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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상생방송 프로그램 한국인의 성씨 - 온양 방씨溫陽方氏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의 방씨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모 방方 자를 쓰는 온양 방씨溫陽方氏 80,445명, 군위 방씨軍威方氏 6,454명, 기타 방方씨 7,932명으로 총 94,831명이다. 그 외에 방 방房 자를 쓰는 성씨로는 남양 방씨南陽房氏 27,454명, 남원 방씨南原房氏 3,539명, 기타 방房씨 2,527명까지 총 33,520명으로 조사되었다. 1985년 중앙일보사 자료에 의하면 나라 방邦 자를 쓰는 방씨, 클 방龐 자를 쓰는 방씨도 조사된 바 있다.


방씨方氏의 연원


방方씨의 시조는 신라 시대에 당唐나라 문화 사절로 왔다가 귀화한 방지方智이다. 〈신유보辛酉譜〉 세록世錄 편에 보면, 그는 중국 하남성 출신인데 신라 문무왕 9년(서기 699) 중국한림학사中國翰林學士로 우리나라에 와 설총薛聰과 더불어 예의禮儀를 강론하고 선교宣敎와 학업을 가르쳐 ‘동방문교東方文敎의 종宗’이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당시 신라는 북쪽의 고구려 및 백제와 빈번하게 충돌하고 있었으므로, 친당 정책을 쓰면서 당의 문화를 수입하기에 열을 올렸고 이것이 이 땅에 방씨를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선대, 그러니까 방씨의 원시조는 중국 신화 시대의 제왕으로 전하는 염제신농炎帝神農씨의 11세손 뇌雷이다. 그가 하남河南의 방산方山을 봉토로 받은 연유로 방씨 성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신라에 온 방지方智는 뇌雷의 133세손인 군강君講의 차남이라고 방씨의 족보는 적고 있다.

씨족사의 개요


온양 방씨는 시조 방지方智 이후 중간 대의 실기失記로 방지의 후손인 온수군溫水君 방운方雲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잇는다. 온양 외에 상주尙州⋅신창新昌⋅군위軍威로 본관을 따로 쓰기도 했으나 모두 온양으로 합본했다. 어쩌다 아직 합본하지 않은 방씨가 눈에 띄지만 모두 한 시조의 후예다.

온양 방씨 가문 흥성興盛의 주역들중시조 방운方雲은 상주 출신으로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2차 견훤甄萱(후백제) 정벌에서 공을 세워 고려 광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의 벼슬에까지 이르렀다. 왕은 만년의 그를 지금의 온양溫陽(당시의 지명은 온수溫水)에 있는 과안산過雁山에 살게 하고는 온수군으로 봉하고 이 산의 이름을 배방산拜方山이라 고쳐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방씨는 온양을 세거지로 삼았다. 시조의 아들 방헌주方軒柱 이후 관향으로 삼아 온 상주尙州를 버리고 온양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방운 이후 후손들은 선대의 후광에 힘입어 고려조에서 대대로 벼슬길에 해 질 날이 없었던 명문으로 등장한다.

방씨는 무예도 뛰어나 온수군溫水君의 손자 방휴方休는 고려 현종 9년(서기 1018) 거란의 장수 소배압蕭排押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귀주대첩龜州大捷의 명장으로 기록됐고, 공민왕 10년(서기 1361)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1등 공신으로 올랐던 방절方節 등 숱한 맹장들이 나왔다.

또 숙종 때 문하성평장사門下省平章事와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던 6세손 방유方裕와 희종 때 상서령尙書令과 상서낭성찬성을 지냈던 11세손 방만년方萬年 등은 명재상으로 당대를 휘어잡던 인물이었다.


배방산拜方山은 온양 방씨의 터전
배방산은 온양 방씨와 관련이 많은 산이다. 충남 천안에서 아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산으로, 당나라 한림학사인 방지의 6세손으로 전하는 방운이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서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60여 년간 6대의 왕을 섬기면서 무훈을 세워 온수군에 봉해졌고 온양, 신창, 아산 3읍을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그가 살고 있던 온양 팔동리 과안산은 ‘방씨를 우러러본다.’는 뜻으로 배방산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산 북쪽 성재산에는 길이 약 1,500m의 석축으로 이루어진 석성이 있다. 대부분 무너져 돌무지만 보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배방산성의 둘레가 3,31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두 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도 건물지로 추정되는 여러 곳이 있으며, 성내에서 백제 시대 토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시대에 축성된 듯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한다.



원나라와의 인연온양 방씨는 중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 13세손 방신우方臣佑는 충렬왕 때 원元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평장사 등 요직을 지내고 그 후 충선-충숙왕 대에 걸쳐 원나라를 왕래하며 대원 외교에 공헌한 외교가이기도 했다. 그는 안평공주安平公主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망고태忙古台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의 시중을 들어 평장사에 올랐다. 충선왕 때 홍중희洪重喜가 고려의 비행을 원제에게 상소하자, 무고임을 밝히고 그를 귀양 보냈다. 1310년 태후太后의 명으로 고려에 파견된 그는 승속僧俗 300여 명으로 금자장경金字藏經의 사서寫書를 완성, 이를 신효사神孝寺로 옮겨 태후의 명복을 빌었다.

태정황후泰定皇后 때에도 총애를 받아 저경사사儲慶司使를 지냈는데, 때마침 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편입시키려는 논의가 있자 고려는 땅이 협소한 데다 산이 많고 들이 적으므로 불필요하다고 원제元帝에게 건의, 그 논의를 철회케 했다. 충숙왕 때 그 공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신에 올랐으며, 1330년 귀국하여 신흥사神興寺를 중수하였다.

그의 아우 방신제方臣悌도 충렬왕 때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금자광록대부평장사金紫光祿大夫平章事라는 큰 벼슬을 지냈고, 그곳에서 다시 귀화하여 오늘까지 그의 후손들이 번성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고려조高麗朝의 영화 속에 번성을 이룩해 온 방씨 가문은 이성계李成桂 혁명의 추종을 거부하고 조선 초기 한때 화를 입기도 했다.

수난으로 시작되었으나, 조선 사회에 큰 공헌을 하다고려조 절신節臣 방순方恂은 공민왕 때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를 지낸 인물로, 조선이 들어서면서 이태조(이성계)가 예조 참의 벼슬자리를 남겨 두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

15세손 방유정方有程 역시 이태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이태조는 고려 광종이 방씨 가문에 내린 온양의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내려 준 땅)를 몰수하는 한편, 방씨 일문의 혼이 담긴 배방산拜方山을 방씨를 배척한다는 뜻에서 배방산排方山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 배방산排方山은 숙종에 이르러 ’방方‘ 자 위에 초두머리(艹)를 붙여 배방排芳으로 고쳐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조에서 방씨 가문은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으나 조선에서 최초로 문과에 급제한 17세손 방강方綱을 비롯해 18세손 방련方鍊 등 초기 급제자들이 유배를 당하는 등 빛을 보지 못해 큰 벼슬길에 오른 인물은 흔치 않았지만, 방유녕方有寧은 일세의 대유大儒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종 20년 과거에 급제, 대사간⋅대사헌에까지 올랐다.

역사상 훌륭힌 무장들을 배출무장으로는 정조⋅순조 때의 방우정方禹鼎이 있다. 홍경래洪景來의 난亂 때 정주성定州城을 함락시킨 선봉장이며, 그가 홍경래의 난 평정에 참가했을 때 쓴 「서정일기西征日記」는 그 방면의 귀중한 자료로 쓰인다.

또 구국의 명장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바로 22세 방진方震(보성군수)의 사위로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의 처숙뻘인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을 비롯, 방응원方應元 등 방씨 가문의 남아들이 이충무공의 선봉장으로 분투하며 함께 싸우다 1598년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를 하기도 했다.

온양 방씨 가문 효자 인맥문무文武의 인맥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방씨 가문의 효자孝子 인맥으로 방득정方得正⋅방치정方致正⋅방희설方希說⋅방국형方國亨⋅방맹方萌⋅방계종方繼宗 등이 있다. 그중에도 ’하늘이 낸 효자‘ 방수간方秀幹의 설화가 전한다. 중시조의 24세 손인 그는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는데 어느 해 엄동설한에 병석의 노모가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한겨울에 수박을 구할 길이 없어 애타는 마음으로 하늘에 빌던 중 그 정성에 하늘이 감응했던지 밖에서 돌연 “수박 사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먹음직스러운 수박 한 덩이가 문간에 놓여 있었다는 효행담이다. 방태유方鮐維, 방원필方元弼, 방시중方時中 등도 모두 방씨 가문의 효자들로 기록돼 있다.

다양한 구국 항쟁 전개방씨 일문은 근세에 특히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독립운동가 방기전方基典, 방경호方敬鎬, 방창근方昌根, 방성도方聖道, 방인근方麟根 씨와 6.25 때 납북된 전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방응모方應謨 씨 등이 그중에도 두드러진다. 그중 방기전은 1910년 망국 후 만주로 이주, 은양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과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족회韓族會에 가담하여 유서柳西 지방 총관으로 무력 항쟁에 나섰다가 전사한 항일 운동의 숨은 별이다.

방응모는 1932년 운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에 거액을 투자해 인수하고 운영하다가, 1946년 8월 조선총독부에게 강제 폐간되자 출판사인 조광사朝光社를 경영하기도 했다. 8⋅15 광복과 동시에 조선일보를 복간, 민족 언론의 창달에 노력해 오다 1950년 납북되었다. 이후 경영을 맡은 방일영方一榮 회장 방우영方又榮 사장은 바로 그의 손자들이다.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방순희方順熙 씨는 일제 시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의 유일한 여성 의원이다. 당시 충칭重慶 방송을 통해 국내의 항일 운동과 독립 정신을 고취한 여걸이었다. 해방 후 서울대 교수로 국어국문학 연구에 공적을 남긴 방종현方鍾鉉 씨는 일제하 한글학회(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우리말을 통해 민족혼을 지키는 독립 투쟁에 숨은 공을 세웠다. 『훈민정음통사訓民正音通史』, 『조선민요집성朝鮮民謠集成』 등의 저서는 그의 애국적 우리말 문학 연구의 결정이다.


어린이들의 큰 별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일제 치하 민족의 암흑기에 이 나라 어린이들에게 횃불을 쥐어 준 소년 문화 운동의 선구 방정환方定煥은 방씨 가문이 낳은 큰 별이자 그의 이름처럼 사라질 수 없는 ‘어린이’라는 낱말과 함께 이 민족의 정신 속에 항상 살아 숨 쉬는 혼이다. 짧은 인생 역정 속에 시대를 앞서 걸으며 봉건 구조의 가족 관계에 억눌려 있던 여성과 어린이를 해방시킨 사상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아동문학가이기도 하다.

소파는 서울 토박이로 서울 한복판 ‘야주개’(지금의 당주동唐珠洞)에서 1899년 11월 9일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는 방경수方慶洙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이미 동네 친구들과 ‘소년입지회’를 조직했을 만큼 일찍 깬 소년이었던 그는 19세에 천도교주 의암 손병희의 사위가 됐다. 의암은 ‘옆얼굴만 보면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며 사람 가리는 법으로 써 왔다는데 소파의 무사 원만한 옆얼굴을 감정하고는 두말없이 셋째 딸 용화溶嬅를 맡겼다고 한다.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은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신청년〉, 〈신여자〉, 〈녹성〉 등의 잡지 편집을 하였고, 3⋅1운동 때는 오일철吳一澈 등과 함께 집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찍어 돌리다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해에 일본에 건너가 일본동양대학 문학과에서 아동문학에 전심하였던 그는 1922년 〈어린이〉를 발간,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손진태孫晋泰, 윤극영尹克榮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정했다. 어른들에게는 어린이들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고, 어린이에게는 앞날의 주인공임을 강조해 주는 뜻깊은 날로, 그때 소파는 어린이날 노래를 짓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문학가로서 일생 동안 어린이를 위해 헌신한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소파상小波賞이 제정되었다.

온양 방씨 세계도



가문의 역사상 주요 인물방강方綱(1400 ~ ?) 조선의 문신, 자字는 군필君弼, 호號는 경재敬齎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때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 참의를 역임한 방순方恂이고, 할머니는 조선 개국공신 윤호尹虎의 장녀 파평 윤씨이다. 1447년(세종 2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사성司成⋅정언正言⋅흡곡현령⋅사간司諫⋅이천부사를 역임하고, 1454년(단종 2)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방륜方輪(1464 ∼ 1534) 조선의 무신, 자字는 중여仲與, 호는 송강松江이다. 계림군雞林君에 봉군되고,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아들 방호의는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방진方震(1514 ~ ?) 보성군수를 역임한 조선의 무관이다. 사위는 이순신 장군이며, 영의정이었던 이준경과 친분이 있었다. 방진은 온양 방씨 판서공파로 온양 방씨 중시조 온수군溫水君 방운方雲의 22세손이다.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방영민方榮玟(1948 ~ )은 대한민국의 관료 출신 금융인, 기업인이다. 행정고시를 통해 관계에 입문한 재무 관료 출신으로, 대통령비서실 부이사관, 재정경제부 경제정책심의관, 공보관, 금융정보분석원장, 금융감독원 감사 등을 거쳐 서울보증보험 사장을 역임했다.

방효충方孝忠(1964 ~ ) 대한민국의 항공우주공학자이자 대학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A&M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해군대학원 연구조교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 충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KAIST 항공우주공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구관측 위성 및 정지궤도 위성의 자세제어 연구 전문가이다.

방기선方基善(1965 ~ ) 대한민국의 경제 관료다. 제13대 기획재정부 제1차관을 역임했고, 제8대 국무조정실장이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온양 방씨 등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온양 방씨溫陽方氏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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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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