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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3~6일까지 3박 4일 동안 일본 큐슈 역사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짧은 답사였지만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답사에서 본 많은 것들 중에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 4국이 일본 열도에 한국문화를 전수한 과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유물과 유적지를 소개합니다. (글: 박덕규)

 

밝은 땅, 하카타

 

 

후쿠오카의 본래 이름은 하카타입니다. 하카타는 한자로 박다馎多라고 쓰는데요. 박다는 우리말 밝은 땅을 뜻하는 '박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후쿠오카(福岡)라는 지명은 에도 시대(1603~1868)부터 사용한 것으로, 그 전까지 하카타였다. 1601년 지금의 미야자키 현 후쿠오카 한(옛 지명)의 첫 영주였던 구로다 나가마사가 하카타로 옮겨와서 후쿠오카 성을 쌓으면서 후쿠오카라는 지명이 큐슈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후쿠오카 시청 홈페이지 참조)

 

박달의 유래는 5,600여년 전 환웅천왕께서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동방으로 이주해서 태백산 아래 세운 나라 이름 '밝달'에서 온건데요. 한자로 쓸 때는 배달培達로도 씁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예가 있습니다. 『일본서기』에서 고구려를 박국狛國(밝국)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카타는 우리 밝달 사람들이 일본 열도에 정착해서 살았던 땅이고 우리 지명 '박달'을 쓴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오사카 옆의 나라(奈良, なら)인데요. 우리말 '나라(國)'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태일신과 칠성신을 모시는 묘견궁    

답사팀이 처음 간 곳은 묘견궁입니다. 구마모토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야쓰시로(八代)시가 나오는데 이곳에 묘견궁이 있습니다. 이 묘견궁은 가야와 관련 있는 신사입니다.

 

 

묘견궁 안에는 묘견의 유래를 알려주는 비석이 있는데, "묘견신은 성스러운 북극성·북두칠성의 상징이다"라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한마디로, 묘견은 북극성 또는 북두칠성을 뜻하는 신을 말하는데요. 

 

 

이렇게 북극성(太一), 칠성을 모시는 문화를 일본열도에 가져온 사람을 '묘견공주'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묘견공주가  거북이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고 전해지는 설화입니다. 

거북이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바로 김해의 구지봉입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가야의 시조 김수로가 하늘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왔고 9간(干)이 받들어서 수로왕과 다섯 형제들이 각각 6가야를 세웠다고 합니다.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구龜는 거북이를 뜻하는데요. 김수로왕의 구지봉과 거북이를 타고 온 묘견공주는 뭔가 연관이 되어 보이죠?

 

야쓰시로 묘켄 마츠리

 

그래서, 묘견공주를 가야 김수로왕의 딸로 보기도 하고, 2대 거등왕의 아들과 함께 떠났다는 신녀(神女)로 보기도 합니다. 

 

[“거등왕 기묘년, 서기 199년에 왕자 선(仙)이 더럽혀진 세상에서 쇠하고 약해진 모습을 보고, 신녀(神女)와 구름을 타고 떠나갔다. 거등왕이 도강 석도암에 올라가 왕자 선을 부르고 그림자라도 새기려 하였다. 그러므로 세속에서는 왕이 선을 부르는 대라서 초선대라고 전해 온다.(居登王己卯王子諱仙見塵世衰葬與神女乘雲離去王欲登都江石島巖招仙銘影故俗傳王招仙臺)” (편년가락국기編年駕洛國記)]

 

 

김수로에게 가야를 세우라고 명한 이는 누구인가?

가락국기에서 중요한 것은 김수로의 말인데요 '황천(皇天)의 명으로 구지봉에 내려와 가야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황천은 높고 크고 밝은 하늘, 하느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황천이 어디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는 해답이 묘견궁에 남아있는데, 묘견궁 비석에서 황천은 바로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본 열도에 처음으로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모시는 하느님 문화가 전해진 곳이 묘견궁이 위치한 야쓰시로입니다.

 

가야 묘견공주(좌)와 신라 선도산 성모(우)

 

왜 묘견공주인가?

고대에는 남성보다 여성의 생명 출산과 신성함을 추앙하는 여신 문화 시대였습니다.

신라 시조 혁거세왕의 어머니 '선도산 성모'나, 가야 수로왕의 어머니 '정견모주'를 모시는 문화처럼, 묘견의 신녀로서 여신을 공주로 높인 것입니다. 

 

2세기 후반 이후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 형성에 기초를 다진 야마대국의 통치자는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무녀(巫女)인 여왕이었다고 합니다. 묘견공주를 떠오르게 하는데요. 일본에서 시조신으로 섬기고 있는 아마데라스 오미카미도 여성입니다. 

 

나뭇가지는 무엇인가?

흥미로운건 묘견공주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입니다. 

후지산신(山神)이자 벚꽃 여신으로 불리는 고노하나 사쿠야비메(이 꽃을 들고 웃는 공주님이란 뜻)도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데요. 나뭇가지는 무엇을 뜻할까요?

나뭇가지는 신을 모시는 히모로기(熊神籬, 검·신의 울타리라는 뜻) 즉, 신단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히모로기는 신라 왕자 천일창이 일본으로 가져간 신단(神壇, 신을 모시는 제단)으로 전해지는데요. 신라뿐만 아니라 가야에서도 묘견신을 모시는 신단수 신앙을 가져간 것이 묘견궁이 전하는 진실입니다. 

다시말해, 가야에서도 북극성·북두칠성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묘견신앙이 있었고 이것을 일본열도에 가져가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북극 3성

묘견궁의 본전을 보면 중앙에 거울을 모셔놨는데요. 

거울은 태양, 태양의 광명을 상징합니다. 神은 본래 해를 뜻하고 밝게 빛나는 신성을 의미합니다. 

 

거울 뒤에는 세 개의 나뭇가지가 있는데요. 이것은 신의 본래 모습이 삼신(三神)이라는 것입니다. 

밤하늘을 보면,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고 중심에 있는 별이 있는데요. 바로 북극성입니다. 

 

 

고구려와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극성을 하나의 별이 아니라 세 개의 별로 그렸습니다. 이걸 '북극 3성'이라고 하는데요. 중국은 다섯개의 별 '북극 5성'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천문을 관측해보니 북극성은 실제로 하나가 아니라 세 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기하죠? 바라 볼때는 하나의 별인데, 들어가보니 세 개의 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신의 섭리를 알았던 우리 조상들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느님을 '삼신三神'이라고 했습니다.

 

 

북극성의 주재신 태일

북극성의 주재신은 '태일(太一)' 신으로 불렸는데요.

 

 

 

일본의 8만개 신사중에서 가장 높은 위격을 가진 신사를 이세신궁이라 합니다. 이곳에서는 매년 '태일 마츠리' 행사를 하는데요. 

'마츠리'는 우리말 '맞으리'에서 유래한 말인데요. '신을 맞아 모신다'는 뜻입니다. (부여의 '영고迎鼓'도 맞이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또한, 마츠리 행사에서 수십명의 가마꾼이 가마를 메고 '왓쇼이'를 외치는데요. 그 뜻은 '(신이) 오셨다(お出になった)'라는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세신궁에서는 북극성의 태일신과 북두칠성의 칠성신을 모시는데요 북두칠성은 우주를 다스리는 옥황상제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여겨집니다. 

 

 

영부 신사

묘견궁 바로 옆에는 영부신사가 있습니다. 낮은 산의 정상에 영부를 모신 신전이 있는데 영부는 태일신을 뜻하는 '태상신선 진택영부'에서 따온 말입니다. 즉, 태일신을 모신 신사라는 뜻입니다.

 

 

삼신문화의 흔적

일본에는 우리 고유의 삼신문화가 남아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조, 삼신을 우리는 국조삼신(國祖三神)이라고 하는데요.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는 국조삼신이신 환인-환웅-단군의 어진을 모신 삼성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히코산에도 우리 국조삼신을 모시는 상궁(환인)-중궁(환웅)-하궁(단군)이 있습니다. 

궁(宮)은 임금이 머무는 곳인데 묘견궁이라 부르는 것도 이유가 있겠죠?  

 

묘견궁 근처에도 상-중-하궁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오래된 표지판에는 표시되어 있는데요. 새로 만든 표지판에는 안타깝게도 보이지 않더군요.

 

 

오늘은 가야에서 태일신과 칠성 신앙을 일본열도로 전해준 첫 관문, 묘견궁과 여신문화 등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다음시간에는 한류의 원형 찾기 - 일본 큐슈 답사기2 백제꽃 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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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여신 문화의 자취 ( 인안나, 바알, 아쉐라 )

 

김현일(상생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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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유일신관을 만들어 내었다. 기독교 및 이슬람의 신관은 이스라엘 유대교의 유일신관을 고스란히 계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처음부터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고 주변 다른 민족들의 신들도 널리 숭배하였다.

 

야훼만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고 다른 신들의 존재를 모조리 부정하는 사상은 히브리인들이 바빌론 포로 신세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돌아온 이후에 서서히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빌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가 내려준 율법을 등한시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빌론 제국의 포로로 전락하였다고 믿었다. 이들은 야훼 숭배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한편 주변 다른 족속과 통혼한 유대인을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내쫓는 과격한 조처도 꺼리지 않았다.

 

이들에게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을 수메르 땅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게 만들고 또 이집트로 이주해간 그 후손들을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구해낸 신이었다. 그리고 야훼가 다른 족속들이 살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넘겨주고 이스라엘이 번성하는 민족이 되도록 축복하였다고 믿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야훼는 당연히 이스라엘이 섬겨야 할 유일한 신이었다.

 

“쉐마 이스라엘”로 일컬어지는 〈신명기〉 6:4-5 구절은 이 점을 분명히 나타내준다.

“들어라 이스라엘, 우리 하나님 야훼는 한 야훼이시다. 너는 너의 하나님 야훼를 너의 마음을 다하여, 너의 영혼을 다하여, 너의 온 힘을 다하여 섬겨라.”

 

그리고 야훼가 아닌 다른 신들, 사방에 인접한 족속들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였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 유명한 구절을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을 나타내는 구절로 보지만 이스라엘을 둘러싼 족속들의 여러 신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야훼만이 유일신이라는 뜻은 아니고 단지 야훼는 이스라엘이 섬겨야 할 유일한 민족신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서들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인들은 야훼 신만을 섬기지는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던 솔로몬 왕은 지혜로운 왕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후궁이 칠백 명, 첩이 삼백 명이었을 정도로 여자를 좋아한 왕이었다. 그의 여인들 중에서 모압, 암몬, 에돔, 시돈과 히타이트 등 주변 이방족속 출신들도 있었는데 솔로몬은 이 여인들을 위해 이방신들의 신전을 지어주고 거기서 분향하고 제사를 올리도록 허용하였다.(열왕기상 11:8)

 

이방신들 가운데 바알과 아쉐라가 특히 인기가 있었다. 가나안인들의 주신 바알은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과 같은 신이다. ‘바알’은 주님이라는 뜻으로 비를 내려주는 신 즉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신이었다. 이런 면에서 유목민 신의 성격을 띤 야훼와는 대비된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인들도 농사는 지어야 하였기 때문에 바알 신도 숭배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아쉐라 여신은 흔히 바알의 배우자 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신상이 많이 남아 있고 또 구약성경의 역사서에도 많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널리 숭배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 사후에는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나뉘었는데 북쪽의 왕국을 이스라엘이라 하고 남쪽의 왕국을 유다 왕국이라 하였다. 솔로몬 왕은 여러 성전들을 짓고 또 여러 도성들을 건설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부역 부담을 져야만 하였다. 이러한 솔로몬 왕의 정책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가져 결국 솔로몬 왕이 속한 유다 지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지파가 다윗 왕가의 지배를 거부하고 따로 독립된 왕국을 세우게 된 것이다.

 

지지한 부족의 수로나 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이름을 차지한 것으로 보아 북왕국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이 다스리는 유다 왕국보다 더 우세한 나라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남쪽 유다 왕국에는 야훼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이 있어 종교적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그에 맞서 수도 사마리아에 야훼 신전을 지어 유다 왕국의 종교적 정통성 주장에 맞섰다. 물론 사마리아에는 야훼 신전만 지어진 것은 아니다.

 

이 북왕국에서 이방신 숭배가 남쪽보다 더 성행하였다. 주변 나라들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일까? 일부 왕들은 솔로몬처럼 외국 공주를 왕비로 맞았다. 아합 왕(재위 BCE 871-852)은 그 치세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는 인물인데 무역도시로 유명한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삼았다. 그리고 부인의 영향을 받았던지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짓고 또 신전 안에는 바알을 위한 제단도 쌓았다.(열왕기상 16:32)

 

아합 왕 당시 이스라엘 왕국에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쉐라 선지자 400명이 있었다고 한다.(열왕기상 18:19) 이 선지자들은 모두 왕실 예산으로 먹여 살리던 사람들이었다. 이방신들을 섬기는 많은 사제들을 이스라엘 왕국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부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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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더불어 널리 숭배되었던 아쉐라 여신을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하늘의 여왕’이라고 칭하였다. 바알이 하늘의 왕이고 아쉐라는 하늘의 여왕이었던 셈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예레미아 선지자는 유다 왕국이 멸망할 즈음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 유다 왕국의 피난민들과 함께 이집트로 억지로 피난하게 되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은 피난처에서도 과자를 구워 그 하늘의 여왕에게 바쳤다고 한다.(예레미야 44:19) 이스라엘 여인들은 야훼가 구해주지 못한 유다 왕국을 아쉐라 여신에게 구해달라고 간절히 빌었을 것이다.

 

이슈타르 여신상

 

아스다롯 여신도 아쉐라 여신과 같은 신이다. 원래는 수메르 여신이었는데 시리아와 페니키아 등 여러 지역을 거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까지 전파되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아쉐라와 아스다롯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동일한 여신을 가리킨다.

 

수메르에서는 그 여신을 인안나라고 불렀고 바빌론에서는 이슈타르라 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이 여신을 자신들의 아프로디테 여신, 로마인들의 비너스 여신과 같은 여신이라고 보았다. 인안나 여신은 수메르에서도 아주 높은 여신이었데 신전 수가 가장 많은 신이었다고 한다.

 

인안나 여신 숭배가 널리 행해진 것은 이 여신이 성과 사랑, 또 생식을 관장하는 여신이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인안나 여신의 신전에서는 신전을 지키는 여성 사제들이 신전을 찾아오는 남자들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었다. 이런 여자들을 바빌론에서는 ‘이슈타리투’라고 불렀는데 ‘이슈타르의 여자들’이라는 뜻이다. 신의 여자들이니 성스러운 존재였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BCE 5세기 중반경 바빌론을 방문하였다. 그는 바빌론 신전에서 이슈타르의 여인들을 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바빌론의 여자들은 일생에 한번 아프로디테(이슈타르) 신전에 가서 그곳에서 낯선 남자와 교합해야 한다. 신전에 앉아 있다가 자신의 무릎에 은화 한 닢을 던진 남자와 관계를 맺어야 했는데 그 제안을 절대로 거절할 수 없었다. 일단 교합이 끝난 여자는 신에 대한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겨져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이러한 관습을 수치스런 것으로 비난하는데 잘 생기고 키가 큰 여자들은 금세 돌아가지만 못생긴 여자들은 의무를 다할 수 없어 오랫동안 신전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히스토리아》 제1권에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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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신화에는 인안나의 남편이 나온다. 양치기들의 수호신 두무지로 바빌론에서는 이 신을 ‘탐무즈’라 불렀다. 수메르 신화에서는 두무지가 지하세계로 끌려갔는데 결혼 후 자신에게 마음을 쏟지 않는 남편에 대한 인안나 여신의 분노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무지는 반년은 지하세계에 붙잡혀 있고 반년은 다시 천상으로 올라가 인안나와 함께 거한다.

 

그가 하계에서 다시 올라오도록 여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이 중동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스라엘 여인들도 이러한 관습을 행하였다. 그것도 야훼 신전에서 그러한 의식이 행해져 야훼주의자인 에스겔 선지자의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에스겔 8:14)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나무나 돌로 아쉐라 상을 만들어 신전의 제단 옆에 세워두거나 집의 신단에도 놓아두고 섬겼다. 그 상은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야훼주의를 신봉하는 왕들이 이방신 숭배를 타파하는 종교정책을 시도할 때에 이 아름다운 여신상들은 제일 먼저 파괴의 표적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방신 숭배가 이스라엘에 들어와 야훼 신앙과 결합하자 아쉐라가 바알이 아니라 야훼 신의 배우자라는 믿음도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고고학자들이 시나이 반도에서 발견한 한 토기파편에는 ‘야훼와 그의 아쉐라에게’라고 헌사를 새겨놓았다. 야훼도 한때는 마누라가 있었던 것이다.  

 

야훼와 아쉐라 여신의 모습이 그려진 토기파편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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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6)고구려의 선인도랑仙人徒郞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소도의 변천사 5️⃣

 

🔍고구려의 선인도랑仙人徒郞(참전參佺과 조의皂衣)

 

단군조선이 말기에 접어들자 중앙집권 세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한다. 그러자 지방 세력들이 새롭게 일어나면서 열국시대列國時代가 전개되는데, 이것이 일명 부여시대夫餘時代이다. 부여에서 신교에 뿌리를 둔 낭가의 맥은 ‘천왕랑天王郞’으로 이어졌지만, 지역에 따라 세속적인 습속과 융합하면서 다소 변전하게 된다. 고구려가 건국되자 낭가의 맥은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이어진다.

 

‘선인도랑’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선인의 도를 닦는 랑郞’이란 뜻이다. 이 말은 고구려의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임 시기에 최고의 재상이었던 을파소乙巴素가 처음으로 썼다.

“을파소가 국상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선발하여 선인도랑으로 삼았다. 교화에 능숙한 자는 참전이라고 하는데, 무리 중에 계를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에 능숙한 자는 조의라 하는데, 지조를 겸하고 계율을 이루어 공익을 위해 앞장서서 나아갔다

 

[乙巴素爲國相 選年少英俊 爲仙人徒郞 掌敎化者曰參佺 衆選守戒 爲神顧托 掌武藝者曰皂衣 兼操成律 爲公挺身也]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어린 영재들로 구성된 고구려의 ‘선인도랑’은 국가에서 인재를 기르는 수행단체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참전參佺’이 되어 ‘계戒’를 잘 고수하고, 지정의知情意를 조화롭게 구비한 선인仙人으로 신교의 진리를 잘 받들고 교화하는 일에 종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일부는 ‘조의’가 되어 참전의 계율을 굳건하게 숭상하면서 무예를 연마하고, 비상시非常時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솔선수범하여 몸을 받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낭가의 맥을 이은 고구려의 ‘선인도랑’은 곧 ‘참전’과 ‘조의’로 실현된다.

 

📑‘참전’의 사명은 무엇인가?

‘참전’이란 말은 제천에서 삼신을 모시고 그 공덕을 기리는 것에서 연유한다.

“신시개천 이래로 매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나라에 큰 축제를 열어 삼신의 덕을 기리고 화합을 제창했다. 어아를 음악으로 삼고 감사를 근본으로 하여 신과 인간을 조화하니 사방에서 이를 본받았다. 이것이 참전계가 되었다

 

[神市以來 每當祭天 國中大會 齊唱讚德諧和 於阿爲樂 感謝爲本 神人以和 四方爲式 是爲參佺戒]”

(『단군세기』).

 

다시 말해서 ‘참전’은 삼신三神의 진리를 깨달아 공덕을 기리고 찬양하는 제천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찬양하는 노래는 ‘어아於阿’이다.

 

‘어아’는 신시神市의 옛 풍속으로 

“태양을 삼신의 모습으로 여기고, 태양의 빛과 열기를 삼신의 공능으로 여기며, 만물이 생겨나 자라고 발전해 가는 모습을 삼신의 심정과 의지로 삼고, 재앙과 행복을 보응하는 것으로써 삼신을 정의한다

 

[以太陽爲儀象 以光熱爲功能 以生化發展爲情志 以禍福報應 爲定義]

(『소도경전본훈』)

 

‘참전계’는 ‘참전이 꼭 지켜야할 계戒’를 말한다. 즉 ‘참전’이란 지智·덕德·체體의 삼육三育을 겸전한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삼신을 모신다는 의미이이고, ‘참전계參佺戒’는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연마하고 지켜야 하는 계율이란 뜻이다. 사실 참전은 이미 배달국의 환웅천황 때부터 있어서 삼신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왔다. 이로부터 고구려 고국천왕 때 재상을 지낸 을파소는 ‘참전계’를 다듬어서 경전으로 집대성하였는데, 「참전계경」이 그것이다. 속설俗說에 「참전계경」은 을파소가 백운산白雲山에서 기도하여 얻은 천서天書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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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은 ‘성誠·신信·애愛·제濟·화禍·복福·응報·보應’의 8강령八綱領, 366가지의 절節과 목目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지켜야할 도덕과 윤리규범이 중심이다.

“‘’은 충심에서 일어나는 것을 혈성으로 지키는 것으로 6체體 47용用의 가르침이고,

’은 천리에 필히 부합하는 것을 인간사에서 이루는 것으로 5단團 35부部의 가르침이고,

’는 본연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어진성품의 본 바탕으로 6범範 43위圍의 가르침이고, 

’는 덕을 겸한 선을 도에 의지하여 널리 펼치기 위한 4규規 32모模의 가르침이고,

’는 악을 부르는 것을 경계하는 6조條 42목目의 가르침이고,

’은 선을 행함으로써 돌아오는 남은 경사로 6문門 45호戶의 가르침이고,

’은 천신이 악인을 화로서 보답하고 선인을 복으로 보답하는 것으로 3계階 30급級의 가르침이고,

’는 악이 악으로써 선이 선으로써 보답 받는 것으로 6과果 39형形의 가르침이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그럼 ‘조의皂衣’는 무엇인가?

‘조의’는 글자 그대로 ‘검은 색깔의 옷’을 뜻한다.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을 통상 조의라 불렀는데, 그 기원은 단군왕조檀君王朝 송하강 아사달 시대에서 비롯된다.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에 의거하면, 4세 오사구 단군께서 “언제나 3월이 되면 마한에 명하여 친히 군대를 사열하시고 사냥을 했다. 16일에 기린굴에서 천제를 올릴 때 조의를 하사하고 갓을 씌우는 예식을 행하고, 이어서 가무와 온갖 놀이를 한 후 파했다[每當三月 命馬韓 閱武田獵. 十六日祭天麒麟窟 賜皂衣加冠지례 仍歌舞百戱而罷]”는 기록이 있다.

의관을 갖춘 ‘조의’는 항상 의젓한 상무정신에 입각하여 화살을 차고 활을 갖고 다닌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는 “이때부터 ‘참전’에게 지켜야할 계가 있고, 조의에게 율이 있어 숭상하는 풍속이 이어졌다. 의관을 갖춘 자는 반드시 궁대를 두르고 활과 화살을 차고 다니고, 능숙하게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반드시 높은 지위를 얻었다. 선한 마음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악의 우두머리로 가정하여 생각하게 되었다[自是 俗尙 參佺有戒 皂衣有律 衣冠者 必帶弓矢 能射者 必得高位 善心 爲修行之本 貫革 爲假想之惡魁]”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에 이르자 조의는 단군시대와 마찬가지로 속칭 ‘검은색 비단옷을 입은 집단’을 가리킨다. 조의가 검은색으로 된 옷을 입은 유래는, 배달시대 때에 천황이 ‘천왕랑天王郞’에게 내려준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는 관례에서 태동하고, 오사구 단군이 천제를 올릴 때 하사한 조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조의는 ‘조의선인皂衣仙人’으로도 불린다. 이는 수행자가 ‘조의’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왕王이나 대가大加 곁에서 가신적家臣的 성격을 가진 자들로 ‘충忠·인仁·의義·지智·예禮’를 덕목으로 삼았다.

 

‘조의선인’은 무사武士의 기능을 하는 ‘조의’와 문사文士의 기능을 하는 ‘선인’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의선인’은 심신을 수련하고, 대체로 문무를 겸비하여 삼신의 덕을 실천하여 국가를 수호하는 종교군대의 성격을 가진다. 그들은 평상시에 왕이나 대가 곁에서 섬기고 돕는 일을 하지만, 때로 편대를 나누어 어느 한 집에 모여 삼신의 진리를 익히기 위해 고사古事를 담론하거나 학예을 익히기도 하고, 무예를 숭상하기 때문에 수려한 산천을 찾아 수련하기도 한다.

 

또한 도로 및 하천을 정비하고, 성곽 등을 건설하고 보수함으로써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일신一身으로 기꺼이 봉사한다. 한마디로 조의는 선善한 마음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고, 무예를 숭상하고, 참전의 계율을 굳건하게 지키고, 비상시에는 민족을 위해 솔선수범하여 몸을 던져 희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의선인의 진가는 전쟁과 같은 국가의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드러난다. 왜냐하면 조의선인은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서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가하여 국가를 수호하는 데에 선봉에 나서기 때문이다. 수나라의 양제梁帝가 113여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당시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대군을 모조리 쓸어버린 역사적인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20여만의 조의선인이 참전하여 혁혁한 수훈을 세웠다고 전한다. 또한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도 대군을 물리치고 궤멸시킨 주인공 또한 조의선인의 후예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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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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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5)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소도문화의 변천 3️⃣

 

🔍대시전의 환웅전, 국조삼신을 모시는 삼성전三聖殿, 불교의 대웅전大雄殿

 

소도로 지정된 산골짜기에는 신단이 있다.

“산골짜기에 나무를 심고 토단을 쌓는 것을 신단이라고 말한다

[在山谷而植木爲土壇者 曰 神壇]”

(『태백일사』 「신시본기」).

 

신단은 삼신의 공덕을 기리고 모시는 제단이다. ‘임자년에 4세 오사구단군烏斯丘檀君은 마한馬韓 왕에게 명하여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께 제사드리는 일을 돕도록 했다[壬子 韓以命 入常春 助祭三神于九月山]’(『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는 기록이 있다.

 

“삼신은 우주만물을 능히 이끌어 내고, 각기 타고난 성품을 온전하게 하니,

신의 오묘함을 백성 모두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神者 能引出萬物 各全其性 神之所玅 民皆依恃也]”

(『단군세기』).

 

그런데 신단에 역대 천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삼신전三神殿’을 세우고 신주神主를 모시기 시작한 것은 2세 부루단군扶婁檀君 때이다. 『단기고사檀奇古史』에 의거하면, ‘부루단제가 삼신전을 세우고, 환인, 환웅, 단군의 성조를 봉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위성조三位聖祖는 바로 인류최초의 시원국가로 알려진 환국의 환인천제, 그 국통을 계승하여 배달국을 창업한 환웅천황, 그리고 배달의 국통을 계승하여 법도를 실현한 단군조선의 단군왕검이다. 또한 5세 구을단군丘乙檀君은 “재위 16년에 장당경에 몸소 행차하여 삼신단을 봉축하고 환화를 많이 심었다[丁丑十六年 親幸藏唐京 封築三神壇 多植桓化]”(『단군세기』).

 

소도에 성조의 유상遺像을 모시고 직접 제사를 지내는 풍속은 11세 도해단군道奚檀君에서 비롯된다.

도해단군은 

“재위 원년인 경인년에 오가에게 명하여 12명산 가운데 최고로 빼어난 곳을 찾아 국선소도를 설치하고, 둘레에 박달나무를 많이 심었다. 가장 큰 나무를 선택하여 환웅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니 그 이름을 웅상이라 했다

 

[庚寅元年 帝命五加 擇十二名山之最勝處 設國仙蘇塗 多環植檀樹 擇最大樹 封爲桓雄像而祭之 名雄常]”

(『단군세기』)

 

 

 

같은 해 도해단군은 ‘대시전大始殿’을 세우고, 거기에 환웅천황의 유상을 봉안하여 모시기 시작했다.

도해단군은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건립하도록 명하였다. 대시전이 완성되니 지극히 웅장하고 화려했다. 천제환웅의 유상을 받들어 안치하니 머리위에는 광채가 찬란하여 마치 태양이 온 우주를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

[冬十月 命建大始殿 極壯麗 奉天帝桓雄像而安之 頭上 光彩閃閃 如大日有圓光 照耀宇宙]

(『단군세기』).

 

대시전은 환웅천황의 유상을 모신 누각이다. 대시전이 바로 ‘환웅전桓雄殿’인 것이다. 그런데 이후에 소도제천이 역대歷代로 내려오면서 삼신전과 환웅전이 통합하여 명칭이 ‘삼성전三聖殿’으로 바뀐다. 삼신전이 곧 삼성전인 셈이다.

 

왜냐하면 삼신이 우주만물을 이끌어내어 각기 부여된 성품을 온전하게 하지만, 국조삼성으로 말미암아 그 공덕이 더욱 빛나고 성대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신전은 곧 동북아 한민족의 국조삼성, 즉 환국을 건국한 환인천제, 배달국을 개창하여 문명화에 힘쓴 환웅천황, 환국과 배달의 국통과 법통의 맥을 이어 동북아 제국을 건설한 단군왕검의 공덕을 봉안하여 모시는 삼성전으로 자연스럽게 바뀐 것이다.

 

삼신전이 곧 삼성전이라는 사실은 33세 감물단군甘勿檀君이 제사를 지낼 때 지은 ‘서고문誓告文’에서 알 수 있다.

세분 성조의 존귀함은 삼신과 더불어 공덕이 같고, 삼신의 공덕은 세분 성조로 말미암아 더욱 성대하도다. 비어있음과 거칠게 있음은 한 몸이요, 낱개와 전체는 하나이니, 지혜와 생명을 함께 닦으면 내 몸과 영혼이 함께 뻗어나가네. 참된 가르침이 정해지고, 믿음이 오래되면 자명해지고 세력을 타면 높아지나니, 빛을 돌려 몸을 돌아봄이로다. 저 높은 백악산이여 만고에 변함이 없이 푸르고, 역대성조께서 대를 이어 예악을 부흥시켰으니 규모가 그토록 위대하여 도술이 깊고도 광대하도다. 하나를 잡으면 셋을 머금고 셋이 모이면 하나가 되나니, 하늘의 계율 널리 펴서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

 

[三聖之尊 與神齊功 三神之德 因聖益大 虛粗同體 個全一如 智生雙修 形魂俱衍 眞敎乃立 信久自明 乘勢以尊 回光反躬 截彼白岳 萬古一蒼 列聖繼作 文興禮樂 規模斯大 道術淵宏 執一含三 會三歸一 大演天戒 永世爲法]”

(『단군세기』)

 

삼성전은 세 분 성조聖祖, 즉 환인천제, 환웅천황, 단군왕검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이를 ‘삼성사三聖祠’라고 한다. 삼성전의 명칭이 삼성사로 바뀐 것은 감물단군 “재위 7년 무자 년에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 아래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드렸다[戊子七年 寧古搭西門外甘勿山之下 建三聖祠 親祭]”(『단군세기』)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군조선이 무너지자 만주 상춘지역의 구월산九月山에 있던 삼성전은 고려에 이르러 다시 삼성사를 지어 이를 계승하게 된다. 오늘날 까지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는 “인웅검 삼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조자용, 『삼신민고』, 169쪽).

 

문제는 환웅전桓雄殿이 삼신전과 통합되면서 한편으로는 삼위성조를 모시는 삼성전으로 바뀌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의 본존本尊을 모시는 ‘대웅전大雄殿’으로 둔갑되었다는 사실이다. 

 

━━━━⊱⋆⊰━━━━

 

💥환웅전은 어떻게 해서 대웅전이 되었을까?

대웅전이라는 명칭은 환웅이 ‘대웅천大雄天’이라는 사실과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융합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단군조선의 삼조선三朝鮮 관경체제가 무너지자 삼국三國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와중에 외래종교인 불교가 들어와 한민족의 생활문화 속으로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불교는 전통적인 민족 신앙인 신교와 대립하게 되는데, 이것을 ‘신불상쟁神佛相爭’이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불교는 한민족의 토속신앙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여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신불융화神佛融和’라 한다.

 

신불융화의 과정에서 불교는 본존을 모신 불당佛堂을 ‘삼성전’이 아니라 ‘대웅전’이라 호칭했고, 그리고 삼신전이란 이름은 본당에서 뒷전으로 밀려나 작은 규모로 지어진 ‘삼신각三神閣’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에 산재해 있는 사찰寺刹은 대부분 대웅전이란 간판이 붙어 있고, 그 안에는 삼존불三尊佛, 즉 본존불인 석가불釋迦佛,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수행을 상징하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사실 대웅전은 불교의 용어가 아니다. ‘대웅大雄’이란 말은 ‘크게 뛰어남’을 뜻한다. 그래서 대웅전은 문자적으로 크게 뛰어난 인물을 모시는 전각이란 뜻이다. 이 말의 직접적인 기원은 ‘대웅천大雄天’에서 비롯한다. ‘대웅천’의 주신은 ‘환웅’이다.

 

이에 대해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는

“그러므로 말하기를 사람과 만물이 모두 삼신에서 생겨나니, 삼신이 바로 한 뿌리의 조상이다. 환인은 역시 삼신을 대행하여 환국의 천제가 되었다. 후에 나반을 대선천이라고 부르고, 환인은 대중천이라고 불렀다.

 

환인은 환웅과 치우와 더불어 삼황이 되고, 환웅을 대웅천이라 부르고, 치우를 지위천이라 불렀다. 이것이 『황제중경』이 만들어진 유래이다[故 曰人物 同出於三神 以三神 爲一源之祖也. 桓仁 亦代三神 爲桓國天帝. 後 稱那般 爲大先天 桓仁 爲大中天, 桓仁 與桓雄治尤 爲三皇 桓雄 稱大雄天. 治尤 爲智偉天 乃皇帝中經之所由作也]”(「三神五帝本紀」)라고 한다.

 

따라서 대웅전은 바로 환웅전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본존을 모시는 불전佛殿은 환웅전이라 하지 않고 대웅전이라 했을까? 이는 ‘신불융화’의 과정에서 불교가 신교의 토속신앙을 수용하는 일환으로 전각의 명칭만 차용해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 의거하면,

“불상이 처음 들어오자 절을 세우고 이를 대웅이라 호칭했다. 이것은 승도들이 옛 풍속을 세습으로 인하여 부르는 칭호이지 본래 승가의 말이 아니며, 또한 이르기를 승도와 유생이 모두 낭가에 예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佛象始入也 建寺稱大雄 此僧徒之襲古仍稱而本非僧家言也, 又云僧徒儒生皆隷於郞家以此可知]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

 

그러므로 한민족의 세속적인 신교문화는 소도에 있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세속적인 신교문화와 결합하게 되고, 소도가 있을 만한 곳에는 대체로 불당이 세워지게 된다. 이때 대시전에 모셔진 환웅천황의 유상은 바로 불상으로 대체되었다.

 

다시 말하면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신교의 신앙문화와 불교가 습합되면서 불전은 옛 풍속으로 전해오는 환웅의 이름을 따서 ‘대웅전’으로 부르게 되고, 그 안에 본존을 모시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불교문화와 전통적인 신교문화 간에는 이질감이 다소 해소되고, 친화성이 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찰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신각이나 칠성각 등과 같은 신당神堂은 곧 신불융화의 과정에서 남아 있는 신교문화의 잔영殘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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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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