다. 이미 사유된 것은 아직 사유되지 않은, 그러나 긴박하게 사유되어야 할 것을 지시한다. 길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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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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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둥글다 (4)-발현 혹은 심연,하이데거, 파르메니데스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Ⅳ. 발현 혹은 심연

존재와 하나의 특출한 존재자인 인간의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관계 또한 공속성의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없으면 존재가 없고, 따라서 ‘둥근 원’이나 사방으로 트이는 존재와 존재자의 함께 속함 같은 것도 일어날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에 속한다.

둘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해명될 수 있다. 존재의 본질이 비은폐란 규정은 존재란 언제나 은닉으로부터 밝게 드러남이란 점과 아울러 그 발현이 일어나 머무는 장, 말하자면 발현이 담길 ‘그릇’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존재는 비은폐로서 영역화하는 한, 개방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은닉으로부터 발현하는 또는 은닉으로 “물러남으로써 우리를 매혹하는 것”(Was heißt Denken?)은 오직 개방된 여지가 허락될 때 열어 밝혀지고 자유롭게 된다. 그리고 존재가 자신의 본질로부터 필요로 하는 개방성을 떠맡는 것은 사유하는 인간 혹은 인간의 사유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유를 통해 존재 진리의 장으로 쓰이는 데 있다.

“인간의 특출함은 그가 사유하는 본질로서 존재에 열려 있고, 존재 앞에 세워져 있으며, 존재에 관련된 채 머물면서 그렇게 존재에 상응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본래 이 상응의 관련(Entsprechung)으로서 있으며, 다만 그것이다.”(Identität und Differenz)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로서의 사유가 왜 존재 진리가 현성하는 ‘그릇’이 될 수 있는가?

그릇의 ‘미덕’은 텅 빔에 있다. 사유가 존재에 상응하려면, 다시 말해 존재로서의 존재가 체류할 개방성이 되려면 스스로를 비워 그로부터 그리로 존재 발현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인간의 사유는 어떤 식으로 그렇게 수행되는가?

하이데거는 ‘마음’, ‘심정’, ‘진심’을 뜻하는 ‘Gedanc’란 독일어 고어古語의 의미로부터, 사유를 “기억”(Gedächtnis)과 “감사”(Dank)로서 설명한다. 이때 기억은 단순히 상기하고 보존하는 인지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유의 본질을 이루는 기억이란 근원적으로는 그것이 향해 있는 것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그리로 마음을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기억은 “[사유거리로] 마음을 불러 모으는 것”(Die Versammelung des Denkens)(Was heißt Denken?)이다. 그럼으로써 기억은 자기 바깥으로 향하며 붙잡는 바 사유거리를 우리 가까이 이르게[현존] 한다. 사유거리들은 이를 통해 간수되고 지켜진다.

 

예컨대 내가 마음을 오롯이 기울여 기억 속에 지키는 것은 내 옆을 지나가는 아무개보다 또 내 앞에 놓인 어떤 것보다 ‘더 가까이’ 있다. 이에 따르면 기억으로서의 본래적 사유란 사유하는 바가 비로소 그 자체로 있도록 마음을 모아 간수하여 지키는 마음챙김(Mindfulness)과 같은 것이다.

 

이때 마음을 불러 모아 간수하여 지킴이란 단지 능동적이거나 단지 수동적인 게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향해 마음을 씀과 물러나 그것을 받아들여 감내하는 지킴이 ‘~이자 또한 ~인’의 방식으로 서로 결속돼 하나를 이루고 있다. 물러나면서 사유거리로 마음을 쏟고, 또한 동시에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물러서 그것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본래적 사유란 자기 밖으로[脫自] 앞으로 나아감이자 뒤로 물러섬, 정확히는 양자가 서로 속하는 합일의 구조로 이뤄져 있음을 말해준다.

그와 같은 역동적, 원환적 성격의 맞이가 그리고 오직 그러한 것만이 자신을 비워 사유거리가 현존하는 장을 내줄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물러서고 물러나는 동시에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개방성이 밝게 열리는 것이다. 본래적 사유는 그 개방된 여지에서, 또한 그것으로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은 영역화하는 존재 진리를 영접하는 마당으로서 존재하는 특별한 존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 사유는 존재자의 존재를 대상화하여 어떤 무엇임으로 이러저러하게 규정하는 방식의 사유와 무관하다. 존재가 그 자체, 즉 비은폐로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저 표상적인 방식의 사유를 포기해야 한다.

 

표상함은 인간이 스스로를 세계의 주체나 중심으로 여기면서, 모든 현실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붙잡아 이론적, 개념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자를 이성적으로 자신의 고려 안에 두는 계산적 사유이다. 계산적 사유가 꼭 수數와 관련된 작업을 하거나 계산기나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계산적 사유는 계산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보다 유망하고 경제적인 가능성들을 계산한다. 계산적 사유는 하나의 전망에서 다음 전망으로 분주히 뛰어다닌다. 계산적 사유는 결코 멈추지 않으며 마음이 모여져 있지 않다.”
(「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

 

근세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된, 표상적이며 계산적인 사유 방식의 밑바탕에는 모든 것을 파악 가능하고, 장악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권력 의지가 숨어 있다.

“계산적 사유는 무엇보다 의지의 사유며 모든 것의 계산된 조작에 겨냥돼 있다.”
(「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

 

 

존재에 올바로 상응하기 위해서는 모든 현존하는 것들을 무제약적으로 대상화하려는 지배 의욕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의욕하지 않음(Nicht-Wollen)을 의욕해야 한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인간 본질의 연관인 사유는 표상적 대상화의 사유에 비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다. 하이데거는 Gelassenheit(『내맡김』)에서 앞으로 나아감의 개방성과 뒤로 물러섬의 수용성으로써 수행되는 존재 사유를 ‘내맡김’(Gelassenheit)이라 부른다.

이곳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진리인 “사역에 적합한 [인간의] 관련”, 다시 말해 사역에 대한 “상응”을 우리 가까이 영역화하는 사역을 향해 자신을 ‘내맡김’으로서 규정한다. 그는 또 대상을 언제나 모종의 셈법 아래 넣어 놓으면서 의지의 무제약적 확장을 기도하는 일체의 ‘형이상학적’ 유위有爲를 포기하는, 그로부터 물러서는 ‘내맡김을 “기다림”과 같은 것으로 말한다.

 

과학자, 학자, 스승 세 사람이 들길을 산책하며 (얘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기술된 「내맡김의 토의」(이상 Gelassenheit)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있는가? 과학자와 학자는 의문을 갖는다.
여기에 스승은 말한다. 우리는 기다림 외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에서 내맡김의 기다림이란 존재를 위해 자신을 버리며 마냥 수동적인 상태로 ‘무기력하게’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존재 진리인 사역의 개방된 여지로 들어서 그것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맡김은 우리를 향해 펼쳐지는 것을 향해 마음을 모아 앞으로 나아감과 동시에 뒤로 물러남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내맡김은 그러한 방식으로 개방된 자리를 열어 영역화의 이행인 사역의 존재가 그리로부터 그리로 현성하게 한다. 모든 것들은 사역의 존재 발현에서, 그것을 ‘터전’으로  비로소 존재자로서 있게 된다. 그러기에 사역의 영역은 사물들이 표상의 대상으로서 우리 앞에 마주 서있는 공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이윽고 저의 본성과 기원에 머무는 개방된 장이다. 그 점에서 사역을 향한 내맡김의 ‘무위’는 또한 최상의 ‘유위’이다.

 

이러한 사태는 이미 존재와 인간은 함께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존재를 향해 사유로써 자신을 바치고 존재는 그 사유의 개방성에서 자신을 열어 밝히며 내준다. 존재와 인간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함께 속한다. 나아가 이 둘은 동일하다.

이때의 동일성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부터 그리로”(Identität und Differenz) 함께 속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동일한 것’은 존재 진리의 영역이자 사유의 개방성으로서 존재와 인간 사이의 ‘사이’며 중심을 가리킨다. 그곳은 “존재와 사유가 서로를 제 것으로 삼으면서 함께 속하고 그것들의 본질적 관계에 이르는 균형 잡힌 영역이다.”(Identität und Differenz)

 

이러한 동일성 개념은 일찍이 파르메니데스가 그의 『단편들』에서 마치 ‘화두話頭’와 같이 내건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이기도 하다.

 

 

존재와 인간은 이러한 함께 속함에서 각자의 본질에 이른다. 존재는 인간의 사유에서 자신의 참됨인 비은폐로서 머문다. 동시에 인간은 그렇게 존재 발현의 장으로 사용됨으로써 ‘존재를 지키는 목자’, ‘존재의 가까움에 거주하는 이웃’이라는 자기 고유함에 이른다.

존재에 대한 ‘다만 상응의 관련’일 따름인 그의 본질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 진리에 자신을 내맡기는 일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 인간의 본성인 사유가 거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존재 진리는 본질로서의 인간,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살고 죽는’ 곳이다.

 

이에 따라 인간을 향한 존재의 요구는 인간에게는 강요나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본질을 최고도로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마음을 모아 존재 진리의 장으로서 바치는 기억의 사유는 동시에 자신의 본질 유래에 머물도록 한 호의와 은총에 대한 감사함이다.

 

여기서의 ‘본질에 이르게 함’ 역시 형이상학적 혹은 과학적 의미에서의 근거지음과 무관하다. 존재와 인간이 이윽고 참됨으로 있는 곳은 존재와 인간보다 시간에서 선행하고 능력에서 우월한 근거가 아니다. 존재 발현의 영역은 근거를 거부하는 비근거(Ab-grund)로서 심연(Abgrund)이다.

발현이 지배하는 저 사이 영역은 스스로 밝게 트이는 ‘폭’[사이]인 동시에 그 영역화가 견지되는 ‘동안’[사이], 즉 시공간 또는 ‘시간-놀이-공간’이다. 시간과 공간 사이의 ‘놀이’는 시공간을 열어 존재와 존재자, 존재와 인간의 단일함 또는 둘의 균형을 붙잡으면서 존재의 진리를 나르는 일을 말할 것이다.

 

존재는 둥글다(5) - 최상의 놀이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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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둥글다(3) - 사방四方으로, 둥글게 트이는 존재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Ⅲ. 사방四方으로, 둥글게 트이는 존재

전통 형이상학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하이데거에서도 존재는 존재자와 관련해서는 ‘존재하게 함’이다. 즉 존재는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존재의 본질이 ‘밝게 드러남’의 비은폐인 만큼, ‘존재하게 함’의 사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일어난다

·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면서 그 빛 안에 존재자를 간수하여 비로소 존재자로서 있게 한다.
· 여러 존재자[多]는 그 하나의 존재 진리[一] 안에서 비로소 존재자로서 들어선다.
·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존재하게 함’은 존재가 자신을 환히 드러내는 밝게 트임 안에서 그리고 그 밝게 트임으로부터 끊임없이 존재자에게 고유하게 존재하도록 수락하고 베푸는 방식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존재하게 함’은 당연히 창조나 제작, 산출 등 인과론적 문맥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비은폐론적으로 이해돼야 한다. 그에게서 존재는 없던 것을 처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본연의, 그러나 숨겨진 자기됨으로 새롭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존재자는 존재의 존재하게 함에서 비로소 그 자신으로 자유롭게 된다.

 

심지어 하이데거는 존재 문제를 이해하는 첫 번째 관건은 존재가 마치 존재자인 양 그것의 근거를 구하고, 다시 이 근거의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얘기하지 않는 데 놓여 있다고 말한다.(Sein und Zeit)

 

달리 말하면 ‘무엇은 무엇이 낳고 이 무엇은 또 다른 무엇이 낳고 … ’ 하며 계보를 따지는 논리를 가지고서는 자신의 사유를 올바로 적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서 산과 집은 존재의 광휘 안에서, 말하자면 그 빛의 ‘은총’ 안에서 ‘왜’란 물음을 거부하며 각기 산과 집으로서 고유하게 머문다. 뜰의 잣나무도 그렇게 ‘이유 없이’ 서 있다.

 

 

 

하이데거는 비은폐론적 존재하게 함에 대해서 Identität und Differenz(『동일성과 차이)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존재자의 존재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Sein, welches das Seiende ist)를 가리킨다. 이때 ‘ist’(‘존재하게 하는’)는 타동他動, 이행(넘어옴)의 의미로 말한다. … ”


한편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에 속한다는 의미로 존재자의 존재이다. 그래서 “[존재의 이행은] 마치 존재자가 존재 없이 있다가 비로소 이 존재에 의해 관여되는 것처럼”, 존재가 따로 떨어진 그의 자리를 떠나 존재자로 넘어오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넘어서, 탈은폐하며 [존재자로] 넘어온다. 그러한 넘어옴을 통해 존재자는 비로소 그 스스로부터 비은폐된 것으로서 도래한다(ankommen). 이때 도래란 존재의 비은폐 안에 간수됨, 그렇게 간수된 채 가까이 머묾, 존재자로 존재함(Seiendes sein)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자로부터 존재자로 넘어오는 존재의 이행은 존재가 자신을 열어 밝히면서 영역화하는 사건을 말한다. 존재자의 존재는 밝게 트임의 영역 안으로 존재자를 감싸 현존하도록 하는(entlassen in das Anwesen) 것이다.

다시 말해 열어 밝혀지며 영역화하는 존재의 환한 ‘조명’ 아래 존재자는 비로소 이러저러한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서 들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영역적 존재는 불러 모으는 장(Ort)으로서 “스스로에게 불러 모으고 그렇게 모인 것을, 꿰뚫어 비추고 밝히면서, 간수하여 그것을 비로소 본질로 있도록 한다.”(Unterwegs zur Sprache『언어로의 도상에서』)

 

이와 같이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며 존재자로 향하고, 존재자는 그 존재의 탈은폐 안에 간수돼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둘은 동시에 서로를 향한다. 그럼으로써 존재자의 존재와 존재의 존재자는 서로로부터 나뉘면서도 서로에게 속하며 단일함, 동시성을 이룬다. 이 단일함, 동시성의 사태 혹은 그 단일함이 일어나는 사이 영역이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에서 정작 사유돼야 할 ‘차이 자체’이다.

“존재자 전체 한 가운데는 하나의 개방된 자리가 현성한다. 밝게 트임이 있다. 이 밝게 트임은, 존재자로부터 사유해보면, 존재자보다 ‘더 있다’(seiender). … 이 환히 트이는 중심 자체가 마치 무(Nichts)와 같이 … 모든 존재자를 둥글게 감싼다.”(Holzwege『숲길』)

 

하이데거는 탈은폐의 밝음인 존재가 스스로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하나로 불러 모으는, 또 그렇게 불러 모여 하나를 이룸을 “모든 존재자를 둥글게” 감싸는 사태라고 말하고 있다. 존재의 밝게 트임은 원만한 원圓으로 영역화한다는 것이다. 또 Identität und Differenz에서도 존재와 존재자의 함께 속함을 붙잡고 있는 사이 영역은 원으로 표현된다. “하나의 원을 이룸, 존재와 존재자가 서로를 향해 번갈아 돎”

 

 

하이데거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가 서구 시원에 벌써 탈은폐하는 현존이란 의미의 존재를 영역적, 위상학적으로 이해하면서, “둥근 공”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파르메니데스는 본래적인 존재로서의 현존을 “어디서나 동일한 것 것으로서 고유한 중심에 있으며 이 중심으로서 원”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은 “포괄해나가는 회전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을 환히 밝히면서 간수하는 탈은폐의 중심에 존립한다.” 즉 둥근 존재는 “탈은폐하며 밝게 트임”(Holzwege)의 사건을 말한다.

존재와 존재자의 공속성[혹은 둘의 차이 자체]은 존재를 세계로, 존재자를 사물로 사유하는 곳에서도 반복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사물’이라는 것을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즉 이러저러한 자기 외적인 견해나 관점들을 모두 떨친 순수한 존재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그리고 세계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들의 총체가 아니라 세계로서의 세계를 말한다.

 

하이데거에서 세계 그 자체, 즉 본연의 세계란 하늘, 땅, 죽을 자들인 인간, 신적인 것들이 각자의 고유함을 견지하는 가운데 하나로 어울리면서 밝게 열리는 사방四方으로서의 세계다. 이 세계는 “존재의 진리가 비대상적으로 머무는”(Vorträge und Aufsätze ), “존재의 진리를 인간 본질에 접근시켜주는”(Die Technik und die Kehr『기술과 전향』) 열린 장이다.

 

반면 사물의 본질이란 세계를 자기 곁에 불러 모아 깃들게 하는 데 있다. 사물의 사물성은 ‘세계 사방’이 펼쳐지도록 하는 데,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분만分娩에 있다는 것이다. 존재 진리는 사물을 ‘장소’로 삼아 세계 사방으로 영역화되는 것이다. 동시에 사물의 편에서는 사방의 단일함으로 밝게 트이는 “세계의 광휘 안으로”(Unterwegs zur Sprache) 간수됨으로써 비로소 사물이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과 세계는 사방으로 환히 트이는 존재 진리에서, 그 장을 중심으로 서로 나눠지면서도 서로에게 향함으로써 함께 속하며, 각기 그 자체로서 존립하는 것이다. 이로써 존재 진리는 존재자와 존재 또는 사물과 세계가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로 있는 단일함을 떠받치는 둘 사이의 ‘사이’가 된다. 하이데거에게 게오르그 트라클의 ‘어느 겨울 저녁’이란 시, 특히 2절의 마지막 두 행은 바로 그러한 존재 진리를 말하고 있다.(Unterwegs zur Sprache)

 

<어느 겨울 저녁>

 

눈이 창문에 내리고,

저녁 종이 길게 울리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식탁이 차려지고

집은 잘 정돈된다.

 

방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어두운 좁은 길 위의 문에 이른다.

대지의 서늘한 수액樹液으로부터 

은총의 나무는 금빛으로 무성하게 피어난다. 

 

방랑자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선다;

아픔은 문지방을 석화石化시켰다.

거기 순수한 밝음 안에서

식탁 위의 빵과 포도주는 환하게 빛난다. 

 

“대지의 서늘한 수액樹液으로부터 / 은총의 나무는 금빛으로 무성하게 피어난다.” 나무는 ‘땅’에 굳건하게 뿌리박고 있으며, 그것의 무성한 개화開花는 햇빛, 비, 바람 등 ‘하늘’의 축복을 향해 열려 있다. 나무의 활짝 핀 꽃에는 열매가 간직돼 있다. 그 열매는 죽을 자들인 ‘인간’을 먹여 살리는 ‘성스러운’ 것이다.

 

금빛으로 피어난 “은총의 나무”에는 이렇듯 하늘, 땅, 신적인 것들 그리고 죽을 자들의 어울림인 “세계-사방”이 불러 모여 있는 것이다. 동시에 금빛 광채와도 같은 세계의 밝음은 하나의 사물인 나무를 감싼다. 나무는 그 품 안에 간수되며, 참됨으로 고요히 머문다.

 

세계와 사물이 하나로 어울리는 혹은 서로에게 향함이 교차하는 ‘중심’인 ‘사이’는 금빛 광채의 세계로 열리는 존재 진리이다. 그리고 이때 둥글게 트이며, 존재와 존재자, 세계와 사물의 단일성, 동시성을 실어 나르는 ‘사이’ 영역은 존재가 그 자체로서, 다시 말해 비은폐로서 머무는 ‘동안의 폭’이자 ‘폭의 동안’으로서 ‘시공간’의 성격을 갖는다.

 

존재는 “존재와 존재자의 시공간적 동시성”(Beiträge zur Philsophie)으로 발현하는 것이다. 존재와 그 진리에서 간수되는 존재자 사이 “하나의 원”은 “시공간적 동시성”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이 시공간적 동시성이 본래적 의미에서 시간의 힘이며 시간 자체이다. 그래서 존재자의 존재는 시간으로부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하이데거 대표작의 제목이기도 한 ‘존재와 시간’에서 둘 사이 ‘와’의 형세가 어떤 것인지 눈짓한다.

 

존재는 둥글다(4) - 발현 혹은 심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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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둥글다 (2)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Ⅱ. 있는 듯 있지 않은 있는 것 같은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너♪”

2014년에 발매된 ‘썸’(some)이란 노래의 가사 일부이다. 서로 호감을 갖고 있고, 또 때로 특별한 구속 없는 만남도 이뤄지고 있지만 사랑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남녀 사이를 ‘썸’이라 부르며 그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남녀 가수의 듀엣곡인 이 노래는 발표 당시 8개 음원 사이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등 대박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보다 더 히트인 것은 노래가 나오고 나서 ‘썸’은, 원래 그런 뜻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아직은 분명하지 않지만 막 사랑이 움트는 사이를 가리키는 말로 엄청난 유행어가 되었다. 생각하면 그런 단계를 가리키는 우리말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말이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런 사이라는 게 딱 꼬집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모호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 노랫말은 상대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온몸이 파릇파릇 반응하면서 때론 달콤하고 때론 쌉싸름한, ‘사랑이 (아직) 아니다.’는 말은 부족하고 ‘(이미) 사랑이다.’는 말은 과한 남녀관계를 말로써 나타내고 있다. 정작 노래를 부른 남자 가수는 처음 그 부분을 듣고 “말장난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불확정적인 썸의 ‘사랑’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이라 할 존재가 그렇다. 존재는 ‘있는 듯 있지 않은 있는 것 같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유야무야有耶無耶하다.’ 현명한 사람들이 굳이 유무 중 하나를 택해 말하지 않음도 따지고 보면 그에 연유할 것이다.

“순수 존재는 순수 무와 같다.”(헤겔)


“현묘한 이치는 없고 없고 있고 있고 있고 없는 중中에 있다 [妙妙玄玄玄妙理 无无有有有无中].”(일부一夫 김항金恒)


“브라만은 존재로도 무로도 말해질 수 없다.”(바가바드기타)


“지극한 큰 하나[大一其極]는 … 무와 유가 뒤섞여 있다[無有而混].”(발귀리發貴理) 등.

 

그러면 존재는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하이데거는 194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 취임 강연인 Was ist Metaphysik?(『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4판을 출간하면서 ‘Nachwort[後記]’를 추가한다. 그는 그곳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모든 존재자와 단적으로 다름은 존재자-아님(das Nicht-Seidende)이다. 그러나 이 무는 존재로서 현성한다. 만일 우리가 무를 단순한 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것이라고 소박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이다.

 

우리는 그렇게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고 무의 난해하고 다양한 의미를 포기하지 말며, 무에서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것[존재]의 영역성(Weiträumigkeit)을 경험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무에서 경험하는 것은 바로 존재 자체이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무란 존재로서 나타나는데, 이는 존재가 스스로를 펼치는 영역화의 사태란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존재 물음에 올바로 들어서기 위한 준비가 될 것이란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 사유에서 우주의 궁극적 목적이나 존재의 최종 근거를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에게 존재는 근거가 아니며 신神은 더욱 아니다. 존재는 도대체 어떤 무엇으로 있는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님’(das Nicht-Seidende)으로서 무와 같다. 이때의 무는 전통 형이상학이 이해하듯, 존재자 전체의 부정이나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게 아니다.

 

불교 및 인도 철학자인 Zhihua Yao는 지금까지 동서 사유에서 논의된 무 개념을 다음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Typology of Nothing: Heidegger, Daoism and Buddhism」)

1) 일반적으로 부재不在로 알려진 결여적 무
2) 부정적인 무 혹은 총체적 무
3) 본래적 무, 즉 존재와 존재론적으로 등가等價인 무.

1)의 무는 예컨대 그림자, 차가움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결핍의 그것이다. 그림자는 빛의 결여이고 후자는 따뜻함의 부재不在이다. 노자의 ‘무위無爲’나 ‘무명無名’에서의 무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2)의 무는 칸트가 개념이 없는 빈 대상이라고 가리키는 것으로서 “논리적 불가능성”을 말한다. “자기 모순적인 개념의 대상은 무이다. 왜냐하면 이런 개념은 없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부정적 무)이기 때문이다.”(Kritik der reinen Vernunft) 예컨대 ‘불임不妊인 여자의 아들’, ‘둥근 사각형’과 같이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3)의 무는 텅 비어있지만 동시에 존재 분만分娩의 가능성으로써 충만돼 있다. 존재로서의 무이다. 예컨대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의 근원인] 천문天門은 무유无有며 만물은 이로부터 나온다[天門者无有也, 萬物出乎无有].”(『장자』 「경상초庚桑楚」)

 

또한 불교의 공空 개념이 이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공은 ‘고유한 본성의 결여[無自性]’를 가리킨다. 중관학파, 유가학파 등 여러 종파들 사이에서 공에 대한 해석은 차이를 보이나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진여眞如, 즉 절대적 실재가 공 개념을 통해 드러난다는 이해가 지배적이다. 이른바 이 묘유진공妙有眞空의 공 또한 본래적 무이다.

 

하이데거에서 무는 위 유형론에 따르면 세 번째의 무, 즉 본래의 무 또는 존재로서의 무에 해당한다. 그는 유와 무가 공속성共屬性을 이룬다고 해명한다. 이는 확고한 배중률排中律의 형식논리로써는 하이데거의 유무 문제에 올바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명제와 그것의 부정 둘 가운데 하나가 반드시 참이라는 배중율에 따르면 유 아니면 무일 뿐이지, 유무 양립을 말하는 3)의 이해란 부조리하거나 기껏 ‘신비한’ 소리이다. 이는 공속성으로 있는 유무의 사태는 개념이나 논리로써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명백한 것들의 여백에 있음을 지시한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제시하는 무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기술한다.

“무는 하나의 대상도 하나의 존재자도 아니다. … 무는 존재자에 대한 반대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존재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 존재자의 존재에 무의 무화無化가 일어난다.”


“사유가 존재를 사유하기 때문에 사유는 무를 사유한다.”


“존재자의 타자로서의 무는 존재의 면사포(Schleier des Seins)이다.”


“존재와 무는 서로 나란히 병렬적으로 생기하지 않는다. 하나의 친족 관계 속에서 일방은 타방으로 향하고 있다. … 무가 존재자로서 존재하지 않는 그만큼 존재도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한다.”(이상 Wegmarken『이정표』)

 

따로 설명이 요구되는 말들이지만, 하이데거는 존재와 무를 함께 속하는 것으로 또는 등가적等價的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비교적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무에서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것[존재]의 영역성을
경험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무에서 경험하는 것은 바로 존재 자체이다.”

 

여기에 이르러 앞의 인용문에 담긴 의미는 다음과 같이 좀 더 구체화된다.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하며, 나아가 이 공속성은 둘 사이의 ‘사이’를 이루는 존재 자체의 영역으로부터 성립한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유와 무의 동일성과 그것의 영역적 성격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미 말한 대로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본질은 은폐와 어둠, 즉 비진리로부터 비은폐와 밝음의 진리로 자신을 펼치는 일어남, 사건으로 이해돼야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본질’(Wesen)은 ‘현성하다’(wesen)라는 동사적 사태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 망각은 그렇게 생기하는 현성함으로서의 존재를 바라보지 못한 데 있다. 그 대신 형이상학은 개념적으로, 명사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예컨대 이데아, 실체, 정신과 같은 존재자성性(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을 존재로 여긴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물음에 답하면서 이것[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앞서 존재를 표상하고 있다.

 

… 그렇지만 형이상학은 존재 자체를 언어로 이르게 하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형이상학이 존재를 진리에서 사유하지 않고 진리를 비은폐로서 그리고 비은폐를 본질에서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발언들은 “그 형이상학의 시작에서 완료에 이르기까지 기이한 방식으로 존재와 존재자의 철저한 혼동 속에 움직이고 있다.”

(이상 Was ist Metaphysic?『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존재 자체가 발현의 사건으로 밝혀짐에 따라, 존재와 상반되는 무는 존재 진리의 숨김과 감춤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이데거에서 유와 무는 곧 감춤과 밝힘, 은닉과 발현의 문제가 된다. 때문에 무와 존재는 따로 떨어진 것일 수 없다.

 

존재는 은닉으로부터 비은폐로 환히 트임인 한, 그것은 언제든 다시 은닉과 부재로 달아날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은닉은 발현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며 발현은 은닉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은닉으로서의 무는 존재를 존재로서 열어 보여주는 가능성으로서 “근원적으로 [존재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Wegmarken) 무는 존재를 감추면서 동시에 내보이는 “존재의 면사포”이다. 반면 존재의 편에서 보면 존재는 은닉의 면사포, 부재의 어둠을 뚫고 밝게 드러나는 것이다. 존재는 무로부터의 탈은폐脫隱蔽로서 무에 속한다.

 

그리하여 은현동시隱現同時, 은닉과 비은폐는 동시적이며 함께 속하는 것이다. 곧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존재와 무는 마치 산과 골짜기처럼 서로를 포함한다.

“존재자의 개방성은 필연적으로 그 자체 은닉의 극복이다. 마치 계곡이 산에 속하듯이 비은폐에는 은닉이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이다.” (Vom Wesen der Wahrheit『진리의 본질에 대하여』)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한다.” 둘 사이에는 “어떤 매개도, 어떤 이행도 없다. 왜냐하면 둘은 그 자체 그들의 본질에 따라 직접적으로 서로 속하기 때문이다.”(Parmenides)

존재로서의 존재는 유도 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둘 다이다. 존재는 ‘썸’이다.

 

이로써 존재와 무의 사이를 이루면서 둘을 동시에 붙잡고 있는 것은 밝게 트이며 영역화하는 존재 진리, 그 비은폐성의 열린 영역으로서 밝혀진다. 즉 둘의 중심이나 사이 영역은 은닉으로부터 발현하며 다시 은닉으로 달아나는 존재 자체의 진리 방식과 지평이다.

 

무에서 경험하는 영역성은 존재 자체이다. 존재 자체가 영역화하는 것이다. 그 영역은 존재의 진리가 머물고, 그럼으로써 존재와 무의 공속성이 일어나는 ‘동안의 폭’이자 ‘폭의 동안’으로서 시공간이다.

 

 

존재는 둥글다(3) - 사방四方으로, 둥글게 트이는 존재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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