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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관 - 상제님, 상제님, 증산 상제님 (2)-2,도교,도솔천,미륵불,호명보살

 

신교에서 뻗어 나간 동서 종교 문화 나들이


마지막으로 신교에서 뻗어 나간 선천 종교를 간략히 살펴보겠다.


*본래 유儒⋅불佛⋅선仙⋅기독교(西仙)는 모두 신교에 연원을 두고 각기 지역과 문명에 따라 그 갈래가 나뉘었더니 … . (도전道典 1:6:1)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보냈느니라. (도전道典 2:40:6)


신교의 주신이며 신앙의 대상이신 성부聖父 상제님께서는 공자, 석가, 노자, 예수 등 성자聖子를 내려보내시어 신교의 맥을 이어받아 

동서의 4대 종교를 펼치도록 하셨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인류 문명 초기의 보편 신앙이었던 신교는 그 이름조차 완전히 잊혔고, 그 가지인 유⋅불⋅선⋅기독교가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하지만 그 종교들이 전하는 하늘과 부처와 신에 대한 가르침만으로는 우주의 주재자이신 상제님을 중심으로 열려 있는 신도神道의 구체적인 실상을 결코 밝혀낼 수 없다. 뿌리 문화와 우주 원리를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신교 문화의 삼신상제관’으로 해석해야만 명쾌한 해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유교유교가 성립된 배경에서 우리는 신교 삼신상제 문화의 면모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공자는 당시까지 사료가 남아 있던 요순 시대 문화의 실체를 최대한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요임금과 순임금은 동방 배달족 출신으로 신교 문화를 계승한 주인공들이다. 따라서 그 문화의 골간에는 ‘상제 의식’이 무르녹아 있었다. 공자 이전 당시까지 전해진 민요와 역사 기록을 모아 엮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등에는 두렵고도 공경스러운 상제님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본래 근본 유교에서 섬긴 ‘하늘’은 인간과 만물에 직접 천명을 내리는 인격적인 하늘(상제천上帝天)로서 만물을 주재하는 ‘주재천主宰天⋅인격천人格天’이었다. 그러나 이후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하늘을 인격적 상제천보다는 자연천自然天과 도덕천道德天, 그리고 운명천運命天의 개념으로 더 많이 언급하고 사후와 귀신의 문제는 언급을 꺼렸다. 이후 한 무제 때 유학자 동중서董仲舒가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 나오는 “도지대원道之大原이 출호삼신出乎三神”이라는 신교의 가르침을 “도지대원道之大原이 출어천出於天”이라고 바꾸어 버림으로써 유교의 천天이 본래의 인격적인 상제천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더욱 멀어졌다.

여기에 제2의 공자로 불리는 주자朱子는 유교의 주요 경전들을 정리하고 주석을 달면서 ‘우주의 시원이자 주재는 곧 태극[理]’이라는 등의 형이상학적인 논리를 세웠다. 그는 ‘우주 이법의 주재자로서 상제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학자가 다 말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며,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세계’라 하며 상세한 언급을 회피했다. 이런 태도는 유교의 ‘천’을 상제천(인격천)에서 의리천義理天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학자들에게 상제 신앙[上帝天]의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선조 때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주었다.
 

깊은 밤 어둠 속에 상제님께서 내게 임하시네. 방 안 깊숙이 홀로 있는 곳에도 신명이 살피고 계신다. ······ 삼가고 두려워하여 상제님의 법칙대로 따를지어다.



또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은 도덕적 의지가 있는 인격적인 하늘을 참되게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예송논쟁을 이끌었던 백호白湖 윤휴尹鑴는 경전 속에서 고대의 상제 신앙을 찾아내어 하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수양 방법을 제시했다. 이는 훗날 다산 사상의 초석이 되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고대 유교 문화에서 섬겨 온 “하늘의 주재자이신 상제님 문화로 되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다산은 젊어서 서적을 읽고 천주교에 심취하여 전도까지 한 일이 있었으나 조상을 우상이라 여기고 신주를 불태우는 행태에 분노하여 신앙을 버렸다. 이후 유교의 본질이 상제 신앙에 있음을 깨닫고 경전 속에 드러난 상제 사상을 정리하여 방대한 주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조선 후기 주자학 일변도의 학풍 속에서 이단시되어 이후 상제 문화는 안타깝게도 또다시 어둠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불교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아리안족이 아니라 동쪽에서 이주해 온 코리족 출신인 석가 부처 는 자신이 전생에 

도솔천의 호명보살護明菩薩로 도솔천 천주님은 ‘미륵불’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자기가 죽은 뒤 3천 년이 지나 말법 시대에 이르면 도솔천의 참주인이자 구원의 메시아인 미륵불이 지상에 강세하신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불가에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그들은 미륵불이 석가 부처 당대의 젊은 제자로서 요절하여 미륵보살로 있다가 56억 7천만 년 뒤에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부처를 이룬다고 한다.

충청도 속리산 법주사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큰 미륵불상이 있는데, 그 지하에 석가불의 발밑에 둘러앉은 숱한 제자들 가운데 석가불을 향해 합장하고 있는 동자 미륵의 부조상이 있다. 석가 부처가 수천 년을 구도하며 몸담았던 도솔천의 천주님, 
모든 부처의 종불宗佛이신 미륵불이 어떻게 석가 부처에게 배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후대 불자들이 석가 부처를 주불로 만들기 위해 그들 스승의 가르침을 뒤집어서 도솔천의 하나님을 호명보살인 석가의 제자로 둔갑시켜 놓은 배사율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도교도교는 본래 신교의 신선 사상을 바탕으로 생성됐다. 우리나라의 신선 계보를 적은 『청학집靑鶴集』에는 ‘동방선파의 조종’을 ‘환인桓因’까지 소급하여 말하고 있다.

도교는 훗날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설로 이론 체계를 세우고 교단을 확립하였다. 그런데 도교의 개설서인 『운급칠첨雲笈七籤』에는 신농씨의 후예인 광성자光成子가, 두 차례나 찾아와 무릎을 꿇고 간절히 도를 구하는 황제헌원黃帝軒轅에게 ‘

대자연의 허(비움)을 네 몸으로 삼으라

(以虛爲體).’ 하여 선도의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포박자抱朴子』에서도 황제가 치우천황의 국사인 ‘자부紫府’를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고, 『관자管子』에도 황제헌원이 치우천황을 뵙고 천도를 환히 알게 되었다고 하니 도교의 뿌리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도교의 신앙 형태 역시 신교를 계승하는데, 본래 신교는 태고 시대로부터 

북극성北極星, 삼태성三台星, 북두칠성北斗七星이라는 하늘의 세 신성한 별들을 섬겨 왔는데, 도교에서도 
태일太一, 삼청三淸, 칠성七星 사상이 있다. 하늘의 모든 별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도는데 그 중심별을 
태일太一]# 또는 [#태을太乙이라고 하였다. 삼청은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이며 세 신은 도교의 근본이 되는 신으로, 혹자는 최고신인 원시천존이 셋으로 나뉘어 분신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한 분인 신(하나님)이 삼신으로 작용하여(一卽三, 三卽一) 만물의 생성과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며 만물을 낳고 기른다는 신교 삼신관과 동일하다.

본래 도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과 구원의 목적은 도의 주권자이신 상제님을 친견하여 ‘천명과 신교’를 받는 데 있다. 그런데 이후 도교는 양생술과 사변철학과 기복신앙으로 기울어진 나머지 ‘도의 주재자’이신 ‘아버지 상제님’과의 긴밀한 관계는 점차 잊혀 갔다.

기독교기독교 문명은 BCE 3500년 무렵 지금의 이라크 남부 지역(구약의 에덴동산이 있던 곳)에서 발생한 수메르 문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기독교와 신교 문화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생명을 낳고 길러 주는 신교의 칠성령 신앙이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인 성령관에 어엿하게 살아 있다는 점이다. 성서에서는 칠성령을 아버지 

하나님의 천상 보좌 앞에 늘어서 있는 ‘일곱 영’(the seven Spirits of God) 으로 말하고 있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요한계시록」 4:5)


이 아버지 하나님의 일곱 영은 바로 수메르 문화권에서 받들어 온 하늘 최고의 신, 일곱 신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들은 우주를 다스리는 주신들 로 수메르인들은 이들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고 통치한다고 믿었다. 이런 다신관은 『구약』의 첫머리 「창세기」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 1:26)라 하며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라는 다수의 신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학자들은 인간 창세의 봄개벽을 주도했던 천상 성령 하나님들을 ‘천상의 신의 총화’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삼위일체의 유일신관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영원한 생명(성령)이 내려오는 칠성령의 7수 신앙이 점차 약화되어 신의 생명의 비밀 코드 반쪽이 사라져 버렸다. 이는 유대인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데, 갈데아 우르에 살던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Abraham이 유프라테스 강줄기를 타고 북쪽의 하란을 거쳐 떠돌다가 서방의 가나안에 정착하였다. 이때까지는 삼신 신앙관을 간직했다.

그러나 이집트 노예 시절을 겪으면서 유대족에게는 고난에 처한 자기네 민족을 강력하게 통합시킬 힘이 무엇보다 절실했고, 모세는 민족정신을 하나로 강력하게 묶기 위해, 그들 민족의 하나님인 만군萬軍의 신 야훼와의 계약을 통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유일신 신앙을 선포하게 된다. 즉 지금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야훼(여호와)는 유대 지역의 지방신인 군신軍神일 뿐이지 온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이 아니다. 이후 천지 안에 가득 찬 무수한 신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야훼 이외의 신들을 섬기는 것을 모두 ‘우상 숭배’로 간주하였고, 이러한 사실과 배경으로 인해 기독교에서 다신관이 사라지게 되었다.

진리의 근본을 보는 또 하나의 관건은 ‘아버지 신관’의 왜곡 문제'다. 예수 성자가 친히 기도는 이렇게 하라며 알려 준 「주기도문」의 첫 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명백히 아버지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었다. 성자 예수의 삶과 가르침도 천상 옥좌에 앉아 계신 아버지의 강세로 실현되는 지상천국(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시대) 건설과 영원한 삶을 향한 머나먼 대장정이었다.

그러나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은 2천 년간 아버지 하나님을 증거한 예수의 부르짖음을 망각하고, ‘하나님은 인간이 볼 수 없고,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 올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하여 가을개벽기에 아버지가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재림한다.’고 믿으면서 오늘날까지 진리의 근본을 왜곡하고 있다. 2024년 전의 예수가 재림을 해도, 과연 그게 예수 성자일지 어떻게 증명한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이제 근본을 보지 못하는 선천 닫힌 우주의 편협된 진리의 틀에서 벗어나 우주를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천국의 백보좌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가을 신천지에 직접 강세하신다는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계 4대 종교를 비롯한 모든 가르침의 모체는 인류 시원 문화의 조국인 환국桓國이며, 이들은 모두 환국의 장자국인 배달倍達과 동방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신교로부터 흘러 나갔다가, 이제 원시로 반본하는 가을개벽을 맞아 다시 환고향을 함으로써 종국에는 본원처인 이곳에서 최종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다음 호에는 드디어 인존으로 강세하신 상제님의 신원과 이곳 한반도에 강세하신 이유, 그리고 인간으로 어떤 삶을 사셨는지에 대해 알아볼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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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 은진미륵을 만나다

 

 (김일부 대성사는) 아침저녁으로 반야산 기슭에 있는 관촉사를 찾아가 은진(恩津)미륵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하니라. (도전 1편 9장 6절)

요즘 조석으로 날이 참 좋다. 청명한 날씨에 맑은 햇빛, 길가에 코스모스들이 가을을 알린다,  미륵님을 친견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계룡산과 향적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면 백제의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의 충혼이 서린 황산벌을 만나게 된다. 그곳을 지나 너른 벌판길을 가다 보면 야트막한 야산이 나온다. 바로 지혜의 산, 반야산. 이곳은 민중들 염원이 담긴 은진미륵님이 계신 곳이다. 절은 참으로 아기자기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절의 주인인 미륵부처님만 바라보게 되어 있다. 본래 이곳은 출입구인 해탈문(불이문不二門)과 석탑, 배례석, 석등 그리고 미륵부처님 석상만 있는 단순한 구조였다고 한다. 이후 여러 전각들이 세워져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전한다.

 

불상의 키는 약 18.1m 정도 되고,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으로 4등신의 어린 아이 같은 인체비율로 되어 있다.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은 보면 볼수록 친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이 불상의 특징인 큰 얼굴은 멀리서 보면 우스꽝스럽고 비례미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가까이 가서 참배를 하며 아래에서 위를 우러러보면 그 모습의 자연스러움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경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무릎 아래에서 경배를 올리면서 좀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분이구나 하는 점을. 또한 미륵부처님이 지긋이 바라보는 모습을 뵈면 중생들을 다 제도하고자 하시는 자비로운 부처의 모습, 어버이의 모습으로 우리 옆에 서 계시다는 것을.

 

머리 위 네모난 2층 천개(갓) 네 귀퉁이에 달린 청동 풍경 소리를 정겹게 들으며 불상 앞에 있는 미륵전에 들어가 보았다. 미륵전 안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다. 육 여사가 서거했을 당시 관촉사에서는 그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자발적으로 천도식을 올리며 명복을 빌었던 게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은진미륵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내려온다.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인 고려 광종 19년 968년에 충청도 은진 땅에 문득 아기 울음소리가 나면서 큰 바위가 솟아났다. 당시 피의 숙청으로 고려 초기 기반을 다지던 광종은 이 돌로 불상을 조성하기로 했다. 970년부터 혜명대사는 수많은 석공을 거느리고 공사에 들어갔다. 이후 37년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1006년(목종 9년)에 불상이 완성되었다. 공사 중 불상의 머리가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게 되자 혜명 대사는 깊은 시름에 빠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사제촌을 지나면서 한 쌍의 동자들이 진흙으로 3단 불상을 쌓으며 노는 것을 보게 된다. 동자들은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아랫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이 모습을 본 혜명 대사는 크게 깨닫게 되어 이 방법으로 불상을 완성했다. 사람들은 이 동자들을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현이라고 믿었다.

 

불상을 완공하고 흙을 치우자 하늘에서는 비가 내려 불상의 흙을 말끔히 씻어주었고(灌佛) 상서로운 기운이 3.7일 동안 주위에 서리고 미간의 옥호玉毫가 멀리 빛을 발했다고 한다. 그때 송나라 명승인 지안智眼이 그 빛을 따라 이곳에 와서 불상에 예배를 한 후 ‘마치 촛불을 보는 것처럼 빛나는 미륵불(燭)’이라고 감탄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라 하였다. 불상의 수인手印의 모습과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 화관이 있는 모습 등으로 미루어 본래는 관세음보살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본래 미륵신앙이 강했던 백제의 지역이었던 이곳 민중들은 미륵부처님으로 여겨 신앙했고 지금은 명실상부하게 미륵부처님으로 경배하고 있다. 이 불상에는 많은 영험담이 내려오는데, 중국에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압록강을 건널 때, 이 불상이 노립승蘆笠僧(삿갓을 쓴 승려)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두 그 강이 얕은 줄 알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이에 적장이 칼로 그 삿갓을 치자 쓰고 있던 개관蓋冠이 약간 부서졌는데,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 말, 들 너머 향적산에서 공부하며 역학易學의 완성체인 정역을 쓰신 김일부 대성사께서도 아침저녁으로 이곳으로 와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셨다고 한다. 천년의 풍상을 겪어온 미륵 불상을 뵈며, 다시 한 번 정성스럽게 사배를 올려 본다. 산문을 나오는 봄날 오후, 꽃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미륵불상의 특징


첫째, 미륵불은 입불立佛이고 석가불은 좌불坐佛이다. 미륵불은 홀로 수행에만 정진하지 않고 세상을 바삐 돌아다니며 민중과 고락을 함께한다.

둘째, 미륵불은 관冠을 쓰고 있다. 특히 황제가 쓰는 면류관을 쓰고 있다. 이는 미륵불의 위격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단서다. 면류관은 미륵불이 통치의 개념도 같이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미륵불이 혹 앉아 있을 수도 있는데, 이때는 반드시 보좌寶座에 앉아계신다. 앉아있다고 해서 좌선을 하는 모습이 아니다. 제왕이 왕좌에 앉아 계신 모습과 같다.

넷째, 미륵불은 손에 여의주如意珠를 들고 있다. 여의주는 모든 일을 뜻대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낸다. 미륵불은 천지만물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시는 조화의 부처인 것이다. 불가에서는 미륵불이 있는 궁전을 여의전이라고도 한다.


수행승 미륵과 미륵불은 연계성이 없다

 


불교 최고最古 경전인 숫파니파타 마지막 장인 피안도품에 바바리 16제자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만 수행승 미륵이 미래불이 된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팔리어 연구의 권위자인 리스 데이비스는 미래불인 미륵불은 수행승 미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한 미륵사상 연구의 대가인 일본의 와타나베 쇼코도 미륵하생경, 미륵대성불경 등 미륵불과 관련된 주요 경전에 수행승 미륵이 미래불이 된다는 내용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음을 밝혀내었다. 미륵은 석가의 선언 그대로 도솔천의 천주님이며 하느님이다. 석가는 도솔천에서 호명보살로 불리던 구도자였다.

<도솔천의 호명보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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