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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자료, 보천교(증산도의 전신)는 600만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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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에 대해서는 일본 도쿄의 학습원 대학에 기록이 남아있었는데요. 동양문화연구소에 있는 자료에 의하면, 

 

미즈다 나오마사라는 조선총독부의 예산을 짠 인물이 보천교에 대한 기록을 책 한권 분량으로 작성해 두었다고 합니다. 

 

 

 

이 자료들은 상당히 높은 지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자료라서 극비라는 표시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일반인의 눈에 띌 일이 없는 자료들이라고 하네요. 

 

 

이자료에서는 보천교를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1926년, 포교에 노력한 결과 한때 600만의 교도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인구가 1800만명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노인이나 아이들을 빼면 대부분이 보천교를 신앙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독립자금 지원의 산실 보천교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 1945년 광복 후 백범 김구가 정읍을 방문했을 때 이 말을 했다고 하는데, 탄허 스님을 통해 전해 들은 사위 서상기가 증언한 내용입니다. 한국 불교계의 거성 탄허 스님의 선친인 율재 김홍규金洪圭는 보천교 재무 담당으로 차경석을 보좌하는 수석 참모였다. 김홍규는 보천교 입교 전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서 자신을 국내 독립군 지금책으로 파견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매우 열성적인 애국지사였습니다.

차경석 교주가 그를 보천교 재무 담당 겸 자신을 보좌하는 최고위 직인 목木 방주로 임명하였다고 하니 차 교주의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보천교가 상해 임정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 활동에 거금을 제공한 사실이 연구자들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제공

백야 김좌진 장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군대를 증파하였고 재 만주 한인들에 대한 보복성 횡포와 만행이 극심하였죠. 이러한 결과 만주 지역의 독립활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김좌진 장군은 1922년 초 국내로 유정근 밀사를 파견하여 보천교 교주 차월곡에게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여 군자금을 제공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때 김좌진 장군이 보천교로부터 받은 금액이 2만여 원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11월의 다른자료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동녕부에 근거를 둔 김좌진은 9월 상순 태을교(보천교) 교주 차월곡으로부터 5만 원을 받아 동녕부의 옛 부하를 소집하여 무력 행동에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만 원일 경우, 이 금액을 현재 시가로 환산한다면 20억 정도로 추정되는 큰 금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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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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