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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수,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김영사, 2003)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연구위원

 

🟦 한국신화의 비밀

 

지금은 고인이 된 조철수 박사는 수메르와 히브리 신화에 정통한 학자였다. 저번에 소개한 《메소포타미아와 히브리 신화》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와 히브리 신화의 관계를 다루었다면 이번에 소개할 책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한국 신화의 관계를 다룬 것이다. 저자는 환웅과 단군 및 주몽과 김수로의 건국 신화 및 고려의 창건자 왕건의 조상들에 관한 신화 등에서 모두 외부에서 들어온 신화의 요소들 — 학자들은 ‘신화소神話素’라 부른다 — 이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말해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들이 중앙아시아나 인도,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의 신화들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겠지만 신화를 연구한 학자의 주장이니 한번 경청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은 저자가 여러 잡지에 기고한 13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글에서는 울산 천전리 암각화를 다룬다. 울산의 이 암각화는 1970년에 동국대학교 불교유적 탐사단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현재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선사시대 암각화이다.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변의 암벽에 새겨진 이 암각화는 언제 새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저자는 신석기 시대로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한다. 겹물결무늬, 겹마름모 무늬, 동심원 무늬 등 추상적인 문양 뿐 아니라 사슴과 개, 용, 사람의 형상도 그려져 있다. 바위 하단부에 신라시대의 사람들이 새긴 한자로 된 명문이 있는데 당시에는 이곳이 사람들이 유흥을 위해 즐겨 찾던 명승지였던 모양이다.

 

 

 

조철수 박사는 이 암각화에서 먼저 용의 그림을 주목한다. 그는 상상의 동물 용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하였다고 본다. 메소포타미아의 유명한 창조신화 「에누마 엘리쉬」에서 용이 나오기 때문일까? 이 신화는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둑이 바다의 여주인 티야마트를 물리치고 승리한 마르둑 찬가이다. 티야마트 여신은 사자, 사나운 개, 전갈, 큰 물고기, 황소 및 털 많은 용사들 그리고 바다의 뱀들을 낳아서 마르둑과 싸우게 하였다.

 

바다의 괴물인 바다의 뱀들에게 피 대신 독을 채우고 눈이 부신 광채를 입혔다. 이 바다의 뱀들이 용이었다. 동양에서는 용이 군주를 상징하는 짐승으로 신성시되었지만 〈에누마 엘리쉬〉에서는 티야마트 여신이 낳은 괴물로 그려진다. 이러한 용의 모습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원통형 인장들에서 더러 발견되며 또 바빌론의 이슈타르 성문의 벽화에도 나타나 있다.

 

 

 

저자는 메소포타미아의 용이 인도와 인도네시아, 중국의 해안 지역을 거쳐 전파되어 종국에는 한반도 남쪽의 울산 천전리 암각화에도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저자는 그 외에도 천전리 암각화에 등장하는 동심원, 연꽃무늬 등이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물론 태양을 상징하는 동심원 무늬는 여러 문화의 유적들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인데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좌우간 조철수 박사는 고대 근동의 신화소들이 한국의 고대 신화와 암각화 등에 등장하게 된 것은 고대 중동 문화가 초원길과 해양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특히 페르시아 만과 인도 및 중국 남해안을 연결하는 해상무역로가 중요한 전달경로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아유타 국의 공주 허황옥과 혼인한 김수로 왕의 신화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 무속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무가巫歌 바리공주 신화에서도 입증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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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저자가 주장하는 신화는 별자리와 관련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찍이 천문학이 발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도 서양에서 점성술에 사용되는 황도십이궁 —영어로는 ‘조디악zodiac’이라고 하는데 이는 작은 짐승을 뜻하는 그리스어 ‘조디온’에서 온 말이다 은 바빌론으로부터 그리스인들이 배워온 것이다.

 

태양이 운행하는 경로에 위치한 12개 별자리인 황도십이궁 가운데 황소자리(타우루스)와 처녀자리(비르고)가 있다. 수메르 신화의 인안나와 두무지 신화에서 반년씩 떨어져 지내야 하는 두 남녀를 이 두 별자리가 상징한다. 이는 동양의 견우와 직녀의 전설과 마찬가지이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춘분에 떠오르는 황소자리가 추분까지 밤하늘에 떠 있다가 사라지는 천문현상을 이러한 신화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천문 신화가 동양에 전해져 견우직녀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저자는 황도대가 오늘날과 같은 열두 별자리로 확립된 것은 BCE 15세기경 고대 바빌론 시대 말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황도12궁이 한국에도 유입되어 십이지신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십이지신이 황도12궁과는 달리 달을 나타내기보다는 하루의 시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아 저자의 주장은 좀 더 검토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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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저자는 《삼국유사》에 실린 소위 단군신화를 논한다. 저자는 단군신화를 배달국과 고조선의 건국이라는 사건이 반영된 건국사화라는 관점보다는 단군을 조선의 수호신으로 믿는 종교적 의도에서 서술된 태초 역사로 본다.(99쪽) 단군신화를 세상에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는 환웅 이야기와 환웅의 아들 단군이 산신이 되는 저승 신화가 결합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환웅은 인간 세상에 질서를 가져다준 문화영웅이었으며 단군은 왕의 자리에서 내려온 후 산신이 되어 민족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 인물이라 하였다.

 

물론 민간에서는 오래전부터 단군을 신격화시켜 숭배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건국의 영웅을 신격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터인데 저자는 단군이 산신이 되어 조선 민족을 지키는 저승신의 역할을 했음을 강조한다. 수메르 신화의 전문가인 저자가 보기에 단군은 대홍수로부터 인류의 멸종을 막은 수메르의 지혜의 신 엔키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저자는 한국의 용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쪽으로 전파되어 들어온 신화소라 본다.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하여 서양에서는 용이 괴물로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와 중국 등 동양에서는 군주의 상징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이미지를 갖게 된 것에 대해서 필자는 어떠한 설명도 본서에서는 찾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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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는 처용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처용은 역신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 태조 왕건의 할머니도 용왕의 딸이었다고 한다. 이는 《고려사》의 맨 앞부분에 나오는 왕건 조상들의 이야기를 담은 〈고려세계高麗世系〉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당나라로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 뛰어들어야 하는 처지에 빠지게 되었는데 용왕을 만나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그 딸을 얻었다는 것이다. 남편 작제건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용녀는 다시 용이 되어 바다로 돌아갔다. 그러나 작제건과의 사이에 네 아들을 낳았는데 그 장남이 용건龍建이다.

 

용건은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대사와 알게 되었는데 도선대사가 지시하는 대로 집을 지어 성자聖子 왕건을 낳게 되었다. 용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진 상상의 동물이므로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고려 왕가의 탄생 신화도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저자는 병에 걸린 아버지 오구대왕을 치유할 약을 구하러 서역을 넘어 저승까지 내려간 바리 공주 이야기도 수메르의 길가메쉬 서사시의 내용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본다. 우루크의 왕 길가메쉬는 영생을 가능하게 하는 불로초를 얻기 위해 저승까지 내려갔다 돌아온 인물로 죽어서는 저승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299쪽)

 

그러나 〈길가메수와 엔키두의 저승여행〉이라는 서사시에서는 길가메쉬가 저승에 갇힌 친구 엔키두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엔키가 엔키두의 혼을 저승에서 불러오게 만들어 길가메쉬와 만나게 하는 것으로 저승여행을 대신하게 만든 것으로 나온다. 좌우간 바리 공주 이야기가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는 데에는 저승여행이라는 모티브가 작용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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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화를 다소 무리하게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연관시키려 하는 본서에서 필자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은 한글이 히브리 문자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을 펼치는 맨 마지막 장이다. 주지하다시피 세종이 창제한 한글 즉 훈민정음은 옛 전자篆字를 본따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는 한글을 해설한 책인 《훈민정음》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옛 전자’〔古篆〕라는 문자가 어떤 글자를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한자의 전서篆書, 산스크리트 문자 혹은 몽골문자 등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어 왔다. 필자가 보기에 중국 한자의 한 서체인 전서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한글의 모양이 한자의 전서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히브리어를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이후 유대인들은 세계 도처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중국에도 그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적어도 당나라 때부터 중국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랍인 여행자의 기록에 의하면 황소난(879)으로 광저우에서 12만 명의 아랍인과 유대인, 기독교인, 페르시아인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페르시아 만에서부터 중국에 이르는 바닷길이 예전부터 무역활동에 널리 이용되어 왔던 것을 생각해보면 상업활동에 주로 종사한 유대인들이 중국까지 들어오게 된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당나라 때 유대교를 청진교淸眞敎라 했고 그들의 회당을 청진사淸眞寺라 했다. 전성기에는 수만 명에 달했던 유대인들이 살았는데 그들은 히브리 문자를 가르치는 서적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조철수 박사는 그 책의 이름이 《창조서創造書》라고 한다. 이 책은 서기 200-400년경 팔레스타인에서 쓰여졌는데 유대교 신비주의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359쪽) 이 책을 중국 유대인들이 한자로 번역하여 갖고 있었던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조철수 박사는 놀랍게도 《환단고기》에 나오는 가림토 문자가 히브리어 문자를 모방해 만든 것이라 한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는 고조선의 3세 가륵 단군 때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환단고기》 연대에 의하면 BCE 2181년 때의 일이다. 그 때 만든 글자가 가림토加臨土라는 문자이다. 조철수 박사는 《단군세기》가 몽골 지배기에 고려의 민족주의가 고양되던 분위기 속에서 행촌 이암이 쓴 책이라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가림토 문자를 가륵 단군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중국 유대인들의 히브리 문자를 참고하여 고려 때 만들어진 문자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림토 문자를 세종과 그 밑의 집현전 학자들이 참고하여 만든 것이 한글이라는 주장이다. 한글이 가림토 문자와 아주 비슷한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국어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단군세기》가 고려 말의 인물인 행촌 이암이 썼다는 사실부터 의심한다.

 

그러나 아주 오랜 고대 문자가 아니라 중세나 근세에 만들어진 문자의 발명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존의 다른 문자들을 참고하여 만든 경우가 많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한글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형태상으로는 한글은 산스크리트 문자나 몽골 문자보다는 히브리 문자에 더 가깝다.

 

조철수 박사는 히브리어 알파벳이 페니키아 문자처럼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약화체로부터 기원하였다고 본다. 약화체(hieratic)는 상형문자가 너무 그림과 같아 쓰거나 그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쓰기 편하게 고안된 문자이다. 일종의 필기체인 셈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가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나오고 히브리어를 모방하여 가림토 문자가 나왔으니 한글은 고대 이집트 문자의 증손자쯤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재미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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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수 박사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은 한국의 고대 신화들 그리고 한글의 창제에도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화가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본다. 그의 이러한 과감한 주장들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거나 무시해왔다.

 

그러나 기존의 주장들과 다른 주장을 펼친다고 해서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특히 문헌으로 확실하게 입증이 어려운 고대사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상력이 동원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다양한 가설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들 없는 고대사는 가능하지 않으며, 가설들의 경쟁 속에서 역사학은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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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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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투바 공화국, 부랴티아 공화국, 사하 공화국에 사는

시베리아 원주민은 고대 한국인의 후손 (2)

 

상생문화연구소 전원철 연구위원

 

5️⃣ 아무르 강 하류의 ‘코로 시레’ 마을에서 이주한 사하의 주요 부족 중 하나인 ‘코로’ 부족

 

에벤키보다 더 중요하고 가장 큰 집단을 이루는 사하의 주요한 대표 종족 이 ‘코로’ 부족이다. 코로의 복수는 ‘코로로르’라고 한다. 이들에 관해서는 자신 또한 부라트인인 부랴티아 공화국 사회과학원 불라트 조릭투예프(Bulat R. Zoriktuev) 교수가 해외의 한 학술지(Advances in Anthropology, Vol.3, No.4. 2013)에 발표한 논문 <코로 야쿠트인 공동체 신화에 관해 – 야쿠트 종족의 탄생에서 차지하는 고아시아인의 역할 Paleoasians in the Ethnogenesis of the Yakuts (on Mythology Data of the Yakut Ethnical Community of the Khoro)> 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내가 1992년경 창립회원으로 기여한 한국몽골학회의 초청으로 후일 가끔 한국에 오기도 하면서 학술발표회에서 참가하기도 한 인물이고, 필자도 가끔 전화비를 아끼지 않고 국제전화로 장시간 토론을 나누곤 한 인물이다. 

 

부랴트인 조릭투예프교수

 

그는 2011년 가을 어느 날 내게 글 한 편을 보내와서 느닷없이, 말하기를, “전선생, 사하공화국에 코리안 후손들이 있다는 글을 썼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나 역사학과 논문집에 실을 수 있는지? 이 글을 영어로 좀 번역해주시라.” 하고 요청해왔다. 나는 당연히 그의 청을 들어주려고 관련학과 두 곳에 연락을 하고 원고도 보냈다. 그러나 국사학과는 냉담하였다. 결국 나는 선생의 청을 못 들어준 꼴이 되었으나, 그는 한 두 해 뒤 상술한 학술지에 자신의 글을 실었다.

 

불라트 조릭투예프 선생의 논문의 취지에 대해서 필자는 물론 일부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 글의 요약문을 통해 그의 연구 성과를 보고 또 그 중에서 그가 밝히지 못한 부분을 필자가 밝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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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시베리아의 북쪽에서 사는 야쿠트 족의 민족 구성에서 주요 단위 중 하나인 큰 민족 집단 코로의 기원에 관한 야쿠트 민족분포학에서 오래 되었지만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연구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야쿠트 족의 형성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시급하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코로로르의 원래 고향이 바르구진-토쿰의 바이칼 서쪽에 있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현재 자바이칼리아(바이칼 동쪽)에 살고 있는 코리 부랴트 부족 공동체의 일부였다고 생각한다. 1207년 칭기즈칸의 군대가 바르구진-토쿰을 정복하는 동안 몽골에서 탈출한 코리 부족의 일부가 중부 레나로 도피하여 바이칼로 돌아오지 않았다. 

 

두 그룹을 식별할 때 코로와 코리라는 이름의 유사성만 고려하여 정확한 결과를 제공할 수 없었다.

 

한편, 코롤로로인들의 까마귀와 독수리 숭배는 북미 인디언 독수리 숭배 토템과 동일한 유형의 유사한 신화를 이룬다. 야쿠티아의 코로로르는 고아시아 기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코로로르는 고아시아인들의 남쪽 지점에 속했으며 그들은 그들의 고향 코로 시레가 있던 아무르 하류지역에 거주했다.

 

많은 초기 중국과 한국 연대기에서 이 지역을 코리라고 한다. 바로 그곳에서 북고아시아 구성요소가 두드러진 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인의 민족발생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서기 1000년 말에 아무르 하류의 코롤로르 족이 북쪽으로 이주하여 야쿠티아 땅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 이것은 야쿠트의 민족발생에서 고대 투르크인들에 덧붙여  고아시아인 종족 층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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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요지 속에서 그는 자신의 논문 결론 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쿠트 족은 몽골의 압력 아래 10~11세기에 형성되기 시작되었는데 바이칼에서 투르크어 사용 그룹이 빠져나와 지금의 야쿠트 족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최근에 프라(원형)-야쿠트 씨족의 대부분이 살았던 바이칼 서부 해안에서 최초의 몽골인의 출현이 8세기 초에 나타났다는 새로운 데이터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중부 레나로 떠난 야쿠트족의 조상들이 새로운 영토를 개발하던 1천년 말에 코롤로르가 아무르 하류에 위치한 코로 시레의 땅에서 그곳에 도착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야쿠트 사람들의 필수 불가결하고 중요한 부분이 되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결론 속에서 그는 “아무르 하류에 위치한 코로 시레에서 온 코롤로르인들은 중국과 한국 연대기에서 나오는 고대 한국인이라고 추정되는 코리 종족과 같은 종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6️⃣ 야쿠트인들 자신의 선조라고 하는 코롤로르 곧 코리는 바로 발해고려인들

 

위의 불라트 조릭투예프 선생의 글에서 보다시피, “야쿠트인들이 자신의 선조라고 하는 코롤로르인들은 한국 및 지나 사서에서 기록된 코리인들이다. 이 족칭은 몽골어로 기록된 <몽골비사> 및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역사모음>, 그리고 나중의 부랴트사서 <황금지팡이> 등에도 나온다. 그런데 이들은 바로 발해고려인들이다.

 

 

왜 그럴까? 첫째 코롤로르인들은 아무르 하류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는 발해고려의 위치와 같다. 둘째 사하어의 코로나 몽골어(말갈-고려어) 코리는 모두 소리가 거의 같다. 또 사서들이 기록한 코리인들의 주거지역도 바로 여기이다. 따라서 코로는 바로 ‘고려’를 국명으로 쓴 ‘발해-고려’, 곧 제3의 이름으로 ‘진국’이다.

 

이 나라의 선대이름은 고려(코리, 코라이, 호라이, 고구려)이다. 셋째, 조릭투예프는 코로를 사하인들이 말하듯이 퉁구스어로 까마귀로 보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발해의 국조 까마귀(삼족오)이다. 곧 코로로르인은 이 나라 출신이라는 이야기이다.

 

 

 

사하의 코로로르’ 고향은 “아무르 하류에 위치한 코로 시레”라고 전하고 있다. 이는 그들 선조의 고향이다. 사하라르(사하인들)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 코로로르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의 선조인 울루코로(Uluu Khoro 대-고려)는 고니들이 추운 겨울을 피해 날아가 겨울을 나는 언제나 따뜻한 남쪽나라 코로시레에서 황소의 달구지를 타고 오늘날의 야쿠티아로 왔다고 한다. 그 땅은 아무르강의 하류에 있다고 전한다. 

 

울루 코로처럼 황소달구지를 타고가는 이

 

그들의 언어는 [어벤, 에벤키 등] 주변의 다른 종족들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언어였고, 그들의 수는 매우 많았으며 사람들은 똑똑하고 도덕성이 강했다고 한다. 바로 이 코로 시레는 그들의 선조의 고향을 밝혀주는 핵심적 지명이다. 조릭투예프 선생은 이 코로 시레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밝히지 못했다. 이 코로시레는 과연 어디일까?

 

놀랍게도 이 땅은 우리 역사서에 적힌 우리 땅이다! 이 땅은 발해-고려가 무너진 뒤 그 땅에 세워진 금나라 역사를 적은 <금사국어해 성씨부>가 “컬시네乞石烈는 고高씨라 한다(乞石烈曰高)”고 적은 바로 그 땅이다. 이 지방은 바로 걸乞씨, 달리 고高씨의 고향 땅이라는 말이다. 곧 “乞石烈(걸석렬)”은 바로 발해 왕가 ‘코로/클(乞, 高=大)씨’의 관향이다. 사하 말의 코로시레는 한국어로는 ‘컬(코로, 乞) 씨레石烈’라는 말이고, 이는 오늘날의 소리로는 ‘걸석렬’이다.

 

이는 “흘석렬부(紇石烈部)”라고도 불렸는데, 그 위치는 조선 시대 실학자 정약용이 <여유당전서>의 <아방강역고> ‘기사북로연혁속其四 北路沿革續’에서 “클시레부紇石烈部는 … 분명히 삼수三水 부근의 땅이다.”고 밝힌 바 있다! 바로 이 우리나라 함경도의 삼수 코로시레에서 오늘날의 야쿠티아로 간 종족이 바로 사하의 코로인들인 것이다.

 

이 코로로르인들의 시조인 울루 코로는 투르크어 ‘큰/대’를 뜻하는 ‘울루’ 성씨에 고려를 뜻하는 코로를 이름으로 가지고 있다. 그는 말갈어로는 바로 ‘걸(乞, 大, 高)-고려’라는 성명을 가진 인물이다. 이 성씨는 또 발해 왕가 성씨이므로 그가 그 발해 왕가의 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코로시레 즉 “컬시네乞石烈는 고高씨라 한다(乞石烈曰高)”는 부락에서 온 인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입증한다. 사하 코로로르인들의 선조는 발해인들인 것이다.

 

 

 

 

7️⃣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인 사하

 

사하라르(사하인들)은 자기들 나라인 사하공화국 즉 야쿠티아를 자기네 말로 ‘사하 나라(사하시레)’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하인들에게 이 말의 뜻이 무어냐고 물으면 사실은 자신들도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한다. ‘시레’라는 말을 ‘나라, 땅’과 같은 말로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시레’의 말뿌리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는 원래 “김씨네, 박씨네” 할 때 쓰는 우리말의 발해-요나라 시대 낱말인 ‘시레石烈’가 바뀐 말이다. <요사백관지>와 <요사지리지>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거란 사람들은 발해인들이 살던 마을 이름들에다가 이 ‘시레’를 붙여 발해인들의 마을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마을들은 ‘씨네/시레’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만일 ‘사하 시레’의 시레가 1000년 전 우리말 ‘시레’라면 오늘날 사하인들은 자신들의 나라 이름을 지금 ‘사하-씨네’라고 부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하인 자신들도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그 종족칭 ‘사하’는 무엇일까? ‘조선-고려-발해’는 <여진역어女眞譯語>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발해의 후손 두 갈래 중 하나인 여진인들의 말로는 ‘소과素戈’로 불린다. 그런데 오늘의 사하는 이 말의 옛소리 ‘소카Sokha’와 거의 같다. 결국 ‘사하 시레’는 조선국 또는 코로로르 사하인들의 시조 울루 코로의 이름과 같이 고려-발해라는 말이다. 사하인들은 놀랍게도 자기 나라를 지금도 퉁구스어로 조선 또는 고려, 발해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결 론

이처럼 사하인들의 주요한 대표 종족인 코롤로르는 바로 발해-고려인들이다! 이들 종족 외에도 사하인들의 주요한 종족을 이루는 에벤키인들 6개 씨족은 ‘키야트(걸씨)’ 등 몽골인들과 같은 성씨를 쓰고 있다.  그들의 선조인 말갈인들은 926년경 발해를 멸망시킨 뒤 발해 백성을 200년 이상 다스린 키타이(선비족 3개지파의 하나)의 언어를 점차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오늘날 몽골어를 쓰는 선비의 3부족 중 하나인 키타이에 동화되어 부랴티아의 바르구진 투쿰으로 갔다. 그 뒤 좀 더 나중에 예전에 말갈 주민의 일부이던 퉁구스-만주계의 북방 지파 에벤-에벤키와 함께 오늘날 사하공화국으로 옮겨가 살면서 그들과 동화하여 오늘날의 사하인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 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로 온 이후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에 공식적으로 오늘날 러시아연방의 일부가 된 것이다. 비록 춥기는 하지만 천연가스와 다이아몬드의 보고인 야쿠티아는 어언 2100년 전 고구려 태조 주몽이 태어난 북부여(뒤부루 = 두막루 = 달막루 = 다우리야)의 북쪽 땅이자, 동시에 발해 때에도 우리 말갈(말고을) 백성들이 살던 바로 우리 한민족 고구려-발해인의 땅이다!

 

뿐만 아니라, 그 아래 부랴티아, 동으로 하바로프스크, 연해주, 사할린, 캄차트카, 추코트카, 서쪽으로는 다우리야(유태인자치구), 그 서쪽의 몽골리아 위에 자리 잡은 투바공화국(현 러시아 국방장관 쇼이구의 고향), 그 서쪽의 학카시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우리 한민족과 함께 같이 나누어 쓰고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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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투바 공화국, 부랴티아 공화국, 사하 공화국에 사는 시베리아 원주민은 고대 한국인의 후손 

 

 

상생문화연구소 전원철 연구위원

 

‘속말말갈’ 발해 왕가에서 나온 몽골 씨족명과 같은 사하(Sakha) 공화국의 에벤키(Evenki) 씨족명

 

이제 몽골리아 북부의 시베리아 ‘탄누 우량하이’ 투바를 지나 더 북동으로 여행해보자. 그러면 동북쪽으로는 우선 부랴티아에 이르고 더 동으로 향해 가면 ‘다구리아(다우리아)’가 이어진다. ‘다구르인들의 땅’이라는 말이다. 이 땅의 옛 이름은 가까운 청대에는 ‘다후르’, 좀 더 이전에는 ‘달막루’, 더 이전의 말로는 ‘두막루豆莫婁’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이 하나 있다. 오늘날 ‘두막루豆莫婁’로 읽는 이 지방의 이름의 옛소리는 ‘뒤부루’이다. 그런데 《북사北史》 사이전四夷傳 중 두막루조에 따르면 이는 ‘북부여北扶餘’이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비문이 기록한 바로 그 고구려 태조 주몽의 고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두막루豆莫婁’라는 지명을 자세히 보면 이 말은 사실은 ‘북부여北扶餘’라는 말과 같은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왜일까?

 

‘두豆’의 소리는 ‘뒤’이고 ‘막루’의 옛소리가 ‘부루’이므로 ‘두막루’는 곧 ‘뒤부루’이다. 또 우리말의 ‘뒤後’는 한문에서는 ‘북北’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뒤부루’는 곧 ‘뒤(北)-부루’, 곧 ‘북부여北扶餘’의 순수한 고구려어 형태이다. 고구려어 소리를 한자를 이용하여 이두문으로 적은 국명이다.

 

이 때문에 《북사》 두막루전은 “두막루국은 물길로부터 북으로 천리에 있는데, 옛 북부여이다 豆莫婁國,在勿吉北千里,舊北夫餘也”고 하여 그 위치가 고구려 영토의 일부인 물길(勿吉) 다음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군장은 모두 [부여의 6加와 같이] 모두 여섯 가지 짐승의 이름으로 관직을 삼았고 君長皆六畜名官”, “옷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게 만들었고, 모자가 크다 衣制類高麗而帽大”고 하면서, 특히 “어떤 이는 [고구려의 백성 종족 명칭과 같은] 예맥의 땅이라고 부른다或言濊貊之地”고 한 것이다!

 

지금부터 2100년 전의 국명 ‘북부여北扶餘’의 부여어 이두식 국명 ‘뒷부루豆莫婁’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두막루에서 달막루, 대막루, 다우르를 거쳐 다후르, 다우리야(러시아어)로 소리가 바뀌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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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방으로부터 더욱 동으로는 고구려의 다른 말인 ‘무구리’를 한자를 빌어 이두식으로 적은 지명 ‘보코리倍阿里’가 있다. 고구려-발해 시대에는 흑수말갈로 불렸지만 오늘날에는 하바롭스크 주로 불린다. 그 지방의 동쪽에는 ‘타타르 해협’, 곧 ‘오호츠크 해’를 지나 사할린섬이 나온다.

 

한편 탄누 우량하이 투바를 지나 부랴티아 동북으로는 올라가면 오늘날 ‘사하Sakha 공화국’으로 불리는 ‘야쿠티야’가 나온다. 이 지역에는 크게 보아 네 종족이 살고 있다. 나중에 온 러시아인들을 뺀 고대 원주민으로는 3개 민족이다. 이 3개 민족 중 하나는 사하인들Sakhalar이고 둘째는 비교적 소수로 토착인 인구의 1%에 못 미치는 퉁구스족인 에벤키Evenki이고 셋째는 보통 몽골계로 부르는 부랴트인Buryat들이다. 토착인구는 오늘날 약 50만이다.

 

 

발해-말갈 씨족의 후손인 사하인 가족

 

 

1) 에벤키화한 몽골계 사하인들

이 사하인들의 종족들의 기원에 관해 2020년 <학문적 계승의 맥락에서 본 북아시아의 민족과 문화>라는 글에서 투골루코프Tugolukov가 한 말을 빌려보자.

 

“연구자들은 오래 전부터 일부 에벤키 씨족명이 몽골 씨족명과 유사하다는 것에 눈길을 돌렸다. 에벤노-에벤키Eveno-Evenki 민족 이름이 아르가나 쿤의 전설적인 조상 고향에서 나온 다르라킨이라는 원래의 몽골 부족의 이름과 유사한 것이다. 이들은 키야트, 유귤리트, 하타긴, 바야우트, 잘라이르 및 몽골l 씨족이다.”

“그런데 야쿠티야의 욜로기르, 바약, 코에트, 유귤리트 및 몽골은 문화적으로 가장 후진적인 ‘보행자步行者’〔기마족속이 아니라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뜻함-편집자〕 에벤키 씨족이며, 이는 그들이 야쿠티아 영토에 도착한 때가 고대임을 나타낸다.” 

 

이처럼 투골루코프가 지적했듯이, 일부 에벤키족 중에서 ‘몽골’ 씨족이 보인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고, 그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단, 아쉽게도 그는 그 이상의 역사적 사실은 밝히지 못했다.

 

그런데, 이 사실의 내용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라시드 웃딘의 《역사모음》에 나오고 또 오늘날 몽골과 튀르키예 학자들이 ‘일반 몽골의 선조’라고 부르는 ‘다르라킨Darlekin 몽골’이 오늘날의 야쿠트 에벤키인들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보았듯이, ‘다르라킨 몽골’은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그런 ‘몽골’이 아니라, 애초에는 원래 발해 고왕 대조영의 맏손자 ‘도리행’의 후손 씨족 지파이다.

 

러시아 학자 투골루코프가 발견한 사실 뒤에는 그것을 뛰어넘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다시 말해 고대 코리안들인 고구려-말골(靺鞨) 출신의 발해 왕가의 지파가 이끄는 종족들이 야쿠티아로 이주하여 몽골-에벤키화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투골루코프가 지목한 그 ‘다르라킨 몽골’의 씨족명을 가진 에벤-에벤키 씨족들은 먼저 926년 발해가 거란에 망하자, 이 때문에 거란화契丹化, 곧 오늘날의 말로는 ‘몽골화’를 거친 것이다. 그들은 나중에 다시 퉁구스화하는 2단계의 종족적 변화를 거쳤다. 그들은 애초의 옛 발해왕가 지파와 발해유민들의 후손인 것이다.

 

 

에벤키 젊은이들

 

 

 

2) 우리말 ‘오랑캐’의 말뿌리가 된 ‘오롱키Oronki’

오늘날 저 멀리 북쪽에서 살며 에벤-에벤키라고 불리는 퉁구스인들은 고대 한민족과 깊은 형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인구 수는 크지 않지만 순록을 몰고 시베리아의 넓디 넓은 땅에서 순룩 유목을 하던 민족이다.

 

그들은 우리나라 북한, 함경도에 이르는 지역에서까지 살면서 그 주된 인구는 ‘오롱키Oronki’와 ‘우량하이’, 그리고 다구르족과 함께 주로 남으로는 만주 북부에서 북으로는 내몽골, 부랴티아에 걸쳐 살면서 청나라 시대까지 스스로를 “솔론Solon”이라고 하였다. 퉁구스어로 ‘에벤’이나 ‘오롱키’의 ‘오롱Oron’은 모두 ‘사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키ki’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이는 곧 에벤키나 오롱키가 모두 ‘사슴치기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특히 오롱키는 우리말의 ‘야만인’을 뜻하는 ‘오랑캐’의 말뿌리가 되었다.

 

 

3) 고조선, 숙신, 고구려 이전부터 한민족과 살아온 에벤키-오롱키인들

그런데, 이들이 스스로를 집합적으로 부르는 부락명 “솔론”은 흥미롭게도 “조선(朝鮮)”과 같은 뜻이다. 원래 퉁구스어의 ‘솔Sol’은 ‘위上’이라는 뜻이고, ‘론lon’은 ‘땅地’을 뜻하는 퉁구스어와 고대 한국어 ‘라la/na’에서 온 말이다. ‘솔라Sola’는 곧 ‘상국上國, 웃나라’라는 말이다.

 

조선의 유민이 남의 한韓 지방으로 도망가서 신라新羅의 전신인 ‘사로국斯盧國’을 세웠는데, 그 ‘사로‘도 퉁구스어로 ‘조선’을 가리키는 ‘솔라Sola’를 한자로 쓴 국명이다. 중세 몽골어로는 솔고, 여진 말로는 소과(素戈), 만주어로는 솔고, 현대몽골어로는 솔롱고스다.

 

그런데 동명왕이 떠나온 북부여의 다른 이름인 ‘솔라이국(색리국索離國)’이 있다. 이는 퉁구스어로 ‘높은 웃나라上國’라는 말이다. 이 솔라이국은 에벤키 족과 오롱키 족이 ‘조선-고려-한국’을 그들 족칭 ‘솔론Solon’과 거의 같은 ‘솔곤Solgon’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통한다.

 

또 《에벤키족 간사簡史》등에서 자기 민족의 역사를 서술할 때 선조들의 전설을 인용하며 자신의 선조들이 백두산에서 옮겨갔다고 한다. 이 사실은 이들이 이미 고조선-숙신 시대, 적어도 주몽이 세운 고구려 때부터 한민족과 함께 산 민족임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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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투골루코프 이야기로 가서 에벤키 씨족과 그가 ‘몽골’ 씨족이라고 말하는 씨족들 중 같은 것들을 보자.

 

에벤키의 ‘코에트’ 씨와 같은 성씨라고 보는 몽골 씨족 ‘키야트’는 발해 왕가의 성씨인 ‘걸乞, 大’씨와 같다. 발해 시대 ‘걸乞(大)’이라는 한자는 남방 송인의 발음으로 ‘키야트’였다. 몽골 ‘카타긴’도 역시 이 ‘걸’ 씨의 지파인데, 《몽골비사》에 따르면, ‘키야트’ 씨에서 좀 더 나중에 갈라져 나온 지파이고, 에벤키 씨족으로는 ‘카티긴’ 씨족이다. 다음 ‘바야우트’는 고구려-백제-후고구려의 왕성인 ‘고씨-걸씨’의 다른 말인 관향 성씨 ‘부여씨’가 몽골어화한 씨족이다. ‘부여씨’의 옛소리는 ‘부여티’이고 이것이 부랴트-몽골화되어 ‘바야티’와 투르크어식 ‘바야트’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는 투골루코프에 따르면, 에벤키 씨족 ‘바약’이다.

 

몽골 ‘바야우트’ 씨는 《몽골비사》에서 칭기스 칸의 10대 여조모인 알란 코와의 둘째 남편과 그 아버지의 성씨로 나온다. 그는 (후)고구려-마진을 세운 궁예(~918년)의 4세손으로 나오는 사실로 보아 1000년대 인물이다. 

 

《역사모음》에 그려진 칭기스 칸의 10대 조모 ‘알란 고와’와 다섯 아들들,
이들 중 막내 ‘보잔자르’가 칸의 9대조이다.

 

셋째 몽골성씨 ‘잘라이르’는 라시드 웃딘의 《역사모음》에 따르면, 칭기스 칸의 6대 선조인 카이두 칸海都可汗 시대에는 대략 35만에 이르는 매우 큰 부족이었다. 부랴트 역사서 《황금지팡이Altan Gadahan》에 기록된 전승을 《삼국사기》>, 《요사》, 《금사》,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 풀어 보면, 카이두 칸은 ‘잘라이르押剌伊而’ 부족한테 7명의 형제를 살해당하는 처참한 재난에 빠졌다. 이 때 카이두 칸의 7촌 아저씨 나친納真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구해내어 내고는 함께 바이칼 호 동편 오늘날 부랴티아의 바르구진 투쿰八剌忽怯谷으로 이주했다. 말갈 말로 ‘발해진 대군’이 바로 몽골어화 한 지명인 바르구진 투쿰, 곧 오늘날 부랴티아의 ‘울란 우데(Ulaan Ude, 붉은 문)’이다.

 

이 사실로 보아 그들은 1050년경 북으로 이주하여 부랴티아와 야쿠티아로 간 것이다. 투골루코프에 따르면 이 ‘잘라이르’는 에벤키 성씨로는 ‘욜로기르’이다. 이 ‘잘라이르’는 대조영의 손자 도리행의 후손 가문인 ‘다르라킨 몽골(도리행 말갈)’의 ‘야래耶懶(함경도 함흥)’ 지방 본관의 한 지파이다. 그들도 발해인들이다.

 

또 넷째로 에벤키의 ‘몽골’ 씨족은 몽골의 ‘몽골’씨이다. ‘몽골’은 발해말로 ‘말 키우는 고을’을 뜻하는 ‘몰골’, 곧 ‘말갈’에서 나온 말이고, 동시에 발해 왕가의 관향성씨이고, 나중에는 칭기스 칸의 부족 이름이 된 관향성씨이다. 그러므로 에벤키의 ‘몽골’ 씨 역시 발해 왕가의 후손이다. 다만 몽골의 한 성씨 ‘유굴레트’가 에벤키의 ‘우굴랴트’와 같다고 하더라도 이 씨족은 다른 발해-몽골 씨족과 대응이 안 된다.

 

그 밖에 또 하나 ‘코리’라는 중요한 성씨가 있다.  어떤 러시아 학자들은 몽골의 ‘코르’, ‘코리’, ‘코루스’, ‘호리’라고도 불리는 이 종족을 대실위Dashiwei, 선비鮮卑 또는 오환Wuhan에서 나왔다고 완전히 잘못 추정한다. 그들은 몽골사나 선비-키탄(거란) 역사는 알지만, 고대 한민족의 역사에는 무지한 탓에 이런 잘못된 풀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종족은 사실은 칭기스 칸의 10대 여선조 알란 코와의 아버지 ‘코리 메르겐’의 11명의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를 부른 종족칭이다. 바로 ‘코리-부랴트’, 달리 ‘코리-투마드’로 이들은 오늘날 주로 부랴티아의 바이칼 호 동서에 갈려 산다.

 

 

몽골 코리-부랴트의 외가 친척 선조 고려 태조 왕건

 

이 ‘코리-부랴트’ 종족 역시 발해 반안군왕 대야발의 아들 일하(壹夏, 몽골명 ‘일 칸’)의 아들 ‘간(澗, 몽골명 ‘키얀’)’의 손자 ‘금행(金幸)의 셋째아들 보활리(무쿠리)의 계보를 있는 가문이다. 금행은 몽골명으로 ‘알탄 칸’ 즉 황금왕인데 고려 태조 왕건의 할머니 용녀龍女의 아버지였다. 역시 사하 에벤키인들 중 일부 씨족이 발해 왕가의 속민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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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2천 년의 비밀 - 사마천이 만든 중국사 (2)-2 급살치우,신주사기,사마천,

황제헌원

 

동북아 역사 왜곡의 시초 - 금살치우擒殺蚩尤

사마천은 중국사의 시조로 황제를 설정했지만, 그 전에 염제신농씨의 세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계보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즉 신농씨가 제후들을 제압하지 못하였으므로 황제가 스스로 병법을 익히고 군사를 길러 제후들을 정벌하니 제후들이 다 복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치우만은 복종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즉 황제헌원 당시 치우와 염제는 복종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사마천은 황제가 먼저 염제와 싸웠다고 한다. 황제와 염제가 싸운 곳이 판천阪泉 들판이다. 이때 염제는 우리가 아는 신농씨가 아니다. 이를 『환단고기』 「신시본기」에서는 ‘유망楡罔의 때’라고 하였다. 즉 당시 중원은 염제신농씨의 나라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유망은 마지막 8세 임금이었다. 이때 중원이 어지러워짐을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때 헌구軒邱(황제헌원)가 불복하므로 치우천황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탁록涿鹿에서 대전쟁을 벌이셨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 「오제본기」에서 사실과 반대로 기록하였다.

신농씨의 나라가 쇠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툴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사납게 짓밟았으나 신농씨는 이를 휘어잡지 못하였다. 이때 헌원이 무력으로 제후들을 치니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그러나 치우가 가장 사나워 칠 수가 없었다. 이때 치우가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키므로(蚩尤作亂), 탁록의 들에서 싸워 치우를 사로잡아 죽이고(擒殺蚩尤) 신농씨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었다.



즉 황제헌원이 난을 일으킨 치우를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왜곡시켜 놓았다. 동북아 역사 왜곡의 시작인 치우작란蚩尤作亂과 금살치우擒殺蚩尤의 기록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그 반대이다. 즉 황제작란黃帝作亂, 금황제擒黃帝이다. 승자와 패자를 반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이에 대해 당나라의 학자 장수절張守節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자세한 주석을 달아 놓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치우가 죽은 뒤 천하가 다시 소란해지자 황제가 드디어 치우의 형상을 그려서 천하에 위엄을 떨치자 천하에서 모두 치우가 죽지 않았다고 이르면서 팔방의 모든 나라가 다 복종했다.... 공안국孔安國은 “구려九黎 임금의 호가 치우蚩尤이다.”라고 하였다.



저자는 “황제가 치우를 꺾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다면, 그 자체로 중원의 지배자가 된 것인데, 제후들이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 패배자인 치우의 형상을 그려서 천하에 위엄을 떨칠 수 있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책 160쪽)”고 하며 그 역사의 진실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의 탁록대전의 진실에 대해서는 『환단고기』 내용을 참고하거나, 본지 2020년 7월 호 ‘창세역사 성인열전’ 배달국 14세 자오지 환웅 下 - 군신軍神 강림 편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하상주 3대의 역사와 요순 선양의 진실

요순에 얽힌 역사의 진실

 

세상에서 우순虞舜을 대효大孝라 일러 오나 순은 천하의 대불효니라. 그 부친 고수高叟의 악명이 반만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였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세상에서 요순지치堯舜之治를 일러 왔으나 9년 홍수는 곧 창생의 눈물로 일어났나니 요堯는 천하를 무력으로 쳐서 얻었고, 형벌刑罰은 순舜으로부터 나왔느니라. (도전道典 4편 30장 1~4절)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은 전통적으로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알려져 왔다. 특히 유학자들이 요순선양堯舜禪讓이라 하여 가장 이상적으로 삼은 왕위 계승 방식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후대 유학자들이 윤색한 것이고 실제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왕위가 찬탈된 것을 합리화한 경우가 많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자는 『서경』에서 제요부터 중국사가 시작하는 것으로 서술하였는데, 제위를 아들 단주에게 세습하지 않고 제순에게 선양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죽서기년』과 『한비자』 등에서는 선양설을 부정하면서 제순이 제요를 무력으로 협박해 제위를 빼앗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선양이 아니라 찬탈이라는 설에 장수절도 주목했다. 그는 『사기정의』에서 요순선양설과 다른 기록이 『죽서기년』에 있다고 말했다.

『죽서기년』에 “옛날 요의 덕이 쇠해서 순에게 갇히게 되었다. 또 언주偃州에 옛 성이 있는데 현의 서북쪽 15리에 있다.”라고 했다. 또한 “순이 요를 가두고 다시 단주를 쓰러뜨려 아버지와 서로 만나지 못하게 막았다.”라는 기록도 인용했다. (114~116쪽)



사마천은 제요帝堯에 대해서 가능한 모든 문장력을 동원한 문학적 수사로 극찬을 하고 있다. 어질기는 하늘과 같고, 지혜롭기는 신과 같은 임금이어서 백성들은 요임금에게 해를 향하는 것처럼 쏠리고, 구름이 덮어서 적셔 주는 것처럼 바랐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마천이 요임금을 극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제주의 왕조에서 국왕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여러 개념을 만들어서 군주권을 제약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천명天命과 선양禪讓 같은 것들이다. 군주가 정치를 못하면 천명이 다른 인물에게 옮겨질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요임금 같은 선양의 전범典範을 만들어서 후세 임금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마천이 요임금을 높이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가 요임금이 이족夷族의 땅을 지배했다는 점이다. (121~122쪽)



그러면서 지금의 산둥성 청주 지역을 다스렸다는 『서경』 기록을 인용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동이족들과 충돌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이때 일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전한다.

이 책에서는 하상주夏商周 삼대의 시조들 모두 동이족 출신임을 여러 근거 자료로 서술하고 있다. 즉 화하족과 동이족의 혈통 문제에 대해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는 현재 동이족과 우리 한민족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강단 식민사학의 행태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아쉬운 점


이 책의 주된 이야기는 중국의 제왕들이 동이족 출신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내용이며, 여러 문헌을 인용하며 이를 논증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환단고기』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언가 『사기』 내용에 의문을 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제대로 된 역사는 무엇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명쾌하게 밝혀 주지는 못하고 있다.

중국 고대사의 진실을 조금 알 것 같지만 여전히 안개 속에 싸여 있는 느낌인데, 이 주제를 논증하기 위하여 『환단고기』의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서로 비교해 살펴보았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동이족과 우리 한민족과의 연관성에 대해 문헌과 역사적 사실, 혈연적 관계, 문화의 유사함 등을 좀 더 서술해 주었다면 이 책을 읽는 데 보다 유익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후 이어지는 다른 책 발간에서 그런 점을 기대해 본다.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신주 사기』


이 책이 나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저자를 비롯해서 30여 명 정도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삼가주석三家注釋을 포함해 『사기史記』를 강독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의 연구 결과로 나온 책이 바로 『신주 사기』이다. 세계 최초로 사기 본문과 삼가주석을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관점의 주석을 추가하여 현재 「본기」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다.

그동안 사마천 『사기』는 「세가世家」나 「열전列傳」의 일부 장면들이 널리 알려지면서 재미있는 책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제대로 알려고 하면 방대하고도 난해한 역사서이다. 예로부터 『사기』를 풀이한 수많은 주석서들이 난무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수십 종의 주석서 중 대표적인 주석서가 위진남북조 시대 당시 남조 송나라 때 진수의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의 아들 배인裵駰의 『집해集解』와 「삼황본기」를 쓴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색은索隱』, 당나라 때 『사기』 연구에 몰두한 장수절張守節의 『정의正義』를 꼽는데, 이를 ‘삼가주석三家注釋’이라고 한다. 삼가주석을 보지 않고 『사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삼가주석은 본문보다 방대하고 동양 고대 사상과 제도, 관습 등에 해박해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인데, 때로는 사마천의 본문과 충돌하기도 한다. 그래서 삼가주석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사기 연구의 길이기도 하다.

『신주 사기』는 사마천이 쓴 본문과 삼가주석을 모두 번역하고 그 아래 원문을 수록했다. 또한 의역을 최대한 피하고 한 문장 한 문장 직독직해를 원칙으로 삼아 번역했다. 그래서 한자를 조금 아는 독자라면 원문과 대조하며 원문을 읽는 지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단순한 중국사가 아니라 하화족의 역사 속에 숨겨진 동이족의 역사를 찾는 여정이야말로 현재 정체성의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가 『신주 사기』를 읽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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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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