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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적 시점에서 한국전쟁의 전모를 낱낱이 밝힌

『한국전쟁 전사全史』

 

이해영 객원기자 / 증산도 서울관악도장


*계사癸巳(道紀 83, 1953)년 양력 7월 27일에 이르러 휴전협정이 조인되니 남북 상씨름의 시작인 6.25 전쟁이 긴 휴게기休憩期에 들어가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10:146:1)

*상씨름 종결 대전쟁 공사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장차 난리가 난다. 우리나라에서 난리가 나간다.” 하시고 문득 크게 호통치시기를 “불칼로 쳐도 안 들을거나!” 하시니라.
이어 말씀하시기를 “대란지하大亂之下에 대병大病이 오느니라. 아동방我東方 삼일 전쟁은 있어도 동적강銅赤江은 못 넘으리라. 서울은 사문방死門方이요, 충청도는 생문방生門方이요, 전라도는 둔문방遁門方이니 태전으로 내려서야 살리라. ○○은 불바다요 무인지경無人之境이 되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무명 악질이 돌면 미국은 가지 말라고 해도 돌아가느니라. 이마두가 선경을 건설하기 위해 도통신과 문명신을 거느리고 화물표를 따라 동방 조선으로 들어오리니 신이 떠난 미국 땅은 물방죽이 되리라.” 하시고 “일본은 불로 치리니 종자도 못 찾는다.” 하시니라. (도전道典 5:406)




온전히 과거가 되지 않은 전쟁, 6.25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40분, 북한군의 일제 공격으로 시작된 6.25 전쟁(한국전쟁韓國戰爭). 이 전쟁은 미국이, 뒤이어 중공과 소련이 잇달아 참전하며 주변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준準세계전쟁’, ‘동북아시아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2막은 남한이 북한의 선제공격을 역이용해 미군과 함께 북진 무력 통일을 도모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행동하는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지한파知韓派로도 유명한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가 2002년 출간한 저서 『한국전쟁 전사全史』에서 펼친 핵심 주장이다.

한국전쟁을 다룬 ‘가장 포괄적이고 균형 잡힌 책’으로 평가받는 이 중요한 저작은 출간 20여 년 만에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의 참전국이 많은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당사자인 한국어, 영국과 미국의 영어, 그리고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자료까지 해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의 수준은 일상 회화 수준이 아니라, 학술 언어로 이해하는 수준을 의미한다. 여기에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관통했을 때 얻어지는 언어력을 고루 갖추어야 했다.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수많은 자료와 한국전쟁과 관련해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료와 연구를 직접 읽고 해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적합한 드문 연구자가 와다 교수이다. 그는 상호 교차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사실의 확인과 발굴, 나아가 전쟁에 관여한 국가와 개인들에 대한 고른 관심을 연구에 반영하여 ‘전사全史’를 서술하였다.

저자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을 되돌아보고 성찰하자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전쟁은 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각국은 무엇을 위해 전쟁을 했는가. 전쟁은 국제 질서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과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 가면서, 전쟁의 자초지종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은 왜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남침을 계획했을까? 미국은 북한의 침략 계획을 몰랐을까? 미국이 원했던 것은 한반도 통일이었나, 현상 유지였나? 남북한, 미국, 소련, 중국, 일본, 타이완은 한국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중국은 이 전쟁을 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 주장했을까? 이 책은 이런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해서 찾아 가는 과정이다.

아마 독자들은 저자가 밝혀내는 전쟁의 모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근원적으로는 지난 한국전쟁과 불원간 한반도를 중심으로 닥칠 대전쟁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찾아보게 될 것이다. 인류 역사의 전쟁은 어떻게 끝나게 되고 그 너머 찾아올 진정한 평화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게 되리라.

지은이


와다 하루키和田春樹1938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다. 1998년까지 도쿄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와 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도쿄 대학교 명예교수, 도호쿠 대학교 동북아시아연구센터 방문 교수다. 소련⋅러시아사 및 남북한 현대사 등 동북아 국제관계사가 주요 연구 분야다. 학자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베트남전 반대 운동, 한국 민주화 운동과의 연대 등을 주도해 일본을 대표하는 행동하는 진보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2010년 제4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받았고, 2012년에 DMZ 평화상, 2019년에 만해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일조교섭 30년사(日朝交渉30年史)』, 『김일성과 만주 항일전쟁』, 『한국전쟁』, 『북조선: 유격대 국가에서 정규군 국가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한일 100년사』, 『동북아시아 영토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북한 현대사』,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위안부 합의 이후 한일관계』, 『한국병합 110년 만의 진실』 등 다수가 있다.

그는 미국 국무부와 첩보 기관의 기밀문서, 암호전보, 러시아(구舊소련)와 중국의 전쟁 관련 자료, 미국이 노획한 북한 자료 등 지금까지 공개된 수많은 자료를 총망라하여 한국전쟁의 전 과정을 이 책에서 극적으로 그려 냈다. 이 책은 저자 스스로 “내가 한국전쟁을 주제로 내는 마지막 책이 될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그의 각고의 노력이 오롯이 담긴 한국전쟁 연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한 사람


남상구 일본 지바 대학교에서 일본 현대사를 전공했다. 박사 논문은 〈전후 일본의 전쟁 희생자 기억 : 국가에 의한 전몰자 추도⋅현창⋅‘보상’〉이다. 일본에서 침략 전쟁의 기억이 어떻게 생산⋅유통⋅소비되는지를 분석했다. 2007년 1월부터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일 역사 문제를 담당하고 있으며, 특히 야스쿠니 신사 문제,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유골 문제, 일본 교과서 문제에 관심을 두고 연구 중이다. 저서로는 『식민 청산과 야스쿠니』, 『20개 주제로 본 한일 역사 쟁점』, 『일본 정치의 구조 변동과 보수화』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일본군‘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한국병합 110년 만의 진실』 등이 있다.

조윤수 일본 도호쿠 대학교에서 한일 관계를 전공했다. 박사 논문은 〈한일 어업교섭의 국제정치 : 해양 질서의 탈식민지화와 ‘국익’의 조정〉이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어업 협상 사례를 청구권 협상과 비교하여 분석했다. 2009년 12월부터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역사 현안을 담당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외교, 한일 외교 문제에 관심을 두고 연구 중이다. 저서로는 『한일 협정과 한일관계』, 『한일관계의 궤적과 역사 인식』, 『일본군‘위안부’』, 『한일공문서를 통해 본 독도』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일본의 역사 인식』 등이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전쟁


이 책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 전역을 자국의 영토라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자국 영토 일부에 자리 잡은 외국의 괴뢰로 치부하는 대항적인 두 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것으로 전개가 된다. 이후 1949년의 위기 상황과 북한 김일성의 일제 공격 방안이 정해진 상황, 그리고 전쟁 위기설이 공공연히 나돌 때 군 수뇌부 이동을 여러 번 단행하는 개전 전 한국군의 기묘한 행동 등을 서술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오전 4시 40분 북한군은 북위 38도 선상의 모든 지점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이후,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 인민군을 저지하였고,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수복, 평양 진격, 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후퇴를 흥미진진하게 적고 있다.

이듬해인 1951년 7월 10일 정전회담이 시작됐고(정전회담을 진행하면서도 전쟁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 후 2년을 더 끌다가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총사령관 미 육군 대장 클라크Mark. W. Clark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彭德懷, 조선인민군 사령관 김일성金日成이 정전협정停戰協定을 체결했다.

당시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이 곧 분단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였고, 이런 집요한 자기주장은 미국이 앞으로 한국에 대한 안전보장을 약속하게 하는 데 완전히 성공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외국 군대의 군대 철수,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과 같은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정치 회담은 정전 후 3개월 이내에 개최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으나, 정작 성사된 것은 아홉 달이 지난 1954년 4월 26일의 제네바 회담(Geneva Conference)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어떠한 합의도 하지 못한 채 6월 15일 결렬됐다. 결국 정전협정 후 마땅히 도래해야 할 평화조약 또는 평화협정은 맺어지지 않았다. 한국군과 미군이 북한군과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태가 70여 년이나 이어지고 있다. 눈앞의 전쟁은 끝났으나 평화는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이 책은 한국전쟁의 전모를 진보와 보수의 논리가 아니라, 오로지 1차 사료에 근거하여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이자 미국 우드로 윌슨 국제학술센터 연구책임자인 캐스린 웨더스비Kathryn Weathersby는 이 책을 “지금까지 출판된 한국전쟁사 서적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며 균형 잡힌 책”이라고 호평했다. 이 책은 712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연구서지만, 한국전쟁을 입체적으로 보여 주어 마치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한국전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 이후


전쟁이 남긴 것은 파괴와 엄청난 죽음이었다. 분단은 굳어져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남북 사회의 이질화는 한층 더 심해졌다. 국토의 분단은 가족들을 생이별하게 했다. 1천만이 넘게 이산가족이라는 비극이 발생했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통일을 위한 전쟁이 실패한 결과로 평화적 통일은 한없이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멈춘 지도 어느덧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남북한은 국가로서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고 있으며, 부전不戰 약속도 숱하게 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리고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2018년 미국과 북한 사이에 평화가 보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 양국과 양 국민 사이에 통일이 평화적으로 실현되리라는 굳건한 믿음은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평화보다는 전쟁 쪽으로 무게가 더 기울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전쟁을 재고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남북한 국민이 3년간의 전쟁을 과거의 일로 흘려보내고 평화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려면, 쌍방 모두 무력으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에 발을 담갔다는 공통 인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의 실체에 대해서 똑바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우리 모두 전쟁을 함께 반성하고 서로에게 사죄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 전쟁에 대한 공통 인식이 없는 한, 그리고 더 나아가 반성과 사죄의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한, 우리 대한민족은 공존과 평화를 향해 도약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공통된 인식의 형성은 독립된 국토 위에 두 나라가 건설된 후 무력으로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기도가 북에서 먼저 시작됐고 뒤이어 남에 파급됐으나, 모두 실패하면서 대립과 분단이 굳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전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썼고 한국어판 출판을 염원했으며, 그 바람이 이루어져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감사하다는 소회를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저자에게 한국전쟁은 그의 의식 세계에서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사건이었다고 한다. 이후 30대에 이른 저자가 베트남 반전 운동을 통해 한국전쟁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고, 일본에 의한 아시아 침략 전쟁을 극복하는 과제와 일본이 지원한 한국전쟁*을 극복하는 과제가 ‘이중의 전후 극복’이라는 과제로 합쳐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침략전쟁의 극복을 위한 미청산未淸算의 식민지 문제라는 과제, 그리고 한국전쟁의 극복을 위해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화시키는 과제가 그의 평생 과업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이 지원한 한국전쟁 - 이 책 제3장 북한군의 공격에서 일본이 한국전쟁의 기지가 되어 실질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음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미 『러일전쟁』이라는 대작을 쓴 바 있다. 『러일전쟁』을 번역한 이웅현 박사는 『러일전쟁』과 이 책 『한국전쟁 전사』는 와다 하루키가 쌓아 올린 두 개의 성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전사全史』 추천서를 쓴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남기정 교수는 “그 성채를 오르는 것으로 한국전쟁의 극복 가능성을 확인하게 될 것이며, 성채 위에서 펼쳐진 한국전쟁이 ‘전경全景’ 속에서 좁게 난 평화로의 길을 찾아내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동아시아 30년 전쟁


이 책은 한국전쟁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폭넓은 시야에서 당시의 시간과 공간을 크게 확장해서 사안을 좀 더 거시적으로 보게 해 준다. 바로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관점에서 본 한국전쟁이다. 즉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여러 전쟁의 중핵中核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청국과 일본에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 이후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이후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 동아시아에서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 왔다. 갑오 동학혁명 이후 일본의 전쟁은 5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는 전 세계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전쟁사를 장식한 마지막 페이지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구축을 내건 태평양전쟁이었다. 그것은 오키나와의 옥쇄, 미군의 공습으로 (일본) 본토가 초토화되고,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할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전쟁도 마침내 끝이 났다. 우리 조선은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평화가 찾아왔음을 뜻하지는 않았다. 유럽과 달리 곧이어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일본을 빼고, 동아시아 전역에서 내전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만주 전역부터 중국 본토에 걸쳐 벌어진 국민당군과 중국 공산당군 간의 전쟁을 시작으로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 공산주의자(베트콩)가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군대와 함께 돌아온 프랑스 식민지주의자 군대와 전쟁을 벌였다.

아시아에서 벌어진 새로운 전쟁이 중국 공산당군의 승리로 끝나자, 소련은 국민당 정부에 대해 지지를 철회하고 중국 공산당(중공)과 연대했다. 그 결과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일본의 강제 점령에서 해방됐음에도 미⋅소에 의해 분할 점령된 한반도에서는 통일 독립 국가 건설을 요구하면서 공산주의적 민족주의 측과 비공산주의적⋅반공주의적 민족주의 측이 투쟁한 끝에, 각기 소련과 미국의 비호 아래 서로 대립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은 두 나라 모두에서 무력 통일이라는 지향점을 만들어 냈다. 이 지향점은 미⋅소 대립의 출현과 결합하면서 소련의 지지와 원조를 등에 업은 북한의 공격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병참 기지, 출격 기지로 삼아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했다. 동시에 미국은 중국 내전에도 간섭하며 타이완 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해 타이완으로 도망친 국민당 정권 방위에 나섰다. 북한군은 한때 미군과 한국군을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미군이 태세를 재건하며 북한군을 압도했다. 마치 씨름에서 샅바 싸움을 하면서 서로 공격을 주고받는 것과 같았다. 한국군이 미군과 함께 북한을 공격해 공산 정권을 쓰러뜨리려 할 때, (소련의 사주를 받은) 중공이 북한 편에서 참전해 미군과 한국군을 격퇴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은 한반도 안의 특수한 내전에서 미⋅중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동시에 소련 공군이 중공군으로 위장해 참전하며 한반도 상공에서 벌어진 전쟁은 사실상 미⋅소 전쟁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간의 내전이라기보다는 미국과 소련, 중공 그리고 여러 세계 국가가 참여한 제3차 대전의 성격이 강하다. 1951년 봄부터 개전 이전의 경계선을 둘러싸고 일진일퇴를 되풀이하다가 그해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고 2년 뒤 체결되었다. 그리고 이 정전협정은 7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평화조약으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의 성격은 한마디로 동북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동북아시아 전쟁이다. 중국의 공산화 혁명과 이 전쟁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가 확립됐다. 남북한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미국, 중국, 소련의 관계 더 나아가 일본과 타이완의 관계가 확정됐다. 또 이 전쟁으로 미⋅소 대립은 결정적인 단계로 진입하여 초강대국의 군사 대치라는 냉전冷戰(Cold War) 체제가 본격화됐다. 인도차이나전쟁은 한국전쟁과 함께 정전을 맞이했지만, 프랑스가 아닌 미국이 개입하면서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의 최종 국면에서 1970년 초 미⋅중 화해가 실현되면서 1975년 을묘년에 베트남전쟁이 끝났다. 동아시아 30년 전쟁이 일단락된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말 미⋅소 냉전도 막을 내렸다. 1991년 소련의 역사가 종말을 맞이함과 동시에 러시아가 사회주의에서 탈피하면서 북한의 고립과 긴장은 심화됐다. 그 사이 북⋅미 관계는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였다. 실제로 1994년에는 북핵 위기 문제로 한반도에서 제2차 한국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들이 나왔고 현재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우리는 한국전쟁이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사가 아님을 새삼 깨달아야 한다.


마무리하면서


잘 아는 듯하지만, 어쩌면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한국전쟁이다. 우리 한반도를 중심으로 세계 주요 강대국이 모두 집결해 있는 지정학적 중요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100년간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세계사 전개의 흐름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추론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지난 70년이라는 시간의 벽은 현 상황이 원래 그런 것처럼 여기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절실히 깨닫게 해 준다. 아울러 한국전쟁은 비단 우리 민족만이 겪은 비극적인 내전이 아니라,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전개된 사건의 일환이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시작은 비록 거대한 비극으로 나타났지만, 결과적으로는 화평의 길로 나아가 공존과 상생으로 그 결론이 매듭지어질 것임을 천지공사를 집행하신 증산 상제님과 태모 고 수부님의 말씀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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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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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3~6일까지 3박 4일 동안 일본 큐슈 역사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짧은 답사였지만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답사에서 본 많은 것들 중에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 4국이 일본 열도에 한국문화를 전수한 과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유물과 유적지를 소개합니다. (글: 박덕규)

 

밝은 땅, 하카타

 

 

후쿠오카의 본래 이름은 하카타입니다. 하카타는 한자로 박다馎多라고 쓰는데요. 박다는 우리말 밝은 땅을 뜻하는 '박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후쿠오카(福岡)라는 지명은 에도 시대(1603~1868)부터 사용한 것으로, 그 전까지 하카타였다. 1601년 지금의 미야자키 현 후쿠오카 한(옛 지명)의 첫 영주였던 구로다 나가마사가 하카타로 옮겨와서 후쿠오카 성을 쌓으면서 후쿠오카라는 지명이 큐슈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후쿠오카 시청 홈페이지 참조)

 

박달의 유래는 5,600여년 전 환웅천왕께서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동방으로 이주해서 태백산 아래 세운 나라 이름 '밝달'에서 온건데요. 한자로 쓸 때는 배달培達로도 씁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예가 있습니다. 『일본서기』에서 고구려를 박국狛國(밝국)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카타는 우리 밝달 사람들이 일본 열도에 정착해서 살았던 땅이고 우리 지명 '박달'을 쓴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오사카 옆의 나라(奈良, なら)인데요. 우리말 '나라(國)'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태일신과 칠성신을 모시는 묘견궁    

답사팀이 처음 간 곳은 묘견궁입니다. 구마모토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야쓰시로(八代)시가 나오는데 이곳에 묘견궁이 있습니다. 이 묘견궁은 가야와 관련 있는 신사입니다.

 

 

묘견궁 안에는 묘견의 유래를 알려주는 비석이 있는데, "묘견신은 성스러운 북극성·북두칠성의 상징이다"라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한마디로, 묘견은 북극성 또는 북두칠성을 뜻하는 신을 말하는데요. 

 

 

이렇게 북극성(太一), 칠성을 모시는 문화를 일본열도에 가져온 사람을 '묘견공주'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묘견공주가  거북이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고 전해지는 설화입니다. 

거북이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바로 김해의 구지봉입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가야의 시조 김수로가 하늘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왔고 9간(干)이 받들어서 수로왕과 다섯 형제들이 각각 6가야를 세웠다고 합니다.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구龜는 거북이를 뜻하는데요. 김수로왕의 구지봉과 거북이를 타고 온 묘견공주는 뭔가 연관이 되어 보이죠?

 

야쓰시로 묘켄 마츠리

 

그래서, 묘견공주를 가야 김수로왕의 딸로 보기도 하고, 2대 거등왕의 아들과 함께 떠났다는 신녀(神女)로 보기도 합니다. 

 

[“거등왕 기묘년, 서기 199년에 왕자 선(仙)이 더럽혀진 세상에서 쇠하고 약해진 모습을 보고, 신녀(神女)와 구름을 타고 떠나갔다. 거등왕이 도강 석도암에 올라가 왕자 선을 부르고 그림자라도 새기려 하였다. 그러므로 세속에서는 왕이 선을 부르는 대라서 초선대라고 전해 온다.(居登王己卯王子諱仙見塵世衰葬與神女乘雲離去王欲登都江石島巖招仙銘影故俗傳王招仙臺)” (편년가락국기編年駕洛國記)]

 

 

김수로에게 가야를 세우라고 명한 이는 누구인가?

가락국기에서 중요한 것은 김수로의 말인데요 '황천(皇天)의 명으로 구지봉에 내려와 가야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황천은 높고 크고 밝은 하늘, 하느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황천이 어디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는 해답이 묘견궁에 남아있는데, 묘견궁 비석에서 황천은 바로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본 열도에 처음으로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모시는 하느님 문화가 전해진 곳이 묘견궁이 위치한 야쓰시로입니다.

 

가야 묘견공주(좌)와 신라 선도산 성모(우)

 

왜 묘견공주인가?

고대에는 남성보다 여성의 생명 출산과 신성함을 추앙하는 여신 문화 시대였습니다.

신라 시조 혁거세왕의 어머니 '선도산 성모'나, 가야 수로왕의 어머니 '정견모주'를 모시는 문화처럼, 묘견의 신녀로서 여신을 공주로 높인 것입니다. 

 

2세기 후반 이후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 형성에 기초를 다진 야마대국의 통치자는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무녀(巫女)인 여왕이었다고 합니다. 묘견공주를 떠오르게 하는데요. 일본에서 시조신으로 섬기고 있는 아마데라스 오미카미도 여성입니다. 

 

나뭇가지는 무엇인가?

흥미로운건 묘견공주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입니다. 

후지산신(山神)이자 벚꽃 여신으로 불리는 고노하나 사쿠야비메(이 꽃을 들고 웃는 공주님이란 뜻)도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데요. 나뭇가지는 무엇을 뜻할까요?

나뭇가지는 신을 모시는 히모로기(熊神籬, 검·신의 울타리라는 뜻) 즉, 신단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히모로기는 신라 왕자 천일창이 일본으로 가져간 신단(神壇, 신을 모시는 제단)으로 전해지는데요. 신라뿐만 아니라 가야에서도 묘견신을 모시는 신단수 신앙을 가져간 것이 묘견궁이 전하는 진실입니다. 

다시말해, 가야에서도 북극성·북두칠성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묘견신앙이 있었고 이것을 일본열도에 가져가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북극 3성

묘견궁의 본전을 보면 중앙에 거울을 모셔놨는데요. 

거울은 태양, 태양의 광명을 상징합니다. 神은 본래 해를 뜻하고 밝게 빛나는 신성을 의미합니다. 

 

거울 뒤에는 세 개의 나뭇가지가 있는데요. 이것은 신의 본래 모습이 삼신(三神)이라는 것입니다. 

밤하늘을 보면,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고 중심에 있는 별이 있는데요. 바로 북극성입니다. 

 

 

고구려와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극성을 하나의 별이 아니라 세 개의 별로 그렸습니다. 이걸 '북극 3성'이라고 하는데요. 중국은 다섯개의 별 '북극 5성'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천문을 관측해보니 북극성은 실제로 하나가 아니라 세 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기하죠? 바라 볼때는 하나의 별인데, 들어가보니 세 개의 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신의 섭리를 알았던 우리 조상들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느님을 '삼신三神'이라고 했습니다.

 

 

북극성의 주재신 태일

북극성의 주재신은 '태일(太一)' 신으로 불렸는데요.

 

 

 

일본의 8만개 신사중에서 가장 높은 위격을 가진 신사를 이세신궁이라 합니다. 이곳에서는 매년 '태일 마츠리' 행사를 하는데요. 

'마츠리'는 우리말 '맞으리'에서 유래한 말인데요. '신을 맞아 모신다'는 뜻입니다. (부여의 '영고迎鼓'도 맞이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또한, 마츠리 행사에서 수십명의 가마꾼이 가마를 메고 '왓쇼이'를 외치는데요. 그 뜻은 '(신이) 오셨다(お出になった)'라는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세신궁에서는 북극성의 태일신과 북두칠성의 칠성신을 모시는데요 북두칠성은 우주를 다스리는 옥황상제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여겨집니다. 

 

 

영부 신사

묘견궁 바로 옆에는 영부신사가 있습니다. 낮은 산의 정상에 영부를 모신 신전이 있는데 영부는 태일신을 뜻하는 '태상신선 진택영부'에서 따온 말입니다. 즉, 태일신을 모신 신사라는 뜻입니다.

 

 

삼신문화의 흔적

일본에는 우리 고유의 삼신문화가 남아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조, 삼신을 우리는 국조삼신(國祖三神)이라고 하는데요.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는 국조삼신이신 환인-환웅-단군의 어진을 모신 삼성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히코산에도 우리 국조삼신을 모시는 상궁(환인)-중궁(환웅)-하궁(단군)이 있습니다. 

궁(宮)은 임금이 머무는 곳인데 묘견궁이라 부르는 것도 이유가 있겠죠?  

 

묘견궁 근처에도 상-중-하궁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오래된 표지판에는 표시되어 있는데요. 새로 만든 표지판에는 안타깝게도 보이지 않더군요.

 

 

오늘은 가야에서 태일신과 칠성 신앙을 일본열도로 전해준 첫 관문, 묘견궁과 여신문화 등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다음시간에는 한류의 원형 찾기 - 일본 큐슈 답사기2 백제꽃 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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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여신 문화의 자취 ( 인안나, 바알, 아쉐라 )

 

김현일(상생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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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유일신관을 만들어 내었다. 기독교 및 이슬람의 신관은 이스라엘 유대교의 유일신관을 고스란히 계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처음부터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고 주변 다른 민족들의 신들도 널리 숭배하였다.

 

야훼만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고 다른 신들의 존재를 모조리 부정하는 사상은 히브리인들이 바빌론 포로 신세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돌아온 이후에 서서히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빌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가 내려준 율법을 등한시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빌론 제국의 포로로 전락하였다고 믿었다. 이들은 야훼 숭배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한편 주변 다른 족속과 통혼한 유대인을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내쫓는 과격한 조처도 꺼리지 않았다.

 

이들에게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을 수메르 땅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게 만들고 또 이집트로 이주해간 그 후손들을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구해낸 신이었다. 그리고 야훼가 다른 족속들이 살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넘겨주고 이스라엘이 번성하는 민족이 되도록 축복하였다고 믿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야훼는 당연히 이스라엘이 섬겨야 할 유일한 신이었다.

 

“쉐마 이스라엘”로 일컬어지는 〈신명기〉 6:4-5 구절은 이 점을 분명히 나타내준다.

“들어라 이스라엘, 우리 하나님 야훼는 한 야훼이시다. 너는 너의 하나님 야훼를 너의 마음을 다하여, 너의 영혼을 다하여, 너의 온 힘을 다하여 섬겨라.”

 

그리고 야훼가 아닌 다른 신들, 사방에 인접한 족속들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였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 유명한 구절을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을 나타내는 구절로 보지만 이스라엘을 둘러싼 족속들의 여러 신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야훼만이 유일신이라는 뜻은 아니고 단지 야훼는 이스라엘이 섬겨야 할 유일한 민족신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서들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인들은 야훼 신만을 섬기지는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던 솔로몬 왕은 지혜로운 왕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후궁이 칠백 명, 첩이 삼백 명이었을 정도로 여자를 좋아한 왕이었다. 그의 여인들 중에서 모압, 암몬, 에돔, 시돈과 히타이트 등 주변 이방족속 출신들도 있었는데 솔로몬은 이 여인들을 위해 이방신들의 신전을 지어주고 거기서 분향하고 제사를 올리도록 허용하였다.(열왕기상 11:8)

 

이방신들 가운데 바알과 아쉐라가 특히 인기가 있었다. 가나안인들의 주신 바알은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과 같은 신이다. ‘바알’은 주님이라는 뜻으로 비를 내려주는 신 즉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신이었다. 이런 면에서 유목민 신의 성격을 띤 야훼와는 대비된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인들도 농사는 지어야 하였기 때문에 바알 신도 숭배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아쉐라 여신은 흔히 바알의 배우자 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신상이 많이 남아 있고 또 구약성경의 역사서에도 많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널리 숭배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 사후에는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나뉘었는데 북쪽의 왕국을 이스라엘이라 하고 남쪽의 왕국을 유다 왕국이라 하였다. 솔로몬 왕은 여러 성전들을 짓고 또 여러 도성들을 건설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부역 부담을 져야만 하였다. 이러한 솔로몬 왕의 정책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가져 결국 솔로몬 왕이 속한 유다 지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지파가 다윗 왕가의 지배를 거부하고 따로 독립된 왕국을 세우게 된 것이다.

 

지지한 부족의 수로나 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이름을 차지한 것으로 보아 북왕국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이 다스리는 유다 왕국보다 더 우세한 나라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남쪽 유다 왕국에는 야훼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이 있어 종교적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그에 맞서 수도 사마리아에 야훼 신전을 지어 유다 왕국의 종교적 정통성 주장에 맞섰다. 물론 사마리아에는 야훼 신전만 지어진 것은 아니다.

 

이 북왕국에서 이방신 숭배가 남쪽보다 더 성행하였다. 주변 나라들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일까? 일부 왕들은 솔로몬처럼 외국 공주를 왕비로 맞았다. 아합 왕(재위 BCE 871-852)은 그 치세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는 인물인데 무역도시로 유명한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삼았다. 그리고 부인의 영향을 받았던지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짓고 또 신전 안에는 바알을 위한 제단도 쌓았다.(열왕기상 16:32)

 

아합 왕 당시 이스라엘 왕국에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쉐라 선지자 400명이 있었다고 한다.(열왕기상 18:19) 이 선지자들은 모두 왕실 예산으로 먹여 살리던 사람들이었다. 이방신들을 섬기는 많은 사제들을 이스라엘 왕국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부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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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더불어 널리 숭배되었던 아쉐라 여신을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하늘의 여왕’이라고 칭하였다. 바알이 하늘의 왕이고 아쉐라는 하늘의 여왕이었던 셈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예레미아 선지자는 유다 왕국이 멸망할 즈음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 유다 왕국의 피난민들과 함께 이집트로 억지로 피난하게 되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은 피난처에서도 과자를 구워 그 하늘의 여왕에게 바쳤다고 한다.(예레미야 44:19) 이스라엘 여인들은 야훼가 구해주지 못한 유다 왕국을 아쉐라 여신에게 구해달라고 간절히 빌었을 것이다.

 

이슈타르 여신상

 

아스다롯 여신도 아쉐라 여신과 같은 신이다. 원래는 수메르 여신이었는데 시리아와 페니키아 등 여러 지역을 거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까지 전파되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아쉐라와 아스다롯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동일한 여신을 가리킨다.

 

수메르에서는 그 여신을 인안나라고 불렀고 바빌론에서는 이슈타르라 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이 여신을 자신들의 아프로디테 여신, 로마인들의 비너스 여신과 같은 여신이라고 보았다. 인안나 여신은 수메르에서도 아주 높은 여신이었데 신전 수가 가장 많은 신이었다고 한다.

 

인안나 여신 숭배가 널리 행해진 것은 이 여신이 성과 사랑, 또 생식을 관장하는 여신이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인안나 여신의 신전에서는 신전을 지키는 여성 사제들이 신전을 찾아오는 남자들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었다. 이런 여자들을 바빌론에서는 ‘이슈타리투’라고 불렀는데 ‘이슈타르의 여자들’이라는 뜻이다. 신의 여자들이니 성스러운 존재였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BCE 5세기 중반경 바빌론을 방문하였다. 그는 바빌론 신전에서 이슈타르의 여인들을 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바빌론의 여자들은 일생에 한번 아프로디테(이슈타르) 신전에 가서 그곳에서 낯선 남자와 교합해야 한다. 신전에 앉아 있다가 자신의 무릎에 은화 한 닢을 던진 남자와 관계를 맺어야 했는데 그 제안을 절대로 거절할 수 없었다. 일단 교합이 끝난 여자는 신에 대한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겨져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이러한 관습을 수치스런 것으로 비난하는데 잘 생기고 키가 큰 여자들은 금세 돌아가지만 못생긴 여자들은 의무를 다할 수 없어 오랫동안 신전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히스토리아》 제1권에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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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신화에는 인안나의 남편이 나온다. 양치기들의 수호신 두무지로 바빌론에서는 이 신을 ‘탐무즈’라 불렀다. 수메르 신화에서는 두무지가 지하세계로 끌려갔는데 결혼 후 자신에게 마음을 쏟지 않는 남편에 대한 인안나 여신의 분노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무지는 반년은 지하세계에 붙잡혀 있고 반년은 다시 천상으로 올라가 인안나와 함께 거한다.

 

그가 하계에서 다시 올라오도록 여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이 중동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스라엘 여인들도 이러한 관습을 행하였다. 그것도 야훼 신전에서 그러한 의식이 행해져 야훼주의자인 에스겔 선지자의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에스겔 8:14)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나무나 돌로 아쉐라 상을 만들어 신전의 제단 옆에 세워두거나 집의 신단에도 놓아두고 섬겼다. 그 상은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야훼주의를 신봉하는 왕들이 이방신 숭배를 타파하는 종교정책을 시도할 때에 이 아름다운 여신상들은 제일 먼저 파괴의 표적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방신 숭배가 이스라엘에 들어와 야훼 신앙과 결합하자 아쉐라가 바알이 아니라 야훼 신의 배우자라는 믿음도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고고학자들이 시나이 반도에서 발견한 한 토기파편에는 ‘야훼와 그의 아쉐라에게’라고 헌사를 새겨놓았다. 야훼도 한때는 마누라가 있었던 것이다.  

 

야훼와 아쉐라 여신의 모습이 그려진 토기파편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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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6)고구려의 선인도랑仙人徒郞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소도의 변천사 5️⃣

 

🔍고구려의 선인도랑仙人徒郞(참전參佺과 조의皂衣)

 

단군조선이 말기에 접어들자 중앙집권 세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한다. 그러자 지방 세력들이 새롭게 일어나면서 열국시대列國時代가 전개되는데, 이것이 일명 부여시대夫餘時代이다. 부여에서 신교에 뿌리를 둔 낭가의 맥은 ‘천왕랑天王郞’으로 이어졌지만, 지역에 따라 세속적인 습속과 융합하면서 다소 변전하게 된다. 고구려가 건국되자 낭가의 맥은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이어진다.

 

‘선인도랑’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선인의 도를 닦는 랑郞’이란 뜻이다. 이 말은 고구려의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임 시기에 최고의 재상이었던 을파소乙巴素가 처음으로 썼다.

“을파소가 국상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선발하여 선인도랑으로 삼았다. 교화에 능숙한 자는 참전이라고 하는데, 무리 중에 계를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에 능숙한 자는 조의라 하는데, 지조를 겸하고 계율을 이루어 공익을 위해 앞장서서 나아갔다

 

[乙巴素爲國相 選年少英俊 爲仙人徒郞 掌敎化者曰參佺 衆選守戒 爲神顧托 掌武藝者曰皂衣 兼操成律 爲公挺身也]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어린 영재들로 구성된 고구려의 ‘선인도랑’은 국가에서 인재를 기르는 수행단체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참전參佺’이 되어 ‘계戒’를 잘 고수하고, 지정의知情意를 조화롭게 구비한 선인仙人으로 신교의 진리를 잘 받들고 교화하는 일에 종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일부는 ‘조의’가 되어 참전의 계율을 굳건하게 숭상하면서 무예를 연마하고, 비상시非常時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솔선수범하여 몸을 받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낭가의 맥을 이은 고구려의 ‘선인도랑’은 곧 ‘참전’과 ‘조의’로 실현된다.

 

📑‘참전’의 사명은 무엇인가?

‘참전’이란 말은 제천에서 삼신을 모시고 그 공덕을 기리는 것에서 연유한다.

“신시개천 이래로 매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나라에 큰 축제를 열어 삼신의 덕을 기리고 화합을 제창했다. 어아를 음악으로 삼고 감사를 근본으로 하여 신과 인간을 조화하니 사방에서 이를 본받았다. 이것이 참전계가 되었다

 

[神市以來 每當祭天 國中大會 齊唱讚德諧和 於阿爲樂 感謝爲本 神人以和 四方爲式 是爲參佺戒]”

(『단군세기』).

 

다시 말해서 ‘참전’은 삼신三神의 진리를 깨달아 공덕을 기리고 찬양하는 제천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찬양하는 노래는 ‘어아於阿’이다.

 

‘어아’는 신시神市의 옛 풍속으로 

“태양을 삼신의 모습으로 여기고, 태양의 빛과 열기를 삼신의 공능으로 여기며, 만물이 생겨나 자라고 발전해 가는 모습을 삼신의 심정과 의지로 삼고, 재앙과 행복을 보응하는 것으로써 삼신을 정의한다

 

[以太陽爲儀象 以光熱爲功能 以生化發展爲情志 以禍福報應 爲定義]

(『소도경전본훈』)

 

‘참전계’는 ‘참전이 꼭 지켜야할 계戒’를 말한다. 즉 ‘참전’이란 지智·덕德·체體의 삼육三育을 겸전한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삼신을 모신다는 의미이이고, ‘참전계參佺戒’는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연마하고 지켜야 하는 계율이란 뜻이다. 사실 참전은 이미 배달국의 환웅천황 때부터 있어서 삼신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왔다. 이로부터 고구려 고국천왕 때 재상을 지낸 을파소는 ‘참전계’를 다듬어서 경전으로 집대성하였는데, 「참전계경」이 그것이다. 속설俗說에 「참전계경」은 을파소가 백운산白雲山에서 기도하여 얻은 천서天書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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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은 ‘성誠·신信·애愛·제濟·화禍·복福·응報·보應’의 8강령八綱領, 366가지의 절節과 목目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지켜야할 도덕과 윤리규범이 중심이다.

“‘’은 충심에서 일어나는 것을 혈성으로 지키는 것으로 6체體 47용用의 가르침이고,

’은 천리에 필히 부합하는 것을 인간사에서 이루는 것으로 5단團 35부部의 가르침이고,

’는 본연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어진성품의 본 바탕으로 6범範 43위圍의 가르침이고, 

’는 덕을 겸한 선을 도에 의지하여 널리 펼치기 위한 4규規 32모模의 가르침이고,

’는 악을 부르는 것을 경계하는 6조條 42목目의 가르침이고,

’은 선을 행함으로써 돌아오는 남은 경사로 6문門 45호戶의 가르침이고,

’은 천신이 악인을 화로서 보답하고 선인을 복으로 보답하는 것으로 3계階 30급級의 가르침이고,

’는 악이 악으로써 선이 선으로써 보답 받는 것으로 6과果 39형形의 가르침이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그럼 ‘조의皂衣’는 무엇인가?

‘조의’는 글자 그대로 ‘검은 색깔의 옷’을 뜻한다.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을 통상 조의라 불렀는데, 그 기원은 단군왕조檀君王朝 송하강 아사달 시대에서 비롯된다.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에 의거하면, 4세 오사구 단군께서 “언제나 3월이 되면 마한에 명하여 친히 군대를 사열하시고 사냥을 했다. 16일에 기린굴에서 천제를 올릴 때 조의를 하사하고 갓을 씌우는 예식을 행하고, 이어서 가무와 온갖 놀이를 한 후 파했다[每當三月 命馬韓 閱武田獵. 十六日祭天麒麟窟 賜皂衣加冠지례 仍歌舞百戱而罷]”는 기록이 있다.

의관을 갖춘 ‘조의’는 항상 의젓한 상무정신에 입각하여 화살을 차고 활을 갖고 다닌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는 “이때부터 ‘참전’에게 지켜야할 계가 있고, 조의에게 율이 있어 숭상하는 풍속이 이어졌다. 의관을 갖춘 자는 반드시 궁대를 두르고 활과 화살을 차고 다니고, 능숙하게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반드시 높은 지위를 얻었다. 선한 마음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악의 우두머리로 가정하여 생각하게 되었다[自是 俗尙 參佺有戒 皂衣有律 衣冠者 必帶弓矢 能射者 必得高位 善心 爲修行之本 貫革 爲假想之惡魁]”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에 이르자 조의는 단군시대와 마찬가지로 속칭 ‘검은색 비단옷을 입은 집단’을 가리킨다. 조의가 검은색으로 된 옷을 입은 유래는, 배달시대 때에 천황이 ‘천왕랑天王郞’에게 내려준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는 관례에서 태동하고, 오사구 단군이 천제를 올릴 때 하사한 조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조의는 ‘조의선인皂衣仙人’으로도 불린다. 이는 수행자가 ‘조의’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왕王이나 대가大加 곁에서 가신적家臣的 성격을 가진 자들로 ‘충忠·인仁·의義·지智·예禮’를 덕목으로 삼았다.

 

‘조의선인’은 무사武士의 기능을 하는 ‘조의’와 문사文士의 기능을 하는 ‘선인’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의선인’은 심신을 수련하고, 대체로 문무를 겸비하여 삼신의 덕을 실천하여 국가를 수호하는 종교군대의 성격을 가진다. 그들은 평상시에 왕이나 대가 곁에서 섬기고 돕는 일을 하지만, 때로 편대를 나누어 어느 한 집에 모여 삼신의 진리를 익히기 위해 고사古事를 담론하거나 학예을 익히기도 하고, 무예를 숭상하기 때문에 수려한 산천을 찾아 수련하기도 한다.

 

또한 도로 및 하천을 정비하고, 성곽 등을 건설하고 보수함으로써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일신一身으로 기꺼이 봉사한다. 한마디로 조의는 선善한 마음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고, 무예를 숭상하고, 참전의 계율을 굳건하게 지키고, 비상시에는 민족을 위해 솔선수범하여 몸을 던져 희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의선인의 진가는 전쟁과 같은 국가의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드러난다. 왜냐하면 조의선인은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서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가하여 국가를 수호하는 데에 선봉에 나서기 때문이다. 수나라의 양제梁帝가 113여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당시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대군을 모조리 쓸어버린 역사적인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20여만의 조의선인이 참전하여 혁혁한 수훈을 세웠다고 전한다. 또한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도 대군을 물리치고 궤멸시킨 주인공 또한 조의선인의 후예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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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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