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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둥글다(1) - 존재 ‘보다’ 존재의 의미를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Ⅰ. 존재 ‘보다’ 존재의 의미를

하이데거는 Was heißt Denken?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존재가 자신을 고유하게 드러낼 때 그 발현發現의 장場이 사유되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도 적절하게 사유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 1929년에 출간된 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현상학의 근본문제들)에서 철학의 근본 과제를 존재 대신 존재 의미를 토의하는(erörtern) 것으로서 제기한다. 사실상 그는 이때도 이미 동일한 얘기를 하고 있다.

 

“철학이 존재에 대한 학문이라면, 다음의 물음이 철학의 시원적이자 궁극적인 근본 물음으로 밝혀진다. ‘존재와 같은 것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가? 도대체 존재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데 존재 진리의 장을 강조하는 앞말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언급하는 뒷말은 어떻게 같다는 것인가?

 

Sein und Zein(존재와 시간)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의미는 “어떤 것의 이해가능성이 머무는”,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영역領域이나 지평을 가리킨다. 어떤 것의 의미를 영역으로 말하는 것은 우선은 생소할 수 있다.

 

‘의미’(Sinn)의 어원에 밝히는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의미는 하나의 사태가 내는 길이며 방향이다. … 의미는 하나의 사태가 자기 본질을 전개하고 동시에 머무는 밝게 트인 영역이다.”

(Vorträge und Aufsätze『강연과 논문』)

 

어떤 것이 지닌, 때로 다소 멀어 보이고 심지어 무관한 듯한 여러 의미들의 범위는 그것의 본질을 지키고 간직하는 영역이란 얘기이다.

 

 

 

예컨대 ‘義[의로움]’란 사태는 「네이버 한자 사전」에 의하면, ‘옳다’, ‘착하다’, ‘맺다’, ‘섞다’, ‘간사하다’, ‘정의正義’, ‘우의友誼’, ‘뜻’, ‘용모’, ‘예절’, ‘인공적인 것’, ‘가짜’ 등 20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다양한 뜻의 스펙트럼, 즉 의미 영역은 의로움의 사태가 걸어온 역사며 길이다. 의로움의 본질은 거기에 머물고 있다. 이 영역은 우리 바깥에 실재하는 객관적인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지어낸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의미 규정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문제 삼는 존재의 의미란 존재가 그 자체로서, 즉 자신의 고유함이나 본질로서 머무는 영역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서 존재 그 자체 또는 존재의 본질은 주지하다시피 은닉으로부터 밝음으로 들어서는 비은폐非隱蔽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진리이다.

 

다시 말해 본래의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며 우리 가까이(an) 머무는(wesen) 현존現存(Anwesen)으로서의 존재이다. 이에 상응하여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의미는 존재가 그 자체, 즉 비은폐로서 현성現成하는 영역으로서 보다 구체화된다.

 

비은폐로서의 존재 진리는 언제나 은닉과 발현의 “어디로부터(Wovon)와 어디로(Wofür)” (Beitgräge zur Philosophie『철학에의 기여』)라는 영역적 성격을 갖는다. 이는 다시 존재는 자신의 진리에서 밝게 트이며 스스로 영역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은폐에는 열린 장이 현성한다.”
(Parmenides『파르메니데스』)

 

그렇지만 비은폐로서의 존재가 그와 같은 이행인 한, 존재는 언제든 다시 은닉 속으로 자신을 감출 수 있다. 그래서 존재가 그 자체를 드러내는 진리 영역은 밝음과 어둠이 투쟁하는 혹은 놀이하는 장이 된다. 여기서 위의 설명과 앞으로의 논의에 용이한 접근을 위해 비非하이데거적 문맥에서 존재의 영역 문제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중용中庸은 만물의 근본[天下之大本]인 중의 발현을 “나는 솔개, 뛰어오르는 물고기[鳶飛魚躍]”라는 『시경詩經의 말[鳶飛戾天, 魚躍于淵]로써 표현한다. 그리고 이 구절에 대해 “이는 위, 아래에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言其上下察也].”라고 부연한다.

 

중국 송(宋) 나라 때 학자 정자程子는 이 구절을 『중용』의 저자인 자사子思(BC 492년 ~ BC 431년경)가 “사람들을 위하여 요긴하게 한 말로서 생동감 넘치는 대목”(중용장구中庸章句)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에 해당하는 『중용의 중은 때에 따라 머물 뿐[隨時而在], 실체적으로 있는 게 아니다[無定體]. 즉 그것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확정된 무엇으로서 있다고도 할 수 없다. 『중용은 유무에 관한 ‘모호한’ 중의 참됨을 위 아래로 열어 밝히며 영역화하는 발현으로 본 것이다.

 


‘일묘연一妙衍(판본에 따라 演).’ 한민족 전래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에 나오는 구절이다. 「천부경」에서 일一 또한 존재자의 존재라는 성격을 갖는다. 「천부경」은 여기 일에 대해 “[모든 것의] 시작이나[一始無始一] 자신은 시작을 갖지 않으며 [모든 것의] 마침이나 스스로는 마침이 없다[一終無終一].”라고 밝힌다.

 

그런데 그러려면 일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동시에 유이면서 무이어야 한다. 단지 유라면 시작과 끝을 가질 터이고 반대로 무일 따름이라면 시작이 될 수 없고, 그러니 끝도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 묘하게 퍼진다[妙衍]는 것이다. 衍(또는 演)은 ‘퍼진다’, ‘부풀어 난다’, ‘통하다’, ‘스며들다’ 등의 뜻을 갖는다. ‘일묘연’ 역시 유무가 뒤섞인 일이 밝게 트이면서 스스로 영역화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철학의 시원적이자 궁극적인 근본 물음”으로 말하는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은 위, 아래에 밝게 열리는 또는 묘하게 퍼지는 존재의 비은폐나 밝게 트임(Lichtung)의 영역 자체를 묻는 것이다. 존재의 빛보다는 그것이 생기生起하고 머무는 장(Ort)을 토의하는(erörtern) 것이다. 다음의 말들은 하이데거 사유의 그같은 성격을 기술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어느 정도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 모든 나타남들을 위한, 폭넓게 이해된 영역, 장 혹은 공간에 대해 기술하는, 숙고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Heidegger and Buddism. On Non-nihilistic Experience of Groundness」)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존재의 진리를 운동으로서 그리고 결국에는 진행 중에 있는 길과 그때그때의 영역으로서 물었다.”(Heidegger and Asian Thought)

 

“존재의 토폴로지에 대한 논의는 주로 1940년대 후반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하이데거 사유의 진행 속에 완성 단계를 나타내는 핵심 주제이다.”(「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의 토폴로지’에 관하여」)

[이때 ‘토폴로지’는 존재의 ‘토포스’(장소, 위상)에 대한 위상학적 탐구를 말하는데, 보다 심화된 관심 속에 존재의 의미나 진리 영역을 다루는 그의 사유를 지칭한다.]

 

그럼에도 “밝게 트임은 이제까지 철학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철학의 역사적 종말에서 미래의 사유를 위한 과제를 의미한다.”(Zur Sache des Denkens『사유의 사태로』)

 


이와 함께 영역의 문제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여기서는 하이데거 사유의 ‘키워드’를 차지하는 밝게 트임이나 토포스를 ‘영역’으로 옮기고 있다. ‘영역’은 측량, 계측할 수 있는 공간과는 달리 열린 개념으로 이해된다.

 

또 ‘영역’은 공간, 시간에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그 점에서 하이데거가 토포스로써 이해하는 사태와 어울린다고 본다. 우리는 또 영역이 이행이며 사건임을 보다 강조할 필요가 있는 문맥에서는 ‘영역화’라는 표현을 함께 쓰게 될 것이다.

 

 

 

존재 의미 존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은 각각 자유롭고 열려 있다는 의미의 ‘밝게 트임’과 그와 같은 열린 장으로써 드러나는 ‘밝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존재 의미와 존재는 환한 터와 그것을 채우는 빛과 같다.

 

“밝게 트임은 현존하고 부재하게 되는 모든 것을 위한 개방된 영역이다.”(Zur Sache des Denkens)

 

나아가 그 장은 스스로 밝게 드러나는 “비은폐의 근거이고 본질 시원이다.”(Parmenides)

 

밝게 트임이 없으면 빛(Licht)도 밝음(Helle)도, 빛의 부재不在인 어둠도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빛을 넘어서 최상의 것은 환히 빛나는 밝게 트임 자체”(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횔덜린 시 해명』)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영역이 존재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근거와 같은 것으로서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영역과 존재[비은폐] 사이는 영역이 근거로서 앞서고 존재가 그 결과로 뒤따르는 인과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역은 근거가 닿지 않으며, 그곳에서는 근거가 사라진다. 영역은 근거를 삼킨다.

 

하이데거는 비근거로서 심연深淵처럼 벌려진 이 열린 영역을 괴테의 말을 빌려 “근원현상”(Urphänomen)(Zur Sache des Denken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영역성은 존재의 본질에 속한다. 영역은 존재가 비은폐로, 즉 자기의 본질이나 진리로 머무는 방식과 지평이다. 그 점에서 영역은 존재 자체이다.

 

 

 

하이데거는 나중에 가서 존재가 존재로서 머무는 영역을 “사역四域”으로 부른다. 이를 통해 그는 존재의 영역적 성격을 보다 분명히 전달한다. 아울러 하이데거는 ‘사역화’(Vergegnis)란 말로써 스스로 발현하며 사역으로 영역화하는 존재의 동사적動詞的 성격을 드러낸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그 존재 발현의 장을 하늘, 땅,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인간이 하나로 어울리며 펼쳐지는 ‘사방 세계’(das Geviert)라고 규정한다. 하이데거에게는 ‘사방 세계’가 어떤 외적 규정도 털어낸 세계로서의 세계 혹은 세계 자체이다. 존재는 비은폐하며 사역화하는데, 그것은 또한 하늘, 땅, 인간, 신적인 것들의 단일함인 사방으로 트이는 영역화라는 것이다.

 

또한 이때 분명히 새겨야 할 것은 영역은, ‘밝게 트임’이란 말의 일상적 쓰임새가 말해주듯, 시간과 공간을 다 같이 지시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밝게 트이는 시간이자 공간으로서 열린다. ‘사역’이나 ‘사방세계’ 또는 ‘토포스’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그것은 존재가 그 자체로서 머무는 ‘동안’(Weile)의 ‘폭’(Weite)이고 ‘폭’의 ‘동안’이다. 즉 시간이며 공간, ‘시공간’(Zeit-Raum)이다.

 

여기서 ‘시공간’은 존재가 스스로를 열어 밝히는 생기의 사건으로서 파악되고 있으며, 그러한 성격에 주목하여 “시간-놀이-공간”(Zeit-Spiel-Raum)(Unterwegs zur Sprache『언어로의 도상에서』)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역은 동안과 폭으로서 … 시간을 부여하는 동시에 공간을 연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후기의 저술들에서 사역을 존재의 ‘시간-놀이-공간’(Zeit-Spiel-Raum)으로 부르고 밝게 트임과 동일시한다.”(Nähe Das Denken Martin Heideggers)

 

이때 시간은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하듯, ‘지금’의 연속이 아니며, 공간 또한 뉴튼식의 물리적 공간(space-container)과 같은 것일 수 없다.  하이데거에게는 ‘동안’이자 ‘폭’, ‘때’이며 ‘곳’인 시공간이 본래적 시간을 형성한다.

 

하이데거는 시간과 공간을 열어 주는 순수하게 밝게 트임이 고어古語 ‘die Heitere’가 가리키는 사태라고 해명한다.(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 오늘날 ‘heitere’는 주로 맑은 날씨를 가리키며, 그 형용사 ‘heiter’는 ‘갠’, ‘맑은’, ‘밝은’, ‘명랑한’, ‘시원한’, ‘찬연한’ 등의 뜻을 갖는다. 이 의미들을 횡단매개하는 공통적 함의는 ‘맑게 갬’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 ‘제색霽色’[비가 온 후 갠 모습]이 그와 같을 것이다.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이 제색의, 즉 비 오고 난 뒤 밝게 트인 인왕산을 그린 작품으로서 보는 사람의 정감을 금세 밝음과 청량감으로 채우는 걸작이다.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리의 기분은 제색으로 조율된다. 존재 진리인 ‘heitere’는 그러한 제색의 시공간에 유비된다.

 

 

한편 존재가 영역화한다는 것은 존재가 개방성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미 지시한다. 자연의 햇빛이 밝게 빛나는 데는 투명한 공기가 있어야 하듯, 영역화하는 것은 본성상 언제나 그 생기와 머묾의 마당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하이데거 사유 초기에 존재가 비은폐된 존재 자체로서 열어 밝혀지는 장은 자기를 넘어[脫自] 초월적으로 존재자와 관계 맺으며 그것의 존재를 이해하는 인간 현존재의 개방성에서 구해졌다. ‘다만 존재 이해란 장이 있는 한 존재는 있다.’ 하이데거 사유의 전개 속에 초기의 존재 이해나 초월을 대신하여 ‘사유’, ‘내맡김’, ‘청종’ 등이 존재 진리가 일어나는 개방성의 자리에 들어선다.

 

그리고 인간이 그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된 존재 진리의 장으로써 존재하는 방식은 그의 본질로서 사유된다.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함은 사유하며, 자기 바깥으로 나아가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 데 있다. 하이데거는 그 인간 본질을 ‘실존’, ‘탈존脫存’, ‘존재의 이웃’, ‘존재의 목자’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이에 따르면 인간 본질은 존재 진리에 속한다. 인간의 고유함은 “영역화하는 것 안에 머묾”(「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인 인간이 존재의 필요에 따라 영역화의 자리로 전용專用되는 일은 그에게는 모든 것에 선행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나 가능성이 거기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 다가올 것을 준비하면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두기로 하자.

1) 존재의 영역은 은닉으로부터 발현하는 존재의 이행과 함께 열린다. 존재 발현은 사역, 사방 세계 등으로써 펼쳐진다.
2) 영역은 존재 자체인 비은폐에 속한다.
3) 영역은 시공간이다.
4) 영역은 그로부터 거기에 머무는 존재에 대해 인과적 의미의 근거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근거이다.
5) 존재는 영역화의 본질로부터 열린 장을 요구한다.
6) 인간이 사유를 통해 자신을 존재 진리의 영역으로서 바치는 것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그의 특기함이다. 그 점에서 인간 본질은 존재에 유래를 둔다.

 

존재는 둥글다(2) - 있는 듯 있지 않은 있는 것 같은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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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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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이 지은 하느님의 노래 - 『용담유사龍潭諭詞』-역저자 도올김용옥

 

역저자 도올 김용옥고려대학교 생물과, 철학과, 한국신학대학에서 수학하고 대만대학, 동경대학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다시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에서 6년의 학부 수업을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 그는 고려대학, 중앙대학, 한예종, 국립순천대학교, 연변대학, 북경대학, 사천사범대학 등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대학에서 제자를 길렀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등 90여 권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베스트셀러들을 통해 끊임없이 민중과 소통하여 왔으며 한국 역사의 진보적 흐름을 추동하여 왔다.

유교의 경전 역주를 완성하였으며, 신학자로서도 권위 있는 성서 주석서를 많이 저술하였고, 영화, 연극, 국악 방면으로도 많은 작품을 내었다. 현재는 우리나라 국학國學의 정립을 위하여 한국의 역사 문헌과 유적의 연구에 정진하고 있다. 또 계속 진행되는 유튜브 도올TV의 고전 강의를 통하여 그는 한국의 뜻있는 독서인들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 나온 그의 저서 〈우린 너무 몰랐다〉, 〈스무 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금강경 강해(개정신판)〉,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노자가 옳았다〉, 〈동경대전1-나는 코리안이다〉, 〈동경대전2-우리가 하느님이다〉는 모두 그가 새로운 국학의 여정을 밟고 있는 역작들이다.

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의 원천, 『용담유사龍潭諭詞』

 

                         동학東學 신도들이 안심가安心歌를 잘못 해석하여 난을 지었느니라. (道典 5편 4장 1절)



경신년 4월 상제님 음성을 듣고 문답하며 도통한 최수운 대신사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과 한글로 된 『용담유사』를 집필하였다. 수운이 한글 가사를 열심히 썼던 이유에 대해서, 역주자는 한글은 민중의 언어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자신이 받은 ‘무극대도’는 한학 교육을 받은 고루한 의식 구조를 파고들어 가기가 매우 힘들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단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깨인 의식을 지닌 민중이 마음을 통하여야 ‘다시 개벽’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한글 가사는 수운이 애초 민중과 교섭하기 위한 매체로 설정한 문학 양식이었다는 것이다. 아주 쉬운 한글 가사를 통해 이는 구전口傳되면서 전국에 퍼져 나갔다. 말랑말랑한 수운의 의식은 이제 민중들의 동학이 되었고, 1894년 갑오년 역사의 대지진인 동학혁명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학 신도들이 「안심가」에서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개 같은 왜적 놈들’ 따위를 ᄒᆞᄂᆞᆯ님 조화 받아 하루아침에 물리칠 만큼 십이제국 괴질운수를 이겨 낼 수 있는 조화를 받았다는 것과 영남 유생들이 서학으로 음해한 것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한 내용이 원래의 의도와 달리 흘러가게 되었다. 서학에 대한 반감은 척양으로, 조선을 침략하는 ‘개 같은 왜적 놈’에 대한 분노는 척왜로 번져 마침내 갑오동학혁명으로 불타올랐다. 동학 신도들은 「안심가」에서 아버지 상제님의 무극대도를 닦아 다시 개벽을 대비하라는 핵심 주제를 놓치고 일본을 향한 지엽적인 분노에 휩쓸려 성급하게 일을 도모했던 것이다.

철학자 도올 김용옥은 『동경대전』과 『대선생주문집』을 완역한 이후에 풍요로운 정보를 바탕으로 『용담유사』를 완벽하게 지금의 우리말로 해체시켜 재구성해 냈다. 오염되지 않은 19세기 말 당시 언어 그대로 어려운 한문 내용은 한학의 전문가답게 출처를 밝히며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동학 이해의 개벽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수운 최제우


고운 최치원의 후손인 최제우는 경주 최 부잣집의 기틀을 놓은 정무공 최진립의 7대손이다. 당시 동양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국권과 온갖 이권을 침탈당하는 시대였다. 동방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어수선한 시기에 최제우는 일찍이 구도에 뜻을 두고, 공부에 전념하며 도를 구했다. 고향인 경주 구미산 아래 용담정에 들어가며 ‘뜻을 이루기 전에는 세상에 나서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일심으로 기도에 정진했다. 이듬해, 그의 나이 37세이던 1860년 음력 4월 5일, 마침내 최제우는 천주이신 상제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물구물공勿懼勿恐하라. 세인世人이 위아상제謂我上帝어늘 여부지상제야汝不知上帝耶아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어찌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 『동경대전』 「포덕문」 中



이러한 ‘천주님과의 천상문답’을 통해 수운 최제우는 천명과 신교를 받고 도통을 하게 된다. 이 과정과 가르침을 집필한 책이 『동경대전』이고, 다시 한글로 하느님을 노래한 가사집을 쓰니 바로 『용담유사』이다. 최제우는 ‘인간으로 오시는 천주님을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를 선언하고, ‘다시 개벽’의 새 세상이 열릴 것을 선포하고 동학을 창도하였다.

『용담유사龍潭諭詞』의 주요 구성과 내용 알아보기


동학의 사상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라는 수운 최제우가 직접 저술한 두 문헌으로 온전히 남아 있다. 『동경대전』은 순 한문으로, 『용담유사』는 순 한글로 지은 4.4조 가사이다. 용담은 경주 인근의 최수운이 활동하던 지역 이름이고 유사는 깨우침을 주는 노래라는 뜻이다. 『용담유사』는 당시에 『수운가사』라고도 하였다.

총 8편으로 이루어진 동학의 노래 『용담유사』는 한글 가사이기에 좀 더 쉽게 민중의 마음속으로 곧바로 파고들 수 있었다. 수운은 우리 한글로 자신의 생각을 민중과 소통하겠다는 위대한 발상을 했다. 표의문자인 한문과 표음문자인 한글이라는 양대 언어 양식을 동일한 무게로 취급하고, 심오한 사유를 두 언어 양식에 걸맞게 분산시켜 표현했다는 데 위대함이 있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수운의 인간적 면모와 개인적 삶과 생활의 질감이 묻어나는 사상 표현은 『용담유사』 쪽에 집약되어 있다.

도올의 수운가사이 책에는 도올의 엄정한 문헌 비평에 의해 밝혀진 『용담유사』의 집필된 순서로 「용담가」, 「안심가」, 「교훈가」, 「도수사」, 「권학가」, 「몽중노소문답가」, 「도덕가」, 「흥비가」 등 8편의 가사 원문 전체를 1883년 계미중추본의 판본 한글 그대로 담고, 독자의 이해를 위해 각 어휘에 해당하는 한자를 첨가하였다. 그리고 각 편들의 전체 개요와 현재 우리말 풀이, 보충 설명을 달았다. 이 책의 말미에는 부록으로 근래에 도올이 국제적으로 발표한 ‘동학선언문’과 ‘동학과 21세기 혁명’이라는 두 편의 장쾌한 문장이 영어 버전과 함께, 그리고 ‘국민총행복과 농산어촌 개벽대행진’에 관여된 다수의 문헌 자료가 실려 있다.

「용담가」의 주요 내용1860년 4월 5일 경신년 상제님과 천상문답 사건으로 시천주주와 무극대도를 받아 낸 사건, 그 느낌이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기에 쓰인 것으로, 동학의 시작은 한글 노래였다. 경주 구미산 용담의 아름다움과 득도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그동안의 비극적인 삶의 역정이 무극대도 수용을 계기로 환희로 전환되는 그 감격이 여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안심가」의 주요 내용문자 그대로 주위 사람들에게 “안심하라.”라는 메시지를 발하기 위해 쓴 글이다. 핵심은 내가 가르치는 도는 서학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뜻을 특히 부녀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득도의 과정과 “개 같은 왜적 놈아”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오면서, 아무리 서양 제국주의의 위세가 세계를 전복시키고 있다 해서 이런 틈새를 타 발호하는 것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침략한 왜적 놈일 수밖에 없음을 갈파하고 있다.

역주자는 수운의 가사는 실로 중층적인 외연, 내포를 가지고 있어서 그 모든 맥락을 표면화시키지 않으면 명료한 뜻을 밝히기 어렵다면서, 정말 「안심가」 주석이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고 토로하고 있다. 더불어 수운을 이해한다는 것은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요구한다고 하고 있다.(책 126쪽)

「교훈가」의 주요 내용8개 가사 중 가장 포괄적이고 교리의 핵심을 전한다. 경주에 남기고 온 제자들을 향해 무극대도에 관한 바른 교훈을 일깨우기 위해 쓴 글로 「안심가」가 압축적인 데 반해 산문적이고 유장하다. 운수는 좋지만 최수운 자신을 믿지 말고 한울님, 즉 호천금궐의 상제님을 믿어 정심 수도하는 것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라는 당부의 마음이 담긴 글이다.

「도수사」의 주요 내용1861년 12월 25일경 완성되었다. 이후 거처를 남원 교룡산성 은적암으로 옮긴다. 원래는 덕밀암德密庵인데, 수운이 정착하면서 그곳을 자신이 한갓지게 자취를 숨기고 은거하는 암자라 하여 은적암隱跡庵이라고 개명하였다. 은적암은 수운이 반년 이상 머문, 동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동학혁명군의 김개남 장군의 군대가 주둔하였다.

문자 그대로 도를 어떻게 닦아야 하냐에 관한 담론으로, 직접 가르침을 베풀지 못하는 안타까움 속에서 용담에서 도를 닦고 있는 도인들의 수도 자세에 관하여 애타는 돌봄의 심사가 끊임없이 끓어오르고 있다. 제자들에게 도를 닦는 요체를 설명하는데, 성경誠敬 두 자를 닦으면서 연원을 잘 바룰 것과 스승 되는 법과 제자 되는 법을 잘 따라 난법난도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권학가」의 주요 내용수운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이단으로 몰리고 있는 난처한 상황에 매우 근원적인 처방을 기획하게 되었다. 본래 무극대도라고 표현한 득도 내용을 좀 더 서민들이 알아듣기 쉽게 고쳐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자기를 음해하는 난법난도자들에게 왜곡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서학의 추종자로 낙인찍는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명칭을 필요로 하여, 이에 ‘동학’이라고 하였다.

서학에 대한 “동학”이라는 명칭은 “무극대도”라는 본래적 성격을 너무 피상적으로 만들고, 대립적이고 국부적이고 상대적인 제한성을 가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수운의 “동”은 해동의 동이요, 조선의 동, 단군 조선의 동, 살린다는 동으로 봐야 할 것이다. 간결하고 발음하기 편하고, 서학으로 오인될 소지를 없애 버렸다. 이 무렵 최수운은 교룡산성 산등성이에서 달밤에 웅장한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며 「검결」을 읊었다.

「권학가」는 동학을 권하는 노래이다. 다 같이 동귀일체同歸一體할 것을 권유하고, 성지우성誠之又誠으로 ᄒᆞᄂᆞᆯ님을 공경할 것과 성경誠敬 두 자로 ᄒᆞᄂᆞᆯ님을 공경하면 신병身病이 물약자효勿藥自效할 것임을 밝히고, 백년 신세를 말하는 사람이 있거든 이 가사를 주고 가르침을 주어 새 운수를 받들도록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몽중노소문답가」의 주요 내용수운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한 작품이다. 이 가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자 하였으며, 다시 개벽의 확신을 선포하고자 하였다. 수운의 출생, 성장, 득도 과정, 득도 내용을 픽션으로 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꿈은 무극대도의 도래에 대한 확신과 선택된 자로서의 신념을 의미하고 있다.

자신이 모습을 이상화하고, 신비롭게 만들고, 다시 개벽의 리더로서 새롭게 주장하고 있다. 삼천리 금수강산, 오만 년 운세가 총집결된 금강산에서 태어난 옥동자가 주류 팔도하고 금강산으로 돌아와 꿈속에서 도사를 만나 깨우침을 얻는다는 내용이 있다. 하느님의 뜻을 민중에게 깨우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도덕가」의 주요 내용남원을 떠나 다시 경주로 돌아왔다. 한글 가사 중 가장 짧은 노래로 도덕은 영어의 morality가 아니다. 현대어 도덕은 과학적 사실과 대비되는 인간 행위의 가치 영역을 의미하지만, 우리 동방 언어에는 그런 대비적 개념성이 없다. 도는 길이다. 인간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다. 덕은 인간이 그 길을 걸어가는 데 필요한 덕성이고, 그 길은 길과 더불어 온축蘊蓄되어 가는 것이다. 도덕은 삶의 총체이며 삶이 위치한 우주의 총체이다.

이때 수운은 1862년 12월 말 흥해에서 제창한 접주 제도를 거두고 해월 최시형을 후계자로 지목하여, 1863년 8월 15일 새벽에 도통을 전수한다. 접주들의 방만한 다원화된 체제가 아닌, 해월 한 사람만의 지도력으로 자기 사후 동학을 이끌어 가게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 선택이야말로 동학이 오늘날 ‘민족의 동학’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관건이 되었다. 수운은 해월의 성품과 인격, 그 지극정성이 겸허한 삶의 태도, 그리고 무전제적인 배움의 수용, 몸에 배인 인간 평등관, 순결한 대인접물의 자세, 즉 도덕과 관련이 있어서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해월조차도 직접 상제님을 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천주라는 동학의 핵심 메시지가 왜곡되기 시작하였다.

역주자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수운은 무극대도의 선포자로서 자아상을 매우 신비롭고 신적으로 그리고 했다면, 「도덕가」에서는 철저히 상식적이다. 초월에서 내재로, 비상에서 범상으로, 일시적 혁명에서 영구적 혁명으로, 초월적 인격성에서 일상 인과적 자연성을 전환시키고 있다면서 수운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서술하고 있다(269쪽). 또한 「도덕가」는 수운의 글 중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글이며 가장 사상적으로 성숙한, 어른스러움을 과시하는 대논설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흥비가」의 주요 내용「흥비가」는 난해하기로 유명하고 역주자는 그의 유언장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시경詩經의 노래체인 흥興과 비比를 사용하여 도를 닦는 법을 가르친 노래다. 흥은 먼저 다른 물건을 읊어서 그 목적한 것을 끄집어 일으키는 것이요, 비는 어떤 사물을 끌어대어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즉 도를 닦는 일은 결코 어렵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적인 일부터 요령 있게 행하는 데에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를 깨달아 무궁한 우주적 존재인 ᄒᆞᄂᆞᆯ님과 같은 무궁한 인간의 존재를 깨닫는 곳에 도의 본체가 있다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래는 ‘모기가’라고 바꾸어도 되는데, 이는 종교 사기꾼들을 ‘모기’에 비유하여, 모기의 행태를 자세히 분석하고 사기꾼들의 행각을 섬세하게 그려 나가고 있다. 이것이 무극대도 경전 내용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하기 때문에, 수운은 시경의 시를 짓는 작법의 원리에 비의比擬하여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이 「흥비가」를 1863년 8월 13일에 반포하였는데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863년 12월 10일 새벽 최수운은 용담에서 선전관 정운구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3월 10일 대구 남문 앞 개울가에 있는 관덕당 뜰에서 효수되었다.

이 책을 읽는 방법


『용담유사』는 기본적으로 한글 가사, 즉 노래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 내서 읽기를 권한다. 한 번이 아니라 열 번 이상 소리 내서 읽기 바란다. 여기에 우리가 아는 아리랑이나 쾌지나칭칭나네와 같은 음조를 곁들여 보는 것도 읽는 맛을 더해 줄 수 있다. 그러면 바로 앞에서 최수운 대신사님이 일러 주는 것 같은 생생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문맥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꼭 여러 번 소리 내어 흥얼거려 보기를 바란다.

또한 이 책은 번역한 책이다. 비록 한글이지만, 100여 년 전에 사용한 우리의 어휘가 이렇게 달랐을까 싶기도 하고, 중간중간의 한문에 대한 기본적 지식도 있어야 하기에 번역이 필요했다. 하지만 역자의 생각도 많이 들어가 있고 현재 우리가 쓰는 언어의 결과물로 비교적 최선의 구성을 이룬 책이 바로 도올의 『용담유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참고하시되, 최수운 대신사가 상제님을 뵙고 받아 내린 시천주주를 수련하면서 이 책을 읽는다면 본래의 뜻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수운의 『용담유사』는 도올의 『용담유사』가 아니라, 이를 읽고 수도하는 이들의 『용담유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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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변화원리 - 한동석 저 , 종교정신과 도(道) 불선 - 정신론(2)편 , 선교와 유불선의 의미.

 

그런즉 불교와 선교의 차이점은 다만 하나는 창조의 완결점을 중시하고 하나는 창조의 시발점을 중시한 것뿐인즉 도통(道統)의 연원은 모두 'ㅡ' 의 理(이치 리)에 있는 것이다.

셋째로, 儒敎(유교)의 목적은 仁(인)을 행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는 精(정할정)을 위주로 하는 것이니 精이란 것은 神을 一의 位(위)에 통일시키려는 것인 바 그것은 유위(維位)에 얽어매어 줌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유정유일(惟精惟一)”이라고 하는데 仁은 이러한 조건에서 이루어지므로 유교는 그 목적을 仁에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주의 仁은 이렇게 이루어졌으므로 인도(人道)에 있어서는 또한 자기의 이해(利害)를 돌보지 않고 사람을 위하는 것을 '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바로 우주가 사물을 生하기 위하여, 즉 仁하기 위하여 자기 이해를 초월한 공도(公道)만을 행하는 법칙을 그냥 본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를 정의하기를,



精義入神 利用安身 故 惟精惟一 允執厥中  
정의입신 이용안신 고 유정유일 윤집궐중

(정한 뜻을 세우는 것은 이치를 이용하여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고, 정함을 생각하고 정함을 하나로 하여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는다.)

 

 
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土金水之氣(토금수지기)로 神을 央(중앙)속에 축장(縮藏)하게 함으로써 안신(安身)의 바탕이 이루어지게 되므로, 거기에서 精과 一이 합일되었다가 다시 축장(縮藏)한 것을 뚫고 中에서 움트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유교라고 한 것이니(儒(선비 유)자는 쓰일 수(需)자와 통한다.) 바로 수천수패(水天需卦)의 象을 취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윤집궐중(允執厥中)하는 장소, 즉 만물이 생의(生意)를 나타내는 방위의 象이 需의 象(상)과 같은 것을 취상의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유교를 한마디로 요약해 보면 그 목적이 윤집궐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궐중 (中)하게 되면 거기에서 仁(生意)이 발하므로 유교의 목적은 仁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삼교정신을 略(간략할 략)한바 그것을 재고하여 보면 불교는 정신의 완전통일점인 空(공)에 기본을 두었고, 선교는 통일의 출발점인 無(무)에 기본을 두었고, 유교는 통일에서 다시 생의(生意)를 발하는 곳에 기본을 두었다고 하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그런즉 이것은 동일한 원리와 동일한 법칙이 운행하는 본중 말운동의한 점씩을 각각 대표한것 뿐이요, 결코 변화 원리자체가 상수(相殊)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종합하여 동양철학의원리라고 하는 것이니 그 원리는 모두 집중관일(執中貫一:가운데를 잡고 하나를 꿴다)'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적(足跡)이 상이(相異)하고 문호(門戶)가 각수(各珠)하였던 것은 동양에 있어서도 전국(戰國) 이후에도통지전(道統之傳)이 암흑기에서 헤맸기 때문에 마치 서로 이단(異端)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道라는 것은 변화의 길이고 변화의 길(法則)은 하나뿐인 즉 그 길에서로 상이(相異)한 원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그런즉 종교가 불원한 장래에 통일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인지(人智)가 이 정도까지 보편화될 때면 인간이 철학의 최고 목표인 '明’을 가지는 것도 용이할 것이며 또한 신비의 문호도 개방될 것이다.


즉 선교는 통일의 출발점 (本)무극, 불교는 정신의 통일점 공(中) 태극, 유교는 통일에서 다시 생의를 발하는 곳 인(末) 황극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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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변화원리 - 한동석 저 , 종교정신과 도(道) 불선 - 정신론(1)

 

 종교정신(宗敎精神)과 도(道)

道라는 것은 우주운행의 법칙적인 길[道]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그법칙이란 것은 천지일월의 운행법칙이며 木火金水와 律呂(율려)의 법칙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법칙이 운행하는 길에서 일어나는 오묘불측(奧妙不測)한 변화는 만물의 생장성수의 과정과 인사(人事)의 길흉화복의 과정에서 출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길에서 일어나는모든 변화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도학(道學)이라고 하며, 그 변화자체를 道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道는 지고지명(至高至明)한 정신이 아니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경지이므로 이것을 가리켜서 종교, 즉 최고정점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와 종교는 동일원리의 체용(用)적 표현인 것뿐인즉 모든 종교정신(宗敎精神)은 천변만화하는 道의 정신이며, 도의 정신은 율려작용의 항존성(恒存性)의 완성이며 항존성의 완성은 ‘明’, 즉 日月이 합명(合明)하는 변화의 귀결점이며 출발점인 바의 戌五點(점-장소)이며 空點(공점)이며 乾點인 것이다. (제8장 본체론 참조)

그런즉 道의 목적, 즉 종교의 목적은 우주와 인간의 변화를 연구함으로써 대자연의 신비의 문을 개방하여 보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범위를 좀 더 축소시킨다면, 즉 인간정신 문제까지로 압축하면, 그것은 바로 생사와 선악문제로 귀결될 것이고 이것을 다시 일점(一點)까지 통일시킨다면 신명(神)의 귀결점, 즉 일월합명(日月合明)의 點까지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정신의 통일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론은 종교정신을 일별함으로써 대자연의 통일목적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첫째로, 불교의 목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공(空:빌공) 의 항존처(恒存處)를 찾고 공에서 항존할 수 있는 지고지명한 인간을 창조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空' 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지신지무(至神至無(이를지,귀신신,이를지,없을무))한 존재이므로 있는 듯 없는 듯한 적멸(寂滅)의 진경(眞境)인 것이다. 그런즉 이 경지는 유일한 神이 명화(化)하고 있는 충화(和)의 경지이므로 세속적 색채가 감히 병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세속에 사로잡혔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정욕으로 인한 형신(形神)의 노(勞)를 안정시키기만 한다면 法身(법신)으로 化(될화)하게 되므로 진리의 본원인 '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空'은 이러한 진경(眞境)이므로 거기에서 발하는 '**사리(舍利)'의 광채는 우주와 같이 흐르고 있으므로 만물은 이길[道]에서 도망할 수 없는 것이다.

**註 사리(舍利)란 것은 불(佛)의 정신을 상징하기 위하여 佛의 신체神體)의 일부를 탑중(塔中)에 보존하는 것인즉 그것은, 즉 佛의 정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지에 달하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하는 것이다. 佛(불)이라는 개념은 이문(貳門)과 동장(動場)의 세속적 문화나 방종적 혼란을 막는다는 뜻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門이라는 말은 金가 交易(교역)을 시작하는 문, 즉 二火의 문을 말하는 것이요, 動場(동장)이란 것은 金火交易(금화교역)자리을 위하여 약동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세속적 문화와 방종적 혼란의 거점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다음 '佛(불)' 이라고 하는 것은 佛字의 막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舍利(사리)' 의 광채가 만고금(古今)을 통하여 사(간사할사:邪)를 추방하고 자비지심으로써 중생을 제도(濟:건널제, 길도)하여 정토진경(淨土眞境)인 옆에서 공존공영하려는 것이 불교의 목적인 것이다.

그런즉 여기에서 다시 불교의 목적을 종합하여 보면 세속적인 육체생활을 초월하고 대각(大覺:큰깨닳음)에 이름으로써 앞으로 돌아가서 明(밝을명)을 찾으려는 것이다. 불교는 이와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속세를 도피하고 空에 한거(閑居:한가하고 조용하게 살음)하면서 숭덕(崇德)하려는것이다.

둘째, 仙敎(선교)는 無를목적으로하는 것 인바 無'라는것은영원불멸(永遠不滅)하는 진기(眞氣:참된기)를말하는것이다. 이와같은 眞氣는 변화작용을 계속하는 본원이므로 만물의 생명정신의 발현능(能)는 여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즉 진기를 보호할 필요가 절실하므로 '포신묵좌(抱神默坐:귀신을 안고 고요히 앉음) 함으로써 도망할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진기는 신으로 하여금 방종한 행동을 못하게 할 수 있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기는 木火金水와 같은 편기(偏氣)가 아니므로 神을 보호했다가 다시 새로운 性을 生할수 있는것이다.(진기는 목화금수와 같은 치우친 기가 아니므로 신을 보호했다가 다시 새로운 성품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서 神이 성화(性化)하게 되면 성은 만물로 발전하였다가 또 다시 무화(無化)하게 됨으로써 유무합도(有無合道:戊己合道무기합도)작용을 하게 되는것이니 이것은 바로 생명과 정신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象은 易의 **천산둔괘(天山遯卦)의 象과 같으므로 이것을 仙道(신도)라고 했던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물(人物)의 생장(生長)이란 바로 인물의 老死(노사:늙어서 죽음)란 말과 상동 되는 것인바 그것은, 즉 形(형)의 死는 神의生을 의미하는것 이므로 인물의死는 새로운神을 창조하려는 우주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창생으로 하여금 삼청별계(三淸別界)로 들어가게 하는 과정인 것이다. 선교는 이것을 가리켜서 '無'라고도 하며, 또는'中'이라고도 한다.

 

**천산둔괘(天山遯卦) : 역경의 서른세 번째 괘는 천산둔(天山遯)이다. ‘둔’(遯)은 ‘달아나서 물러나 피하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천산둔괘는 건위천(乾爲天)괘에 소인인 일음(一陰)인 뛰어들어 천풍구(天風 )가 되고 음(陰)이 자라 천산둔이 돼 소장생괘(消長生卦) 순으로 계속 음이 자란다. 천산둔괘는 상괘인 현인 군자가 하괘 간산의 산으로 숨는다는 화상( 象)을 보여준다. 그래서 둔괘는 산 속으로 은둔해 도망가는 상이고 고향으로 멀리 피해 가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선교는'中'을 지킴으로써 '一'을 포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이것을 '수중포일(守中抱一)'이라고 한 것이다.이와같이 고찰해 보면 이것은 불교가 말하는 바의 空에 도달하려는 '中'점, 즉 '無'의 작용을 중시하는 것이다.

 

 

 

 

우주변화원리 - 한동석 저 , 종교정신과 도(道) 불선 - 정신론(2)편에서 유불선에 대해서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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