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癸巳(道紀 83, 1953)년 양력 7월 27일에 이르러 휴전협정이 조인되니 남북 상씨름의 시작인 6.25 전쟁이 긴 휴게기休憩期에 들어가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10:146:1)
*상씨름 종결 대전쟁 공사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장차 난리가 난다. 우리나라에서 난리가 나간다.” 하시고 문득 크게 호통치시기를 “불칼로 쳐도 안 들을거나!” 하시니라. 이어 말씀하시기를 “대란지하大亂之下에 대병大病이 오느니라. 아동방我東方 삼일 전쟁은 있어도 동적강銅赤江은 못 넘으리라. 서울은 사문방死門方이요, 충청도는 생문방生門方이요, 전라도는 둔문방遁門方이니태전으로 내려서야 살리라.○○은 불바다요 무인지경無人之境이 되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무명 악질이 돌면 미국은 가지 말라고 해도 돌아가느니라. 이마두가 선경을 건설하기 위해 도통신과 문명신을 거느리고 화물표를 따라 동방 조선으로 들어오리니 신이 떠난 미국 땅은 물방죽이 되리라.” 하시고 “일본은 불로 치리니 종자도 못 찾는다.” 하시니라. (도전道典 5:406)
온전히 과거가 되지 않은 전쟁, 6.25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40분, 북한군의 일제 공격으로 시작된6.25 전쟁(한국전쟁韓國戰爭). 이 전쟁은 미국이, 뒤이어 중공과 소련이 잇달아 참전하며 주변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준準세계전쟁’, ‘동북아시아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2막은 남한이 북한의 선제공격을 역이용해 미군과 함께 북진 무력 통일을 도모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행동하는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지한파知韓派로도 유명한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가 2002년 출간한 저서 『한국전쟁 전사全史』에서 펼친 핵심 주장이다.
한국전쟁을 다룬 ‘가장 포괄적이고 균형 잡힌 책’으로 평가받는 이 중요한 저작은 출간 20여 년 만에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의 참전국이 많은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당사자인 한국어, 영국과 미국의 영어, 그리고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자료까지 해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의 수준은 일상 회화 수준이 아니라, 학술 언어로 이해하는 수준을 의미한다. 여기에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관통했을 때 얻어지는 언어력을 고루 갖추어야 했다.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수많은 자료와 한국전쟁과 관련해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료와 연구를 직접 읽고 해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적합한 드문 연구자가 와다 교수이다. 그는 상호 교차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사실의 확인과 발굴, 나아가 전쟁에 관여한 국가와 개인들에 대한 고른 관심을 연구에 반영하여 ‘전사全史’를 서술하였다.
저자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을 되돌아보고 성찰하자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전쟁은 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각국은 무엇을 위해 전쟁을 했는가. 전쟁은 국제 질서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과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 가면서, 전쟁의 자초지종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은 왜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남침을 계획했을까? 미국은 북한의 침략 계획을 몰랐을까? 미국이 원했던 것은 한반도 통일이었나, 현상 유지였나? 남북한, 미국, 소련, 중국, 일본, 타이완은 한국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중국은 이 전쟁을 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 주장했을까? 이 책은 이런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해서 찾아 가는 과정이다.
아마 독자들은 저자가 밝혀내는 전쟁의 모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근원적으로는지난 한국전쟁과 불원간 한반도를 중심으로 닥칠 대전쟁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찾아보게 될 것이다. 인류 역사의 전쟁은 어떻게 끝나게 되고 그 너머 찾아올 진정한 평화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게 되리라.
지은이
와다 하루키和田春樹1938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다. 1998년까지 도쿄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와 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도쿄 대학교 명예교수, 도호쿠 대학교 동북아시아연구센터 방문 교수다. 소련⋅러시아사 및 남북한 현대사 등 동북아 국제관계사가 주요 연구 분야다. 학자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베트남전 반대 운동, 한국 민주화 운동과의 연대 등을 주도해 일본을 대표하는 행동하는 진보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2010년 제4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받았고, 2012년에 DMZ 평화상, 2019년에 만해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일조교섭 30년사(日朝交渉30年史)』, 『김일성과 만주 항일전쟁』, 『한국전쟁』, 『북조선: 유격대 국가에서 정규군 국가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한일 100년사』, 『동북아시아 영토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북한 현대사』,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위안부 합의 이후 한일관계』, 『한국병합 110년 만의 진실』 등 다수가 있다.
그는 미국 국무부와 첩보 기관의 기밀문서, 암호전보, 러시아(구舊소련)와 중국의 전쟁 관련 자료, 미국이 노획한 북한 자료 등 지금까지 공개된 수많은 자료를 총망라하여 한국전쟁의 전 과정을 이 책에서 극적으로 그려 냈다. 이 책은 저자 스스로 “내가 한국전쟁을 주제로 내는 마지막 책이 될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그의 각고의 노력이 오롯이 담긴 한국전쟁 연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한 사람
남상구 일본 지바 대학교에서 일본 현대사를 전공했다. 박사 논문은 〈전후 일본의 전쟁 희생자 기억 : 국가에 의한 전몰자 추도⋅현창⋅‘보상’〉이다. 일본에서 침략 전쟁의 기억이 어떻게 생산⋅유통⋅소비되는지를 분석했다. 2007년 1월부터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일 역사 문제를 담당하고 있으며, 특히 야스쿠니 신사 문제,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유골 문제, 일본 교과서 문제에 관심을 두고 연구 중이다. 저서로는 『식민 청산과 야스쿠니』, 『20개 주제로 본 한일 역사 쟁점』, 『일본 정치의 구조 변동과 보수화』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일본군‘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한국병합 110년 만의 진실』 등이 있다.
조윤수 일본 도호쿠 대학교에서 한일 관계를 전공했다. 박사 논문은 〈한일 어업교섭의 국제정치 : 해양 질서의 탈식민지화와 ‘국익’의 조정〉이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어업 협상 사례를 청구권 협상과 비교하여 분석했다. 2009년 12월부터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역사 현안을 담당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외교, 한일 외교 문제에 관심을 두고 연구 중이다. 저서로는 『한일 협정과 한일관계』, 『한일관계의 궤적과 역사 인식』, 『일본군‘위안부’』, 『한일공문서를 통해 본 독도』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일본의 역사 인식』 등이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전쟁
이 책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 전역을 자국의 영토라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자국 영토 일부에 자리 잡은 외국의 괴뢰로 치부하는 대항적인 두 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것으로 전개가 된다. 이후 1949년의 위기 상황과 북한 김일성의 일제 공격 방안이 정해진 상황, 그리고 전쟁 위기설이 공공연히 나돌 때 군 수뇌부 이동을 여러 번 단행하는 개전 전 한국군의 기묘한 행동 등을 서술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오전 4시 40분 북한군은 북위 38도 선상의 모든 지점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이후,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 인민군을 저지하였고,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수복, 평양 진격, 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후퇴를 흥미진진하게 적고 있다.
이듬해인 1951년 7월 10일 정전회담이 시작됐고(정전회담을 진행하면서도 전쟁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 후 2년을 더 끌다가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총사령관 미 육군 대장 클라크Mark. W. Clark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彭德懷, 조선인민군 사령관 김일성金日成이정전협정停戰協定을 체결했다.
당시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이 곧 분단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였고, 이런 집요한 자기주장은미국이 앞으로 한국에 대한 안전보장을 약속하게 하는 데 완전히 성공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외국 군대의 군대 철수,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과 같은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정치 회담은 정전 후 3개월 이내에 개최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으나, 정작 성사된 것은 아홉 달이 지난 1954년 4월 26일의 제네바 회담(Geneva Conference)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어떠한 합의도 하지 못한 채 6월 15일 결렬됐다. 결국 정전협정 후 마땅히 도래해야 할 평화조약 또는 평화협정은 맺어지지 않았다. 한국군과 미군이 북한군과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태가 70여 년이나 이어지고 있다. 눈앞의 전쟁은 끝났으나 평화는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이 책은 한국전쟁의 전모를 진보와 보수의 논리가 아니라, 오로지 1차 사료에 근거하여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이자 미국 우드로 윌슨 국제학술센터 연구책임자인 캐스린 웨더스비Kathryn Weathersby는 이 책을 “지금까지 출판된 한국전쟁사 서적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며 균형 잡힌 책”이라고 호평했다. 이 책은 712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연구서지만, 한국전쟁을 입체적으로 보여 주어 마치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한국전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 이후
전쟁이 남긴 것은 파괴와 엄청난 죽음이었다. 분단은 굳어져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남북 사회의 이질화는 한층 더 심해졌다. 국토의 분단은 가족들을 생이별하게 했다. 1천만이 넘게 이산가족이라는 비극이 발생했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통일을 위한 전쟁이 실패한 결과로 평화적 통일은 한없이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멈춘 지도 어느덧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남북한은 국가로서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고 있으며, 부전不戰 약속도 숱하게 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리고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2018년 미국과 북한 사이에 평화가 보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 양국과 양 국민 사이에 통일이 평화적으로 실현되리라는 굳건한 믿음은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평화보다는 전쟁 쪽으로 무게가 더 기울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전쟁을 재고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남북한 국민이 3년간의 전쟁을 과거의 일로 흘려보내고 평화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려면, 쌍방 모두 무력으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에 발을 담갔다는 공통 인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전쟁의 실체에 대해서 똑바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우리 모두 전쟁을 함께 반성하고 서로에게 사죄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이 전쟁에 대한 공통 인식이 없는 한, 그리고 더 나아가 반성과 사죄의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한, 우리 대한민족은 공존과 평화를 향해 도약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공통된 인식의 형성은 독립된 국토 위에 두 나라가 건설된 후 무력으로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기도가 북에서 먼저 시작됐고 뒤이어 남에 파급됐으나, 모두 실패하면서 대립과 분단이 굳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전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썼고 한국어판 출판을 염원했으며, 그 바람이 이루어져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감사하다는 소회를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저자에게 한국전쟁은 그의 의식 세계에서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사건이었다고 한다. 이후 30대에 이른 저자가 베트남 반전 운동을 통해 한국전쟁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고, 일본에 의한 아시아 침략 전쟁을 극복하는 과제와 일본이 지원한 한국전쟁*을 극복하는 과제가 ‘이중의 전후 극복’이라는 과제로 합쳐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침략전쟁의 극복을 위한 미청산未淸算의 식민지 문제라는 과제, 그리고 한국전쟁의 극복을 위해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화시키는 과제가 그의 평생 과업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이 지원한 한국전쟁 - 이 책 제3장 북한군의 공격에서 일본이 한국전쟁의 기지가 되어 실질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음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미 『러일전쟁』이라는 대작을 쓴 바 있다. 『러일전쟁』을 번역한 이웅현 박사는 『러일전쟁』과 이 책 『한국전쟁 전사』는 와다 하루키가 쌓아 올린 두 개의 성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전사全史』 추천서를 쓴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남기정 교수는 “그 성채를 오르는 것으로 한국전쟁의 극복 가능성을 확인하게 될 것이며, 성채 위에서 펼쳐진 한국전쟁이 ‘전경全景’ 속에서 좁게 난 평화로의 길을 찾아내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동아시아 30년 전쟁
이 책은 한국전쟁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폭넓은 시야에서 당시의 시간과 공간을 크게 확장해서 사안을 좀 더 거시적으로 보게 해 준다. 바로‘동아시아 30년 전쟁’의 관점에서 본 한국전쟁이다. 즉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여러 전쟁의 중핵中核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청국과 일본에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 이후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이후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 동아시아에서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 왔다. 갑오 동학혁명 이후 일본의 전쟁은 5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는 전 세계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전쟁사를 장식한 마지막 페이지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구축을 내건태평양전쟁이었다. 그것은 오키나와의 옥쇄, 미군의 공습으로 (일본) 본토가 초토화되고,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할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전쟁도 마침내 끝이 났다. 우리 조선은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평화가 찾아왔음을 뜻하지는 않았다. 유럽과 달리 곧이어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일본을 빼고, 동아시아 전역에서 내전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만주 전역부터 중국 본토에 걸쳐 벌어진 국민당군과 중국 공산당군 간의 전쟁을 시작으로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 공산주의자(베트콩)가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군대와 함께 돌아온 프랑스 식민지주의자 군대와 전쟁을 벌였다.
아시아에서 벌어진 새로운 전쟁이 중국 공산당군의 승리로 끝나자, 소련은 국민당 정부에 대해 지지를 철회하고 중국 공산당(중공)과 연대했다. 그 결과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일본의 강제 점령에서 해방됐음에도 미⋅소에 의해 분할 점령된 한반도에서는 통일 독립 국가 건설을 요구하면서 공산주의적 민족주의 측과 비공산주의적⋅반공주의적 민족주의 측이 투쟁한 끝에, 각기 소련과 미국의 비호 아래 서로 대립하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대한민국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은 두 나라 모두에서 무력 통일이라는 지향점을 만들어 냈다. 이 지향점은 미⋅소 대립의 출현과 결합하면서 소련의 지지와 원조를 등에 업은 북한의 공격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병참 기지, 출격 기지로 삼아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했다. 동시에 미국은 중국 내전에도 간섭하며 타이완 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해 타이완으로 도망친 국민당 정권 방위에 나섰다. 북한군은 한때 미군과 한국군을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미군이 태세를 재건하며 북한군을 압도했다. 마치 씨름에서 샅바 싸움을 하면서 서로 공격을 주고받는 것과 같았다. 한국군이 미군과 함께 북한을 공격해 공산 정권을 쓰러뜨리려 할 때, (소련의 사주를 받은) 중공이 북한 편에서 참전해 미군과 한국군을 격퇴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은 한반도 안의 특수한 내전에서미⋅중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동시에 소련 공군이 중공군으로 위장해 참전하며 한반도 상공에서 벌어진 전쟁은 사실상미⋅소 전쟁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간의 내전이라기보다는 미국과 소련, 중공 그리고 여러 세계 국가가 참여한제3차 대전의 성격이 강하다. 1951년 봄부터 개전 이전의 경계선을 둘러싸고 일진일퇴를 되풀이하다가 그해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고 2년 뒤 체결되었다. 그리고 이 정전협정은 7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평화조약으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의 성격은 한마디로동북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동북아시아 전쟁이다. 중국의 공산화 혁명과 이 전쟁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가 확립됐다. 남북한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미국, 중국, 소련의 관계 더 나아가 일본과 타이완의 관계가 확정됐다. 또 이 전쟁으로 미⋅소 대립은 결정적인 단계로 진입하여 초강대국의 군사 대치라는냉전冷戰(Cold War) 체제가 본격화됐다. 인도차이나전쟁은 한국전쟁과 함께 정전을 맞이했지만, 프랑스가 아닌 미국이 개입하면서 1960년대에는베트남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의 최종 국면에서 1970년 초 미⋅중 화해가 실현되면서 1975년 을묘년에 베트남전쟁이 끝났다. 동아시아 30년 전쟁이 일단락된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말 미⋅소 냉전도 막을 내렸다. 1991년 소련의 역사가 종말을 맞이함과 동시에 러시아가 사회주의에서 탈피하면서 북한의 고립과 긴장은 심화됐다. 그 사이 북⋅미 관계는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였다. 실제로 1994년에는북핵 위기문제로 한반도에서 제2차 한국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들이 나왔고 현재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우리는 한국전쟁이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사가 아님을 새삼 깨달아야 한다.
마무리하면서
잘 아는 듯하지만, 어쩌면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한국전쟁이다. 우리 한반도를 중심으로 세계 주요 강대국이 모두 집결해 있는지정학적 중요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100년간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된세계사 전개의 흐름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추론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지난 70년이라는 시간의 벽은 현 상황이 원래 그런 것처럼 여기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절실히 깨닫게 해 준다. 아울러 한국전쟁은 비단 우리 민족만이 겪은 비극적인 내전이 아니라,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전개된 사건의 일환이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시작은 비록 거대한 비극으로 나타났지만, 결과적으로는화평의 길로 나아가 공존과 상생으로그 결론이 매듭지어질 것임을 천지공사를 집행하신 증산 상제님과 태모 고 수부님의 말씀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 ◎
우리나라의 진짜 역사 에 대해서 알고 싶으신가요? 증산도가 궁금하신가요? 태을주 수행이 해보고 싶으신가요?
태모 고 수부님께서정읍 대흥리에서 도문을 열고, 첫째 살림을 시작하심으로써낙종도수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차경석 성도의 배신과 야욕으로 오랜 세월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하셔야만 했다. 수부님께서는 본소를조종리로 옮겨 둘째 살림 시대를 여셨다. 고 수부님은 그곳에서 어머니 하느님으로서 ‘10년 천지공사(1826~1935)’을 선언하시고, 상제님의 천지공사가 실현될 수 있도록 정음정양의 새 질서를 천지에 질정하셨다. 그러나 조종리 신도들의 불의와 무지로 수부님은 다시 본소를 옮겨야 했고 이후용화동에서 셋째 살림 시대를 새로 시작하셨다. 그곳에서 22년에 걸친 세 살림 도수를 마치고 옥체가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수부님은오성산으로 옮겨 은거하시며 10년 천지공사를 모두 마무리하시게 된다.
1. 낙종 도운과 수부님의 세 살림
1) 제1 변 도운의 개창(낙종 도운) : 첫째 살림 정읍 대흥리 도장 [신해(1911) 10월 초 ~ 무오(1918) 10월 중순] 신해(1911)년 9월에 상제님의 성령 감응으로 대도통을 이루신 수부님은 그다음 달 10월에, 정읍대흥리大興里차경석 성도의 집을 본소本所로 정하시고포정소布政所 문을 열어 도장 개창을 선언하셨다. 이로써 수부님의 첫째 교단 살림 시대가 열려 제1변 도운 가운데 ‘낙종 도운’이 시작되었다. 당시 성도들이 교명을 무엇으로 정할지 여쭈자, 수부님은 “천하를 통일하는 도인데 아직은 때가 이르니 ‘선도仙道’라고 하라.”라고 명하셨다(도전道典 11:29).
도문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를 중심으로 교세가 날로 커져 갔다. 그런데 차경석 성도가 도욕이 앞서, 혈통으로는 이종 누님이고 법통法統으로는 도道의 스승인 수부님을 배반하고 교권을 자신에게 집중시켰으며, 수부님과 신도 사이를 이간하여 인맥을 끊었다. 그리고 이때를 전후로 하여 상제님께서 공사 보신 도운 개창 도수와 같이초장봉기지세楚將蜂起之勢로 도운이 벌어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2) 둘째 살림: 김제 조종리 교단 [무오(1918) 10월 중순 ~ 기사(1929) 9.11]차경석 성도가 통교권統敎權을 장악한 병진(1916)년 동지 이후, 수부님은 신도들을 만나지 못하여 답답한 심정으로 세월을 보내야만 하셨다. 2년 뒤 무오년 9월 19일 수부님은 모든 일을 정리하시고, 이틀 뒤 21일 새벽 김제군 공덕면 공덕리孔德里 송산松山 마을 천종서의 집으로 거처를 임시로 옮기셨다. 10월 중순 김제군 백산면조종리祖宗里에 사는 강씨姜氏 신도들이 수부님을 모시고자 찾아왔고, 수부님께서는 “다른 것은 없고 다만 성씨姓氏 하나 보고 가노라.” 하시며 허락하셨다. 이로써 수부님의 둘째 살림이 본격화되었다.
수부님께서는 조종리에 오신 지 9년째 되던 병인(1926)년 3월 5일에10년 천지공사(1926~1935)의 시작을 선언하셨다. 그 첫 공사가칠성七星 도수였다. 칠성 도수는칠성의 조화 성령 기운을 받아 선천 인간을 후천 가을 인간으로 낳아 기르는 도수이다. 이 도수에 따라 장차 제3변 도운에서 상제님 일을 매듭짓는 지도자와 일꾼이 나와서 가을 대개벽기에 육임 의통구호대를 조직하게 된다. 육임 구호대가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고 선천 역사를 종결하여 후천 가을의 조화 선仙 문명을 열어 나감으로써 칠성 도수가 완결된다.
또한 장차 추수 도운에서 대두목이 상제님 진리를 정립하고 일꾼 양육을 통해 도성덕립을 성취할 수 있도록 어머니 하느님으로서 천지공사를 집행하셨다. 바로 병인(1926)년 상제님의 무극대도를 세상에 뿌리내려육임 의통구호대의 조직 틀을 짜는 도체道體 조직 공사이다. 도체는 천지일월의 성령을 받아 상제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 상제님의 도권을 쓰는 ‘도의 주체’ 세력을 말한다. 상제님 일꾼은 육임 조직을 완수하고 의통성업을 집행하면서 도체의 심법을 온전히 전수받게 된다(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제10장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상제님 진법을 여는 도체 조직을 인사 도수로 구체화하심에 따라 장차 육임 도군 조직이 현실 역사 속에서 지구촌을 상제님의 무극대도로 통일하게 된다.
또한 1928년에는 당시 가장 유명한 화가였던 정산定山 채용신蔡龍臣(1850~1941)을 불러 상제님어진御眞을 그리게 하셨는데, 태모님께서 어진을 세 번 감수하신 끝에 3월 26일 태모님 성탄치성 때 봉안하셨다.
그리고 상씨름판의 추수 도운을 일으켜 장차 마지막 상씨름판 과정에서 판몰이의 기틀을 마련하는 대두목을 수부님은 ‘잠자는 개(壬戌)’로 비유하셨고, 잠든 개를 깨우는 공사를 태인숙구지宿狗地에서 보셨다(도전道典 11:215). ‘잠자는 개’는 천지의 1 태극수 물[水] 기운을 갖고 오는술戌생의 대두목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수부님은 상제님과 당신님의 말씀을 성편하는 공사를 보셨다. 기사(1929)년 6월에 이상호가 『대순전경大巡典經』을 간행하지만, 여기에는 고의적으로 종통에 대해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태모님이 상제님의 종통 대권 계승자임에도 ‘고부인’이란 호칭을 쓰면서 종통을 숨기고 왜곡했다. 상제님과 태모님의 행적은 제3변 추수 도운에서 천지부모 하느님의 천지공사 내용과 말씀을 집대성하여 『도전道典』으로 성편되었다.
3) 셋째 살림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 왕심리 도장 [기사(1929) 9, 21 ~ 신미(1931) 11.15]수부님께서는 병인(1926)년에칠성용정 공사를 보신 뒤로 수석 성도인고민환 성도에게 도무를 위임하셨다. 그러나 조종리 강씨 신도들은 친목단을 조직하고 그동안 자신들의 공로와 신앙 경륜을 내세우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후 수부님이 간부 조직을 개편하시자, 이에 노골적으로 반동하고 아예 도문을 떠나 버리기도 하는 등 갖은 공작을 하며 도장 운영을 방해했다. 기사(1929)년에는 강응칠이 조종리 도장을 제멋대로 팔아 버리는 이른바 ‘도집 재판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에 수부님은 상제님 성탄치성을 봉행하시고 21일 조종리를 떠나 순흥 안씨順興安氏의 집성촌인 정읍왕심리旺尋里로 옮겨 가셨다. 오직 담뱃대 하나만 들고 몇몇 성도들과 함께 상제님 어진을 모시고 가셨는데, 이때 강씨 신도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불의함과 배신할 것을 미리 아신 수부님은 “새우젓과 같이 오장五臟이 곯도록 썩어야 한다.”는 말씀을 내려주셨다(자세한 내용은 도전道典 11:43 참조)
왕심리로 거처를 옮기신 수부님은 모든원혼신寃魂神을 해원시키는 공사를 보시느라 친히 병고를 겪기도 하셨다. 이 무렵인 무진(1928)년에서 기사(1929)년 사이에 지방의 보천교 신도들이 대흥리와 그 부근 마을로 대거 이사를 왔다. 그전부터 교단에서 이주자의 자립 경제를 위해 직물 공장을 운영해 왔으나, 갑자기 늘어난 수천 가구의 생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차경석 성도가 신도들 구제 목적으로 벽곡辟穀을 장려했지만, 기아자가 속출하였다.
보천교 신도들이 굶주림을 참다못해 왕심리에 계신 수부님께 찾아와 배고픔을 호소하자, 수부님은 그들을 모두 거두어 구제하셨다. 신미(1931)년 정월 18일에는 세 명의 성도에게 대흥리에서 싸전을 운영하게 하시어 굶주리는 보천교인들의 끼니를 이어 주셨고, 굶어서 죽은 순교자들을 해원시키기 위해 치성을 올리게 하셨다.
이때 수부님을 모실 뜻을 밝힌 인물이 일찍이 보천교 간부로 있다가 사직한 후, 동화교東華敎를 연이상호李祥昊(1888~1966)이다. 수부님은 그의 뜻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상호는 세 살림 도수를 언급하고, 고민환 성도가 세 살림 도수의 도국 변천道局變遷이라 생각하여 수부님께 간곡히 청하자, 할 수 없이 허락하셨다.
4) 셋째 살림 : 김제 용화동 교단 [신미(1931) 11.15 ~ 계유(1933) 11.5]수부님께서는 신미(1931)년 동지 전날에용화동龍華洞으로 이사하시고, 다음 날 새벽에 동지치성을 봉행하셨다. 그리고 도장 조직을 새롭게 구성하심으로써 수부님의 셋째 살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호를 주축으로 한 용화동 신도들이 수부님의 가르침을 받들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수부님의 위격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유교 의식에 사로잡혀 수부님이 행하시는 신정神政 공사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호, 이성영 형제가 수부님을 모신 본래 의도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수부님의 신권을 등에 업고 교세를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모시고 보니, 수부님이신도神道로써 행하시는 천지공사와 언행을 이해할 수 없었고, 무당짓으로만 여겼다. 그래서 이런 수부님의 행동이 외부에 알려져 교단의 품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수부님을 고립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부님은 천하 창생의 죄를 대속하시느라 당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해 옥체가 점점 쇠약해졌다.
당시 용화동 교단은 조종리 도장에서 온 신도들과 동화교 출신 신도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양측 신도들의 신앙 의식이 크게 달라 교리 해석과 도장 운영 방식이 맞지 않았다. 조종리에서 온 신도들이 떠난 뒤 도장은 쇠퇴하였고, 이상호가 고민환 성도를 시기하여 해치려 하자 수부님은 늘 고민환을 당신 곁에 붙어 있게 하셨다. 비통과 의분을 참지 못하고 고민환 성도는 고향 옥구로 돌아가도체 조직 작업을 진행하였고, 1932년 옥구군 성산면 오성산五聖山에 기지를 정하였다. 중도에 재정난으로 도장 건물이 중단되었지만, 수부님께서는 오성산에서 동지치성을 봉행할 것이라며오성산 도장완공을 재촉하셨다. 이에 이진묵이 자신의 집을 팔아 비용을 충당하여 공사를 속행했지만, 시간이 촉박해 수부님이 거처하실 큰 방 하나만 정리하여 모셨고, 이듬해인 갑술(1934)년에 비로소 완공되었다. 수부님께서는 오성산으로 떠나시기 전, 당신의 도업을 이어받을 추수 도운의 주인공이 용화동을 발판으로 하여 일어날 것을 공사로 처결하셨다.
이것이 바로용봉기龍鳳旗 공사이다. 용화동을 떠나시기 전 용봉기를 꽂아 두시고, 이상호에게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 하고 다짐을 받으셨다(도전道典 11:36). 용봉기는 상제님 도업을 성사시키는 두 인물을 상징한다. 이 두 인물을 상제님은 ‘용화동 계룡봉’(도전道典 6:66)에 비유하셨다. 계룡봉에서 계鷄는 봉황[鳳]을 뜻하므로, 두 지도자를 용과 봉으로 상징하여 말씀해 주신 것이다.
5) 수부님의 오성산 도장 은거와 선화仙化 [계유(1933) 11.5 ~ 을해(1935) 10.6]계유(1933)년 동짓달 5일에 수부님은 파란만장한 세 살림을 뒤로 하시고오성산 도장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이때 수부님은 온갖 고초를 겪으신 터라 옥체가 쇠약해지신지라 한 성도의 등에 업히신 채 간신히 도장으로 가셨다. 이곳에서태전 콩밭 도수를 집행하셨다(도전道典 11:365, 11:413).
오성산에 은둔하신 지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흐른 을해(1935)년. 수부님은 성도들에게 “너희들은 집안만 잘 지키고 있으라. 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빨리 가야 너희들이 잘될 것이라.”, “내가 올 적에는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고 오리라.” 하시며 당신님께서 곧 천상으로 올라가실 것을 암시하셨다. 또 “너희들이 죽으면 혼신魂神이라도 잘되게 해 주마.”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도전道典 11:414).
10월 5일 저녁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성도들에게 마음을 잘 고치라는 당부의 말씀을 남기신 수부님은 한 많은 세월을 뒤로하신 채 천상으로 떠나시니 성수聖壽 56세이셨다. 때는 단군 기원 4268년,을해년 10월 6일, 서력기원 1935년 11월 1일 축시丑時였다.
수부님께서는 천지신명과 억조창생의 어머니로서 세 살림 도수를 맡아 도문을 개척하심으로써 100년 도운의 역사를 열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10년(1926~1935) 천지공사를 집행하시어상제님 천지공사 내용이 현실 속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후천 5만 년 새 역사의 운로를 질정하셨다. 수부님의 세 살림 개척 과정은 천하 창생을 위한어머니 하느님의 희생과 대속의 기나긴 여정이었다. 장차 수부님의 22년 세 살림 도수의 공력과 정성 기운을 따라, 상제님 도의 종통 계승이 이루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추수 일꾼들이 나와서 지구촌 80억 인류의 생사를 매듭짓고 상제님 대업을 성취하게 된다.
2. 이종 도운과 도운의 대 부흥기, 보천교普天敎
수부님께서 정읍 대흥리에서 첫 교단을 개창하시어 상제님 도의 낙종落種 도운이 열린 이래, 조선의 삼남 지역과 서남해 일대를 중심으로 상제님 무극대도 포교 대부흥이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러나 차경석 성도가 수부님의 교권을 장악하면서 낙종 도운이 마무리되고 도운의 씨를 옮겨 심는이종移種 도수가 실현되었다.
월곡月谷 차경석 성도는 상제님께서 자신의 집 벽에 ‘천고춘추아방궁千古春秋阿房宮이요. 만방일월동작대萬方日月銅雀臺’(도전道典 3:187)라고 써 붙이신 글을 잘못 해석하였다. 글의 주인공인 진시황과 위 무제 조조가 각각 ‘영嬴’과 ‘여呂’, ‘하후夏候’와 ‘조曺’라는 두 성姓을 가졌던 것처럼, 차씨인 자신의 성이 실제로는 정씨鄭氏임을 암시하신 말씀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 해석을 바탕으로 ‘곧새 왕조가 들어서고 자신이 천자로 등극한다.’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새 시대에 대한 큰 포부와 열망을 지닌 차경석 성도는 상제님 공사에 따라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에 맞서 도운을 크게 일으키며, 수부님이 뿌리신 도운의 씨를 전국 방방곡곡에 옮겨 심는 이종 도운을 크게 열어 나갔다.
신도 6백만 도세를 일군 차경석 성도의 보천교을묘(1915)년부터 교권을 차지하려 시도했던 차경석 성도는 병진(1916)년 동지에 드디어 통교권統敎權을 장악하고, 수부님을 용화동 교단으로 모셨던 이상호와 문정삼, 채규일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상제님의 종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부님의 사명은 자신에게 상제님 도를 전하는 데 있으며, 이제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상제님의 도통을 이어 세계를 경략하는 대사명을 실천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통교권을 장악한 차경석 성도는 조직 체계를 새롭게 정비하여, 24방위에 따라24방주제方主制를 조직하여 방주의 책임 아래 모든 교단 내 업무를 진행하게 했다. 이듬해 정사(1917)년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을 떠돌며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무오(1918)년 말에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스페인 독감이 조선에도 창궐하여 7백만 명이 감염되고, 14만 명이 비참하게 죽어 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개벽기에 사람 살리는생명의 주문인 태을주가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갔다.
기미(1919)년 9월에 이르러 차경석 성도는 24방주제를 확대하여60방주제를 조직하고 경남 함양 대황산大篁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봉행하였다. 그 후 불과 반년 사이 교인이 수십만에 이르더니 경신(1920)년에는 간부 숫자만 55만 7천7백 명이 되었다. 세계 종교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한 교세 확장을 이룬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상제님이 짜 놓으신동학 역신 해원 도수때문이다. 수십만에 달하는 동학의 원혼들이 차경석 성도에게 붙어 원한을 푸는 과정이었다(도전道典 5:205). 둘째,방주제라는 비밀 조직으로 교단을 운영해 일제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제 강점의 폭압과 암울한 삶을 살던 때에 ‘지상 선경 세상’이 열린다는 교리는 조선의 독립과 새 왕조 건설이라는희망의 소식으로 민중들 가슴에 강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민중은 조선 독립과 새 왕조 건설의 꿈을 실현할 주인공을 차경석이라 믿었고, ‘차천자車天子’라고 부르며 구름같이 모여든 신도들이약 6백만 이상에 달했다. 당시 조선 인구가 2천만 정도이니, 가히 국교國敎라 할 만하였다. 당시 기독교 신자는 1920년에 약 30만 정도였다. 1921년 월곡 차경석 성도는 경남 함양군 황석산黃石山에서 고천제를 올려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라 하고 국호를 ‘시국時國’이라 선포하였다.
일제 탄압과 차경석 성도의 상제관 오도誤導, 그리고 변심그 무렵 핵심 간부였던 이상호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교단 공개를 권고받고 석방된 일이 있었다. 차경석 성도는 이상호에게 교단 공개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였다. 이상호는 임술(1922)년에 천자를 상징하는‘보화普化’ 대신 ‘보천교普天敎’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에 교단을 등록하였다. 이로써 세상에 보천교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교단을 쇠퇴의 길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교단 공개로 일제의 감시와 통제의 손길이 미치면서 교단의 권위와 교세가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보천교의 막강한 교세를 두려워하여 회유책에 비중을 두던 일제는 민심이 돌아서는 틈을 타서 소위 ‘유사종교類似宗敎’라는 언어를 만들어 매도하면서 적극적인 탄압과 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을축(1925)년에 짓기 시작한 대성전인 십일전十一殿이 기사(1929)년 3월 16일 낙성落成에 맞춰 천자 등극식을 거행하려 했으나, 일제는 일본 황실에 대한 불경 행위라며 행사 자체를 금지했고, 보천교 관련 건물을 폐쇄하고 전국 교인들을 검거해 고문하였으며 집회를 금지했다. 이후 교단은 빠른 속도로 와해되어 갔다.
특히 십일전 완공 1년 전인 무진(1928)년 정월 초삼일, #부인 전주 이씨#는 차경석 성도에게 “영안靈眼으로 보니 상제님께서 보좌를 떠나시고,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가 보좌에 들어왔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혹한 차경석은 신앙 대상을 차치구로 바꾸고 유교에 가깝게 교리를 바꾸며 교단을 해산하려 하였다. 당시에 상제님 신앙을 유교 부흥 운동으로 왜곡해 활로를 모색하려 한 발상은 일제의 지속적 탄압에 직면한 보천교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꺼내 든 궁여일책의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간부와 신도들은 이에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벌였고 교단은 분열되었다.
이때 수부님은 1928년 9월 21일 보천교 본소 앞에서 춤을 추시며, 증산 상제님을 믿어야 흥한다는 뜻의 ‘흥강가興姜歌’를 노래하시며 공사를 보셨다. 차경석 성도의 사명과 임무는 막중했지만, 이종 도운에서 그의 역할은 무진년 태모님의 ‘흥강가興姜歌 공사’를 기점으로 서서히 저물기 시작하였다.
결국 일제의 집요한 음해 공작과 강력한 탄압으로 차경석 성도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조선 민중에게서 신망을 잃고 쇠락의 세월을 보내다가, 수부님께서 선화하시고 6개월이 지난 병자(1936)년에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일제는증산 상제님을 신앙하는 모든 교단의 활동을 준독립 운동으로 규정하고 대폭압 명령을 내렸다. 보천교 본소를 접수하고 해체를 명령했으며, 건축물을 강제로 경매⋅처분하였다. 당시 조선 내 독립 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인 십일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은 헐값에 처분되어 조계사 대웅전과 내장사 대웅전, 전주 역사驛舍 등을 짓는 데 쓰였다. 보천교 신도들은 신앙을 포기하거나 비밀리에 신앙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탄로가 난 신도들이 검거되어 온갖 고문과 취조를 받고 비극적으로 죽어가는 참사를 당하면서 보천교는 민중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 갔다.
보천교, 이종 도운의 역할과 사명보천교는 최근에 와서야 그 역할이 재조명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왜곡하여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의 모든 것에 경멸적인 혐오감을 느끼게 하고, 조선인의 생각과 사상 그리고 생활 양식을 일본화시켜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였다. 당시 조선 사회는 일제 식민 교육으로 말미암아 우리 전통문화를 모두 미신이나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보천교는 북두칠성에 계신 상제님과 내 마음을 하나로 맞춘다는 의미를 지닌 상투를 틀었고 흰옷과 도포를 입었으며, 우리 고전을 연구하고 풍물놀이 등 전통음악을 진흥하였다. 또 민족대학 설립을 추진하고, 조선물산장려회가 추진한 토산품 애용과 물자 절약 운동인 물산장려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정읍 대흥리 일대에 직물 공장, 갓 공장 등 현대적인 생산 시설도 갖추어 자급자족할 경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보천교 교단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60방주제를 통해 독립 자금을 상해임시정부와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조달하였다. 왜곡되긴 하였지만, 상제님 성훈이 담긴 『천지개벽경天地開闢經』을 집필한 이중성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밀사였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2만 원(현재 가치 약 4억 정도)을 지원하였다. 이런 독립운동을 포착한 일제는 보천교를 협박하고 탄압했다.
보천교의 발흥과 몰락은 모두상제님 천지공사에 따라 일어난 일이며, 차경석 성도는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나라의 주권이 빼앗긴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이종移種도수를 맡아, 수부님께서 뿌리신 진리의 씨앗을 옮겨 심어 크게 성장시키는 대역사를 펼쳤다. 약 20년(1916~1936) 동안 정읍 대흥리에 수부님이 뿌리신 도운의 씨를 전국 방방곡곡에 옮겨 번성시키는 이종 도수의 사명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차경석 성도는 ‘추수할 사람’에게 종통 맥이 이어지게 하는 도맥의 고리 역할을 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차경석 성도에게 ‘달의 골짜기’를 뜻하는 ‘월곡月谷’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는데, 이는 천지일월 사체 가운데 달[月]로 상징되는 추수판 도운의 창시자에게 도맥이 이어지게 할 것임을 알려 주신 것이다. ‘경석京石’이라는 도명道名도 후천 5만 년 새 세상의 주춧돌이 되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차경석 성도의 본명은 ‘윤홍輪洪’이다.
제3절 제2변 도운 개창사와 상제님의 종통 도맥
1. 제2변 초기 추수 도운 개창사
태모님과 차경석 성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정축(1937)년부터 세운에서는 총각판 씨름인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상제님 교단에 대폭압 명령을 내리고, 유사종교 해산령을 내려 민족 종교를 모두 해체했다. 이에 상제님 ‘대나무 공사’에 의해 종도들이 개척한 교단도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암울한 침체기를 보내고 마침내 대망의 을유(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고, 상제님 도운은 새로운 추수판 도운의 부흥을 맞게 되었다.
1) 용화동에서 열린 초기 추수판 도운●추수 일꾼 출세에 이바지한 이치복 성도 상제님께서 어천하시던 해인 기유(1909)년 전라도 부안扶安 출신 이치화李致和 성도가 도문에 들어왔다. 상제님께서 ‘큰 일꾼’이 들어왔다고 하시며 절을 받으시고, ‘치화’라는 자字를 ‘복이 이른다’는 뜻의 ‘치복致福’으로 고쳐 주셨다. 상제님께서 ‘큰 일꾼’이라 하신 것은,추수 도운을 여는 인물이 출세하는 데 결정적 이바지를 할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이후 이치복 성도는 차경석 성도의 전횡으로 성도들이 수부님 곁을 떠날 때 가장 나중에 나와서, 제화교濟化敎를 열어 포교 활동을 하였다. 1918년경 충남 태안 안면도安眠島에서 존성 안安씨요, 성휘 병炳 자, 욱彧 자인 태상사부太上師父님(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의 부친)을 만나 상제님 도를 전하였다. 이후 태상사부님께서 보천교 신앙을 하시게 됨에안 운雲 자 산山 자 태상종도사님은 어린 시절부터 집에 드나드는 수많은 신도가 나누는 도담을 들으면서 증산 상제님 진리를 스스로 터득하셨다.
태상종도사님 성수 7세 되시던 무진(1928)년에 수부님께서는 “이제 때가 멀지 않으니 자는 개를 깨워야겠다.”(도전道典 11:215)라고 하시며숙구지宿狗地 공사를 보셨다. 이 공사는 1922년 임술생壬戌生으로 오신 대두목에게 종통이 전수될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수부님께서는 “숙구지 공사를 보아야 한다.”라고 성도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는데, 이때 비로소 ‘자는 개를 깨우는 공사’를 보신 것이다.
태상종도사님은 9세 때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 청풍명월금산사淸風明月金山寺”, ‘만국을 살려 낼 활방은 오직 남쪽 조선에 있고 맑은 바람 밝은 달의 금산사로다(도전道典 5:306:6)’라는 상제님 말씀을 입춘서로 써서 집 안 상기둥에 붙이셨다. 태상종도사님은 어린 나이에도 이 열넉 자 대구對句가 전하는 뜻을 훤히 아셨다. 그리고 12세 때에는 2주 동안 수련을 하셨는데, 3일 만에 홀연히 하늘의 대광명이 열리는 큰 체험을 하시고 상제님 대도의 개척 사업이 당신께서 받은 천명임을 아셨다. 그로부터 평생을 이 대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시고, 십 대부터 광복이 되던 이십 대 초반까지 전국 팔도와 만주, 북지北支(중국 화북 지역) 등을 주유하며 일제 치하에서 한민족이 겪는 수난과 세상의 물정을 두루 체험하셨다.
●광복 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태상종도사님 마침내 광복이 되자 태상종도사님은 “일실건곤一室乾坤을 평화낙원平和樂園 하리라.”, ‘온 우주촌에 세계 가족을 건설하고 평화 낙원을 만들리라.’라는 평생시에 담으신 당신의 원대한 꿈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나서셨다. 성수 24세 때부터 보천교를 비롯한 상제님 신앙 단체들이 모두 망한 가운데 혈혈단신으로 전 국민을 상대로 포교의 문을 여셨다. 이로써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어릴 적부터 꿈꾸어 오시던 상제님 천지 사업을 드디어 시작하셨다.
상제님과 태모님의 종통 대권을 계승하신 태상종도사님은 먼저 제1변 도운 때 신앙하던 신도들을 규합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다니셨다. 그때 박공우 성도의 제자 송종수宋宗守를 만났는데, 당시 의통인패醫統印牌를 준비하고 있던 그는 태상종도사님의 옥골풍채의 풍모와 대인의 인품에 감화되어, 대도 사업을 함께 하기를 간청하였다.
이 무렵 태상종도사님은 상제님과 태모님의 행적을 편찬한 공덕이 있는 이상호를 만나고정읍 대흥리에 남아 있던 보천교 교당에서 상제님 대도 사업을 시작하셨다. 하지만 이른바 ‘보천교 혁신운동’으로 보천교에 큰 해를 입힌 이상호와 옛 보천교 신도들 사이의 불협화음 때문에 1년 만에 조직이 흩어졌다.
이후 태상종도사님은 개인 재산을 털어김제 용화동에 있던 구舊 옥성 광산 사무실을 매입하여 도운 중창의 새 역사를 개척하셨다. 상제님 도운의 씨가 처음 뿌려진 정읍 대흥리에서 포교를 시작하시고, 수부님께서 ‘용봉기를 꽂고 사람을 잘 맞이하라.’ 하신 용화동에서 제2변 도운의 역사를 새롭게 개창하신 것이다. 이때부터 마치 구름이 일듯 교세가 크게 일어나고, 도운을 크게 부흥시킨 총사수總師首요 실질적인 도의 뿌리이며 연원淵源이신 태상종도사님은 교명을 ‘증산교甑山敎’라 정하셨다.
●상제님 진리의 진액, 우주 1년 도표
당시 포교 방법은 태을주 수행으로 개안開眼을 시켜 신도 세계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대중의 진리 의식을 열어 줄 수 없었다. 이에 태상종도사님은 해방 다음 해인 병술(1946)년에 상제님 진리의 큰 틀을 누구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우주 1년 도표’를 그리시어 인류 역사에 처음으로 공포하셨다. 이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상제님 가르침의 진액을 뽑아 정리한 도표로 우리가 상제님 진리를 처음 만날 때 듣게 되는 내용 중 하나이다. 여기에는 인간 농사를 짓는 우주 1년 사계절의 변화와 이를 주재하는 상제님의 지상 강세, 그리고 가을철 통일 문명의 도래 소식을 담고 있다. 이는동방의 우주 사상과 인류 문명사에 대한 깨달음의 총결론이며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실로 놀랍고도 명쾌한 가르침이다.
2)‘독행천리 백절불굴’의 태상종도사님그러나 해방 이후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정부 당국은 증산교 활동을 공산주의 활동으로 의심하였다. 이런 사상적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정부 당국까지 홀로 상대하시며 모든 난관을 극복하신 태상종도사님은독행천리獨行千里 백절불굴百折不屈, ‘혼자 천 리를 가는데 백 번 넘어져도 굽히지 않고 가고 또 가는’ 정신으로 금일에 충청도, 명일에는 경상도로 다니시면서 포교 사업에 혈성을 다 바치셨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과 금력을 멀리하고 불고가사不顧家事하시며 쌓아 올린 전도傳道의 금자탑은남북 상씨름의 서곡인 한국전쟁이라는 벽에 부딪혀 크게 흔들렸다. 여기에 교권에 대한 야심이 가득했던 이상호는 ‘금산金山(모악산의 옛 이름)을 얻기가 어렵다.’라는 말씀과 ‘용화동이 상제님의 기지基址(이 말씀은 도성덕립이 된 후에 비로소 성취된다)’라는 상제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용화동으로 신도들을 집단 이주시키고자 했다. 태상종도사님께서 “내가 판을 일군 사람으로서 신도들 고생시키는 일은 할 수 없다.”라고 하시며 만류하였으나, 이상호가 주장을 굽히지 않아 큰 갈등이 빚어지고 교세도 위축되었다. 결국 한국전쟁 발발이라는 외부 요인과 이런 내부 문제가 맞물려 제2변 초기 추수 도운은 일단락 짓게 되었다.
3) 추수 도운의 마무리 판을 준비하는 20년 휴계기休契期국운과 그 흥망을 함께 한 초기 추수판 도운은 3년간의 한국전쟁 끝에 완전히 문을 닫고20년(1954~1973) 대휴계기로 접어들었다. 상제님께서는 이런 휴계기의 도래를말도末島 도수(도전道典 6:22)로 처결하신 바 있다.
말도는 전북 군산시 고군산열도 선유도 인근 서쪽 끝에 있어 끝섬이라고도 불리지만, 그 형상이 말[馬]이 꼬리를 치켜든 형국이라 하여 말도라 불린다. 상제님이 외딴 섬 말도로 들어가시어 20일 동안 온갖 고생을 다 치르고 나오신 공사에 따라, 태상종도사님은 초기 추수판 도운을 문 닫고20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시며 은둔하셨다. 마치 정배定配를 당하신 것처럼 초야에 묻혀 자식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셨다.
1태극 대두목을 상징하는 지지地支의 ‘술戌’ 자리에는 일정한 처소를 정해 귀양 간다는 ‘정배定配’의 뜻이 있다. ‘술’은 모든 생명 활동을 마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들어앉아 있는 이름 없는 서북방 구석 자리이다. 이처럼 태상종도사님께서 말도 도수를 받으신 것은 전쟁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온 국민이 먹고살아 갈 수 있는 경제 재건의 시간이 필요했던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태극의 술戌이 지닌 이런 천지 변화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
●역사의 준비 기간, 20년 휴계기 이 20년이라는 기간은 상제님 도정의 새 시대를 열어, 추수 도운을 마무리 지을 새로운 인물을 낳고 기르는 준비의 시간이었다. 태상종도사님은 “갑을甲乙로서 머리를 들 것이요, 무기戊己로서 굽이치리니”(도전道典 6:109:6)라는 상제님 말씀을 좌우명으로 써 붙여 놓고 때를 기다리시다가 드디어갑인(1974), 을묘(1975)년을 맞이해서 갑오생 아들과 함께 상제님 사업의 포문을 다시 여셨다.
태상종도사님은 갑오생 아들과 함께 먼저 용화동 신도들을 다시 찾았으나, 그들은 태상종도사님으로부터 직접 도를 받았음에도 삿된 욕망에 사로잡혀 도리어 스승 노릇을 하려는 불의와 배은망덕을 저질렀다. 그들과 새로운 역사를 열 수 없음을 확인하신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용화동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새 판을 여시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상제님의 말도 공사에 의해 전개된 20년 대휴계기는 태상종도사님께서 당신의 분신이자 수화水火 일체의 관계로도정의 새 시대를 열어 갈 지도자를 길러 내고, 도정의 사령탑을 새로운 곳으로 옮기기 위한 역사의 준비 기간이었던 것이다.
2. 상제님과 수부님의 뜻을 성취하는 대두목
상제님께서는 어천 당시 상제님 대업을 이룰 ‘두 사람’이 나와서 당신의 천지 대업을 마무리 짓는다고 말씀하셨다(도전道典 10:27). 이 ‘두 사람’은상제님과 태모님을 계승하여 그 뜻을 도운道運의 인사人事로 펼칠, 진리의 눈을 상징하는 일월日月의 지도자, 즉 태극太極과 황극皇極의 지도자를 말한다.
상제님은 가을 천지 대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고 후천 선경을 건설한 인사의 지도자를 ‘대두목大頭目’이라고도 하셨는데, ‘대두목’은 큰 대大, 머리 두頭, 눈 목目 자로, 글자 그대로 가장 큰 지혜와 안목眼目을 가진 상제님 진리의 우두머리이며 상제님 대도 진리를 세상에 밝히는 최고 지도자(The Supreme Leader)를 말한다.
이 대두목이 맡은 역할과 사명은 이러하다. 첫째,상제님과 수부님의 인사 대권자로서 두 분을 대행하여 당신의 뜻과 이상을 펼치고 집행한다. 둘째, 상제님 진리를 밝혀 진법을 드러내고 천지대업을 이루는일꾼을 길러낸다. 셋째, 인류를 구원할 의통을 준비하고 가을 대개벽 상황에서의통성업醫統聖業을 집행한다. 넷째, 후천 선경의 주역들에게 도통을 내려주는,종통 도맥의 주인공이다.
건곤 천지이신 증산 상제님과 고 수부님께서는 감리坎離 일월日月의 역할을 하는 음양일체의 두 인물이 나와서 태극과 황극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천지공사를 집행하셨다.
1) 십일성도하는 1태극 대두목우리는 앞서 『증산도의 진리』 제4장(천지개벽과 역수의 변화)에서 10무극과 1 태극이 결합하여 우주 창조의 이상과 세계 역사를 완성하는십일성도十一成道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사의 주재자인1태극 대두목은 상제님과 수부님이 짜 놓으신 설계도(도수)에 따라 현실 역사 속에 후천 선경을 건설할 바탕을 마련하셨다. 그리고7화火의 황극 대두목이 상제님 무극대도의 이상을 실현하게 된다. 이것이 십일성도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2) 후천 통일을 성취하는 5(五,午)황극 대두목우주 생명이 생장 분열하는 선천의 전체 과정을 매개하여현실 속에 무극과 태극의 이상을 온전히 드러내는 주체가 바로 황극皇極이다. 황극 지도자는 10무극 상제님과 1태극 대두목의 이상을 역사 속에 실현하게 해서 후천 5만 년 광명의 선경 세상을 여는 주인공이다.
이 인물을 1태극 대두목이 길러 내고 지켜 주게 되는데, 그 이치는 황극[火]이 태극[水]을 근본으로 하여 나와서(水生火) 태극의 대업을 인사로 성취하기 때문이다. 선천과 후천의 세상 중심에는 황극이 작용하고, 황극으로 작용하는 지지地支는7오화午火이며 말[馬]로 상징이 된다. 예로부터 동방 배달의 신교神敎에서는 북두칠성을 하느님이 타는 하늘의 수레(제거帝車)라 불렀다. 말(午)이 수레를 끌고 가는 것과 같이 7오화午火(七火, 七星) 기운을 지니고 오는 진리 주인공이 상제님 대도 문명을 여는 조화 광명의 수레를 이끌고 간다. 이로써 세계가 구원받고 온 세상이 상제님의 한마음(일심一心)으로 통일되어 인류는 후천 선경 낙원의 조화 문명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천지공사天地公事는 천⋅지⋅인 삼계를 주재하시는 삼신상제님께서 후천 조화선경이라는 대이상향을 지상에 펼치시기 위해 직접 인간의 몸으로 행한 천지정사天地政事이다. 즉 대우주 통치자이신 증산 상제님께서 원과 한으로 점철된 선천 역사를 해원解寃의 도로써 종결짓고, 후천 5만 년 상생의 조화낙원을 여신 우주 정치宇宙政治이다. 이는 세운世運 공사와 도운道運 공사로 나뉘는데,도운 공사는 증산 상제님의 도가 인간 역사에 뿌리내려 도성덕립道成德立하는 개척 과정에 관한 공사이다.
도운 공사도 세운 공사와 마찬가지로 세 번 크게 굽이치면서 변화해 간다. 즉 상제님의 종통 계승자이신 고 수부님께서 무극대도의 씨를 뿌리시고(낙종落種), 차경석 성도가 옮겨 심은 뒤에(이종移種), 상제님과 수부님의 종통을 계승한 인사의 대권자가 모든 것을 거두어들이고 마무리를 짓는다(추수秋收). 낙종과 이종은 제1변 도운에서 그리고 추수는 제2변 도운과 제3변 도운을 거쳐 실현된다. 지금 우리는제3변 도운의 막바지에 서 있다.
제1절 상제님의 종통 도맥과 도운의 개시 - 수부首婦님의 종통 대권 계승
1. 상제님 무극대도의 종통 도맥
종통이란 무엇인가?모든 생명 세계에는 창조와 변화의 근본 맥이 있다. 흐르는 물에는 수맥이, 산에는 산맥이, 우리 몸에는 혈맥과 기맥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의 세계에도 깨달음의 맥이 역사 속에 개척되어 뻗어 간다. 증산 상제님 개벽의 도에는 상제님이 천지공사로 천지 신명들에게 선언하신도통 맥道統脈과 그것이 인간 세상에 뿌리내려 가는 개척사의종통 맥宗統脈이 있다. 상제님 신앙에서 가장 중차대한 문제는 상제님 종통 전수의 핵심인 도통의 뿌리와 이로부터 뻗어 나가는 도통 맥을 바로 보는 것이다.
진리 전수의 역사는 정통正統과 윤통閏統의 대결이다. 정통은 그 정신과 창조력의 맥이 도조道祖로부터 인정되어 내려오는 데 반해 윤통은 근본을 잊고 곁다리로 흘러 내려오는 분파된 맥이다.종통 도맥은 상제님으로부터 뻗어 내리는 도의 정통 맥으로 상제님의 심법과 도권 계승을 의미한다.
천지일월 사체로 이루어진 종통 맥상제님 도의 종통 맥은 만물을 생성⋅존재하게 하고, 변화의 질서를 낳는 근본 틀인천지일월天地日月 사체四體로 구성되어 있다. 이 천지일월을 역易의 음양 원리로 상징하면건곤감리乾坤坎離로 표현한다. 건곤, 하늘과 땅이 만물을 생성하는 바탕[체體]이라면, 감리, 해와 달은 천지를 대신하여 만물을 낳고 기르는 실질적인 작용의 손길[용用]이다. 천지가 만유 생명의 근원이자 생성의 바탕이지만, 일월이 없으면 결코 만물을 낳아 기를 수 없는 것이다. 상제님과 수부님이아버지 하느님과 어머니 하느님으로 함께 오셔서 천지 조화의 본체로 무극대도를 열어 주시고, 일월의 섭리로 오는 #인사의 지도자도 두 사람#이 짝이 되어 도를 펼치고 뿌리내린다.
천지 뭇 생명의 어머니 수부님에게 종통을 전수하심인간으로 강세하신 증산 상제님께서는 어천하시기 2년 전인 1907년 정미년 동짓달, 태모太母 고 수부高首婦님을 맞이하여수부 책봉 예식을 봉행하시고, 친히천지 대업의 종통을 전수하심으로써 어천 후 당신님의 도업이정음정양正陰正陽의 이치로 역사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셨다. 이후 수부님께서는 상제님을 대행하여 최초로 교단을 개창하시고 도운의 세 살림을 집행하셨다. 상제님께서 도운의 종통 연원宗統淵源을 수부님에게 전수하신 이유는 후천 곤도坤道 우주의 창조 원리에 따라 태모님이 천지 어머니로서 10년 천지공사를 집행하시어 도운사의 첫 장을 열어 나가게 하신 것이다.
종통 도맥을 셋 도수로 집행하심우주 창조의 조화 원리인 무극無極⋅태극太極⋅황극皇極은 우주 변화 질서의 근본 틀인 천지일월의 구성 원리로 운용된다. 만유 생명의 근원인 하늘과 땅,건곤乾坤 천지天地는 일체로 도의 체體인 무극이 된다. 그리고 감리坎離 정신에 따라 생겨난 해와 달, 즉일월日月이 도의 용用으로 태극(水)과 황극(火)이 된다. 천지의 뜻을 일월이 실현하듯이 무극에서 비롯된 우주 운동은 태극과 황극을 거쳐 완성된다.
상제님과 수부님은 만유 생명의 근원인 무극제無極帝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무극제이신 상제님과 수부님의 도업을 계승하여 광명 문화를 여는 일월의 두 지도자가 태극과 황극의 이법에 따라 천지의 이상을 실현하고 마침내 도성덕립을 이루어 낸다. 이처럼 천지일월 사체四體가 인간 역사에 무극⋅태극⋅황극의 도맥으로 현실 속에 드러나는 것을 상제님은 ‘셋 도수’로 말씀하셨다.
즉 ‘셋 도수’란 도성덕립을 위해무극⋅태극⋅황극(삼극)이 인사로 실현되어 상제님 도의 체體(도통 맥)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2. 도운의 준비 과정과 도운사의 전체 틀
상제님 어천, 태을주 수행과 포교기유(1909)년에 상제님께서 홀연히 천상으로 떠나시자, 성도들은 부모를 여읜 듯 실의와 절망감으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새 세상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부푼 꿈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수년 동안 상제님을 수종 들며 겪은 온갖 사연이 아련한 기억 속에서 허망하게 맴돌 뿐, 성도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그러던 중 ‘상제님께서 곧 미륵불’이라는 말씀을 기억한 차경석車京石 성도가김형렬金亨烈성도를 찾아가 의논한 후 여러 성도들이 제물을 준비해 함께 금산사로 가서 치성을 올렸다. 이때 김형렬 성도가 신안이 열려 완연한 미륵불 모습으로 들어오시는 상제님을 친견하였다. 상제님께서 마음을 굳건히 잡아 주시고 다시 만날 언약을 해 주신 것이다(도전道典 10:84).
하지만 이후로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성도들은 같은 스승을 찾으러 사방으로 돌아다녔다.김경학金京學성도도 여기저기 방황하다 1910년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모친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슬퍼하다가 문득 ‘태을주로 사람을 많이 살리리라.’ 하신 상제님 말씀이 떠올라 상제님께 청수를 모시고 기도를 올린 다음 지성으로태을주太乙呪를 읽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천지 조화 성령을 체험한 김경학 성도는 이때부터 태을주를 읽어 병자들을 낫게 해 주었으며, 인근 놋점리에 사는 류의경柳義卿이 장질부사(장티푸스)로 사경에 이르자 태을주로 치료해 주고 상제님 신앙으로 인도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경학 성도의태을주 포교로 도가 크게 열려 나가기 시작했다(도전道典 10:89~90).
도운 전개의 전체 틀을 정하신 대나무 공사그러면 상제님 어천 이후 도운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을까? 수천 년 내려온 선천의 종교 판과 달리 ‘판밖 진리’인 상제님 대도는 후천 개벽을 앞두고 짧은 기간에 역사 속에 뿌리내려 저변을 확대해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다. 그래서 상제님은 이 역사적 과제가 실현될 수 있도록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른 대나무의 기운을 도운 공사에 취해 쓰셨다. 상제님 도판의 운세가 벌어져 나갈 형세를 #대나무 열한 마디 공사#로서 천지에 질정質定해 두셨다(도전道典 6:106).
대나무 열한 마디는 상제님 대도의 운로가 후천을 상징하는 10무극十無極수로 시작될 것을 의미한다. 즉 열 마디는 상제님을 추종하는초기 교단의 분열 수를 뜻하고, 그 열 마디 가운데 끝의 한 마디는 모든 교단의 ‘두목頭目’으로서 상제님께 친히 도통을 받으신 수부님을 상징한다. 이 열 마디와 별도로 ‘상제님 무릎 밑에 넣으신 한 마디’는 후에 판안의 난법 도운을 통일하여 진법 도운을 열 진리의 큰 스승이신 ‘대두목大頭目(1태극)’을 상징한다. 이 한 마디를 따로 분리하신 이유는, 대두목이 역사하는 시간대가 나머지 열 마디의 주인공들과 시간적으로 단절되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이다.
3. 상제님의 종통 계승자, 태모 고 수부님
인간과 신명의 어머니, 수부님상제님 도의 계승자인태모 고 수부님! 수부首婦는 문자적으로 ‘천지 뭇 생명의 머리[首]가 되는 여성[婦]을 뜻하는 말로 ‘어머니 하느님’을 의미한다. 우주 주재자의 공식 호칭인 ‘상제上帝’와 음양 짝을 이루는 호칭이다. 수부님은 선천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질서를 허물어 후천의음존陰尊 시대를 여는 구원의 선봉장이시다. 특히, 상제님의 종통 맥을 계승하여 인류를 후천 가을 우주의 열매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고 수부님을 우리는 ’생명의 큰[太] 어머니[母]로 모신다.
상제님에게는 두 분의 수부님이 더 계신다. 맨 먼저 부모님이 맺어 주신정 수부님(1874~1928, 하동 정씨 문중으로 성휘聖諱 치治 자, 순順 자)을 아내로 맞아하셨고, 다시 김형렬 성도의 셋째 딸인김 수부님(1890~1911, 성휘 말末 자, 순順 자)을 맞이하셨다. 하지만 두 분 모두 수부 사명을 받지 못하셨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에서 확정하신 정식 수부님은 ‘나의 수부, 너희들의 어머니(도전道典 6:96:5)’라 선언하신 고 수부님 오직 한 분이다.
수부 책봉과 천지 종통 대권 전수태모 고 수부님의 존성尊姓은 고高씨이고, 본관은 장택長澤이며, 성휘는 판判 자, 례禮 자이시다. 경진庚辰(1880)년 음력 3월 26일 축시丑時 전라도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 무이동면無伊洞面 도리道理(지금의 성도리成道里)에서 탄강하셨다. 신미辛未생이신 상제님과 아홉 살 차이가 나신다.
여섯 살 되시던 해에 성부님께서 돌아가시자, 수부님은 성모님을 따라 외외가外外家 송씨 집안의 승문僧門에서 생활하셨고, 아홉 살 되시던 해 이모부 차치구(차경석 성도의 부친)의 대흥리 집으로 이사하셨다. 이때부터 동학을 신앙하며 시천주주侍天主呪 수련을 하였고, 열다섯 살 되시던 해에 이모의 권유로 같은 동네 동학 신도 신씨申氏에게 출가하셨으나, 13년만인 1907년에 사별하셨다.
이 시기에 상제님께서 차경석 성도에게 ‘수부를 택정하라.’는 명을 내리자 차경석 성도는 이종 누님인 고 수부님을 천거하였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바로 다음 달수부 책봉 예식을 집행하셨다. 이때 상제님께서는 “이로부터 천지 대업을 네게 맡기리라.”라고 하시며 고 수부님에게천하사의 종통 대권을 전수하셨다. 이후 차경석 성도의 집에 처소를 정하여 수부님을 머물게 하시고, 그 처소를 ‘수부소首婦所’라 부르게 하셨다. 이번 가을 대개벽기에 고 수부님을 상제님 대도의 종통 대권자로 모시는 일은 인류가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절대 관문이다.
태모님은상제님 진법 도맥의 계승자요, 종통의 전수자이시다. 그러나 당시는 여성을 단지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여기던 터라 종도들은 물론이고, 직접 공사에 참여한 성도들조차 이런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기유(1909)년에 상제님께서 어천하시자, 여러 성도들은 수부님께 그 사실을 차마 알리지 못했다. 하지만 수부님께서는 주문을 읽으시던 중에 광명 속에서 상제님 모습을 뵙고 어천 사실을 아셨으며, 홀로 상제님 성체가 모셔진 구릿골로 찾아가 사별死別하는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상제님은 옥황상제이시고 당신은 상제님의 천지 대업을 물려받은 수부임을 깊이 자각하셨다(도전道典 11편 11~15장).
태모 고 수부님의 대도통신해(1911)년 4월 수부님은 상제님의 성령聖靈과 혼례식을 올리시고, 상제님께서 도통문을 여신 대원사 칠성각에서49일 진법주 수련을 하셨다. 그 뒤에 다시 운산리 신경수 성도의 집 윗방에서100일 동안 수도를 하셨고, 이후 활연대각豁然大覺하시어 삼계三界의 이치를 두루 통하셨다.
그해 9월 중순에 수부님은 차경석 성도에게상제님 성탄치성聖誕致誠을 올릴 것을 명하셨고, 19일 새벽에 상제님 어천 후 처음으로 성탄치성을 봉행하셨다. 성탄치성을 봉행한 다음 날인 9월 20일 아침에 수부님께서는 마당을 거니시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는데, 혼절해 계시던 중 정신이 황홀한 가운데 높이 괴어 있는 오색 과실이 땅 가까이 내려와서 갑자기 허물어져 쏟아지는 순간에 놀라 깨어나셨다. 이날 수부님께서는 상제님의 성령으로수부의 신권神權과 도권道權을 온전히 내려 받으셨다. 이로부터 대권능을 자유자재로 쓰시고 신이한 기적과 명철한 지혜를 나타내시며, 천하 창생의 태모太母로서 상제님 대도 생명의 길을 여셨다(도전道典 11:19).
도문道門의 개창이날 태모님은 혼절하셨다가 깨어나 장차 상제님 종통 도맥이 전개되는 과정을낙종落種, 이종移種, 추수秋收의 이치로 밝혀 주셨다. 즉 수부님 당신께서 도운의 첫 씨를 뿌리시고(낙종), 차경석 성도가 그 씨앗을 옮겨 심어 도세를 키우고(이종), 나중에 다시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 도운을 추수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천지의 인간 농사를 짓는 상제님의 도업이 세 차례의 변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도록 공사를 보신 것이다.
상제님 도의 종통 대권의 전수 과정을 천지에 선포하신 이 공사는 수부님이 대도통을 이루시고 수부로서 신권을 쓰신 첫날에 행하신 첫 공사로 도운의 가장 중차대한 문제를 처결하신 것이다. 이는 사명을 받는 주인공이 태어난 달에 맞추어 낙종⋅이종⋅추수라는 도운의 개척 사명을 부여하셨음을 뜻한다.
이후 태모님은 구릿골 약방에 가서 약장과 궤櫃와 기타 약방 기구 일체와 벽에 붙인 글과 벽에 바른 종이까지 모조리 떼고 방바닥의 먼지까지 쓸어서 가져오라고 명하셨다. 이때 병환 중이셨던 김 수부님께서 선화하셨고, 송찬오 주막에 계시던 태모님께서는 태모님을 찾아뵈러 온 김형렬 성도를 위로하셨다. 이후 태모님은 사인교를 타고, 약장과 모든 물건을 짐꾼에게 지워 앞세우고 원평을 떠나 대흥리로 돌아오셨다. 상제님의 종통을 계승하신 태모 고 수부님은 이로써 도운의 첫 씨를 뿌릴 준비를 모두 마치시고 정읍 대흥리에서 첫 교단을 여시게 되었다.
증산도의 진리 8장 | 도운공사道運公事 (1)-2에서 계속..
생존의 비밀, 한민족과 증산도, 천지성공 책을 읽어보고 싶으신 분들께 생존의 비밀 책자를 무료로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