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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구도의 첫걸음, 入道 91회





●프로그램명 : 증산도 구도의 첫걸음, 入道
●방송시간 : 30분 / 제작 : STB 상생방송
● 방송소개 : <증산도 구도의 첫걸음, 入道>에는 풀리지 않는 인생의 해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다 증산도를 만나 구도의 첫걸음을 시작한 도생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상제님 대도 진리로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나가는 이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MC) 안녕하세요, 이상은입니다. 미국의 작가인 R.G. 잉거솔이 쓴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과거의 필연적 산물이며 모든 미래의 필연적 원인이다.” 증산도 진리에 빗대어 해석하면, 우리는 조상님들의 정성으로 이 자리에 있고, 우리가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나와 조상님의 미래를 만들어 간다는 것인데요. 오늘은 조상님들의 정성 어린 보살핌으로 새로운 증산도 가족이 된 도생님들의 입도入道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사연 봉투를 열어 보겠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즈웨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부처님께 과일을 올리며 기도하시는 것을 보았고, 저도 같이 하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 부모님과 함께 늘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또 집에서는 항상 선한 마음으로 살고 악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저는 중국에서부터 한국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작년에 대구 경북대 어학원에 유학을 오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독감에 걸려 침을 맞고 약도 먹었지만, 며칠이 지나도 잘 낫지 않았습니다. 이때 남자 친구의 어머니께서 증산도에 태을주라는 약藥 주문이 있는데, 한번 읽어 보지 않겠냐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한번 해 보겠다고 마음먹고 주문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주문을 따라 읽었습니다.


주문을 읽은 지 15분 정도 지나니 열도 내리고, 속이 메슥거리는 증상도 없어졌습니다. 며칠 동안 아파서 밥을 잘 먹지 못했는데, 수행을 한 이후에는 밥도 잘 먹게 되었습니다.

MC) 즈웨이 도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기리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바른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랐는데요. 한국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던 즈웨이 도생님은 한국에 유학을 오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자마자 지독한 독감에 걸리는데요. 독감에 걸리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죠. 밥도 먹지 못해 너무 힘들고 지쳤을 때, 남자 친구의 어머니가 태을주 수행을 알려 줍니다. 병원에 가도 낫지 않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태을주를 읽었는데, 신기하게도 15분 만에 열이 내리고 속도 편해집니다. 즈웨이 도생님이 깜짝 놀랐을 것 같은데요. 계속해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친구 어머니가 “수행하는 도장이 있는데, 같이 가 볼래?”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아픈 몸을 낫게 해 준 수행을 알려 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도장을 가 보기로 했습니다. 처음 도장에 와서 상제님, 태모님을 어진으로 뵈었을 때 저절로 마음속에서 공경심이 우러나왔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짧게 했는데도 몸과 마음이 많이 편해졌습니다.

이후에 남자 친구의 조상님 천도식이 있다고 해서 참석했습니다. 도장의 모든 도생님들이 공손한 마음으로 치성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조상님을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상님의 원한을 해원시켜 드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증산도 진리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진리를 공부하면서 상제님께서 모든 인간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참하느님이라는 것과 천지공사를 보신 것, 그리고 해원을 통해 후천개벽을 맞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수행을 해서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MC) 태을주 수행으로 독감이 나은 즈웨이 도생님은 남자 친구 어머님의 권유에 따라 도장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도장에서 어진을 보는 순간 상제님, 태모님을 처음 뵌 것임에도 불구하고 공경심을 느꼈는데요. 즈웨이 도생님이 도와 인연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장에서 수행을 하고 천도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조상님에 대한 중요성도 깨달았는데요. 어린 시절 중국에서 할아버지 산소에 찾아가 기도를 하던 시간들이 많이 생각났을 것 같습니다. 즈웨이 도생님은 이렇게 천도식이 끝나고 진리 공부를 하며 곧바로 입도를 결심하였습니다. 즈웨이 도생님이 직접 경험한 치유의 기적을 통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살리는 멋진 일꾼이 되시길 축원드리고, 입도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다음 두 번째 봉투를 열어 볼까요?


 

저는 한 달 전 지인으로부터 교회 행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날은 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었습니다. 교회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눈을 떴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갑자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습니다. 화장실 변기에 앉기도 힘들 정도로 극심한 통증을 느꼈고, 한두 시간을 기다려도 도저히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만 날이 아니니 다음에 가면 되겠지 생각하며 결국 못 가겠다고 연락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연락을 하고 자리에 누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어제 무리한 것도 없는데 대체 왜 허리가 부러진 듯 아픈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같은 시각, 엄마는 증산도 선려화 빛꽃 전수 행사에 가려고 분주히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주방에서 불현듯 “아무래도 조상님이 막으시나 보다. 교회는 가지 않는 게 좋겠어.”라고 제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지?’ 하고 눈이 동그랗게 떠졌는데요. 갑자기 어릴 적에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생명을 부지하게 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떠올랐습니다.

 


MC) 황 도생님은 지인의 초대를 받아 교회에 가기로 했는데요. 약속한 날 아침, 아픈 적도 아플 이유도 없는데 갑자기 극심한 허리 통증을 느낍니다. 결국 교회에 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연락을 하는데요. 마침 선려화 전수 행사에 갈 준비를 하던 어머니가 허리가 아파 누워 있는 황 도생님에게 “조상님께서 교회에 가지 말라고 그러나 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황 도생님은 처음에 무슨 얘기인가 하다가 문득 기억나는 사건들을 떠올리는데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니 얼른 읽어 보겠습니다.

위험할 뻔했던 많은 일들에서 나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게 한 것은 어쩌면 조상님의 도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중 한 가지 사건만 얘기해 보자면, 제가 스물한 살 때의 일입니다.

당시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서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보탰습니다. 고된 아르바이트로 손가락 끝이 갈라지고 피도 나서 반창고를 붙이고 아픈 걸 참아 가며 설거지를 계속해야 하는 날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는데요. 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야간 업무도 했습니다. 낮과 밤이 뒤바뀐 힘든 업무로 보내는 일상이 워낙 지난하다 보니 점점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스물한 살, 남들은 대학 다니고 연애하기 바쁠 텐데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왜 항상 힘들기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힘들기만 할 거라면 그냥 여기서 인생을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눈물이 벅차올랐고, 사람 많은 전철에서 그만 펑펑 울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존재가 나타나서 환히 웃으며 저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저를 알고 있는 존재 같았습니다. 정확히 얼굴은 보지 못했고 따스한 촉감이 느껴졌던 것도 아니지만 “많이 힘들지? 다 알고 있어. 괜찮아.”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느낀 감정이 워낙 강렬해서 지금도 떠올리면 눈물이 흐르곤 합니다.

MC) 황 도생님은 어려운 가정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고등학생 때부터 고된 아르바이트를 계속해 왔는데요. 고등학교 졸업 후 성인이 되어서도 또래 친구들과 달리 대학 생활은 누리지 못하고 곧바로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짊어지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 같은데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황 도생님은 안 좋은 생각까지 하며 주저앉아 울고 맙니다. 그런데 그 순간, 울고 있던 황 도생님을 누군가가 따스하게 안아 주는 체험을 하는데요. 늘 곁을 지키며 힘들어하는 황 도생님의 손을 꼭 잡아 주고 싶었던 조상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제님께서는 천상에서 선령신들이 쓸 자손을 타 내려고 60년 동안 공을 들인다고 하셨는데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는, 만나 본 적 없는 조상님들이 그렇게 정성을 들여 이 세상에 태어난 소중한 존재입니다. 황 도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자손을 향한 조상님들의 애틋함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데요. 보이진 않지만, 남들이 모르는 나의 고달픔을 알아주고 나를 안아 주고 위로해 주는 조상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존재를 만난 이후에도 제 생활이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군가 절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더 이상 삶을 포기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아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지난한 삶이 퍽 괜찮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 일을 포함해 그동안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 보호받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사랑과 같은 따뜻한 감정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정말 교회 가기로 한 날 갑자기 아픈 게 조상님의 뜻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교회를 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엄마한테 교회에 안 가겠다고 말할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일어나자마자 순식간에 허리 통증이 사라진 것입니다. 제자리에서 콩콩 뛰어 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조상님이 항상 나를 보호해 주고 계시다는 걸 확신했고, 그날 엄마와 함께 증산도 인천구월도장으로 향했습니다. 도장에서 선려화를 전수받고 진리 공부를 시작하며 입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제 곁에서 아낌없이 사랑을 주시는 조상님을 언제나 잊지 않고 모시겠습니다.

 


MC) 역시 조상님이셨네요. 이 사건을 통해 조상님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떠올린 황 도생님은 이번에도 조상님의 뜻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난 순간, 아팠던 허리가 멀쩡해졌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인데요. 황 도생님은 그길로 어머니와 함께 도장을 방문하고, 지금 증산도 도생님이 되셨습니다. 허리 통증은 황 도생님을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의 매였던 것 같죠. 황 도생님, 늘 함께하는 든든한 지원군인 조상님과 함께 진정한 천지 일꾼으로 거듭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입도 축하드립니다. 다음 세 번째 봉투를 열어 볼까요?


저는 약 31년간의 경찰관 생활을 마치고 자유롭게 명예퇴직을 하였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좀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부산 송도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부산지방경찰청 퇴직자 모임인 경우회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19년 9월 어느 날,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신 조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희 5대조 할아버지가 대정통감을 지낸 관료 출신이라 비교적 가정이 여유가 있어,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세운 초등학교와 운전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부께서는 1920년대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학원생 출신이 되셨고, 1920년대 후반 경성에서 택시 회사에 다니시다가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운수 회사에도 다니셨다고 합니다. 사진이 남아 있어 100년 전 조부님의 삶에 대해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는데요.


정읍으로 내려온 조부께서는 보천교 본당이 있었던 대흥리 입암 마을에 사시면서 정읍 운수 회사에 다니셨는데, 그때 보천교 신앙인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보천교 파괴로 더 이상 정읍에서 살 수 없어져 중국 만주로 이주해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후 8.15 해방과 함께 다시 정읍으로 오셨지만, 1946년 좌익으로 몰리면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결국 1948년에 감옥에서 병을 얻어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저희 부모님께서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으며 오늘날까지 살아오셨습니다.

 



MC) 30년 넘던 경찰 생활을 정리한 뒤 박 도생님은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바로 할아버지께서 보천교 신앙을 하셨다는 이야기인데요. 할아버지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천교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셨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진리와의 인연이 박 도생님에게는 어떻게 이어지게 되는지 계속해서 읽어 보겠습니다.


작년 초, 상생방송의 제영수 도생님과 만난 것은 저를 밝고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영수 도생님은 보천교를 신앙하셨던 저의 조부님과 집안 내력을 상생방송 동방신선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해 주셨고, 저희 가족이 보관하고 있던 보천교 십일전 철거 현장 사진을 세상에 알리게 해 준 고마운 분입니다. 그 인연을 계기로 제영수 도생님은 저를 부산중앙도장으로 인도해 주셨고, “증산도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도장 책임자 김재오 수호사님의 말씀이 깊이 다가왔습니다. 진리를 찾아 가는 밝은 빛이 제게 다가온 것입니다.

상생방송 PD님을 만나 조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보천교와 또 증산도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는데요. 이후 상생방송에 할아버지의 보천교 신앙 이야기가 나오면서 보천교가 철거되는 역사적 사건의 소중한 기록 또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 도장에 방문해 진리를 배우며 ‘아, 상제님의 진리는 마치 내 영혼을 비추는 밝은 빛과 같구나.’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날이 다가올 무렵 도장에서 설맞이 조상보은치성과 천도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입도를 하지 않았지만, 제영수 도생님의 권유와 수호사님의 배려로 조상신단에 조상님의 위패를 모시고 치성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천도식은 증산도에 대한 제 믿음을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증산도 도생님들이 가진 조상님에 대한 보은의 마음가짐과 그 덕이 매우 인상 깊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설날에 아버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니, 대뜸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어제 저녁에 꿈을 꾸었는데, 조부께서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나셨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지요. 또 이후에도 하는 일들이 스트레스 없이 잘 진행되고 있어 조상님의 음덕이 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호사님과 여러 도생님들의 온화한 미소와 따스한 안내가 저를 더욱더 정진하는 길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대망의 지난 수요일, 저는 드디어 입도를 했습니다. 아직은 증산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만, 『도전道典』과 『증산도의 진리』 책을 포괄적으로 정리해 나갈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MC) 박 도생님은 방송에서 시작된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 설맞이 보은치성에도 참석하였는데요. 치성에서 조상님들을 모시는 도생님들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조상님을 정성스럽게 모시는 곳이면 믿을 만하겠구나.’ 하고 증산도를 더 신뢰하게 되셨네요. 설 전날, 흰옷을 멋지게 입으신 할아버지께서 아버지 꿈에 나오신 걸 보면, 할아버지께서도 기분이 무척 좋으셨던 것 같은데요.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함께 이뤄 줄 손자가 생겼으니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박 도생님, 할아버지와 함께 참된 진리의 길을 힘차게 걸어 나가시길 기도드리며 입도 축하드립니다.

네, 오늘도 도생님들의 입도 사례를 들어 봤습니다. 오늘 사연을 읽으면서, 항상 곁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아껴 주시는 조상님의 따뜻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도전道典』에 있는 조상님과 관련된 상제님의 말씀을 읽으며 오늘의 입도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60년 공덕을 들이는 천상 선령신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무한한 공부를 들이나니
그러므로 모든 선령신先靈神들이 쓸 자손 하나씩 타 내려고 60년 동안 공을 들여도 못 타내는 자도 많으니라.
이렇듯 어렵게 받아 난 몸으로 꿈결같이 쉬운 일생을 어찌 헛되이 보낼 수 있으랴.
너희는 선령신의 음덕을 중히 여기라.
선령신이 정성 들여 쓸 자손 하나 잘 타 내면 좋아서 춤을 추느니라.
너희들이 나를 잘 믿으면 너희 선령을 찾아 주리라.
태을주를 많이 읽으라. 태을주는 선령 해원 주문이니라.
(도전道典 2:119)



『증산도 구도의 첫걸음, 入道』를 시청하시려면?
매주 :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오후 4시 / 일요일 오후 2시 30분
온 가족이 함께 보면 더 좋은 방송 STB 상생방송!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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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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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인이 본 영화  영화 <파묘>의 메시지

- 여우였던 무라야마 지준 ,보천교

 

영화 <파묘>에서 무라야마 지준(준지)의 비중이 높지않아서 감독이 말하는 메시지는 아니지 않나싶었는데, 무라야마 지준(村山 智順)에 관한 논문을 읽다보니, 정작 영화에서 말하는 모든 사건의 원흉은 무라야마 지준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곡성>에서도 무라야마 지준이 배경으로 나오는데요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일본에서 풍수나 주술, 천문 등 음사와 관련된 것들은 음양사들이 맡아서 했습니다. 영화에서 친일파에게 묘를 쓰라고 한 '기순애=키츠네=여우=음양사=무라야마 준지'였죠

 

 

 

"신으로 모셔져 있던 이 몸은 원래 남산의 신궁으로 갈 예정이었다. 망할 여우 놈이 이곳에 데려왔지"


3·1운동 직후인 1919년 7월 18일, 아마테라스 신과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하는 조선신사, 곧 “신사를 조선 경기도 경성부 남산에 창립하고 사격을 관폐대사에 열列할 것”이라는 내각고시가 내각 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로부터 나왔습니다. 

 

서울의 남산에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으로 불리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천조대신)와 메이지 천황을 모신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인의 조상과 통치자를 일본인의 조상과 통치자로 바꾸겠다는 뜻이죠 

 

 

일제는 일본의 신도(神道)를 식민지 조선의 국교로 하려했고, 불교, 기독교 이외의 민족종교(대종교, 천도교, 보천교 등)를 모두 신종교이자 유사종교로  분류하여 감시하고 탄압했습니다. 

 

"정령은 동물이나 인간의 영이 사물에 붙어 만들어진 거에요. 이 땅엔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될 것. 그것과 마주했을 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를 가능케하는 학문적 근거를 댄 인물이 무라야마 지준이었습니다. 무라야마는 <조선의 풍수>, <조선의 귀신>, <조선의 무격>, <조선의 점복과 예언> 등 네 권의 책을 쓰면서 조선의 민중신앙을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미신에 불과하다. 한국인은 무격에 의지하는 소극적 행태를 보인다'고 비하했습니다.

 

 

결국, 무라야마는 1935년 <조선의 유사종교>를 썼고, 조선총독부는 종교 담당부서를 학무국에서 경무국으로 옮겼습니다. 쉽게 말하면 종교 담당 부서를 지금의 문화관광부에서 행정안전부의 경찰청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때부터 한국의 민족종교(천도교, 대종교, 보천교)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 했습니다.

 

 

"이건 일본 귀신이다. 일본 귀신은 이유 없이 아무나 다 죽인다."


영화 중반부터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쓰는 풍수가 상덕, 무당 화림, 법사 봉길, 장의사 영근 등은 일본의 정령, 요괴와 대결을 펼칩니다. 소위 풍수와 정령, 귀신, 음양오행의 대결인데, 이것은 조선의 정신과 일본 정신의 대립으로 이해됩니다. 

 

 

무라야마 지준은 조선의 풍수와 귀신, 정령을 일본의 신도(神道)와 비교하여 전 근대적이고 미개한것으로 치부하였습니다. 지금, 한국인들은 우리의 무속과 전통 신앙, 종교를 '사이비'나 '이단' 정도로 치부합니다. 

 

일제강점기 무라야마 지준이 주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한국인들의 머리(山) 속에 박아놓은 쇠말뚝은 '조선의 무속, 민간 신앙은 미개하며 야만적이다'라는 인식이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한국의 정신을 근대 시기 일제가 만든 종교(Religion)의 틀에 가둬놓고 '신종교, 유사종교, 사이비종교'로 왜곡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일제강점기 대일항쟁에 뛰어들고 민중의 희망이었던 동학(천도교), 대종교, 보화(보천교)는 그들이 규정해놓은대로 '종교'가 아니라 한국의 정신, 인간이 가야하는 길(道)이었습니다.

 

▼ 무라야마 지준과 조선총독부 관련 참고 논문

한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면적이고 근본적이며 장식 없는 문화를 고찰해야만  한다. 그리고 조선에서의 그것은 묘지풍수라고 무라야마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묘지 풍수란 자손의 현실적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중략) 즉 묘지 풍수는 선인에게 안주할 땅을 바치고 이로써 그 영(靈)을 영원히 수습하려는 일차적 추효관념(追孝觀念)보다도 오히려 자손의 번영, 행복을 위해 선인의 분묘를 길지(吉地)로 구한다는 이차적이고 이기적, 현실적인 관념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무라야마는 조선인에게는 ‘불에 의한 정화’라는 관념이 무의식적으로 잠재해 있어서, 악귀가 입을 통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불로  조리하는 것이 조선의 일반적인 식생활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맵고 냄새나는 것을 악귀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고추, 파, 마늘이  많이 사용되며,  제사나 굿을 할 때 팥떡 등 적색음식물이 주로 사용되는 것도 축귀법의 일종이라고 하였다. (중략)  무라야마는 축귀법적 측면을  부각시켜서 조선의 문화가 귀신신앙의 지대한 영향만으로 이루어진 것인 양 일반화 했다고 할 수 있다. 

 

무라야마는 특히 조선의 민간신앙에서 주도적인 존재로서의 무(巫)의 폐해에 주목하였다.

 

그는 조선의 무격신앙을 ‘조선 민간의 기초신앙의 중추’라고 정의하면서도 악귀를 모신다는 이유 등을 들어 그것을 미신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총독부의 어용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경성신문에서의 기사자료들을 인용하여 조선의 무격신앙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원시 민간신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대의 생활에 기여하는 바가 없”으며, “사상의 계발, 문화의 진보를 저해할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인 범죄의 원인이 되고 경제생활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조선인들이 넓은 의미로서의 조상신인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초자연적인 힘 또는 존재를 설명하는 하나의 신앙체계로  인정하지 않고, 원시적이며 미신이라는 관점을 가진 무라야마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문명 진화론적 입장에서 일본은 문명, 조선은 야만, 미개라는 양분적 사고 하에 조선의 민간신앙을 원시적이라고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민중은 자력갱생적 기력의 왕성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전통의 힘에 속박되어 운명관, 숙명관의 인생관에서 해방되지  못하였으며, 과학적인 지식의 보급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현상에 대해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있는 상식적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민중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려 하지 않고 다만 축귀로 귀신의 재앙을 없애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소극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그러한 소극적 생활유지욕구가 귀신의 활동을 더욱 성하게 하고  무격을 찾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무라야마는 보았다.

 

김희영. (2009).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조선인식 - 조선총독부 조사 자료를 중심으로. 日本文化學報, 0(43), 323–342.

 

3·1운동 이전인 무단정치시기에는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식민지 종교정책의 기반이 조성된 때로서, 1911년 불교 통제를 위한 ‘사찰령’과 유림 회유를 위한 ‘경학원 규정’을 만들고, 1915년에는 신도와 기독교를 규제하기 위해 ‘포교규칙’을 제정한 것에서 그 특징을 찾고 있다. 그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이에 포함되지 않는 한국 ‘신종교’를 이른바 ‘유사종교단체’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본 천황의 신격화와 신사참배 및 내선일체 사상이 강요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1939년 종교단체법이 만들어지며 ‘신종교’의 입지는 더욱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어, 강제해산당하거나 오히려 종교보국운동에 동원되기도 한다. 즉 종교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은 일본 메이지시대의 종교정책이 조선총독부로 이어지고 있다. 

 

그 실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신도, 불도 그리고 기독교만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인정되고 나머지는 모두 ‘좌도(左道)’ 또는 ‘사교(邪敎)’나 ‘유사종교’ 혹은 ‘사이비종교’ 등으로 규정되는 상황이었다.

 

1919년 문부성 종교통첩에 나오는 ‘종교유사의 행위’라는 표현 이후 1926년, 1929년의 ‘제2차종교법안’과 ‘제1타종교단체법안’에 나오는 ‘유사종교’라는 용어가 1920년대 후반 조선에서도 정착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지고 있다

 

이후 ‘유사종교’라는 용어는 1935년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朝鮮の類似宗敎』에 이르러 한국의 ‘신종교’를 학문적으로 분류하는 범주로 악용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일제가 이 ‘유사종교’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의 ‘신종교’를 통제, 탄압, 해산하는 근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즉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신종교’를 종교단체를 담당하는 학무국이 아니라 경무국을 중심으로 감시, 탄압하는 정책으로 일관한다. 한국에서 자생한 민족종교는 정식 종교가 아닌 ‘유사종교’로서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중적인 잣대를 제시하여 엄중한 관리와 와해 또는 해체를 유도했던 것이다

 

무라야마 지쥰(1891~1968)은 일본 니이카타 출신으로 일찍 어머니를 잃은 뒤 묘광사에 들어가 그 사찰 주지 무라야마 지젠의 양자가 되었다 한다. 그는 1916년부터 1919년 7월까지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고, 종교사회학에 관심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조사활동을 하는 한편 세브란스 전문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도 있다 한다. 1941년 무라야마는 조선 총독부 촉탁직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조선장학회의 주사로 근무하였고 1945년 양부 무라야마 지젠이 세상을 뜨자 그 사찰의 주지가 되었다. 

 

그가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활동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일제의 조선통치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시기로서, 이른바 ‘내지연장주의에 의한 동화(同化)정책’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는 시기이다. 즉 이 시기 일제의 구관(舊慣)제도에 대한 조사사업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는데, 무라야마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조선 사람들을 정신적, 사상적으로 어떻게 하면 동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이조 중세부터 유사종교 발생 당시 조선민중의 정신생활은 지적 비판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맹목적 신앙에 의지하며 대단히 현세적인 생활전개를 신비적으로 동경’하는 등 이른바 ‘조선민중의 무지’에서 한국 ‘신종교’ 출현의 배경으로 이해하고 있다.

 

‘유사종교’의 장래를 위해서는 ‘해산하든가 아니면 외적 운동이 아니라 내부성찰에 전념하여 참다운 종교로 다시 태어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요컨대 당시 한국 ‘신종교’가 더 이상 ‘유사종교’로서 ‘민중들을 현혹시키지 말고 해산하든가 내부 성찰을 통해 다시 태어나 종교로서 공인을 받지 않으면 쇠퇴의 길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한국 신종교가 ‘경제적으로는 곤궁을 초래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소요사건을 일으키고 민중을 신동하며 인심을 현혹하고 구습을 고집하고 진흥운동에 배치되는 등 식민지 통치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나아가 ‘사회로부터도 혐오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사상적으로는 혁명사상을 고취하고 민족의식을 농후하게 조장하였고 근로정신을 저해하고 사회운동 발생의 기초를 만드는 등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입장이자 분석결과를 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민영, (2017). 식민지시대 한국 `신종교` 단체의 동향과 특징 - 『朝鮮の類似宗敎』(村山智順, 1935)의 재검토를 중심으로. 韓日民族問題硏究, 0(32), 32, 3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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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자료, 보천교(증산도의 전신)는 600만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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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에 대해서는 일본 도쿄의 학습원 대학에 기록이 남아있었는데요. 동양문화연구소에 있는 자료에 의하면, 

 

미즈다 나오마사라는 조선총독부의 예산을 짠 인물이 보천교에 대한 기록을 책 한권 분량으로 작성해 두었다고 합니다. 

 

 

 

이 자료들은 상당히 높은 지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자료라서 극비라는 표시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일반인의 눈에 띌 일이 없는 자료들이라고 하네요. 

 

 

이자료에서는 보천교를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1926년, 포교에 노력한 결과 한때 600만의 교도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인구가 1800만명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노인이나 아이들을 빼면 대부분이 보천교를 신앙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독립자금 지원의 산실 보천교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 1945년 광복 후 백범 김구가 정읍을 방문했을 때 이 말을 했다고 하는데, 탄허 스님을 통해 전해 들은 사위 서상기가 증언한 내용입니다. 한국 불교계의 거성 탄허 스님의 선친인 율재 김홍규金洪圭는 보천교 재무 담당으로 차경석을 보좌하는 수석 참모였다. 김홍규는 보천교 입교 전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서 자신을 국내 독립군 지금책으로 파견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매우 열성적인 애국지사였습니다.

차경석 교주가 그를 보천교 재무 담당 겸 자신을 보좌하는 최고위 직인 목木 방주로 임명하였다고 하니 차 교주의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보천교가 상해 임정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 활동에 거금을 제공한 사실이 연구자들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제공

백야 김좌진 장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군대를 증파하였고 재 만주 한인들에 대한 보복성 횡포와 만행이 극심하였죠. 이러한 결과 만주 지역의 독립활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김좌진 장군은 1922년 초 국내로 유정근 밀사를 파견하여 보천교 교주 차월곡에게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여 군자금을 제공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때 김좌진 장군이 보천교로부터 받은 금액이 2만여 원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11월의 다른자료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동녕부에 근거를 둔 김좌진은 9월 상순 태을교(보천교) 교주 차월곡으로부터 5만 원을 받아 동녕부의 옛 부하를 소집하여 무력 행동에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만 원일 경우, 이 금액을 현재 시가로 환산한다면 20억 정도로 추정되는 큰 금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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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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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점, 600만 보천교 지도자

- 월곡月谷 차경석車京石

 

서울동대문도장 김종우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일본의 식민 지배가 한창이던 시절,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불세출의 영웅이 있었다. 지난 세월 대중들의 기억에서 철저히 잊힌 그 주인공은 보천교普天敎 교주 월곡月谷 차경석車京石(1880~1936)이다. 월곡은 1921년 9월 24일 경상남도 함양 황석산에서 대규모 고천제告天祭를 올리고 국호를 ‘시時’, 교명을 ‘보화普化’라고 선포하였다. 이로써 그는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단의 교주가 되는 동시에 《시국時國》이라는 나라의 천자天子로 불리게 되었다.

 

보천교(일본 총독부에 등록하는 과정에서 ‘보화교’가 ‘보천교’로 왜곡됨)는 독립운동의 심장부였다. 상해 임시정부에 거금의 독립 자금을 지원하였고, 만주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장 김좌진 장군에게도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보천교는 존재 자체가 항일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민족 종교 단체였다. 월곡 차경석! 그는 전 세계 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단기간에 600만 신도를 결집한 위대한 종교가요, 세계 경영을 꿈꾼 경세가요,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였다. 그동안 일제 식민 권력의 시각에서 그를 평가한 오명汚名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 국내외 정세는 매우 복잡다단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때 우리의 주체적 시각으로 월곡 차경석을 재조명하여 그의 진면목을 살펴보고자 한다.

 

차경석 그는 누구인가?

📑출생과 성장

월곡은 1880년 6월 1일(음), 전북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400번지 일명 연기동煙起洞에서 아버지 차중필(자字 - 차치구)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4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홍輪洪이고, 자字는 경석京石이며, 호號는 월곡月谷이다.

 

월곡은 10대에 들어서면서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공부법인 한漢나라 서적을 탐독하였고, 19세기 후반기 국내외 정세에도 관심을 가져 동학東學에 가입해 활동한 지역의 뛰어난 인재였다. 보통 사람보다 체구가 장대하고 걸출한 인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갖춘 위인이었다.

 

 

 

📑아버지 차치구 동학혁명에 가담

월곡의 부친 차치구車致九(1851~1894)는 전북 정읍시 입암면 출신으로,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의 정읍 지역 접주였다. 1차 봉기 때 전봉준 장군과 함께 고부 관아 습격을 모의했던 20인방幇 중의 한 명이었고, 2차 봉기에서는 농민군 5천을 이끌던 수령이었다. 차치구는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양반들의 횡포에 맞서 완력을 사용하기도 한 당대 민초들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실패와 함께 1894년 12월 흥덕현감 윤석진에게 체포되어 불의의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차월곡(15세)은 분살형焚殺刑을 당한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 삼십 리 길을 걸어 대흥리 선산에 모셨다. 월곡은 1899년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조직한 영학당英學堂에 가담하여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패배하여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만석보(정읍 이평)

 

📑일진회一進會 참여

월곡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일진회의 동학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전라남북도 순회관이 되어 일진회의 실세로 자리 잡았다. 1905년 2월 전주 아전과 일진회원 간의 큰 분쟁 등에서 월곡은 최고 간부로 명성을 날렸으며 이는 시간 단위로 일본 영사관에 보고되었다. 1905년 12월 송병준과 이용구 등이 조선 침략의 앞잡이로 친일을 하자 일진회를 탈퇴하였다. 또 손병희를 따라 활동한 적도 있었으나 그와도 뜻이 맞지 않아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증산 상제님과의 운명적인 만남

일진회를 탈퇴하고 생업에 종사하던 월곡은 송사訟事 문제로 전주에 가던 길에 증산 상제님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1907년 5월 17일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암리 물방앗간 앞 주막에서의 일이다. 그날 증산 상제님은 형렬의 집을 떠나시며 “이 길이 길행吉行이라. 한 사람을 만나려 함이니 장차 네게 알리리라.”(증산도 도전道典 3:180:1)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미루어 보면 앞으로 차경석을 아주 중요한 인물로 쓸 것을 예정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날 첫 만남의 자리에서 차경석의 미래를 예시하는 상징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차경석이 상제님의 기품에 취해 말씀을 청하게 되고 증산 상제님은 온화한 표정으로 대하시며 차경석에게 닭국을 권했다. 그때 어디선가 벌 한 마리가 날아와 그 국에 빠졌다. 차경석은 “혹시 상서롭지 못한 징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자 증산 상제님이 “벌은 규모 있는 벌레니라.”하며 앞으로 차경석이 조직적이고 규모 있는 교단을 이끌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28세이던 차경석은 모든 일을 전폐하고 오로지 증산 상제님의 가르침만을 따르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생일날인 6월 1일 증산 도문에 입도를 하게 된다.

 

📑증산 상제님의 어천과 교단 창립

1909년 6월 24일 증산 상제님이 9년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마치고 어천하셨다. 상제님 어천 후 2년 만인 1911년 9월 20일 상제님의 종통 도맥을 이은 고판례 수부님의 도통을 기점으로 정읍 입암 대흥리에서 ‘선도교仙道敎’라는 이름의 교단이 형성되었다. 이때부터 전라도와 충청남도, 경상남도와 서남해의 모든 섬에 태을주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태을주를 읽는 사람들의 모임을 ‘선도교’ 외에도 ‘태을교’, ‘훔치교’ 등으로 불렀다.

 

차경석은 자신이 천거하여 상제님과 부부의 연을 맺은 이종 누님 고판례 수부님 밑에서 교단 운영의 실무를 담당하고 포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점차 신도 수가 늘어나자 차경석은 신도들이 수부님에게 접근하는 길을 막아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점차 독자적인 길로 나아가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1916년 차경석은 교단의 교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탁월한 교단의 조직 관리 능력으로 급속도로 신도가 늘어나 교세가 확장되었다.

 

 

 

📑국호는 시국, 교명은 보화, 새 나라 건설 시도

차경석은 1916년에 교단 조직을 갖추기 위해 24방위에 해당하는 24방주方主를 임명하여 조직 구성의 첫 틀을 마련했다. 1919년에는 종전의 24방주제를 다시 확대하여 60방주제를 만들어 보천교의 내부 조직을 완성하였다.

 

그 후 입교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3년 만에 간부만 557,700명에 달하는 비밀 조직을 이루었다. 마침내 교인의 수가 600만 명에 이르러 보천교의 세력이 한반도를 들썩이게 할 정도의 큰 종교 단체로 성장하였다. 당시 조선 인구가 1,800만이었다고 하니 아이, 노인을 빼면 거의 대부분 보천교를 신앙하였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외교 문서인 뮐러 보고서나 일제 관료들의 보고서에도 보천교 교인 수 600만이 등장한다. 1921년 9월 차경석은 경상남도 함양 황석산에서 천자 등극을 하늘에 고하는 대규모의 천제를 올렸다. 나라 이름을 시국時國으로, 교명을 보화普化로 선언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특별하게 교단 이름이 없이 선도교, 태을교, 훔치교 등으로 불리어 왔으나 이제 교명을 보화교로 정한 것이다.

 

교단이 성장할수록 일제 식민 권력의 감시와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를 타개 하고 자 보천교에서는 1922년 교단을 공개하게 되는데 실무를 담당했던 이상호가 조선총독부에 ‘보화교’를 ‘보천교’라고 등록하면서 세상에 ‘보천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보천교의 항일 독립운동

일제 식민 권력은 보천교를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로, 교금을 독립 자금으로 규정하고 철저한 통제와 탄압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은 해체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공인된 종교는 신도神道, 불교, 기독교로서 학무국 소관이었고, 보천교를 비롯한 천도교 등 민족종교는 ‘유사종교’ 단체로 분류하여 총독부 경무국에서 관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 활동 자체가 항일 독립운동과 직결되는 것이 당시의 시대 상황이었다.

 

📑제주도 무오 법정사 항일 항쟁

1918년 10월 7일 일제의 수탈과 탄압, 국권 회복을 위해 항거한 제주 최초의 무장 항일 투쟁이 일어났다. 1918(무오戊午)년에 일어난 무장투쟁이라 하여 ‘무오戊午 법정사 항일 항쟁’이라고 부른다. 무오 법정사 항일 투쟁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최초, 최대의 항일 무장 투쟁이며 1910년대 한국인이 일제와 맞서 싸운 최대의 무장 투쟁이다. 국권 회복을 외친 무오 법정사 항일 투쟁은 당시 400여 명의 보천교 신도들이 주도했다.

 

일제의 기록과 신문 기사 및 연구 논문(특히 안후상의 박사 학위 논문)과 증언 등을 종합해 보면 ‘선도(후에 보천교로 불림)를 믿는 법정사 주지 김연일’과 선도의 신도들이 주도한 무장 항일 투쟁이지만, 그동안 불교의 항일 투쟁 역사로 다루어져 왔다. 참고로 대일 항전기에 제주 도민 70%가 보천교 신도들이었다.

 

 

 

📑보천교와 의열단

1923년 상해에서 한민족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됐을 때 보천교 간부 강일(강홍렬), 배홍길(배치문), 김종철 등 3인이 공식적으로 참가하였다. 보천교 청년단 대표 강일과 진정원 간부 배홍길은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후 의열단에 가입하고 김원봉 의열단 단장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의 밀명을 받고 국내에 들어왔다.

 

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한 100여 명의 대표자 중에서 다른 종교계에서는 천도교 측 대표가 동일하게 3인 정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보천교 직위를 걸고 3명의 대표가 참가했다는 사실은 당시 보천교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독립자금 지원의 산실 보천교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

 

1945년 광복 후 백범 김구가 정읍을 방문했을 때 이 말을 했다고 하는데, 탄허 스님을 통해 전해 들은 사위 서상기가 증언한 내용이다. 한국 불교계의 거성 탄허 스님의 선친인 율재 김홍규金洪圭는 보천교 재무 담당으로 차경석을 보좌하는 수석 참모였다. 김홍규는 보천교 입교 전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서 자신을 국내 독립군 자금책으로 파견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매우 열성적인 애국지사였다.

 

차경석 교주가 그를 보천교 재무 담당 겸 자신을 보좌하는 최고위 직인 목木 방주로 임명하였다고 하니 차 교주의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는 사례다. 보천교가 상해 임정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 활동에 거금을 제공한 사실이 연구자들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제공

백야 김좌진 장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반면 일본군은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군대를 증파하였고 재만 한인들에 대한 보복성 횡포와 만행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결과 만주 지역의 독립 활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김좌진 장군은 1922년 초 국내로 유정근 밀사를 파견하여 보천교 교주 차월곡에게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여 군자금을 제공받은 적이 있다. 이후에도 군자금 모집은 계속되었다. 1924년 11월 관동청 경무국의 보고 내용을 보면,

“근년 김좌진은 자금 부족 때문에 부하를 해산하여 전혀 활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번 봄 조선 내 보천교 교주 차경석車景錫과 연락하여 만주 별동대로서 행동하게 되었다. 지난 10월 초순 교주 대표 모某가 영고탑寧古塔에 와서 2만여 원의 군자금을 주었다. 이로써 김좌진은 이 돈으로 옛 부하를 소집해 삼차구三岔口에 근거를 두고 포교와 무장대의 편성을 계획해 동지를 인솔해 동녕현東寧縣에 들어가려 했다.”

(비秘 관기고수關機高授 제32743호)

 

‘김좌진, 군자금을 확보하다’라는 제목의 문건이다. 이때 김좌진 장군이 보천교로부터 받은 금액이 2만여 원이라 했다. 그런데 11월의 다른 자료도 있다. 거기에는 “동녕부에 근거를 둔 김좌진은 9월 상순 태을교 본부(보천교) 교주 차월곡으로부터 5만 원을 받아 동녕부에서 옛 부하를 소집하여 무력 행동에 나섰다.”고 기록하였다.

 

5만 원일 경우, 이 금액을 현재 시가로 환산한다면 20억 정도로 추정되는 큰 금액이다. 이 정도의 자금이면 옛 부하들을 소집하여 무장대를 편성할 수 있는 충분한 금액이다. 더욱이 1925년 초 신민부가 조직되어 많은 자금이 필요한 때인 만큼 조직 구성과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의부와 보천교의 군자금 모집 계획

1919년 중국으로 넘어가 연경대학 의예과를 다니던 박자혜는 1920년 독립운동가이며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와 결혼한다. 신채호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박자혜는 1922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귀국한다. 그녀는 경성에서 산파産婆 일을 하면서 의열단 등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할 때 거사를 돕고 있었다.

 

1924년 정의부가 항일 무장 독립 투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 요원을 국내로 파견할 때 보천교 신도였던 박자혜가 보천교 북방주인 한규숙을 소개하여 군자금을 지원하게 된다. 이를 보여 주는 문건이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죄 사건’으로 알려진 ‘정의부 및 보천교의 군자금 모집 계획에 관한 건’(비秘 관기고수關機高授 제第32743호號)에 대한 보고서이다.

 

경기도 감찰부는 “1925년 11월 13일, 권총을 휴대한 불령선인 한 무리가 보천교 간부와 제휴하여 조선 독립 군자금을 모집 중인 용의자에 대한 수사 명령을 받았다. 그러다 조선 남부 방면에 출장 중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173번지 보천교 북방 방주 한규숙 집에 그들 용의자들이 숨어 있음을 탐지해 검거했다.’고 보고하였다. 여기서 불령선인不逞鮮人은 정의부 요원들이었다. 이 군자금 모집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보천교가 재외 독립 단체와 적극적으로 직접 연결하여 활동하려던 실체를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겠다

 

📑보천교와 상해 임시정부 

차경석은 보천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1년 탄허 스님의 부친이자 보천교의 교금을 총괄했던 김홍규가 독립 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교금 30만 원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 김구에게 보냈고, 10만 원 가량을 항아리에 넣어 마루 밑에 묻어 놓았다가 밀고로 발각되어 압수당하고 말았다.

 

1919년은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맞서 전국적으로 일제에 항거한 3·1 만세 혁명과 현재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해이다. 보천교는 1919년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설립에 5만 원을 지원했다. 보천교 경성진정원 형평사장이었던 임규林圭가 보천교로부터 5만 원을 받아서 나용균羅容均을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한 것이다.

1921년 11월에 열린 워싱턴 회의를 앞두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후원하는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韓國外交後援會’가 조직되었다. 보천교는 앞의 후원회에 이영로李榮魯, 채봉묵蔡奉黙 등 2명을 파견하였다. 이 후원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한 밑에 있었다.

 

1922년 1월 제1회 극동피압박민족회의, 일명 코민테른 국제대회에 참가한 이들 중에는 김철수金綴洙, 김규식金奎植, 장덕수張德秀, 최팔용崔八鏞, 라용균羅容均 등이 포함돼 있다. 김철수는 보천교로부터 받은 1만 원으로 코민테른 국제회의 여비로 충당하였으며, 그 회계를 자신이 담당하였다고 하였다.

 

📑한미동맹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보천교

6·25 한국전쟁 후 한국의 운명을 가늠하는 외교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1953년 10월 1일 체결한 한미동맹조약이다. 정확하게는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가 추진한 한미동맹이 사실 보천교 신도들의 믿음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었다. 이는 증산 상제님의 다음 말씀에서부터 시작한다.

 

1908년 덕수궁 앞 대한문과 원구단 사이의 광장(현 서울시청 앞 광장)에 가시어 차경석과 여러 성도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쌀은 미국이고 솥은 조선이라. 쌀이 솥을 따라야 한다. 일본이 패망하고 서양(미국)이 들어온 뒤 평화의 세상인 지천태地天泰 운이 열린다.”고 하셨다. 이에 따라 보천교 신도들은 미군이 해방군으로 들어오면서 일본이 물러난다고 알고 있었고, 미군이 들어오는 걸 지천태 운이 열리는 출발점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희망을 등에 업고서 대한민국 정부는 한미동맹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탄압과 보천교의 쇠퇴

 

📑시대일보 인수와 보천교 혁신 운동 

보천교에서 1924년 <시대일보>를 인수했다. 하지만 일제 식민 권력은 민중의 대변지를 사교 단체에 넘길 수 없다는 여론을 조성하여 인수 과정에서 사회 언론의 비판을 받게 된다. <시대일보> 인수 사업을 추진하던 이상호, 이성영 형제는 독단적인 월권행위로 보천교에서 출교黜敎되는데, 이후 ‘보천교 혁신 운동’을 주도하며 차경석에게 반기를 들고 내분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보천교 내에서는 보수와 혁신이라는 갈등 구도가 더 심화되어 나간다. 이렇게 교단 내 내분이 격화되면서 조직의 결속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1924~1925)의 결성

차경석은 보천교 혁신 운동과 일제의 탄압으로 사면초가에 몰리자, 일본에 사절단을 보내 보천교의 취지를 전하고 일본 정부의 이해를 촉구하였다. 그 결과 일본인과 대동단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성의를 보이라는 일제의 요구로 1924년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이라는 특별기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제의 요구에 의해 조직된 단체인 시국대동단의 강연은 보천교의 취지와 무관하게 친일 사상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보천교를 해체하려는 일제 식민 권력의 계략에 따라 시국대동단 활동은 지식인들과 민중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명예만 훼손시키고 말았다. 시국대동단 사건은 보천교를 친일 반민족적 집단으로 매도케 하여 민심이 등을 돌리도록 함으로써 보천교의 분열을 가속화시킨 사건이었다. 궁여지책으로 활로를 찾고자 했던 보천교는 이후 식민 권력이 의도한 대로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십일전十一殿 건축과 보천교의 쇠락

1925년 을축년에 시작한 십일전十一殿 건립 공사가 5년 만에 완공되었고, 1929년 기사년 3월 16일 낙성落成에 맞춰 천자 등극식을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불경 행위라며 행사 자체를 금지시켰고, 보천교 관련 건물을 폐쇄하고 전국 교인들을 검거하여 고문하고 집회를 금지시켰다. 결국 일제의 집요한 음해 공작과 탄압으로 차경석은 조선 민중의 신망을 잃고 쇠락의 세월을 보내다 1936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차경석의 사후 불과 3개월도 채 안 된 그해 6월에 정읍경찰서에서 무장 경관을 대동해 대흥리 보천교 본소를 접수하고 보천교 해체 명령을 내렸으며, 재산의 전권을 빼앗아 십일전을 비롯한 건축물을 강제로 처분하였다. 뜯겨 나간 건물은 서울 조계사曹溪寺 대웅전과 내장사 대웅전, 전주 역사驛舍 등을 짓는 데 쓰였다.

 

 

 

글을 마치며

차경석은 본래 천하를 손에 넣고자 하는 큰 포부와 영웅의 심법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한 차경석에게 상제님께서는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고 상제님 도운 역사상 가장 험난한 제1변 도운을 개척하는 인물로 쓰셨다. 도전 5편 205장을 보면 “이제 경석에게 동학 역신 해원의 삼태육경三台六卿 도수를 붙이리라.” 하셨다.

 

상제님의 말씀에 의하면, “동학혁명 때 동학 신도들이 여러 만 명 학살되어 모두 지극히 원통한 원귀寃鬼가 되어 우주간에 나붓거리는지라. 그 신명들을 해원시켜 주지 않으면 후천에 역도逆度에 걸려 반역과 화란이 자주 일어나 정사를 못 하게 되리라. 이제 그 신명들을 해원시키려고 원혼을 통솔할 자를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십이제국을 말하니 이는 스스로 청함이라. 오늘부터는 동학 때 한 맺힌 신명들을 전부 경석에게 붙여 보내어 이 자리에서 왕후장상의 해원이 되게 하리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운명에 대해 경계하며 말씀하시기를 “경석아, 집을 크게 짓지는 말아라. 그러면 네가 죽게 되느니라. 정읍이 대창大昌하되 잠농지운蠶農之運이라. 누에는 집만 지으면 죽나니 집만 끝이 나면 죽으리라.”(도전道典 3:187)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따라 차경석은 1929년 경복궁 두 배 크기의 십일전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한번 사용하지도 못한 채 1936년 윤 3월 10일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차경석은 일제의 간교한 회유 정책과 물리적 탄압을 지속적으로 받았고 식민 권력의 편에 선 언론과 지식인들의 여론 조작으로 뭇매를 맞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600만 신도를 규합하고 후천 새 세상을 여는 국가 건설의 연습을 진행하였다. 차경석은 상제님이 붙여 주신 ‘경석京石’이란 이름 그대로 후천 5만 년 새 세상의 주춧돌이 되는 인물이다. 600만이라는 대부흥의 역사를 쓴 보천교가 비록 일제 식민 권력의 계략에 의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민중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지만, 상제님 도운이 열릴 수 있는 역사적, 문화적 토대를 닦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의미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월곡은 일제 강점기의 민중들에게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희망을 주었으며, 실제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기도 한 ‘시대의 풍운아’였다. 또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고 당대의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등 대일 항전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민족 종교 운동의 지도자였다.

 

1921년 황석산 고천제를 봉행하여 교명을 ‘보화普化’라고 선포한 지 만 100년이 지났다. 이제 그동안 월곡 차경석에게 덧씌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 내고 본래의 참모습을 밝혀 그가 남긴 거대한 발자취를 광명 세상을 여는 나침반으로 삼았으면 한다.◎

<참고자료>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甑山道) 道典, 서울: 대원출판사, 2003.
박종렬, 車天子의 꿈, 경기도: 장문산, 2002.
김철수, (숨겨진 역사) 보천교, 대전: 상생출판, 2020.
노종상 외, 보천교 다시보다, 대전: 상생, 2018.
김재영, “1920년대 보천교의 민족운동에 대한 경향성”, 전북사학 0.31 (2007): 139-163.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2022.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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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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