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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4)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소도문화의 변천 2️⃣

 

🔍제천의식祭天儀式의 변화 

상고시대에 한민족의 제천의식은 하늘에 계신 지존의 삼신일체상제님을 주신主神으로 숭상하고, 신을 맞이하는 종교적인 행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통國統과 종통宗統의 계승자로 ‘천제의 아들[天帝之子]’임을 천명하는 정치적인 전례典禮이기도 했다.

 

제천의식에서 단군왕검은 천제를 집전執典하는 신교의 대제사장大祭司長이면서 천자임을 천명했다. 그래서 단군왕검은 민족단위의 국가를 설립하여 번창한 신시배달의 국통과 종통을 계승하고, 옛 법통을 되살려 세상을 다스렸던 것이다.

 

“배달신시개천 1565년 10월 3일에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백명을 거느리고 단목 터에 와서 백성과 더불어 삼신일체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 왕검께서 지극한 신의 덕성과 성스러움을 겸한 인자함으로 능히 환인·환웅의 성조를 받들어 개천을 계승하니, 그 공덕이 높고 커서 찬란하게 빛났다. 이에 구환의 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진실로 복종하여 천제의 화신으로 여기고 임금으로 추대하니, 이분이 바로 단군왕검이다. 왕검께서 신시배달의 법도를 되살리고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를 세우니 조선이라 하였다

 

[至開天一千五百六十五年上月三日 有神人王儉者 五加之魁 率徒八百 來御于檀木之墟 與衆奉祭于三神 其至神之德 兼聖之仁乃能奉詔繼天 巍蕩惟烈 九桓之民 咸悅誠服 推爲天帝化身而帝之 是爲檀君王儉 復神市舊規 立都阿斯達 建邦號朝鮮]

(『단군세기』)

 

그런데 제천의식은 후대로 전해지면서 점차 확대 변화되어 갔다. 국통과 종통의 계승자임을 확인하고, 조상 제사와 신을 맞이하여 찬양하는 대동축제가 그것이다.

 

16세 위나尉那 단군은

 

“재위 28년 무술년에 구환족의 모든 왕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삼신일체상제님께 천제를 올릴 때 환인, 환웅, 치우를 배향하고 단군왕검께 제사지냈다. 5일간 백성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히고 밤새워 천부경을 노래 부르고 마당 밟기를 했다. 한쪽에 횃불을 줄지어 밝히고 다른 쪽에서 둥글게 춤을 추며 애환가를 함께 불렀다

 

[戊戌二十八年 會九桓諸汗于寧古搭 祭三神上帝 配桓因桓雄蚩尤 及檀君王儉而享之 五日大宴與衆 明燈守夜 唱經踏庭 一邊列炬 一邊環舞 齊唱愛桓歌]

(『단군세기』)

 

여기에서 영고탑寧古搭은 소도제천의 장소로, 북을 울리며 신의 강림을 맞이하는 영고제迎鼓祭를 지내던 곳이다. 그런데 영고탑迎鼓搭이라 하지 않고 영고탑寧古搭이라고 한 까닭은 한자어 영고迎鼓가 영고寧古로 바뀌고 터가 탑搭으로 음사되면서 영고탑寧古搭이 된 것이다.

 

위나단군은 영고탑에서 삼신일체상제님께 제천하고 선령先靈께 제사한 후, 5일 동안 백성들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것은 제천의식이 신과 함께 모두가 즐겁게 노래하고 즐기는 축제의 장場으로 점차 확대 변화되어 감을 함축한다.

 

 

 

 단군조선의 말기에 삼조선[진조선辰朝鮮, 막조선莫朝鮮, 번조선番朝鮮] 체제가 무너지자 제천의식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祭政分離]되어 나타난다. 특히 삼조선이 망하게 되면서 각 지역에는 새로운 군장君長들이 우후죽순 등장하여 관할하게 된다. 이에 제천의식은 천황天皇이 아니라 천군天君이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가 되고, 그리고 각지에 있는 소도에서 종교의식이 거행될 때에도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변모되기도 했다.

 

✔ 단군조선의 국통을 이은 부여夫餘에서 제천의식은 거국적으로 참석하는 국중대회國中大會의 형식으로 거행되면서 모두가 한 마음으로 즐기는 축제祝祭 분위기로 이어진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 의거하면, 부여夫餘에서는 음력으로[殷曆] 정월正月에 국가적인 행사로 신을 맞이하는 영고제迎鼓祭를 열어 북을 치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모두 함께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었다고 한다.

 

중국 돈황문서인 『토원책부兎圓策府』에 의거하면, 동예東濊에서는 10월에 행해진 무천舞天이라는 제사의식이 거행되었는데, 밤낮으로 마시고 춤추며 노래하였고, 전쟁이 있을 때에는 출정出征에 앞서 소를 잡아 그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는 우제점牛蹄占도 행했다고 한다.

 

✔ 부여大夫餘의 종통宗統을 계승한 고구려高句麗는 단군시대의 옛 영토를 회복하면서 분열된 여러 족속들을 통합한다. 통합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제도에 있어서 천왕天王이 있고, 천왕의 중심에는 계루부桂婁部, 절노부絶奴部, 연노부涓奴部, 관노부灌奴部, 순노부順奴部라는 5부족 연맹체가 있으며, 천왕의 직속신하로는 상가, 패자, 고추가,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료를 두었다.

 

천왕은 이들 제가회의를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10월에는 동맹東盟이라는 제천행사를 개최했는데, 이는 고구려 국조신에 대한 제사의식으로 동명東明으로도 불린다. 그래서 고구려의 동맹은 조상 제사 및 일종의 추수감사제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 고려高麗에 이르자 제천의식은 고구려의 동맹을 계승하면서 토속신앙의 종교의식과 불교의식이 결합된 팔관재八關齋의 형식으로 변질된다. 『송사宋史』 「고려전高麗傳」에 의거하면, 고려에서는 “10월 보름에 나라 동쪽에 있는 굴窟의 세신歲神을 모셔다 제사하는데 이를 팔관재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팔관재는 팔관회八關會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도참사상圖讖思想이 첨가되어 천령天靈 및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겼다. 한마디로 고려의 팔관재는 조상제祖上祭의 성격을 표면화하면서 천하태평과 군신화합을 기원하는 민족적 연중행사로 발전된다.

 

✔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국가제도는 전적으로 유학儒學의 이념으로 무장된다. 이로부터 전통적인 제천행사는 사라지게 되고 겨우 기우제祈雨祭의 형식만이 남아 있게 된다. 또한 고대의 소도문화에서 출원한 신앙의식은 본질적으로 변질되어 세속화된 흔적만이 남아 있게 되는데, 신목神木을 모신다든가, 신당神堂에서 삼신을 모신다든가, 당산제堂山祭를 지낸다든가, 당집에서 액厄막이 굿을 한다든가, 소원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의 의식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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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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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3)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소도문화의 변천

 

단군조선의 말기에 접어들자 소도문화는 시대적 상황에 걸맞게 점차 확대 분파分派되고, 여러 지역으로 뻗어나가 토착화되면서 지역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전變轉되기에 이른다.

 

변전의 중요한 특징은 크게 세 관점, 즉 천단天壇의 구조형식의 변화, 대시전大始殿 명칭의 개칭, 낭가문화郞家文化의 변천이라는 관점에서 약술해볼 수 있다.

 

✔첫째는 소도에 마련된 제천단의 설치구조가 변경됐다는 것이다. 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보듯이, ‘천원지방’의 우주관을 표출하고 있는 제단의 구성형식은 위쪽에 원형圓形으로, 그 밑에는 방형方形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구조형식이 바뀌어 위쪽에는 방형이고 그 밑에는 원형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삼신일체상제를 모시는 신교의 제천의식은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즐기는 축제문화의 장場으로 변질되어 갔고, 또한 소도에 건립된 대시전大始殿은 환웅전桓雄殿으로 바뀌었다가, 환국ㆍ배달ㆍ단군조선을 창업하여 다스린 국조삼신을 모시는 삼신전三神殿으로 변경되었고, 고려가 들어서자 불교가 들어오면서 환웅전이 불상을 모시는 대웅전大雄殿으로 둔갑됐다는 것이다.

 

✔셋째는 소도에 세워진 경당扃堂으로부터 낭가문화가 정착되었는데, 이는 시대를 거듭하면서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문사文士와 무사武로 구분되는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국선國仙과 낭도郎徒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신라의 화랑도花郞徒, 그리고 근대 조선의 선비[士] 정신으로 변천되면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1️⃣ 제천단의 구조변화 

제천祭天은 글자 그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이는 창세기 인류 최초의 국가 환국桓國의 원형문화에서 기원한다. 그 문화의 중심에는 신교神敎가 있다. 신교는 본래 제정일치 시대에 하늘, 땅, 인간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삼신일체상제님을 받들어 모시고, 그 덕화德化의 가르침을 받아 내려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천은 신神을 맞이하는 제사의식이다. 이는 환국桓國 말기에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개창할 때,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신시神市를 열고 천제를 올린 사실이나,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할 때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천제를 올린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환국-배달-조선으로 이어지는 국통國統의 계승이나 종통宗統을 승계 받는 국가의 주요 대사가 있을 때, 천황天皇은 거국적인 제천을 필히 거행했다. 그런데 제천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단이 마련되어야 한다. 제단은, 모든 것이 음양 짝으로 존재하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대대待對하여 쌍으로 건립된다. 지존의 삼신일체상제님을 모시는 천단과 반대쪽에 제신諸神을 모시는 신단神壇이 그것이다. 

 

그래서 소도가 있는 곳에는 천단과 신단이라는 두 개의 제단이 설치됐던 것이다. 

“산꼭대기에 땅을 파서 성단聖壇을 만드는데, 이를 천단天壇이라 하고, 산골짜기에 나무를 세워 토단을 쌓은 것을 신다神壇이라 한다[在山頂而塹山爲城壇者 曰天壇, 在山谷而植木爲土壇者 曰神壇”]

(『태백일사』 「신시본기」).

 

천단은 우주만유를 총괄하여 주재하는 삼신일체상제님을 모시는 곳이기 때문에 하늘[天], 땅[地], 인간[人]이 하나가 됨을 상징하는 형태로 건립돼야 한다. 그 모습은 하늘의 도道가 원만함을 상징하는 둥근 원형으로 된 구조형식을, 땅의 도가 방정함을 상징하는 네모진 방형으로 된 구조형식을, 전체적으로 하늘의 원만함과 땅의 방정함을 본받은 사람의 도가 삼위일체로 하나 됨[각角]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건립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원·방·각’의 구조형식으로 건립된 천단이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우주관을 표상하는 ‘천원지방’의 꼴로 이루어져 있다.

 

 

 

천원지방의 구조형식으로 만들어진 인류최초의 천단은 중국 적봉赤峯 일대의 우하량유적牛河梁遺跡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지역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유물 유적이 발굴된 곳이다. 이것들이 출토되자 중국정부는 아무런 역사적인 전거가 없다는 의미에서 ‘신비의 문명’, 혹은 일대가 붉은 산이라는 의미에서 홍산문명紅山文明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 문명을 일으킨 주체는 동이족이다. 그들은 바로 배달국 시대에 살았던 동북아 한민족의 조상이었음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홍산문명의 3대 요소로 꼽히는 유적은 제천하기 위해 3단으로 건립된 천단天, 그리고 여신묘와 적석총이 대표적이다. 천단은 주로 산을 끼고 건립되었는데, 그 구조는 원형과 방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하면 천단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天圓地方]’는 뜻의 구조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위쪽에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으로 된 터가 자리하고 있고, 바로 그 아래에 땅을 상징하는 방형으로 된 터가 위치해 있는 흔적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천단의 반대편에는 조상신과 제신諸神을 모시는 신단神壇이 설치되었던 터가 있다. 천원지방의 구조형식으로 건립된 제천단은 오늘날 중국 북경에 있는 천단이나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천제를 올리기 위해 건립한 서울의 환구단圜丘壇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북경의 천단이나 서울의 환구단보다 더 오래전에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제천단이 한국 땅에 현존한다. 바로 단군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塹城壇이다.

 

 

 

“초대 단군왕검은 재위 51년 무오년에 운사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郎城을 건설하게 하시고,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게 하니 지금의 참성단이 곧 그것이다[戊午五十一年 帝命雲師倍達臣 設三郎城于穴口 築祭天壇於摩璃山 今塹城壇 是也]”

(『단군세기』).

 

그러나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은 홍산문명에서 보는 제천단, 중국 북경의 천단이나 서울에 있는 환구단의 구조형식과는 사뭇 다르다. 참성단은 천원지방의 구조형식이 아니라 천원과 지방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건립돼 있기 때문에 ‘지방천원地方天圓’의 구조형식이다.

 

한마디로 참성단은 위쪽에 땅의 도를 상징하는 방형이 자리하고 아래쪽에 하늘의 도를 상징하는 원형이 위치해 있다.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이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역학易學에서는 ‘천지비괘天地否卦’의 ‘상象’을 나타내는 구성형식이라고 하고, 반대로 땅을 상징하는 방형이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지천태괘地天泰卦’의 상을 나타내는 구성형식이라고 한다.

 

역학에서 ‘천지비괘’는 하늘이 최고인줄만 알고 땅과 서로 사귀지 않는 형국을 상징한다. 이는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이 서로 통하지 않음[불통不通]을 나타낸다. 달리 말하면 하늘이 땅을 비천하게 여기는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사상을 나타내는 괘상卦象이다.

 

‘천지비괘’의 내용은 남존여비나 약육강식의 사회적 제도로 나타난다. 반면에 ‘지천태괘’는 하늘이 스스로 낮추어 땅과 조화를 이루는 형국을 상징한다. 이는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이 서로 조화롭게 소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달리 말하면 하늘이 땅을 존귀하게 여기는 정음정양正陰正陽의 사상을 상징하는 괘상이다. ‘지천태괘’의 내용은 남녀평등이나 약강조화의 사회적 제도로 나타난다.

 

문명사에서 볼 때, ‘천지비괘’는 선천先天의 상극질서相克秩序를 표상하지만, ‘지천태괘’는 후천의 상생질서相生秩序를 표상한다. 문명의 창세기에 건립된 제천단의 구성형식은 선천先天의 세상을 표징表徵하지만, 단군시대에 건립된 마리산 참성단의 구성형식은 후천後天의 세상을 표징한다. 따라서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뀜을 상징하는 마리산의 참성단은 양도시대陽道時代에서 음도시대陰道時代로의 전환, 선천에서 후천으로 변천, 강자가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약자와 서로 소통하여 천하 태평한 세상이 열리게 됨을 함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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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2) 국자랑,천지화랑, 경당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 전하는 소도의 용례 2

 

5️⃣ 소도에 설치된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天指花郞

“(13세 흘달단군屹達檀君은) 재위 20년 무술년에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혼인하지 않은 자제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는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불렀다. 국자랑이 밖에서 돌아다닐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를 꽂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천지화랑이라 칭했다.

 

[戊戌二十年 多設蘇塗 植天指花 使未婚子弟 讀書習射 號爲國子郞 國子郞出行 頭揷天指花 故 時人稱爲天指花郞]”

(『단군세기』)

 

11세 도해단군에 이어 13세 흘달단군 시대에 이르러서 ‘소도 문화’는 절정의 국면에 다다른다. 그 특징을 요약하자면 다음 네 관점이 핵심이다.

✔첫째, 소도는 단군의 명령으로 나라 여러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소도 문화가 지역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 변질되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둘째, 소도 주변에는 단목檀木 대신에 천지화天指花를 많이 심었다는 사실이다. 소도에 머무는 미혼 자제들은 ‘국자랑’, 혹은 머리에 천지화를 꽂고 다녔다는 의미에서 ‘천지화랑’이라 불렸다. 이는 신라시대의 ‘화랑花郞’으로 이어진다.

 

셋째, 소도에 설치된 경당에서는 미혼 자제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가르쳤다. 독서는 전통적으로 소의경전所依經典, 즉 선인仙人 발귀리發貴理가 읊조린 「원방각경」, 환국시대부터 구전되어온 「천부경」과 「삼일신고」, ‘환국5훈’ 등이 중심이다. 후대에 들어오면서 독서는 부여의 ‘삼륜구서三倫九誓’와 고구려의 「참전계경參佺戒經」이 첨가되었다.

 

넷째, ‘국자랑’은 국선國仙 혹은 ‘선랑仙郞’이라 불렸다. 이는 신라시대 ‘화랑花郞’의 모체가 되었다. 국자랑의 전통은 고구려의 조의선인皁衣先人으로 이어지고, 백제의 무절武節이나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나타난다.

 

“(24세 연나단군延那檀君) 재위 2년 신축 년에 여러 왕(칸汗)이 연나단군의 조칙을 받들어 소도를 증설하고, 천제를 지냈다. 국가에 큰일이 있거나 재앙이 있으면 곧 소도에서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아 안정시켰다.

 

[辛丑二年 諸汗奉詔 增設蘇塗 祭天. 國家 有大事異災 則輒禱之 定民志于一]”

(『단군세기』)

 

연나단군 때에는 소도가 더욱 더 많이 늘어났다. 국가의 전쟁이나 재앙 등과 같은 중대한 일이 발생하게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소도제천蘇塗祭天이 시행되었다. 이는 소도가 국가의 치세와 백성들의 안정에 중차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소도는 지방의 여러 제후들을 모아 함께 천제를 지냄으로써 국론을 모으는 장소가 되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안정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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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도에 설치된 경당扃堂(교육기관)

“소도가 건립된 곳에는 모두 계율이 있는데, 충ㆍ효ㆍ신ㆍ용ㆍ인이라는 오상五常의 도가 그것이다.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을 세워 미혼 자제로 하여금 유형무형의 모든 것(사물)을 익히게 했는데, 대개 독서ㆍ활쏘기ㆍ말달리기ㆍ예절ㆍ가악ㆍ권박으로 육예의 종류이다. 모든 읍락에는 자체적으로 삼로를 두었는데, 삼로를 삼사라고도 한다. 어진 덕이 있는 자, 재물을 베푸는 자, 사리를 아는 자를 모든 사람이 스승처럼 섬기는 것이 그것이다.

 

[蘇塗之立 皆有戒 忠孝信勇仁五常之道也. 蘇塗之側 必立扃堂 使未婚子弟 講習事物 蓋讀書習射馳馬禮節歌樂拳搏幷劒術六藝之類也. 諸邑落 皆自設三老 三老亦曰三師. 有賢德者 有財施者 有識事者 皆師事之 是也]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소도에서 가르쳐서 깨우쳐야하는 기본 덕목이 있다. 이는 환국시대에서 연유하는데, 신교神敎의 실천덕목으로 불리는 ‘오훈五訓’이 그것이다.

‘오훈’은 다섯 가지의 가르침

✔ ‘정성과 믿음으로 행하여 거짓이 없는 것[성신불위誠信不僞]’

✔ ‘공경하고 근면하여 게으름이 없는 것[경근불태敬謹不怠]’

✔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함을 거역하지 않는 것[효순불위孝順不違]’

✔ ‘청렴하고 의로움을 지켜 음란하지 않는 것[염의불음廉義不淫]’

✔ ‘겸손하고 화평하게 지내어 싸우지 않는 것[겸화불투謙和不鬪]’

 

단군시대에 소도문화가 정점에 이르자 소도에서 교육을 받는 미혼자제들은 마땅히 따르고 실천해야할 계율戒律이 있었다. 그 계율은 ‘오계五戒’ 또는 실천윤리 덕목으로 ‘오상五常’이라고 불린다. 

 

‘오계’ ‘다물오계’라고도 하는데,

‘효로써 어버이를 섬겨야한다는 사친이효事親以孝’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겨야한다는 사군이충事君以忠’

‘믿음으로써 친구를 사귀어야한다는 교우이신交友以信’

‘전투에 임에서는 결코 물러서지 말아야한다는 임전무퇴臨戰無退’

‘죽이고 살리는 것을 가려서해야 한다는 살생유택殺生有擇’이 그것이다.

 

이는 신라시대의 원광법사圓光法師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알려진 ‘세속오계世俗五戒’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오상은 충성[忠], 효도[孝], 믿음[信], 용맹[勇], 어짊[仁]의 도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사람이 지켜야할 다섯 가지 기본적인 덕목[五常之德], 즉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하는데, 이는 단군시대의 ‘오상의 도’에 근간根幹을 두고 있다.

 

그리고 소도에서는 필수적으로 ‘여섯 가지 기예[육예六藝]’를 가르쳤다. 독서讀書, 활쏘기[습사習射], 말타기[치마馳馬], 예절禮節, 풍류와 노래[가악歌樂], 검술과 씨름[권박拳搏]이 그것이다. 이는 주周나라에서 행해진 여섯 가지 기예[육예六藝], 즉 ‘예학[禮]ㆍ악학[樂]ㆍ활쏘기[射]ㆍ말타기[御] ㆍ서예[書]ㆍ산술[數]’의 근간이 되었다.

 

특이한 것은 각각의 읍락邑落에 백성들의 귀감이 되는 세분의 스승[삼사三師]을 두었다는 것이다. 고려 때에 왕의 고문顧問 역할을 담당하는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는 바로 삼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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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소도에서 단군이 직접 강론한 삼륜구서三倫九誓

“병진년에 삼일신고비를 새겨서 남산에 세우고, 경신년에 벼를 심는 밭을 개간하였다. 기해년에 소도를 세워 삼륜구서의 가르침을 베푸니, 어진정치로 백성을 다스려 이끌어감이 크게 행해졌다.”

 

[丙辰 刻立三一神誥碑於南山. 庚申作稻田. 己亥立蘇塗 施三倫九誓之訓 治化大行]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馬韓世家 上’).

 

기해년은 3세 가륵단군嘉勒檀君 원년이다. 가륵단군은 소도에서 ‘삼륜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베풀었다. ‘삼륜구서’의 가르침은 일찍이 배달 신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단군시대로 전승된 것이다.

 

소도에 설치된 경당에서 단군이 “삼륜구서의 가르침을 강론하게 되자 환국시대의 문명[桓道文明]이 번성하여 국경 밖까지 소문이 나게 되어 중국 하夏나라의 13세 왕 근僅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講三倫九誓之訓 桓道文明之盛 聞于域外 夏主僅 遣使獻方物]”(『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고 한다.

 

‘삼륜’은 무엇인가? 그것은 윤리의 기본 강령[綱]으로

“아버지와 자식은 사랑으로 벼리가 되고[父子愛之綱]”,

“임금과 백성은 예의로 벼리가 되고[君民禮之綱]”,

“스승과 제자는 도리로 벼리가 됨[師徒道之綱]”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윤리규범으로서 ‘삼강三綱’의 근간이 된다. ‘삼강’은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돼야한다는 군위신강君爲臣綱’, ‘아버지는 자식의 벼리가 돼야한다는 부위자강父爲子綱’,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돼야한다는 부위부강夫爲婦綱’이다.

 

‘구서’는 명심해야할 실천윤리규범으로 아홉 가지 경계警戒

“예도를 좇아서 자식은 효도하고 어버이는 자애롭고[孝慈順禮]”,

“어진 마음과 용서로서 친구 간에 화목하고[友睦仁恕]”,

“정성과 근면으로 믿음직하고 착실하고[信實誠勤]”,

“기개와 절도로서 충성과 의리를 가지며[忠義氣節]”,

“삼가와 공손으로 겸손과 사양심을 가지고[遜讓恭謹]”,

“견문과 학식으로 밝은 지혜를 터득하고[明知達見]”,

“무술과 의협심으로 용기 있는 담력을 쌓으며[勇膽武俠]”,

“깨끗하고 맑은 마음으로 청렴과 올곧음을 유지하고[청廉直潔淸]”,

“일반적인 도리에 맞는 정의를 구현하는 것[正義公理]”이다.

 

솔라단군은 소도에 머물면서 예법을 직접 강론하고 신하들과 토의했다. 강의 내용은 소이경전에 있는 실천윤리 규범이 중심이다.

 

예컨대 “(25세 솔나단군率那檀君) 재위 47년 정유년에 임금께서 최상의 소도에서 옛날의 예법을 강론하시다가, 아첨하는 신하와 올곧은 신하로 구분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삼랑 혼운성이 나아가 말하기를, ‘올바른 이치를 굽히지 않고 지키는 자는 올곧은 신하요, 위세가 두려워 뜻을 굽혀 복종하는 자는 아첨하는 신하라고 말했다.” [丁酉四十七年 帝在上蘇塗 講古禮 因問侫臣直臣之分 三郎洪雲性 進大曰 執理不屈者 直臣也 畏威曲從者 侫臣也] (『단군세기』).

 

 

 

8️⃣ 금8조禁八條를 반포하여 소도를 성소聖所로 지정

22세 색불루단군索弗累檀君은 “오월에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여 제도를 고쳤다. 조선은 관경(영토 관할)을 일컫는다. 진조선은 천왕이 직접 다스리는데, 통치영역은 예날 진한의 땅 그대로이다. 정치는 천왕에서 연유하므로 삼한은 모두 하나로 통일되어 천왕의 명령을 받았다. 천왕은 여원흥을 마한왕으로 삼아 막조선을 다스리게 하고, 서우여를 번한 왕으로 삼아 번조선을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이를 총칭하여 단군관경이라 하니 이것이 즉 진국이다. 바로 역사에서 일컫는 단군조선이 이것이다.”

 

[五月 改制三韓爲三朝鮮 朝鮮謂管境也. 辰朝鮮 天王自爲 而地則仍舊辰韓也 政由天王 三韓皆一統就令也. 命黎元興爲馬韓 治莫朝鮮 徐于餘 爲番韓 治番朝鮮 總之 名曰 檀君管境. 是則辰國 史稱檀君朝鮮 是也]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단군조선의 중기에 접어들자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제도화된다. 이는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제도이다. 삼조선은 진조선辰朝鮮, 막조선莫朝鮮, 번조선番朝鮮을 일컫는다. 삼조선은 옛 진한眞韓 땅 그대로이다.

 

진조선은 단군 천황이 직접 다스리고, 막조선과 번조선은 일종의 제후급으로 왕王을 두어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삼한일통三韓一統의 근간이다. 이를 바탕으로 진조선의 색불루단군은 관습법을 넘어서 인류 최초의 성문법이라 불릴 수 있는 ‘금8조禁八條’를 제정하여 삼한의 백성들에게 반포한다. 이는 삼한의 백성들이 모두 평등하고, 질서 잡힌 사회를 구현하여 화평한 삶을 구현하도록 하는 법규이다.

 

색불루단군 “4년 기해년에 진조선이 천왕의 칙문을 전했다. 그 칙문에서 말하기를 ‘너희 삼한은 위로 천신을 받들고 뭇 사람들과 친하게 사귀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예절과 의리, 밭농사와 누에치기, 길쌈, 활쏘기, 자전으로써 백성들을 가르치고, 백성들에게 ‘금8조禁八條’를 제정했다

 

[四年己亥 眞朝鮮 以天王敕文 傳曰 爾三韓 上奉天神 接化羣生. 自是 敎民 以禮義田蠶織作弓矢字書 爲民設禁八條]”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금8조’ 중에 소도를 훼손한 자는 금고형禁錮刑이라는 엄벌에 처한다는 법규가 들어 있다. “백성을 위해 금8조를 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살인한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하고, 도둑질한 자 중에서 남자는 거두어서 집의 남자종으로, 여자는 여자종으로 삼는다. 소도를 훼손한 자는 금고형에 처하고,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역시키고, 게으른 자는 부역에 동원하고, 사악하고 음란한 자는 태형으로 다스리고, 남을 속인 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

 

[爲民設禁八條 相殺 以當時償殺 相傷 以穀償 相盜者 男沒爲其家奴 女爲婢 毁蘇塗者 禁錮 失禮義者 服軍] 不勤勞者 徵公 作邪淫자 笞刑 行詐欺者 訓放”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이와 같이 소도는 신성불가침의 성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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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1)『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

『태백일사』는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 1455~1528)이 1520년 66세의 나이에 찬술纂述한 역사경전이다. 그가 『태백일사』를 찬술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왕조의 10대 임금인 연산군 14년(1503)에 정사의 기록을 맡아 관리하는 춘추관의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면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였다. 그는 또 1504년 충북 괴산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때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비장祕藏의 역사서를 탐독하게 되었으며 이후 11대 임금인 중종 14년(1519년)에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왕실 서고의 귀중한 사료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이맥이 찬술한 『태백일사』는 그 후손인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에게 가보로 전해졌다. 이기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태백일사』를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1864~1920)에게 전해주었는데, 계연수는 『태백일사』를 받아 보자마자 무한한 찬사를 보내면서 ‘손발이 절로 춤추며 흥겨워 외치고 싶어 미칠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태백일사』에 온전하게 실려 있는 두 경전, 즉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는 ‘낭가郞家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유가儒家의 『대학大學』ㆍ『중용中庸』에 비견되는 중차대한 사료史料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계연수는 한민족의 역사경전인 『환단고기』를 편술하게 되는 분수령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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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태백일사』인가?

그것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크게 빛나지만[太白] 숨어있는 뛰어난 역사[逸史]’란 뜻이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역사 교과서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우리 민족의 빛나는 역사사상의 유산이 잘 기록되어 있다.

 

『태백일사』가 편술될 당시의 조선왕조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찌든 유학儒學의 사풍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맥은 동북아 9천년 한민족의 국통國統과 보배로운 환단桓檀의 숭고한 사상을 『태백일사』라는 이름으로 찬술했던 것이다. 이에 운초 계연수는 이맥의 『태백일사』를 중심으로 환단의 옛 기록을 함의하는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이로부터 『태백일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한민족의 역사종통이 그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태백일사』는 총 8권으로 편집되어 있다.

 

제1권은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제2권은 「환국본기桓國本紀」

제3권은 「신시본기神市本紀」

제4권은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제5권은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제6권은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제7권은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제8권은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앞서 『대학』과 『중용』에 버금가는 경전이라고 말한 까닭은 대표적으로 우주만유에 대한 진리의 본원경本源經인 「천부경」과 온전한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해 대광명의 심법을 여는 수행경전인 「삼일신고」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제5권의 「소도경전본훈」은 한민족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라 불린다. 여기에는 배달국 시대 초기에 선인仙人 발귀리發貴理가 제천행사에 참석하고, 의식儀式이 끝난 후 삼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원방각경圓方角經」이 소개되어 있고, 다음으로 환국桓國 시대부터 구전되어오다가 배달국 시대에 문자화된 경전, 즉 우주만물의 근원과 창조변화의 법칙을 1에서 10까지의 상수로 드러낸 「천부경」이 실려 있다. 그리고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 「삼일신고」, 「신지비사神誌祕詞」, 「참전계경參佺戒經」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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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도경전본훈」인가?

그것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소도蘇塗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경전’이기 때문이다. ‘소도’는 바로 수려한 명산에 자리 잡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신성神聖한 곳이다. 상고시대에 한민족은 ‘소도’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직계자손임을 알리는 의식, 즉 ‘삼신일체 하느님’에 대한 제천祭天을 직접 행사하였고, 여기에 설치된 경당扃堂에서는 삼신일체三神一體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기본적인 소의경전이 강론되었다.

 

그래서 ‘소도’는 삼신을 수호하는 종교의식의 중심센터이면서 심신수련의 장場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단군시대 이후에 ‘소도’는 국가를 경영하는 많은 젊은 인재들을 양성養成하여 배출하는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한다. 

 

소도蘇塗 문화의 의미

 

📌그럼 ‘소도蘇塗’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소도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소생하다, 쉬다’를 의미하는 ‘소蘇’와 ‘진흙, 덧칠, 길’이라는 뜻의 ‘도塗’이다. 그래서 소도는 ‘참 진리를 깨우쳐서 오욕으로 덧칠해진 몸과 마음이 새롭게 소생될 수 있도록 하는[修行] 신성한 장소’를 함축한다

 

왜냐하면 소도는 ‘삼신일체 하느님’에 대한 경배의식과 그 종교적인 진리를 깨우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삼신일체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본연의 생명을 회복하도록 단련하는 청정淸淨한 곳이기 때문이다.

 

📌소도는 어떻게 출범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배달국의 환웅천황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에 의거하면, 

“옛적에 환웅천황께서 천하가 광대하여 한 사람이 능이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왕명, 형벌, 질병, 선악을 주관하고, 인간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했다. 책력을 지어 365일 5시간 8분 46초를 1년으로 삼았다. 이것이 삼신일체상제님이 남겨주신 법이다.

 

그러므로 환웅천황은 삼신의 도로 가르침을 세우고, 이에 품고 있는 뜻[念標文]을 지었다. 염표문에 이르길, 일신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 성性은 빛남에 통해 밝고,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치고, 삼신의 도를 널리 펼쳐 인간을 유익하게 한다. 이때부터 소도가 세워져 도처에서 볼 수 있고, 산상과 웅상은 산 정상에 모두 있게 되었다.

 

[昔者 桓雄天王 思天下之大 非一人 所能理化. 將風伯ㆍ雨師ㆍ雲師 而主穀ㆍ主命ㆍ主刑ㆍ主病ㆍ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作曆 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四十六秒 爲一年也 此乃三神一體上尊之遺法也. 故 以三神立敎 乃作布念之標. 其文曰 一神降衷 性通光明 在世理化 弘益人間. 自是 蘇塗之立 到處可見. 山像雄常 山頂皆有]

 

소도는 국가 최고 통치자인 천황의 명령에 의해 아주 신성한 곳[聖地]에 지정되었을 것이다. 국가에 대사가 있을 때 천황은 소도라는 특정한 장소에 왕림하여 삼신일체상제님께 제사를 지내는 일[祭天行事]를 주로 하였고, 거기에서 신교의 진리, 즉 삼신일체상제님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천부경」과 「삼일신고」 등 소의경전을 강론하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소도는 신교문화의 중심지로 삼신일체 상제님을 모시는 국가적인 신앙의 중심지이자 곧 심신수련의 신성한 장소였다.

 

역사상 명실상부한 최초의 소도는 ‘박달나무로 우거진 터[檀木之墟]’에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초대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삼신일체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던 것이다. 이후 단군조선의 11세 도해단군道奚檀君은 전국의 12명산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을 골라 ‘국선소도國仙蘇塗’를 설치하고 주변에 단목을 많이 심었다. 13세 흘달단군屹達檀君도 나라 곳곳에 소도를 많이 설치했고, 24세 연나단군延那檀君은 소도를 더욱 증설增設하기도 했다.

 

소도는 천단天壇을 쌓고 삼신일체상제님께 제사지내는[祭天儀式]의 중심센터이지만, 그 외에도 소의경전이 강론됨으로써 젊은 인재를 양성하는 국가적인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단군시대에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는 이름의 젊은 남녀는 소도에서 독서와 활쏘기 등으로 심신을 단련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도는 교육기관으로서 문무文武를 겸비하는 인재 양성소이기도 하였다. 즉 소도에서의 독서는 문치文治를 위한 인재육성에 기여하게 되고, 활쏘기 등의 무도武道는 국방력 강화를 위한 상무인尙武人의 육성에 기여하였다.

 

소도는 이웃 나라간의 우호를 증진하는 선린善隣과 개화開化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삼신오제본기』에 의거하면,

“소도에서 올리는 제천행사는 바로 구려를 교화하는 근원이 된다. 이로부터 책화 제도로 이웃나라와 선린하고, 있고 없는 물자를 서로 교환하여 문명을 이루어 다스려지니 개화되어 모두가 평등했다. 이에 온 나라에서 이 소도제천을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蘇塗祭天 乃句麗敎化之源也. 自是 責禍善隣 有無相資 文明成治 開化平等 四海之內 莫不崇飾祀典者也]”고 한다.

 

단군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소도는 각 고을에 있는 명산名山마다 설치됨으로써 그 문화가 민간에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소도에 설치된 신단神壇 앞에는 큰 나무기둥이 세워져 있다. 그 나무기둥은, 사실 배달국을 개창한 초대환웅천황이 소도에 납시어 신성한 나무를 신단수神檀樹로 삼아 그 앞에서 천제를 올렸기 때문에, 원래 삼신을 모시는 기둥이었다. 여기에 배달국의 환웅천황을 상징하는 ‘웅상雄像’의 의미가 덧붙여진다. 이는 천자국天子國의 성역聖域으로서 그 위상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기 위한 일환이었을 것이다.

 

신단 앞에 세워진 나무기둥은 소도임을 알리는 삼신문화의 옛 풍습으로 오늘날 ‘솟대[立木]’문화로 남아 있다. 솟대는 조간鳥竿이라고도 불리는데, ‘솟대’ 끝에 새가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새는 곧 삼신일체상제님의 사자使者로 신교문화의 상징물인 삼족오三足烏를 지칭한다.

 

 

 

달리 말하면 솟대는 삼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서로 연결하는 통로이고, 솟대 끝에 앉아 있는 신조는 삼신일체상제님에게 인간의 기원을 전하는 전령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솟대 혹은 조간은 곧 신조神鳥가 앉는 신간神竿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소도에 설치된 단목檀木, 신목神木, 나무기둥에서 기원하는 솟대는 동북아 한민족의 고유한 소도 문화로 정착되었고, 이 문화가 세계로 퍼져나간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의 대륙과 일본, 몽고와 파키스탄, 인도와 티베트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솟대 문화는 바로 한민족의 소도문화가 여러 가지 다양한 신앙형태로 변전되어 남아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민족의 소도蘇塗 문화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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