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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천년의 약속 (3)

 

 

상생문화연구소 노종상

 
 
제2장 출가

 

 

━━━━⊱⋆⊰━━━━

 

 

3)

 

진표율사에 대한 전기는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국내 기록으로는 고려시대의 고승 일연이 쓴 『삼국유사』 권4 제5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이하 「석기」로 줄임)가 대표적이다.

 

전기는 아니지만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도 진표의 행적에 대한 일부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기록에는 송나라 찬영贊寧(930∼1001)이 쓴 『송고승전』 권 제14 「당백제국금산사진표전唐百濟國金山寺眞表傳」(이하 「진표전」으로 줄임), 원나라 사람 담악曇噩이 찬술한 『신수과분육학승전新修科分六學僧傳』의 「진표전」 그리고 명나라 태종 성조成祖가 지은 『신승전神僧傳』 권7 「진표」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중국기록인 『신수과분육학승전』의 「진표전」은 『송고승전』의 「진표전」을 거의 그대로 옮겨 실었다. 『신승전』의 「진표」 역시 마찬가지다. 『송고승전』 「진표전」의 첫머리에 있는 출가 동기에 대한 부분과 끝부분의 금산사 조성에 관한 부분만 제외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중국기록으로서 전표 전기는 『송고승전』의 「진표전」 한 편으로 귀착된다.

 

금산사를 다녀온 뒤에 나는 꽤 열심히 자료를 수집하였다. 국내 도서관은 물론 인터넷을 통해 모은 국내외 자료도 제법 쌓였다. 그 결과를 연구노트에 정리하고 있을 때, 학생들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이번 학기에 나한테 수강하고 있는 ‘한류반’ 학생들이었다.

 

💬“어서들 오게.”

나는 학생들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 “뭐하셨어요? 지난번에 금산사 다녀오신 뒤로 엄청 바쁘신 것 같던데요. 역시, 진표율사인가요!”

 

💬“음. 맞아. 내 나름대로 진표율사에 관한 전기를 수집하다 보니까 말이야. 아주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네.”

 

- “뭔가요, 교수님?”

 

💬“『송고승전』에 실려 있는 「진표전」은 송나라 단공端拱(988~989) 원년에 찬술되었단 말이야. 진표 전기의 찬술시기로는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오래되었지.”

 

- “그 말씀은…, 진표율사 전기가 중국에서 먼저 기록되었다는.” 석사과정 2학기인 여학생 정지원이 말했다. 그는 불제자로서 이번 학기에 내가 강의하는 과목은 물론, 특히 내가 관심을 두고 진표율사 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맞아. 바로 그 점일세.”

- “….”

 

💬“문제를 좀 더 확대시키면 더욱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네.” 나는 어조에 힘을 주면서 정지원을 보았다. 그의 지식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 “네. 교수님. 진표율사는 신라 시대 다른 고승들과 같이 당나라에 구법 유학을 하지도 않았고, 또한 직접 집필한 저술도 남기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까지 알려져 그의 전기가 국내보다도 먼저 중국에서 『송고승전』을 비롯한 몇 편의 고승전에 실려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아.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네.”

 

-“굳이 비교하자면 원효와 같은 인물이군요,” 박사과정 1학기에 재학하고 있는 송진호가 메모지를 무릎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 원효 역시 당나라에 유학하지 않은 고승으로서 『송고승전』을 비롯하여 각종 중국의 고승전에 입전되었으니까.”

나는 송진호와 정지원을 번갈아 보며 일단 송의 의견에 일단 동의를 하였다.

 

- “교수님. 하지만 진표와 원효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정지원이 반대의견을 들고 나왔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였다.

 

💬“응. 말해보게.”

 

- “원효는 많은 저술을 남겨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심지어 중국에까지 영향을 주었잖아요. 그러니까 중국 고승전에 입전될만하죠. 또, 원효는 두 차례나 당나라 구법 유학을 시도했었잖아요.”

 

정지원이 지적한 것처럼 원효가 두 차례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 것은 학계에서 인정하고 있다. 원효가 당나라에 유학하려고 했던 이유는 유식학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유식학의 중국(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전래는 세 단계에 걸쳐 전해졌다.

 

첫째는 보리유지菩提流支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의 한역, 둘째는 진제眞諦의 『섭대승론攝大乘論』의 한역, 셋째는 현장玄奘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성유식론成唯識論』의 한역이다. 이러한 유가유식사상의 한역으로 종파가 발생하여 『십지경론』의 지론종地論宗을, 『섭대승론』은 섭론종攝論宗을, 그리고  『유가사지론』과 『성유식론』은 법상종法相宗을 발생시켰다.

 

이 가운데 보리유지와 진제가 전한 유식학을 구유식, 현장의 유식학을 신유식이라고 하였다. 이 유가사상은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의 유가유식은 세 차례에 걸쳐서 도입되었고, 또 유가사상과 함께 미륵신앙을 도입한 이들 세 종파는 눈부신 신앙운동으로 유가사상의 보급과 함께 미륵신앙도 토착화시키게 된다.

 

중국에 전해지고, 발생한 유가유식은 신라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신라에는 유식학자가 많았다. 섭론종에 속했던 원광법사와 법상종에 속하는 원측법사를 비롯하여 원효, 도증道證, 승장勝莊, 신방神昉, 순경順璟, 경흥憬興, 둔륜遁倫, 태현太賢 등이 그들이었다. 이 가운데 원효가 처음 접한 유식은 구유식이었다. 원효와 의상義湘은 중국에 전해진 신유식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신라 불교계에서 하나의 신사조에 다름없었다. 원효와 의상은 그 신사조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을 향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는 고구려의 국경에서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두 번째 시도는 뱃길이었다. 오늘날의 충남 당진인 당주항唐州港에서 중국 배를 기다리면서 어떤 묘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한밤중에 원효는 갈증이 났다. 물을 찾다가 근처의 샘에서 물을 달게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샘을 찾은 그는 자신이 간밤에 마신 감로수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구토가 일어났고 그 순간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당시 원효가 읊었다는 오도송이 전한다.

마음이 일어나는 까닭에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감龕과 분墳이 둘이 아니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며, 모든 현상은 의식의 전변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달리 [마음 밖에서] 구하겠는가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동행하였던 의상은 홀로 당나라로 구법 유학을 떠나 정작 당나라 수도 장안에 가서는 유식학이 아닌 화엄학을 공부하여 해동 화엄학의 개조가 되었다.

 

💬“그런가. 그렇군. 허허.” 나는 정지원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그렇다면, 진표율사가 당시 유행이다시피 한 당나라 유학도 하지 않고, 저술도 남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고승전에 입전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 “자명하지 않을까요. 진표의 교화력과 명성이 국내 신라는 물론 중국까지 명성을 떨쳤던 까닭이겠지요. 결국 진표율사의 교화력이라고 봐요.”

 

💬“교화력이다!”

 

- “저도 동의합니다. 무엇보다도 진표율사가 추구했던 미륵신앙과 참회교법 등에 의한 교화와 대승보살로서의 실천적 삶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송진호가 말했다.

 

💬 “대승보살로서의 실천적 삶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 바꾸어 말하면 대중적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애기였을 테구 말이야.”

 

나는 두 학생의 토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말하자면 그들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자. 그럼 다음 발표는 누구 차례인가.”

 

━━━━⊱⋆⊰━━━━

 

4)

 

국내 기록으로서 진표의 전기 두 편은 『삼국유사』에 앞뒤로 실려 있다. 앞에 실려 있는 「진표전간」은 물론 일연이 기록한 것이다. 같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진표전기라고 해도 「석기」는 기록자가 다르다. 「석기」는 1199년 금강산 발연사 주지 영잠瑩岑이 기록한 「관동풍악산발연수진표율사진신골장입석비명關東楓岳鉢淵藪眞表律師眞身骨藏立石碑銘」(이하 「비명」으로 줄임)을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1250~1322)이 정리, 수록한 것이다.  「석기」 말미에 다음과 같이 덧붙여 놓았다.

 

이 기록(『삼국유사』)에 실린 진표율사의 사적(「진표전간」)과 발연사 비석의 기록은 서로 다른 데가 있다. 때문에 영잠의 기록만을 추려서 실었으니 후세의 현자들이 당연히 잘 살피기 바란다. 무극이 기록한다(此錄所載眞表事跡 與鉢淵石記 互有不同 故刪取瑩岑所記而載之 後賢宜考之 無極記).

 

『삼국유사』에는 ‘무극기無極記’라고 덧붙인 곳이 두 군데가 있다. 『삼국유사』라는 제목은 일연이 붙였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제자 무극에 의해서 책으로 간행되었다.

 

「남행월일기」는 전주목 사록겸서기史錄兼書記에 보임된 이규보가 1199년 9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년 4개월여 기간 동안의 외직생활을 통해 얻은 견문을 토대로 1201년에 정리한 일종의 기행수필이다. 당대 최고의 문인 이규보는 전주목 주변을 두로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기록했는데, 여기에 진표에 관한 기록이 들어있다.

 

이 기록은 영잠의 「비명」과 같은 해에 쓰였다. 현재 전하는 진표에 관한 국내 기록으로는 「석기」와 함께 최초의 기록이다. 기행문이므로 진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기는 아니지만 진표의 수행에 관해서는 매우 유용한 자료다.

 

학생들이 내가 준 프린트 복사본을 읽는 동안 나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정원사 황세운씨는 오늘도 정원수 정지작업을 하다가 휴식 시간에는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각자 읽었던 프린트 물을 앞에 놓고 고개를 드는 학생들을 나는 천천히 둘러보았다.

 

💬“정리를 하면 이렇다네.

 

현재 전하는 진표율사에 대한 전기는 「진표전간」, 「석기」 그리고 「진표전」 등 3종이 있네. 이들 중 「진표전」이 가장 오래 되었지. 그러나 「진표전」은 중국기록으로서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단 말이야.

 

진표율사와 진표전기 찬술자들의 사망연대를 기준으로 「진표전」은 진표 사후 약 230년 뒤에, 「비명」(「석기」)은 약 435년 뒤에, 그리고 「진표전간」은 525년 뒤에 기록되어 있어요. 전기물의 평가 대상이 ‘사실성’ 여부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또한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굳이 사실성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진표와의 시간적 거리와 공간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전기물로서의 ‘가치’가 커질 것이고. 이 경우 시간적 거리는 「진표전」〉「비명」「석기」〉「진표전간」이 되고, 공간적 거리는 「석기」=「진표전간」〉「진표전」이 되지.

 

그러나 시간적 거리에서 「석기」의 경우, 원래 영잠에 의해 집필된 「비명」은 「진표전간」보다 앞서지만, 무극에 의해 정리·편찬된 「석기」는 「진표전간」보다 늦어. 스승 일연이 쓴 「진표전간」을 보고「비명」과 다른 곳이 있어서 제자 무극이 다시 정리하여 「석기」라는 제목으로 「진표전간」 뒤쪽에 수록한 것이기 때문이지.”

 

- “문제는 이들 3종의 전기가 진표율사의 행적에 대한 연대를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20년 정도의 차이가 납니다. 따라서 진표의 생애에 대한 접근은 이들 3종의 전기에 대한 종합, 비교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데요.”

정지원이 지적했다. 

 

-“제가, 어떤 논문을 읽었는데,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박사과정 3학기 백기영이 입을 열었다.

 

“한 인물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인물의 직접적인 활동 행적을 통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인물이 남긴 ‘말씀’을 통하는 길이지요. 특히 종교인의 사상은 그 인물의 삶 자체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 인물이 남긴 ‘말씀’ 또한 중요합니다. 종교인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진표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전기는 3종이 있지만, 그가 남긴 ‘말씀’의 기록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표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그에 관한 3종의 전기를 통해 그의 ‘말씀’과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 “그렇습니다. 신라 중대 불교사상을 연구할 때 진표율사만큼 논란이 많았던 인물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진표의 행적이 ‘신이神異의 사事’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존하는 진표 전기 가운데 최초의 기록인 「진표전」이 실려 있는 『송고승전』은 신비주의 성향이 특히 강한 문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표전」뿐만 아니라 두 국내기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 명나라 태종 영락제가 편찬한 『신승전』은 마등摩騰으로부터 원元의 첨파瞻巴까지 신이를 행한 승려 208명의 전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진표의 전기가 실리게 된 이유도 ‘신이의 사’가 큰 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송진호가 말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나카리야 가이텐忽滑谷快天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진표전간」과 「석기」는 모두 황당한 기사로 채워져 있다. 『송고승전』에도 진표의 전기가 실려 있지만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노트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던 정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 “그와 같은 비판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진표율사는 고대 신라시대의 종교인입니다. 종교인의 행적에 신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종교인’이기를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닐까요. 또한 ‘신이의 사’라고 지적하는 기준도 모호해요. 결국 잣대는 과학적 합리성, 실증성이라는 것일 텐데. 아무리 학문적 접근이라고 해도 그것이 만능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 생각에 진표 전기에서 신비주의는 불교 나름의 ‘종교적’인 범위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신이의 사’로 기록된 진표의 행적에서 역사적 진면목을 찾아내는 것은 바로 연구자의 몫이 아닐까요.” 정지원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

 

5)

 

묵은 해가 가고, 다시 새해가 왔다.

봄볕이 완연하다.

4월 하순을 지났을 무렵이다. 모내기철이다. 이제부터 들판은 차츰 바빠지기 시작한다.

엄뫼는 온통 푸른 옷으로 갈아입은 지 오래였다.

 

- “잡아랏. 놓치면 안 된다.”

그날 사냥에 나선 진내마가 쩌렁 소리 질렀다. 사슴이었다. 지난해 가을에 놓친 사슴이 생각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잡자.”

진표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 “와아, 와아―.”

몰이꾼으로 나선 노비들이 고함을 질러댔다.

 

진표는 말을 몰았다. 그해에도 그의 작은 흑마는 바뀌지 않았다. 복보를 두 발로 차면서 채찍을 휘둘러댔으나 아무리 빨라도 아버지가 타고 있는 백마를 따라잡기에는 턱도 없었다. 그래도 흑마는 나름 달린다고 혼신을 다 해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신나게 달렸는데 사슴은커녕 아버지가 탄 백마는 물론이고 몰이꾼들도 보이지 않았다. 숲속에서 진표 혼자 남은 셈이었다.

 

말은 이미 지쳤는지 걸음이 더뎠다. 진표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숲속의 싱그런 봄내음이 좋았다.

 

- “도련님 아닌감요?”

그때 판돌이 울먹이는 소리로 길을 막았다. 같은 또래인 판돌은 진표에게 친구나 다름없는 노비였다.

💬“판돌이구나. 혼자 남은 거냐?”

“근당게요.”

 

💬“다들 어디로 갔지?”

“나도 모르것는디요. 함께 달려왔는데, 눈뜨고 보니께 혼자 아닙뎌.”

 

💬그러냐. 어여 타거라.”

진표는 말을 세우고 뒤쪽으로 턱짓을 하였다. 뒤에 타라는 것이었다. 판돌은 얼른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뭐하냐. 내 뒤에 타라구.”

“안되어라 잉.”

판돌이 뒷걸음질을 하였다. 자신의 신분이 노비임을 잊지 않은 까닭이었다.

 

💬“누가 보믄 어쩔라구.”

“보긴 누가 본다고. 어여 타기나 해.”

 

진표가 윽박지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인집 도련님의 명이다. 그제야 판돌은 진표의 뒤에 올라탔다. 작은 말은 힘겹다는 듯 절룩거리면서도 어딘가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낯설지만 낯선 것 같지 않은 숲속 길이다. 진표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말이 가는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해는 이미 중천에서 많이 기울었다.

 

개굴, 개굴―.

얼마나 갔을까. 진표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가까운 곳에 개울이 있었다. 볕이 잘 드는 아늑한 숲속 개울이다. 그러고 보니까 퍽 눈에 익은 숲속이었다. 진표는 개울가로 말을 몰았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제법 요란하였다. 개구리 울음소리만 제외하면 숲속은 정적이 흘렀다. 잠시 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진표는,

💬“쉬었다 가자.”

하고 판돌의 대답을 들을 사이도 없이 말에서 뛰어 내렸다. 판돌도 말에서 내려 뒤따라 왔다.

- “….”

 

바로 그때였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따라 물속을 들여다보던 진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몰속을 보고 있는 눈이 의심스러운 까닭이다.

“도련님, 이거슨.”

판돌이 뒤에서 소리 질렀다.

 

💬“앗. 아아.”

진표는 말없이 탄식을 삼켰다. 맞다. 판돌이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개구리 꿰미였다. 작년 가을에 사냥을 왔다가 진표의 요구로 일행이 잡아서 물속에 담가 두었던 바로 그 개구리 꿰미였다. 개구리 꿰미는 진표가 물속에 담가 둔 그대로 놓여 있었다. 진표는 꿰미 끝에 눌러놓은 돌들을 치우고 개구리 꿰미를 들어 올렸다. 거기에는 줄잡아서 30마리 가량의 개구리가 아직까지 살아서 퍼덕거렸다. 5, 60마리는 잡아 두었는데, 그렇다면 절반 정도는 죽었다는 얘기였다.

 

개구리 꿰미를 들고 한참 동안 바라보는 진표의 눈가에 안개가 피워 올랐다. 목안이 울컥했다.

―내 잘못이다. 내 욕심으로 이 개구리 절반을 죽였구나.

개구리 꿰미에서 눈을 떼지 않는 진표의 두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참회의 눈물이다.

―괴롭구나. 괴로워. 어찌 입과 배가 저같이 꿰어 해를 넘기며 괴로움을 받는고!

진표는 무거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며 스스로 책망하여 말했다. 한동안 괴로워하던 진표는 버들가지를 끊어 살아있는 개구리들을 모두 놓아주었다.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굳은 표정을 하고 말위에 올랐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이후 진표는 도통 말이 없었다. 아예 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벌써 달포가 지났다.

그날 밤, 늦게 진표는 안방을 찾아갔다.

 

“표야. 이 밤중에 네가 웬일이냐?”

💬“아버지,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전에 없이 깍듯하게 경어를 쓰는 열두 살 아들을 보고 진내마와 어머니 길보량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아들을 바라보았다.

 

💬“소자는, 중이 되고자 합니다.”

잠시 동안 뜸을 들이던 진표가 뚜벅 말했다. 열두 살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모는 금방 알아차렸다. 철없는 것 같지만 속이 깊어도 한없이 깊어 부모조차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아들이었다. 아들이 이 정도의 얘기를 한다면, 그것은 어떤 권위와 회유를 가져온다고 해도 도저히 물릴 수 있는 결심이 아니라는 것을. 더구나 진내마 내외는 원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불심이 깊은 청신사, 청신녀였다. 아무리 그러하기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선뜻 출가하도록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여라.”

진내마 내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물론 그 말조차도 형식적임을 모르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들이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죽은 나무 가지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것을 부모는 모르지 않았다.

 

진표 역시 부모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안방에서 물러 나왔다. 7일 뒤, 진표는 다시 안방을 찾았다. 그날도 부모는 완곡하게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그렇게 부모를 설득하기를 세 번, 진표는 다시 안방을 찾았다.

 

- “어디로 가겠느냐?”

뜻밖에도 진내마가 먼저 말했다.

 

💬“금산사 숭제스님 문하에 들고자 합니다.”

- “알았다.”

 

진표는 마침내 부모의 허락을 받았다. 그러니까 진표는 개구리 사건을 계기로 출가의 뜻을 품게 되었고, 다음날 모악산 금산사로 들어가 숭제법사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그의 나이 열두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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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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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천년의 약속 (2)

 

 

상생문화연구소 노종상

 
 
제2장 출가

 

 

━━━━⊱⋆⊰━━━━

 

1)

 

💬 “이럇. 이랴 아―.”

 

왼손으로 갈기를 움켜쥔 채 오른손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모는 목소리가 청아하다. 달리는 동물은 말이라기보다는 당나귀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체구이다. 그러나 안장에 앉아있는 주인과 비교하면 그런대로 격이 맞았다. 온통 검은 털의 흑마이다. 작은 체구에도 흑마는 용맹스럽게 생겼다. 

 

다각다각―. 

 

흑마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짧은 다리로 아무리 달린다고 해도 속도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말 주인은 신이 났다.

 

늦가을 바람이 상쾌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다. 

해는 중천에서 한참 기울었다.

 

- “표야. 천천히 달려라. 조심해야지.”

 

훌쩍 큰 백마를 타고 달리는 아버지는 열한 살 아직 어린아이인 아들 진표가 말을 모는 것이 퍽 대견스럽지만 또한 걱정스러운 듯 눈을 떼지 못한다. 백마는 흑마에 비해 속력을 내어 달리지 않았으나 거의 같은 속도를 유지하였다. 백마가 한 걸음을 뛴다면 흑마는 서너 걸음을 뛰어야 속도가 맞을 정도였다. 뚜벅뚜벅 관절 부분을 꺾어 가면서 절도 있게 걸어가는 백마는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시다. 

 

💬 “괜찮아요. 아버지.”

 

진표는 갈기 잡은 손을 놓고 안장에 반듯하게 앉아서 고삐 줄을 빙글빙글 돌렸다. 

 

- “허어. 인석아. 조심해야지. 딴짓하다가 또.”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짓지 못한다. 진표가 처음 말을 탔을 때 낙마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표도 이미 눈치를 챈 모양이다. 

 

💬 “아버지는. 그때는 어렸을 때잖아요.”

- “그럼. 지금은 컸느냐?”

 

💬 “그럼요. 내가, 열한 살이라구요. 근데, 아버지. 저기 저 산이 엄뫼지요?”

- “엄뫼지. 큰뫼라고도 하고.”

 

💬 “큰뫼라고요!” 진표는 눈을 송아지 눈처럼 부릅떴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쁨의 표현이다. 

 

모악산은 엄뫼라고도 불리고 큰뫼라고도 불렸다. 전하는 얘기로는 한자어로 쓸 때 엄뫼는 모악으로 바뀌었고, 큰뫼를 ‘큼’을 음역하여 ‘금金’로 하고 ‘뫼’는 의역하여 ‘산’으로 하여 금산金山이라 바뀌었다고 하였다. 엄뫼와 모악은 어머니 산이란 뜻이다. 산의 정상에 어머니가 어리니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으로 보이는 바위가 있어서 어머니 산이라는 뜻이 생겼다고 하였다.

 

💬 “전에 어머니랑 금산사에도 갔었는데, 좀 작고 초라했어요. 너무 작아요.” 진표는 어린 시절 금산사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인석아. 부처님 도량이 크고 작고가 문제인 게냐.”

 

💬 “그래도요. 금산사가 그대로 이름난 절인데, 아쉬워요.”

-“허어. 그럼 이 다음에 네가 커서 불사 시주를 많이 하려무나. 큰 절로 불사를 해달라고 해.”

 

💬 “그럴까요. 참, 금산사 스님께서도 잘 계시겠지요?”

- “누구, 숭제崇濟 스님 말이냐?”

 

💬 “예. 전에 어머니가 불공드리러 갔을 때 가서 뵜어요. 그때 뵈니까, 꼭 아버지 같으시던 걸요.”

- “뭐야. 스님이 나 같았다고? 흠. 좋은 일이지. 그럼 좋고말고. 숭제스님이, 공부를 아주 많이 하신 분이니라. 자주 가서 뵙도록 해.”

 

💬 “아버진. 나 혼자 절에를 어떻게 가요. 난 열한 살이라고요.”

- “왜, 아니냐. 열한 살이면 다 컸다고 하지 않았느냐.”

 

💬 “참. 그땐 그때고요. 그러지 말고 오늘 금산사에 가면 되겠네요.”

- “안된다.”

💬 “왜요? 아버지.”

 

- “우린 지금 사냥 중이잖느냐. 부처님은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고 하셨느니.”

💬 “알았어요. 아버지.”

 

진표는 이미 아버지의 얘기를 뒤로 하고 쏜살같이 말을 몰았다. 뒤에서 말고삐를 당기며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졌다. 아직 어리지만, 속내는 꽉 찼다는 든든함이 가슴에 차 올랐다.

 

- “내마奈麻(乃末, 奈末, 柰麻) 나으리. 좀 천천히 가야써것는 디요. 소인들은 도저히 못따라가겄구만이라 잉.”

 

뒤따르는 세 명의 사내들이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중늙은이 한 명과 젊은 사내 그리고 진표 또래의 아이였다. 각자 등에 화살통 하나씩을 메고 있는 그들의 손에는 활과 화살이 들려 있는 몰이꾼들이었다.

 

내마는 신라의 11등급 관직명이다. 진내마는 진표의 아버지를 이름 대신 벼슬로 지칭하는 것이었다. 진내마 부자의 뒤를 따르는 몰이꾼들은 노비였다.

 

- “알았느니.” 인근에서 인품이 좋기로 소문난 진내마였다. “표야. 게 섰거라.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지.”

💬 “아버지. 저기, 사슴이에요. 저놈을 잡아야 돼요.”

 

진표는 대답 대신 사슴을 쫓았다. 제법 큰 사슴이다. 진내마도 욕심이 동했는가 보았다. 부자는 약속이나 한 듯 사슴을 쫓았다. 그러나 사슴은 이내 울창한 숲속으로 사라졌다.

 

- “표야. 그만 됐다. 쉬어 가.” 

아버지가 아쉬움을 감추고 말했다. 

 

💬 “예, 아버지. 그러잖아도, 쉬었다 갈 참이에요.”

 

진표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곳은 숲으로 둘러싸인 개울가였다. 잠시 후 몰이꾼들이 헐떡거리며 도착했다. 

 

━━━━⊱⋆⊰━━━━

 

2)

 

개굴. 개굴―.

 

진표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은 것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식을 즈음이었다. 처음에는 한 마리가 진표의 반응이라도 떠보겠다는 듯 개굴, 하고 울었고 뒤이어 저쪽에서 응답하는 듯 개굴, 하고 울었다. 잇따라 여기저기서 개구리가 개굴개굴, 울어댔다. 재미있다는 듯 물속을 바라만 보고 있던 진표는 입가에 씩 웃음을 지었다.

 

💬 “잡을 거야.”

그는 혼잣말처럼 말하고 물속으로 슬금슬금 들어갔다. 금방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았다. 그는 자랑스럽다는 듯 히죽거리며 일행을 보았다. 

 

💬 “팔용 아저씨. 이거 구워 먹으면 맛있겠어요.”

그는 중늙은이 노비 팔용을 보고 말했다. 

“….”

 

키가 작고 입술이 개구리처럼 두툼한 팔용은 진내마의 표정을 흘끔 살펴보았다. 며칠 전 노비들끼리 들에 나가서 일하다가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었을 때, 진표가 나타나 같이 먹었던 일이 있었다.

 

💬 “판돌아, 뭐해? 개구리를 잡아야지.”

 

팔용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진표는 노비 중에 가장 나이 어린 판돌에게 고함을 질렀다. 기다렸다는 듯 판돌이 물속으로 들어왔고, 뒤이어 중간 노비인 춘삼이도 합세하였다. 개구리는 지천이었다. 셋이서 잡았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개구리는 금방 마릿수가 늘어났다.

 

💬 “팔용 아저씨. 이거 가져가요. 집에 가서 구워 먹게.”

- “알았구먼요, 도련님.”

 

팔용은 진내마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뒤탈에 대한 우려를 던져버리고 곧장 개울가로 가서 가늘고 긴 버드나무 가지를 툭툭 꺾어왔다. 그는 이로 물어뜯어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꿰미를 만들었다. 개구리는 다섯 꿰미나 되었다. 줄잡아서 5, 60마리는 될 터였다. 개구리 꿰미를 받아서 든 진표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다. 제법 묵직하다.

 

- “저기, 사슴이구만이라 잉.”

춘삼이가 소리쳤다.

- “맞네. 내마 나리. 사슴이구만요.”

팔용이 진내마를 보고 굽신거렸다.

 

- “잡아라.”

진내마가 외쳤다. 일행은 후다닥 물속에서 뛰어나와 사슴을 쫓았다. 뒤에서 일행을 바라보던 진표는,

💬 “이건 어쩌라고!”

혼잣말로 말하고, 개구리 꿰미를 물속에 담갔다. 구운 개구리 뒷다리의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 “사냥이 끝나면 가져가야지.”

 

그는 혼잣말로 말하면서 개구리 꿰미를 물속에 담그고 끝을 돌로 눌러 둔 뒤에 일어섰다. 그리고 말 위에 올라 사슴을 쫓았다. 그러나 숲속에서 말을 타고 사슴을 쫓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슴은 마치 진내마 일행을 놀려 주기라도 하는 듯 거리가 좀 멀어졌다 싶으면 멈췄다가, 사냥꾼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훌쩍훌쩍 숲속으로 줄행랑을 쳤다.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고 이내 어스름이 밀려왔다. 진내마 일행은 그날 사냥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슴을 쫓으면서 왔던 길이 아니라 산 북쪽으로 해서 집으로 돌아왔으므로 진표는 개울 물속에 담가둔 개구리 꿰미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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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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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천년의 약속 (1)

 

 

상생문화연구소 노종상

 
1️⃣ 화두

 

 

━━━━⊱⋆⊰━━━━

 

1)

💬 “따라서 현재의 한류 현상이 크게는 지구화(globalization), 문화의 혼성화(cultural hybridity) 또는 세역화(glocalization), 문화생산과 수용의 권역화(regionalization), 문화적 근접성(cultural proximity) 그리고 문화수용의 능동성(active reception)이라는 다섯 가지의 서로 관련 혹은 대립하는 힘들의 중층적 영향/결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한 연구자의 지적에 일단 동의하고자 합니다. 한국 대중문화가, K-Pop이 현재의 한류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는 주장도 없지 않지만, 나는 일단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한류 문화의 저변에 대한 확충을 다각도로 점검해보자는 것이죠. 한류의 미래! 한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리고 나의 과제가 되겠지요. 자.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여섯 명의 학생들이 연구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물고 창가로 갔다. 머리가 복잡했다. 아니, 혼란스러웠다. 두 번째 강의였다. 아직도 강단이 낯설었다. 과연 이 직업이 나에게 어울리는 옷일까. 담배 연기를 온몸 깊숙이 삼켰다가 창문을 향해 훅 뿜어냈다. 담배 연기는 안개처럼 사방으로 번졌다.

 

나는 꿈을 꾼다. 내 기억이 처음 열린 그때부터 지금까지 꿈을 꾸며 살았다. 살고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누구나, 꿈을 꾸며 산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도. 인간은 누구나 꿈을 꾸며 살고 있다. 과연 꿈꾸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뭐,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살아온 그때까지, 참, 혹독한 꿈을 꾸며, 꿈속에서 살아왔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을 당위로 알았다. 꿈꾸지 않는 자는 죽음이다. 주검이다. 과연, 그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 “선생님은 빨갱이 소설 쓰잖아요. 이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소설은, 안 됩니다.”

 

평소 잘 알고 있었던 출판사 사장의 그 말 한마디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 바뀐 세상! 내가 꿈꾸었던 완전한 그런 세상은 아니었지만, 당장에는, 차선책은 된다고 생각하였고, 나는 그 세상을 위해 참 무던하게도 모진 꿈을 꾸며 살아왔는데. 아니, 꿈만이 아니었다. 작가로서, 기자로서 나는 현실을 피하지 않았고, 덕택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하였던가.

 

벌건 대낮의 대로상에서, 그것도 다섯 살난 아들이 보는 앞에서 너댓 명의 괴한들에게 불법납치당해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서초동 검찰청 어느 검사 앞에서 조사받기도 했으며, 재판정에 불려가 판사 앞에서 괜스레 가슴 조여 보기도 했고, 그리고, 또, 감옥에 끌려가 몇 년을 썩고, 삭여야 했던가.

 

뜻밖에도 돈이 좀 모였을 때는 좀, 생뚱맞게도, 신문사를 차려 온통 그 꿈꾸는 곳에 집중하기도 하였다. 뭐, 대가를 바라고 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꿈꾸고, 투쟁했던 그런 세상에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며칠 뒤, 나는 꿈 하나를 접었다. 절필이다. 참, 부질없이, 많은 글을 남발해왔다. 변명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투쟁을 위한 무기였다.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니! 동기부터가 불순했던 것 같기도 하였다. 그것을, 나는 성스러운 것이라고 포장해 왔다. 나는 물론 내 가족을 먹고 살게 하는 글이니, 얼마나 성스러운가. 

 

또 있다. 내 소설은 민주주의를 위한 무기다. 오. 나는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다. 틀렸다. 틀려도 참, 많이 틀렸다. 내, 오만을, 나는 그렇게 포장했던 거다. 죄송하게도 그분, 붓다의 말씀을 빌린다면, 나는 한 마디의 글도 쓰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그동안 내가 쓴 글을, 하나도, 쓰여서는 안 되는 글이었다. ‘빨갱이 소설’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서가 아니다. 물론 그 소리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계기는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달 동안 아파트 방구석에 틀어박혀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병이 찾아왔다. 참, 무지막지한 병이었다. 며칠 동안을 끙끙거리며 신열을 앓았다. 죽을 고비라는 생각이 몇 번씩이나 들었다. 그러나, 무식하게도 버텼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속셈이었다.

 

고개 하나를 넘으면 큰 병원이 있었다. 원자력병원이다. 암 전문 병원이지만, 뒷날 아내에게 들었던 소리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긴 기껏해야 1km 남짓 떨어진 병원을 119구급차에 실려 갔을 정도였다니까.

 

병원에 실려 온 그날부터 나는 또 하나의 경계와 싸워야 했다. 아니, 경계 앞에 혼자 괴로워하며 몸부림쳐야 했다.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게 된 나는 2인실에 강제 입원을 당했다. 문제는 입원 첫날부터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7월의 여름 날씨는 지상의 모든 것이 불타는 듯한 무더위였다. 

 

그런데, 병실에는 에어컨조차 틀 수 없었다. 같은 병실에 입원한 환자가 찬 기운을 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암 환자였다. 강원도 강릉에서 왔는데, 30년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달 앞두고 암으로 판정받은 환자였다.

 

그는 1주일 만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퇴실했다. 다음에 들어온 환자도 암 환자였다. 그렇게 한 달여를 입원하는 동안,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암 환자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랬는데, 회진 나온 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 “정밀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것을 알겠지만, 암일 수도 있습니다.”

 

뒤에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면 의사는 아주 틀린 얘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암일 수도 있다고 했지, 암이라고 하지는 않았지 않은가. 다만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는 소리를 좀 과하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와 아내의 귀에는 왜 암이라는 진단으로 알아들었을까. 지레 겁을 먹은 탓인지 몰랐다.

 

원자력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여 동안 우리는 적지 않은 암 환자의 최후를 목격하였다. 오늘 밤에 살아서 우리와 얘기를 나누었던 환자가 다음 날 아침에는 주검이 되어 사라졌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따라서 회진 의사의 그 말 한마디는 우리에게 일종의 사형선고와 같은 울림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간호하던 아내는 벌써 훌쩍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냥, 진공상태에서 한동안 멍하니 어두컴컴한 병실 천정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1주일 뒤에 나온 결과는, 엉뚱하게도, 늑막결핵이라는 판정이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원자력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는 동안, 나는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서울을 떠나는 꿈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에 온 이후 20년이라는 세월을 서울에서 살았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참, 오래 살았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절필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앞으로 소설을 쓰지 않겠다. 내 결심을, 각오를 들은 아내의 얼굴에는 벌써 걱정의 빛이 완연하다.

 

그때 나는 아내에게 가장 무책임한 말을 툭 내뱉었다.

💬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 되겠지.”

 

아내는 반응이 없었다. 늘 그랬으니까. 아내의 바로 그런 점이 나를 옭아매는 무기가 되었다. 차라리, 아니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앙칼지게 부정이라도 한다면, 나는 더욱 강하게 튀어 나갔을 터다. 그러나 아내는 어떤 일이 닥치면 천 근 바윗덩어리같이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침묵 앞에 무릎을 꿇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모든 것을 털고 나니까 홀가분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는데, 승리의 여신이 아내의 머리 위에서 흰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때 나에게 손을 내민 것은, 대전 근교 계룡산 천왕봉이 한눈에 올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한류문화대학원대학교(이하 ‘한류대’로 줄임)라는 긴 이름을 가진 대학원대학교 교수 자리였다. 앓고 있는 병이 완치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나는 복부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차를 직접 몰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

 

2)

 

늦여름의 해는 정오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더위는 마지막 작열하는 기세로 한여름 무더위보다 더욱 날카롭게 내리쬐었다. 금산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주위에는 퍽 낯익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보제루를 나온 나는 정면에 보이는 대적광전과 오른쪽 미륵전 건물을 향해 합장을 올린 뒤에 곧장 설법전 건물 앞을 지나갔다. 다른 사람이 나를 눈여겨보았다면 퍽 익숙한 몸놀림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 터다.

 

💬 “혹시, 원명스님, 아직도, 계십니까?”

 

적묵당 앞으로 다가선 나는 굳게 문이 닫혀 있는 건물 쪽을 흘끔거리면서 맞은 편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홍안의 한 노승에게 짐짓 떨리는 음색으로 말을 걸었다. 적묵당은 주지를 비롯한 삼직 스님의 거주처이자 후원 요사의 중심 건물이다. 일반 요사와는 달리 공양하고 예법을 갖추는 대중방(큰방)이 있는 수행 전용 건물이다. 그리고 맞은편에 ‘참석 수행중’이라는 검소한 팻말 하나가 결려있는 안쪽 건물은 화림선원이다. 일반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스님들의 선방이다.

 

- “누구?”

 

노승이 물었다.

 

💬 “원명스님이라고.”

 

“그놈을 왜 찾누.”

 

💬 “그게, 저.”

 

“죽었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승은 뒷짐을 진 채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망연한 눈빛으로 비틀거리며 사라지는 노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나는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원명스님은 내 도반이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내가 한 때는 출가인이었다는 얘기부터 하는 것이 순서겠지. 그것도 바로 이곳 금산사에서 행자 시절을 보냈고 사미계를 받았다. 원명은 나보다 1년 늦게 머리를 깎았다. 그렇다고 해도 같은 나이인 우리는 도반이자 친형제와 같았다. 속가의 표현대로라면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꿈 탓이다. 정확하게는, 소설가 탓이었다. 내가 원명과 헤어지게 된 것은.

 

- “이눔아. 소설가라니. 중이 소설가가 되겠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은사 스님은 단호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소설가와 스님은 좀 거리가 있었다. 차라리 시인이면 또 모를까. 전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문학 동아리에 가입했다. 촛불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신석정 시인이 지도교사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시인이 꿈이었다. 그 꿈이 지금까지 유지되었다면, 나는 은사 스님의 바람을 굳이 저버리지는 않아도 좋았을 텐데.

 

그런데 나는 언제인가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설가의 꿈을 꾸었다. 은사 스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는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명을 통해 편지 한 통을 남겨 놓고, 어느 날 새벽예불을 마친 뒤에 나는 줄행랑을 치듯 금산사를 떠났다.

 

반면, 원명은 은사 스님의 착한 제자였다. 그는 은사 스님의 바람대로 선승이 되었고, 몇 년 전에 들리는 소식으로는 아직도 금산사에서 가부좌가 터지도록 정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지금도 화림선원 한쪽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지 몰랐다.

 

나는 미륵전으로 향했다. 삼 층의 육중한 건물이다. 위풍당당한 미륵불상을 보며 나는 마치 고향에라도 온 듯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삼배를 올린 뒤에, 잠시 미륵불상을 우러러보았다. 예나 다름없이 자비로운 모습 그대로였다. 오, 부처님. 미륵부처님.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문득 내가 부처님을 찾아온 거지 아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화경』 「신해품」에서는 ‘장자궁자의 비유’가 나온다. 부자 아버지 장자와 거지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하여 타향객지를 떠돌다가 거지가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다른 곳에 머물면서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있는 성으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가 찾지 못하여 한 성에 머물면서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장자로 불렸다.

 

장자는 아들 생각에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다. 어느 날 거지가 된 아들이 장자 저택에 품팔이를 왔다. 아들은 으리으리한 집에 보배로 치장한 주인이 바라문과 왕족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두려움을 느껴 품팔이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달아났다.

 

장자는 그 거지를 보고는 그렇게도 찾아 헤맸던 아들임을 알았다. 그는 옆에 시위하고 있던, 옷을 잘 차려입은 시종을 보내 데려오도록 했다. 잡혀 온 거지 아들은 자신은 이제 죽게 될 것이라 지레 겁을 내어 기절하였다.

 

장자는 아들이 심지가 얕고 졸렬하여 자신을 어려워함을 알고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을 알아보게 했다. 이번에는 방편을 써서 허름하게 생긴 시종을 보내 거지 아들을 꾀어오게 했다. 주인댁에 품팔이할 일이 있으니 같이 가서 똥치는 일을 하면 품삯을 배로 준다는 것이었다. 거지 아들은 똥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화려한 옷을 벗어놓고 초췌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오른손에는 똥치는 그릇을 들고 아들이 일하는 곳으로 가 게으름피우지 말고 일하라고 하였다.

 

그 후 장자는 아들을 불러 아들 같은 친근감을 느낀다고 하면서 칭찬해 주며 집안일을 도우라고 하였다. 아들은 마지못해 시키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일이 지난 후에 주인댁에 대한 신뢰감이 싹터 출입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 후 장자는 집안의 재물과 창고를 모두 거지 아들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아들은 여전히 대문 밖에 살면서 자기 재물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장자는 아들의 마음이 점점 커 감을 알고 재물을 물려주기 위해 국왕과 친족들을 불러 놓고 선언했다. 이 아이는 나의 아들이고 그동안 50여 년을 떠돌다가 돌아와 살게 되었으니 이제 모든 집과 사람들을 모두 아들에게 맡긴다고. 그제야 거지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기뻐하며 한량없는 보배를 얻게 되었다.

 

절집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장자궁자의 비유’는 우리가 누구이고 부처가 중생들을 어떻게 교화하는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이 비유에서 장자는 부처를, 거지 아들은 중생을 뜻한다. 아들이 원래 장자의 아들이었듯이 우리 중생들도 원래 부처인 불성을 갖고 있는 불자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하여 50여 년을 떠돌며 거지가 되었듯이, 중생들도 자신이 불자임을, 부처임을 잊어버리고 오도(五道,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를 윤회하며 생로병사의 고통을 받은 중생이 되어버렸다. 거지 아들이 큰 저택에 살고 있는 장자를 차마 자신의 아버지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부처는 원래 다른 존재요 우리 자신이 곧 불도를 이룰 불자라는 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금산사 미륵부처의 입장에서는 내가 거지 아들로 비추어질지 모르겠으나,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장자를 피해 다니는 거지 아들이 차라리 부러웠다. 머리로는 ‘장자궁자의 비유’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으나, 내가 금산사 미륵전을 찾은 것은 거지아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것이었다. 나는 돌아온 궁자가 아니었다. 또한, 원명을 만나기 위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원명도 관련이 있었다.

 

금산사 행자 시절 원명은 대적광전, 나는 미륵전 소제 담당이었다. 금산사에는 많은 전각이 있었으나 특히 미륵전은 내게는 안방이요, 놀이터와 다름없었다. 나는 행자는 물론 사미 시절 대부분을 미륵전에서 보냈다. 행자 시절 나는 스님들 몰래 미륵불상 뒤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때로는 미륵불상 발뒤꿈치에 기대어 잠을 자기도 하였다. 얼마나 달콤했는지. 그곳은 나의 비밀 ‘아지트’였다.

 

현재 미륵보살이 천상 사람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는 도솔천과 같은 정토였다.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금산사 미륵불상에 몸을 기대고 잠을 자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그것은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었다. 아니, 금산사 대중 가운데 딱 한 명,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원명이었다. 

 

반대로 대적광전 상단 밑 공간이 원명의 비밀 아지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때로는 원명과 나, 둘이 같이 미륵불상 뒤편이나 대적광전 상단 밑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예불 시간을 놓쳐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날이면 스님에게 불려가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혼이 나나 일쑤였다. 그러나 개구쟁이들의 반성이란 그때뿐이어서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 “원광이 너는, 하던 일을 계속하도록 해라.”

 

나는 행자 시절 3년을 꼬박 미륵전 소제 담당으로 보냈다. 그리고 사미계를 받은 뒤에 주지 스님이 내가 준 소임은 여전히 미륵전 소제 담당이었다. 대개 소제는 행자들이 담당하고, 사미는 강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지만, 내가 주지 스님에게 미운털이 박혔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미륵전 소제 담당은 그대로였다.

 

- “공부도 게을리하지 말고.”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주지 스님은 마지막 어조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 “예. 스님.”

 

나는 내심 여유를 갖고 대답했다. 주지 스님이 나에게 미륵전 소제 임무를 계속 맡기는 것은, 그가 나의 은사 스님이었으므로 다른 대중에게 보여 주려는 특별한 배려(?)임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주지 스님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사미가 되었다고 해도 나는 나의 정토 미륵전을 떠나기 싫었다.

 

미륵전 미륵불상 뒤편이야말로 나만의 세계를 즐길 수 있는 나만의 정토였다는 것을 은사인 주지 스님은 몰랐을 터다. 그런 내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은 역시 원명이었다. 그는 주지 스님이 내가 계속 미륵전 소제를 담당하라는 명이 떨어지는 순간, 나를 향해 부럽다는 표정을 한껏 담아서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원명을 향해 나는 말없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원명아. 원명아. 걱정일랑 꼭 붙들어 매 두거라 잉. 언제라도 우리 아지트로 오면 되는 거싱게. 나는 그런 얘기를 침묵으로 속삭였다. 실제로 그 후에 원명은 자주 나를 찾아 미륵전으로 왔다.

 

우리는 행자 시절과 전혀 달라 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행자 때는 우리들의 정토가 두 곳이었는데, 사미가 된 뒤에는 한 곳으로 줄어들었다는 점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미륵불상 뒤편에서 자주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랬는데, 달포 전에, 한류대 정원사 황세운씨가 내게 건네준 책이 잠자는 나의 추억의 사자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

 

3)

 

정원사 황세운씨가 내게 먼저 책을 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고, 내가 그의 작업실에 찾아가서 책을 빌려왔다. 나는 연구실에서 수업을 마치면 담배를 물고 창밖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그 버릇 한 부분을 황세운씨가 가로채 갔다.

 

그는 내가 창밖으로 시선을 주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시간에 맞추어 자신도 휴식 시간을 가졌고, 그때마다 나무 밑이나 정원석 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몇 번씩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으므로 나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그의 휴게실로 찾아갔다.

 

💬 “무슨 책을 그렇게 보세요?”

 

내가 물었다.

 

- “뭐, 이것저것.”

 

내가 찾아온 것이 뜻밖이라는 듯 그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 “교수님같이 젊은 분이야 실감이 안 나겠지만, 늙으면, 급해지는 법이지요. 밀린 독서를 하는 중이랍니다.”

 

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

 

나는 말없이 휴게실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말이 휴게실이지 정원사 일에 필요한 도구들이 한 쪽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것이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 “정원사 일은 오래 하셨는가요?”

 

- “운이 좋아서, 은퇴 후에 재취업을 한 게지요.”

 

💬 “그렇군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휴게실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 “책을 찾는군요?”

 

백발에 온몸이 삭정이처럼 마른 그는 앙상한 손으로 캐비닛 속에 있는 책을 꺼내 주었다. 그의 손등에서 거머리 같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잠시 동안 그를 보던 나는 책으로 눈길을 가져갔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가죽 표지가 닳아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제법 두툼한 책이다.

 

💬 “뭡니까. 『증산도 도전』이군요.”

 

나는 3분의 1정도는 날아간 금박의 제목을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학 때 일부 동학들이 민족종교 단체인 증산도의 동아리 활동을 하던 일이 떠올랐다. 마침 내가 활동하고 있는 불교 동아리방과 이웃하고 있어서 이따금씩 그들의 활동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나도 몇 번 그들의 모임에 참석한 경험이 있었다. 일반 동아리 활동과는 달리 그들은 매우 열심히 공부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진리 공부를 하였다. 지금도 인상에 남은 것은 ‘우주 1년’이라는 도표였다. 지구의 1년 사계절과 같이 우주에도 1년 사계절이 있다는, 그런 내용을 그린 도표였다.

 

💬“증산도 신도입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아니지요.”

 

그의 대답은 이외로 단호했다.

 

💬 “그럼?”

 

- “나는, 모든 성인의 가르침을 존중합니다. 다 믿지요.”

 

💬 “그렇군요.”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라고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게실 안은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자초한 면이 있었다.

 

💬 “그런데, 저기 오래된 책은.”

 

내가 캐비닛 속에 꽂혀있는 책 한 권을 보고 물었다. 내 질문에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의도가 섞여 있었다.

 

- “아. 저거요. 어디 보자.” 황씨는 꾸역 일어나 책을 꺼내왔다. “이건, 『대순전경』이라는 책인데.”

 

💬 “『대순전경』이라구요.” 나는 황씨가 들고 있는 두 책을 번갈아 보았다.

 

- “증산도 신도들이 신앙하는 증산 상제의 행적을 기록한,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순전경』은 그 초기 기록이구.”

 

“….”

 

- “초기 기록들은 『대순전경』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지요. 『도전』은 초기 기록들을, 다시 일일이 답사하고 관련자 후손들의 증언을 취재하여 다시 정리한 경전입니다. 일종의 종합경전이라고 할까요.”

 

💬 “그렇군요. 그런데 증산 상제가 누구입니까? 증산도 신도들이 신앙한다면 증산도 도조인가요?”

 

-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내가 아직 지식이 짧지만서도, 얘기하자면, 그분은 19세기 말, 그 나라 안팎으로 혼란한 시기에, 또한 우주사적으로는 우주의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기에 사람 농사를 결실하기 위해 인간으로 온 우주 주재자이자, 통치자입니다.”

 

💬 “우주 주재자…통치자…라구요.” 나는 황씨가 했던 말을 뇌었다. “우주의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기에 인간으로 온, 우주의 주재자라.”

 

- “그 분을, 상제라고 하지요.”

 

💬 “상제! 와. 세군요!” 나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리고 미륵불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의 부처인.”

 

황씨는 내가 전직 승려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미륵불에 힘을 주어 말했다. 황씨의 얘기대로 미륵불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보살 가운데 하나로 석가모니 부처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를 가리킨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이트레야(Maitreya)이며,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지타(Ajita, 아일다阿逸多)이다. 성인 미륵은 자씨(慈氏)로 번역되어 흔히 자씨보살로도 불린다. 불전에 의하면 그는 인도의 바라나시국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

 

그는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56억7천만 년이 되는 때에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라고 하는데, 그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전까지는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이후는 미륵불이라 한다.

 

💬 “미륵불이라구요!”

 

나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움푹 들어간 황씨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흔들리는 것은 내 마음이었다. 미륵불! 그것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내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사자를 깨우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나의 뇌리에는 금산사 미륵불이 번갯불처럼 스쳤다. 나의 도반 원명의 얼굴과 함께.

 

- “내 말이 아니랍니다. 증산 상제, 당신이 직접 자신의 신원을 그렇게 밝혀 주었어요. 여기, 보세요.”

 

황씨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혀끝에 침을 묻힌 뒤에 『도전』을 재빠르게 넘겼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내가 미륵이니라.”(증산도 도전 2:66:5)라는 글자가 분명히 적혀 있었다.

 

- “여기도…여기도요.”

 

황세운씨는 『도전』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지 곧장 그가 원하는 부분을 찾아내어 손가락 끝으로 꾹꾹 짚어 나갔다. 과연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도전』 곳곳에서 증산 상제(당신을 신앙하는 분들의 입장을 존중하여 ‘증산 상제’로 표기한다)는 자기가 미륵이라고 자기의 신원을 밝혀 놓고 있었다. 나에게, 문제는 그 미륵불 증산 상제가, 어느 먼 곳에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

 

4)

 

황세운 씨에게 『도전』이란 책을 빌려온 나는 며칠 동안 밤을 새우다시피 읽어 내려갔다. 그중에서도 내 어린 시절의 추억과 직접 관련이 있는 내용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좀 길지만 있는 대로 인용한다. 

 

상제님께서 임인(壬寅 : 도기道紀 32, 1902)년 4월 13일에 전주 우림면 하운동(全州 雨林面 夏雲洞) 제비창골 김형렬의 집에 이르시니라. 이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심회를 푸시고 형렬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조화로써 천지운로를 개조(改造)하여 불로장생의 선경(仙境)을 열고 고해에 빠진 중생을 널리 건지려 하노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본래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개탑(天蓋塔)에 내려와 천하를 두루 살피고 동양 조선국 금산사 미륵전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다가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내려왔나니, 이제 주인을 심방함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2:1:1-85)

 

나의 일은 비록 부모, 형제, 처자라도 알 수가 없나니 나는 서양 대법국 천개탑 천하대순이로다. 동학 주문에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나니 천지간의 모든 신명들이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나에게 탄원하므로 내가 천조(天朝)의 대신(大臣)들에게 ‘하늘의 정사(政事)를 섭리하라.’고 맡기고 서양 천개탑에 내려와 천하를 둘러보며 만방의 억조창생의 편안함과 근심 걱정을 살피다가 너의 동토(東土)에 인연이 있는 고로 이 동방에 와서 30년 동안 금산사 미륵전에 머무르면서 최제우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주었더니 조선 조정이 제우를 죽였으므로 내가 팔괘 갑자(八卦甲子)에 응하여 신미(辛未 : 道紀 1, 1871)년에 이 세상에 내려왔노라.
(증산도 도전道典 2:94:1-7)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 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하늘의 모든 신성과 부처와 보살이 하소연하므로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이마두가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내려와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둘러보며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중 진표(眞表)가 석가모니의 당래불(當來佛) 찬탄설게(讚歎說偈)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至心祈願)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甲子 : 道紀前 7, 1864)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辛未 : 도기 1, 1871)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수운가사(水雲歌詞)에서 말하는 ‘상제’는 곧 나를 이름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2:30:8-17)

 

자신이 미륵불이라고 스스로 밝힌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온 과정을 밝힌 기록들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전체 내용도 그렇지만, 특히 나를 놀라고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미륵불인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온 과정에서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상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렀다는 부분이었다.

 

내가 행자와 사미 시절을 포함하여 6년 동안 매일 쓸고 닦았던 금산사 미륵전, 바로 그곳에 증산 상제가 30년 동안 임하였다가 인간으로 왔다! 이 밖에도 『도전』에는 증산 상제가 금산사 미륵불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은 많았다. 그렇게 인간으로 와서 당신의 일을 마친 증산 상제는 다시 금산사 미륵전을 통해 천상으로 환궁하였다. 다시 인간으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너무 악하여 몸둘 곳이 없으므로 장차 깊이 숨으려 하니 어디가 좋겠느냐?” … 잠시 후에 “나는 금산사에 가서 불양답(佛糧畓)이나 차지하리라.” 하시니라.

 

또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미륵이니라. 금산사 미륵은 여의주를 손에 들었거니와 나는 입에 물었노라.” 하시고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 미륵불을 보라. 금산사 미륵불은 육장(六丈)이나 나는 육장 반으로 오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10:33:1-7)

 

『도전』 기록에서 나는 더욱 놀라고 당혹스럽게 만든 다른 구절은 “중 진표가 석가모니의 당래불 찬탄설게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이라는 부분이었다. 금산사 중창조로서 진표율사라면 나로서는 행자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터라 모를 리 만무하였다.

 

그러나 위의 구절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바로 그 금산사에, 금산사 미륵전과 미륵불에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떠났다는 자책감에 젖어 들었다. 나는 기자 시절 익힌 감각이 발동하였다. 금산사 미륵불상을 세운 진표율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도전』에는 「미륵불의 동방 조선 강세의 길을 연 진표 대성사」라는 제목으로 진표율사에 대한 행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놓았다. 

 

동방 조선 땅의 도솔천 천주님 신앙은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영글어 민중 신앙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

 

진표는 12세 때 부모의 출가 허락을 받고 김제(金堤) 금산사(金山寺)의 숭제법사(崇濟法師)로부터 사미계(沙彌戒)를 받으니라.

 

법사가 진표에게 가르쳐 말하기를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님 앞으로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하여 친히 미륵님의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 하매 이로부터 진표가 미륵님에게 직접 법을 구하여 대도를 펴리라는 큰 뜻을 품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더니

 

27세 되는 경자(庚子, 760)년 신라 경덕왕 19년에 전북 부안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 들어가 미륵불상 앞에서 일심으로 계법을 구하니라.

 

그러나 3년의 세월이 흘러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하자 죽을 결심으로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니 그 순간 번갯빛처럼 나타난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살며시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놓고 사라지더라.

이에 큰 용기를 얻어 서원을 세우고 21일을 기약하여 생사를 걸고 더욱 분발하니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온몸을 돌로 두들기며 간절히 참회하매 3일 만에 손과 팔이 부러져 떨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거늘 7일째 되던 날 밤 지장보살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며 와서 진표를 가호하니 곧 회복되니라.

 

21일 공부를 마치던 날 천안(天眼)이 열리어 미륵불께서 수많은 도솔천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대광명 속에서 오시는 모습을 보니라.

 

미륵불께서 진표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시기를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戒)를 구하다니.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 참회하는구나. 내가 한 손가락을 튕겨 수미산(須彌山)을 무너뜨릴 수 있으나 네 마음은 불퇴전(不退轉)이로다.” 하고 찬탄하시니라.

 

이 때 미륵불께서 점찰경(占察經) 두 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를 진표에게 내려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것으로써 법을 세상에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으로 삼으라. 이 뒤에 너는 이 몸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도솔천에 태어나리라.” 하시고 하늘로 사라지시니라.

 

원각(圓覺) 대도통을 한 뒤, 닥쳐올 천지 대개벽의 환란을 내다본 진표 대성사(大聖師)는 온 우주의 구원의 부처이신 미륵천주께서 동방의 이 땅에 강세해 주실 것을 지극정성으로 기원하니 이로부터 ‘밑 없는 시루를 걸어 놓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고 4년에 걸쳐 금산사에 미륵전을 완공하니라.

 

이 뒤에 진표는 미륵불의 삼회설법의 구원 정신을 받들어 모악산 금산사를 제1도장, 금강산 발연사를 제2도장, 속리산 길상사를 제3도장으로 정하고 용화도장을 열어 미륵존불의 용화세계에 태어나기 위해 십선업(十善業)을 행하라는 미륵신앙의 기틀을 다지고 천상 도솔천으로 올라가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1:7:1-19)

 

미륵전에는 마침 찾아오는 불자도 없어서, 한참 동안 말없이 미륵불을 올려다보던 나는 와르르 무너지듯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도전』을 읽었던 그때부터 나는 과거의 포로가 되었다.

 

내 십 대 시절을 오롯이 하였던 금산사와,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을, 그리고 진표율사를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춰 주었다. 당신들을 몰랐다는 것은 곧 나를 몰랐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금산사에서 보낸 내 십 대 시절은, 행자 시절은, 사미 시절은 무엇인가.

 

『금강경』에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는 문구가 있다. 꿈이나 환영,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다는 의미다. 그런가! 그런가! 그때부터 내 머리는 복잡해졌다. 『금강경』에서의 그 온전한 문장의 가르침은 내 입장과 달랐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현상계의 모든 법은 꿈이나 환영,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같이 볼지니라.

 

부처님은 그렇게 설하셨다. 죄송하지만, 나는 금산사 미륵전에서 보낸 내 행자 시절을, 사미 시절을 꿈이나 환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 있는 실체라는 것을 확인하게 위해서 이곳 금산사를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반개한 눈가에 힘을 주었다. 눈언저리가 파르르 떨렸다.

 

 

[장편소설] 천년의 약속 (1)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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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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