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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자료, 보천교(증산도의 전신)는 600만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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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에 대해서는 일본 도쿄의 학습원 대학에 기록이 남아있었는데요. 동양문화연구소에 있는 자료에 의하면, 

 

미즈다 나오마사라는 조선총독부의 예산을 짠 인물이 보천교에 대한 기록을 책 한권 분량으로 작성해 두었다고 합니다. 

 

 

 

이 자료들은 상당히 높은 지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자료라서 극비라는 표시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일반인의 눈에 띌 일이 없는 자료들이라고 하네요. 

 

 

이자료에서는 보천교를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1926년, 포교에 노력한 결과 한때 600만의 교도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인구가 1800만명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노인이나 아이들을 빼면 대부분이 보천교를 신앙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독립자금 지원의 산실 보천교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 1945년 광복 후 백범 김구가 정읍을 방문했을 때 이 말을 했다고 하는데, 탄허 스님을 통해 전해 들은 사위 서상기가 증언한 내용입니다. 한국 불교계의 거성 탄허 스님의 선친인 율재 김홍규金洪圭는 보천교 재무 담당으로 차경석을 보좌하는 수석 참모였다. 김홍규는 보천교 입교 전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서 자신을 국내 독립군 지금책으로 파견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매우 열성적인 애국지사였습니다.

차경석 교주가 그를 보천교 재무 담당 겸 자신을 보좌하는 최고위 직인 목木 방주로 임명하였다고 하니 차 교주의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보천교가 상해 임정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 활동에 거금을 제공한 사실이 연구자들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제공

백야 김좌진 장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군대를 증파하였고 재 만주 한인들에 대한 보복성 횡포와 만행이 극심하였죠. 이러한 결과 만주 지역의 독립활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김좌진 장군은 1922년 초 국내로 유정근 밀사를 파견하여 보천교 교주 차월곡에게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여 군자금을 제공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때 김좌진 장군이 보천교로부터 받은 금액이 2만여 원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11월의 다른자료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동녕부에 근거를 둔 김좌진은 9월 상순 태을교(보천교) 교주 차월곡으로부터 5만 원을 받아 동녕부의 옛 부하를 소집하여 무력 행동에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만 원일 경우, 이 금액을 현재 시가로 환산한다면 20억 정도로 추정되는 큰 금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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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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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40회 충주 지씨




프로그램 소개


〈한국의 성씨〉는 나의 존재의 근원이자 근본 뿌리인 성씨姓氏에 대해 그 기원과 틀을 바르게 알아보고 자신의 뿌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방영 정보


시청등급 : 일반 / 방송시간 : 30분 / 제작국가 : Korea / 담당PD : 김내연 / 제작 : STB 2020

충주 지씨忠州池氏 현황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지’로 발음되는 성은 ‘연못 지池’ 자를 성으로 쓰는 지씨池氏와 ‘지혜 지智’ 자를 성으로 쓰는 지씨智氏가 있습니다. 이 중 96%는 연못 지의 지씨池氏이고 지혜 지의 지씨智氏는 6,070명으로 4% 정도가 됩니다. 지금의 ‘봉산 지씨鳳山智氏’가 ‘지혜 지智’ 자를 성으로 쓰는 지씨智氏이며, 고려의 명장 지채문智蔡文을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연못 지池’의 지씨池氏는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89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충주忠州를 비롯하여 청주淸州⦁경주慶州⦁광주光州⦁홍농弘農 등 7본이 전해집니다. 이 중 ‘광주 지씨光州池氏’는 후백제 견훤의 사위인 지훤池萱을 시조로 모시고 ‘홍농 지씨弘農池氏’는 중국 명나라 홍농에서 조선 인조 때 귀화한 지명천 장군의 셋째 아들 지시염을 중시조로 모십니다.


‘충주 어씨忠州魚氏’는 충주 지씨忠州池氏에서 분적한 성씨입니다. 충주 어씨의 시조 어중익魚重翼은 본래 충주 지씨의 6세손 지중익池重翼으로 겨드랑이에 크고 빛나는 비늘이 있어 고려 태조 때 충주 어씨로 사성賜姓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충주 지씨忠州池氏는 어떤 성씨일까요?


충주 지씨는 충청북도 충주시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입니다. 충주는 원래 고구려 때 ‘나라의 벌판’이란 뜻으로 국원성國原城이라 불렀고 신라 때는 처음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이라 부르다가 후에 ‘가운데의 벌판’이란 뜻으로 중원소경中原小京이라 불렀습니다. 충주忠州란 지명은 서기 940년 고려 태조 23년에 처음 사용했고 이후 여러 차례 지명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1956년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95년 다시 통합되어 현재의 충주시가 되었습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충주 지씨忠州池氏는 약 15만 3천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으며 전체 지씨池氏의 96.5%를 차지하여 지씨池氏의 거의 대부분은 충주 지씨라 할 수 있습니다.

 

계파는 크게 충의군파忠義君派⦁충무공파忠武公派⦁충의공파忠義公派를 비롯하여 11개 파로 나뉘어 있는데 그 아래 다시 나누어져 총 43개 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집성촌을 살펴보면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판운1리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장천 마을 가장리 중산 마을을 비롯하여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대덕1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초평리 등 전국에 크고 작은 집성촌이 있습니다. 이 중 영월군 주천면 판운1리는 병자호란 때 순절한 충성군 지계최池繼催의 고향이고, 여수시 율촌면의 집성촌은 임진왜란 때 24세손 지달사池達四가 양주에서 여수로 피난을 온 뒤에 형성되었습니다.

시조 소개


충주 지씨의 시조는 송나라 태학사인 지경池鏡입니다. 그는 서기 960년, 고려 광종 11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이 땅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인물일까요?


지경池鏡, 903~1003(충주 지씨 시조)
서기 960년(고려 광종 11년) 송나라 단명전端明殿 태학사太學士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들어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보太保 평장사平章事 벼슬을 역임하고 고려에 정착하였다.



충주 지씨의 시조 지경池鏡은 중국 송宋나라(북송北宋) 홍농弘農 출신입니다. 당시 관직은 지금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고려의 왕(고려 광종)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신으로 와서 “말은 있으나 글이 없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를 형성하기 어려우니 빠른 시일 내에 말과 글이 형성되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고려의 왕이 지경을 붙잡았지만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 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문학적으로 뛰어난 지경池鏡의 모습을 보고 고려에서 송宋으로 다시 사신을 보냈습니다. 이후 고려에 글을 만들어 주라는 명을 받은 지경은 ‘나를 포함한 여덟 명의 학자가 건너가 학회를 만들어 연구하겠다.’고 하며 고려에 오게 되었습니다. 지경과 함께 넘어온 여덟 명이 8학사八學士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충주 지씨 인물 소개


충주 지씨는 고려조에서 36명의 평장사平章事*1)와 24명의 대장군을 배출할 정도로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조에서도 충절忠節을 지킨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탄생하였습니다. 충주 지씨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을까요?

*1) 평장사平章事 : 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급. 충주 지씨는 고려 시대에 대대로 36명의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였다.



지문4걸池門四傑 : 지윤⦁지용기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지용기池湧奇는 시조의 17세손으로 고려 말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지윤池奫은 시조의 15세손으로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지문4걸池門四傑 : 지용도⦁지용수

충의공忠懿公 지용도池龍圖와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는 형제간으로 고려 말 국난기에 많은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지석영池錫永지석영池錫永은 구한말 개화기 인물로 우리나라에 우두법牛痘法을 최초로 보급하였습니다. 그는 1855년 지금의 서울 낙원동에서 가난한 양반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한의학에 정통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한학과 의학을 배우게 되고 서양 의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879년 전국에 천연두天然痘가 창궐하여 수많은 아이들이 생명을 잃자 서양의 종두법을 도입하려 애를 썼습니다.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병원인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우두법을 배우고 이듬해 26세 때는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직접 건너가 두묘痘苗*2)의 제조와 저장법 등을 완전히 습득하였습니다. 귀국한 뒤 그는 전주와 공주를 필두로 전국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우두 접종을 시행하였습니다.

1883년 고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동래부사를 지내고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승정원 좌승지와 한성부윤에 올랐습니다. 이때 그는 전국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우두를 의무적으로 접종하게 하여 19세기 말 수많은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의학 교육에도 헌신하는데 1899년 최초의 의학교인 ‘경성의학교*3)’를 설립하여 10년간 교장으로 있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글 보급에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지석영은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1905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인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하여 시행케 했습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여생을 보내며 1914년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 진료소를 차려 평생 아이들의 건강을 돌보다 생을 마쳤습니다.

*2) 두묘痘苗 : 두창에 걸린 소에서 뽑아낸 천연두 백신
*3) 경성의학교 :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지청천池靑天지청천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일본군 중위로 복무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부대를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합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독립군은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의 근간이 되어 마침내 봉오동과 청산리 대첩의 쾌거를 이루어 냅니다.

지금까지 중국의 송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선의공宣懿公 지경池鏡을 시조로 모시는 충주 지씨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한국의 성씨』를 시청하시려면?
매주 화요일 오후 3시, 오후 10시 30분
온 가족이 함께 보면 더 좋은 방송 STB상생방송!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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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상생방송 프로그램 한국인의 성씨 - 온양 방씨溫陽方氏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의 방씨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모 방方 자를 쓰는 온양 방씨溫陽方氏 80,445명, 군위 방씨軍威方氏 6,454명, 기타 방方씨 7,932명으로 총 94,831명이다. 그 외에 방 방房 자를 쓰는 성씨로는 남양 방씨南陽房氏 27,454명, 남원 방씨南原房氏 3,539명, 기타 방房씨 2,527명까지 총 33,520명으로 조사되었다. 1985년 중앙일보사 자료에 의하면 나라 방邦 자를 쓰는 방씨, 클 방龐 자를 쓰는 방씨도 조사된 바 있다.


방씨方氏의 연원


방方씨의 시조는 신라 시대에 당唐나라 문화 사절로 왔다가 귀화한 방지方智이다. 〈신유보辛酉譜〉 세록世錄 편에 보면, 그는 중국 하남성 출신인데 신라 문무왕 9년(서기 699) 중국한림학사中國翰林學士로 우리나라에 와 설총薛聰과 더불어 예의禮儀를 강론하고 선교宣敎와 학업을 가르쳐 ‘동방문교東方文敎의 종宗’이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당시 신라는 북쪽의 고구려 및 백제와 빈번하게 충돌하고 있었으므로, 친당 정책을 쓰면서 당의 문화를 수입하기에 열을 올렸고 이것이 이 땅에 방씨를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선대, 그러니까 방씨의 원시조는 중국 신화 시대의 제왕으로 전하는 염제신농炎帝神農씨의 11세손 뇌雷이다. 그가 하남河南의 방산方山을 봉토로 받은 연유로 방씨 성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신라에 온 방지方智는 뇌雷의 133세손인 군강君講의 차남이라고 방씨의 족보는 적고 있다.

씨족사의 개요


온양 방씨는 시조 방지方智 이후 중간 대의 실기失記로 방지의 후손인 온수군溫水君 방운方雲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잇는다. 온양 외에 상주尙州⋅신창新昌⋅군위軍威로 본관을 따로 쓰기도 했으나 모두 온양으로 합본했다. 어쩌다 아직 합본하지 않은 방씨가 눈에 띄지만 모두 한 시조의 후예다.

온양 방씨 가문 흥성興盛의 주역들중시조 방운方雲은 상주 출신으로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2차 견훤甄萱(후백제) 정벌에서 공을 세워 고려 광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의 벼슬에까지 이르렀다. 왕은 만년의 그를 지금의 온양溫陽(당시의 지명은 온수溫水)에 있는 과안산過雁山에 살게 하고는 온수군으로 봉하고 이 산의 이름을 배방산拜方山이라 고쳐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방씨는 온양을 세거지로 삼았다. 시조의 아들 방헌주方軒柱 이후 관향으로 삼아 온 상주尙州를 버리고 온양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방운 이후 후손들은 선대의 후광에 힘입어 고려조에서 대대로 벼슬길에 해 질 날이 없었던 명문으로 등장한다.

방씨는 무예도 뛰어나 온수군溫水君의 손자 방휴方休는 고려 현종 9년(서기 1018) 거란의 장수 소배압蕭排押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귀주대첩龜州大捷의 명장으로 기록됐고, 공민왕 10년(서기 1361)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1등 공신으로 올랐던 방절方節 등 숱한 맹장들이 나왔다.

또 숙종 때 문하성평장사門下省平章事와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던 6세손 방유方裕와 희종 때 상서령尙書令과 상서낭성찬성을 지냈던 11세손 방만년方萬年 등은 명재상으로 당대를 휘어잡던 인물이었다.


배방산拜方山은 온양 방씨의 터전
배방산은 온양 방씨와 관련이 많은 산이다. 충남 천안에서 아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산으로, 당나라 한림학사인 방지의 6세손으로 전하는 방운이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서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60여 년간 6대의 왕을 섬기면서 무훈을 세워 온수군에 봉해졌고 온양, 신창, 아산 3읍을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그가 살고 있던 온양 팔동리 과안산은 ‘방씨를 우러러본다.’는 뜻으로 배방산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산 북쪽 성재산에는 길이 약 1,500m의 석축으로 이루어진 석성이 있다. 대부분 무너져 돌무지만 보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배방산성의 둘레가 3,31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두 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도 건물지로 추정되는 여러 곳이 있으며, 성내에서 백제 시대 토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시대에 축성된 듯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한다.



원나라와의 인연온양 방씨는 중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 13세손 방신우方臣佑는 충렬왕 때 원元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평장사 등 요직을 지내고 그 후 충선-충숙왕 대에 걸쳐 원나라를 왕래하며 대원 외교에 공헌한 외교가이기도 했다. 그는 안평공주安平公主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망고태忙古台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의 시중을 들어 평장사에 올랐다. 충선왕 때 홍중희洪重喜가 고려의 비행을 원제에게 상소하자, 무고임을 밝히고 그를 귀양 보냈다. 1310년 태후太后의 명으로 고려에 파견된 그는 승속僧俗 300여 명으로 금자장경金字藏經의 사서寫書를 완성, 이를 신효사神孝寺로 옮겨 태후의 명복을 빌었다.

태정황후泰定皇后 때에도 총애를 받아 저경사사儲慶司使를 지냈는데, 때마침 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편입시키려는 논의가 있자 고려는 땅이 협소한 데다 산이 많고 들이 적으므로 불필요하다고 원제元帝에게 건의, 그 논의를 철회케 했다. 충숙왕 때 그 공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신에 올랐으며, 1330년 귀국하여 신흥사神興寺를 중수하였다.

그의 아우 방신제方臣悌도 충렬왕 때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금자광록대부평장사金紫光祿大夫平章事라는 큰 벼슬을 지냈고, 그곳에서 다시 귀화하여 오늘까지 그의 후손들이 번성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고려조高麗朝의 영화 속에 번성을 이룩해 온 방씨 가문은 이성계李成桂 혁명의 추종을 거부하고 조선 초기 한때 화를 입기도 했다.

수난으로 시작되었으나, 조선 사회에 큰 공헌을 하다고려조 절신節臣 방순方恂은 공민왕 때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를 지낸 인물로, 조선이 들어서면서 이태조(이성계)가 예조 참의 벼슬자리를 남겨 두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

15세손 방유정方有程 역시 이태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이태조는 고려 광종이 방씨 가문에 내린 온양의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내려 준 땅)를 몰수하는 한편, 방씨 일문의 혼이 담긴 배방산拜方山을 방씨를 배척한다는 뜻에서 배방산排方山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 배방산排方山은 숙종에 이르러 ’방方‘ 자 위에 초두머리(艹)를 붙여 배방排芳으로 고쳐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조에서 방씨 가문은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으나 조선에서 최초로 문과에 급제한 17세손 방강方綱을 비롯해 18세손 방련方鍊 등 초기 급제자들이 유배를 당하는 등 빛을 보지 못해 큰 벼슬길에 오른 인물은 흔치 않았지만, 방유녕方有寧은 일세의 대유大儒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종 20년 과거에 급제, 대사간⋅대사헌에까지 올랐다.

역사상 훌륭힌 무장들을 배출무장으로는 정조⋅순조 때의 방우정方禹鼎이 있다. 홍경래洪景來의 난亂 때 정주성定州城을 함락시킨 선봉장이며, 그가 홍경래의 난 평정에 참가했을 때 쓴 「서정일기西征日記」는 그 방면의 귀중한 자료로 쓰인다.

또 구국의 명장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바로 22세 방진方震(보성군수)의 사위로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의 처숙뻘인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을 비롯, 방응원方應元 등 방씨 가문의 남아들이 이충무공의 선봉장으로 분투하며 함께 싸우다 1598년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를 하기도 했다.

온양 방씨 가문 효자 인맥문무文武의 인맥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방씨 가문의 효자孝子 인맥으로 방득정方得正⋅방치정方致正⋅방희설方希說⋅방국형方國亨⋅방맹方萌⋅방계종方繼宗 등이 있다. 그중에도 ’하늘이 낸 효자‘ 방수간方秀幹의 설화가 전한다. 중시조의 24세 손인 그는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는데 어느 해 엄동설한에 병석의 노모가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한겨울에 수박을 구할 길이 없어 애타는 마음으로 하늘에 빌던 중 그 정성에 하늘이 감응했던지 밖에서 돌연 “수박 사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먹음직스러운 수박 한 덩이가 문간에 놓여 있었다는 효행담이다. 방태유方鮐維, 방원필方元弼, 방시중方時中 등도 모두 방씨 가문의 효자들로 기록돼 있다.

다양한 구국 항쟁 전개방씨 일문은 근세에 특히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독립운동가 방기전方基典, 방경호方敬鎬, 방창근方昌根, 방성도方聖道, 방인근方麟根 씨와 6.25 때 납북된 전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방응모方應謨 씨 등이 그중에도 두드러진다. 그중 방기전은 1910년 망국 후 만주로 이주, 은양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과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족회韓族會에 가담하여 유서柳西 지방 총관으로 무력 항쟁에 나섰다가 전사한 항일 운동의 숨은 별이다.

방응모는 1932년 운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에 거액을 투자해 인수하고 운영하다가, 1946년 8월 조선총독부에게 강제 폐간되자 출판사인 조광사朝光社를 경영하기도 했다. 8⋅15 광복과 동시에 조선일보를 복간, 민족 언론의 창달에 노력해 오다 1950년 납북되었다. 이후 경영을 맡은 방일영方一榮 회장 방우영方又榮 사장은 바로 그의 손자들이다.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방순희方順熙 씨는 일제 시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의 유일한 여성 의원이다. 당시 충칭重慶 방송을 통해 국내의 항일 운동과 독립 정신을 고취한 여걸이었다. 해방 후 서울대 교수로 국어국문학 연구에 공적을 남긴 방종현方鍾鉉 씨는 일제하 한글학회(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우리말을 통해 민족혼을 지키는 독립 투쟁에 숨은 공을 세웠다. 『훈민정음통사訓民正音通史』, 『조선민요집성朝鮮民謠集成』 등의 저서는 그의 애국적 우리말 문학 연구의 결정이다.


어린이들의 큰 별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일제 치하 민족의 암흑기에 이 나라 어린이들에게 횃불을 쥐어 준 소년 문화 운동의 선구 방정환方定煥은 방씨 가문이 낳은 큰 별이자 그의 이름처럼 사라질 수 없는 ‘어린이’라는 낱말과 함께 이 민족의 정신 속에 항상 살아 숨 쉬는 혼이다. 짧은 인생 역정 속에 시대를 앞서 걸으며 봉건 구조의 가족 관계에 억눌려 있던 여성과 어린이를 해방시킨 사상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아동문학가이기도 하다.

소파는 서울 토박이로 서울 한복판 ‘야주개’(지금의 당주동唐珠洞)에서 1899년 11월 9일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는 방경수方慶洙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이미 동네 친구들과 ‘소년입지회’를 조직했을 만큼 일찍 깬 소년이었던 그는 19세에 천도교주 의암 손병희의 사위가 됐다. 의암은 ‘옆얼굴만 보면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며 사람 가리는 법으로 써 왔다는데 소파의 무사 원만한 옆얼굴을 감정하고는 두말없이 셋째 딸 용화溶嬅를 맡겼다고 한다.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은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신청년〉, 〈신여자〉, 〈녹성〉 등의 잡지 편집을 하였고, 3⋅1운동 때는 오일철吳一澈 등과 함께 집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찍어 돌리다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해에 일본에 건너가 일본동양대학 문학과에서 아동문학에 전심하였던 그는 1922년 〈어린이〉를 발간,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손진태孫晋泰, 윤극영尹克榮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정했다. 어른들에게는 어린이들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고, 어린이에게는 앞날의 주인공임을 강조해 주는 뜻깊은 날로, 그때 소파는 어린이날 노래를 짓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문학가로서 일생 동안 어린이를 위해 헌신한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소파상小波賞이 제정되었다.

온양 방씨 세계도



가문의 역사상 주요 인물방강方綱(1400 ~ ?) 조선의 문신, 자字는 군필君弼, 호號는 경재敬齎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때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 참의를 역임한 방순方恂이고, 할머니는 조선 개국공신 윤호尹虎의 장녀 파평 윤씨이다. 1447년(세종 2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사성司成⋅정언正言⋅흡곡현령⋅사간司諫⋅이천부사를 역임하고, 1454년(단종 2)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방륜方輪(1464 ∼ 1534) 조선의 무신, 자字는 중여仲與, 호는 송강松江이다. 계림군雞林君에 봉군되고,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아들 방호의는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방진方震(1514 ~ ?) 보성군수를 역임한 조선의 무관이다. 사위는 이순신 장군이며, 영의정이었던 이준경과 친분이 있었다. 방진은 온양 방씨 판서공파로 온양 방씨 중시조 온수군溫水君 방운方雲의 22세손이다.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방영민方榮玟(1948 ~ )은 대한민국의 관료 출신 금융인, 기업인이다. 행정고시를 통해 관계에 입문한 재무 관료 출신으로, 대통령비서실 부이사관, 재정경제부 경제정책심의관, 공보관, 금융정보분석원장, 금융감독원 감사 등을 거쳐 서울보증보험 사장을 역임했다.

방효충方孝忠(1964 ~ ) 대한민국의 항공우주공학자이자 대학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A&M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해군대학원 연구조교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 충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KAIST 항공우주공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구관측 위성 및 정지궤도 위성의 자세제어 연구 전문가이다.

방기선方基善(1965 ~ ) 대한민국의 경제 관료다. 제13대 기획재정부 제1차관을 역임했고, 제8대 국무조정실장이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온양 방씨 등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온양 방씨溫陽方氏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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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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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다시보기 | 80억 세계인의 성씨,중국 성씨 분포도

 
[STB하이라이트]
 는 상생방송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지난 프로그램과 회차는 《한문화중심채널 STB상생방송》 공식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 소개


그들은 어떤 성씨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성씨는 어떻게 갖게 되었는가. 또 그 뿌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지구촌 전 인류의 성씨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을 〈80억 세계인의 성씨〉에서 풀어 본다.

방영 정보


시청등급 : 일반 / 방송시간 : 60분 / 제작국가 : Korea / 담당PD : 김융기 / 제작 : STB상생방송 2023


〈80억 세계인의 성씨〉 첫 번째 시간으로 ‘중국의 성씨 현황’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중국 성씨의 수를 문헌에서 살펴보면, 전한前漢 시기에 사유史遊가 편찬한 『급취편急就篇』에 130개라고 나옵니다. 또 당대唐代에 출간된 『원화성씨찬元和姓氏纂』이라는 책에는 1,232개 정도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중화성씨대전中華姓氏大全』이라는 책에 보면 11,969개의 성씨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소수 민족의 성씨를 포함하면 약 2만 2천여 개가 넘는다고 이 책에서는 정리하고 있습니다.

중국 성씨 분포도


중국 성씨 분포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최근 미국 애틀랜틱 월간지에 실린 「중국성씨 지리분포」에 의하면 중국 인구의 87%가 100개의 상용하는 성씨를 사용하고 있고 이 중 5분의 1 정도의 중국인들이 이李씨, 왕王씨, 장張씨 성姓을 사용하는데 인구가 2.75억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李, 왕王, 장張 성씨는 중국 동북 지구에 많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은 중국 한족漢族의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입니다. 이렇게 중국 동북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이李, 왕王, 장張씨와 달리 몇몇 성씨는 다른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성씨가 진陳씨입니다. 진陳씨 성姓은 중국 남동부에 많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와 달리 마馬씨는 소수 민족 가운데 대표적인 인구수를 자랑하는 만주족滿洲族과 회족回族의 대표적인 성씨입니다. 만주족 8대 성씨의 하나이고 회족에서도 가장 많이 보이는 성씨이기도 합니다.

중국 성씨의 구조


지금부터는 중국의 10대 성씨를 중심으로 중국 성씨의 구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중국의 최다 성씨 서열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동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10대 성씨에 대해서 2021년을 기준으로 보면 왕성王姓이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고 있는데요. 인구의 7.94%로 1억 530만 명 정도 됩니다. 그다음이 이성李姓 - 장성張姓 - 유성劉姓 - 진성陳姓 - 양성楊姓 - 조성趙姓 - 황성黃姓 - 주성週姓 - 오성吳姓으로 이어지며, 이 성씨들을 일반적으로 중국의 10대 성씨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1위부터 10위까지의 성씨를 합하면 전체 인구의 약 44%이고 중국의 100대 성씨를 합하면 전체 인구의 87%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10대 성씨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의 5대 성姓인 왕王씨, 이李씨, 장張씨, 유劉씨, 진陳씨 인구는 약 4억 명에 가깝습니다.

(1) 왕씨王氏
왕씨는 북방 대부분에 고루 분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이 왕씨가 집중 분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왕씨는 현재 중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성씨로 통계 지역에 따라서 이성李姓과 1, 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이씨, 왕씨 순위가 뒤바뀌는 경우도 있고 전국 통계는 빈민촌 등 주민 등록이 신고되어 있지 않은 지역이 많기 때문에 정확하게 통계를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왕씨는 오래전부터 대성大姓을 이루었기 때문에 중국인을 상징하는 캐릭터로서 ‘왕 서방’이라고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왕씨의 주요 인물

왕망王莽 (BCE 45 ~ CE 23)
왕씨를 일으킨 인물로 중국의 전한前漢을 타도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신新나라를 세웠다.


왕희지王羲之 (307 ~ 365)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동진 시대의 서예가이다.


왕이王毅 (1953 ~ )
중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2) 이씨李氏이씨도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성李姓은 해외에 많은 사람들, 그러니까 동남아시아나 북미 지역에 이씨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씨는 장씨와 더불어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관용구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는 송대宋代부터 쓰인 말인데요. ‘장씨의 셋째 아들과 이씨의 넷째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름이나 신분이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말하기를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김씨, 이씨, 박씨, 최씨 중 한 명은 맞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4대 성씨인 김씨, 이씨, 박씨, 최씨가 인구의 약 50% 정도를 차지할 만큼 흔한 성씨라는 뜻을 말하는데요. 마찬가지로 장삼이사라는 말은 그만큼 흔한 성姓이라는 뜻입니다.

●이씨李氏의 기원
전욱 고양씨의 후손, 고요를 시조로 하는 영씨嬴氏
전욱 고양씨顓頊高陽氏의 직계 후손으로 전욱의 먼 후손이 되는 고요皐陶를 시조로 하고 있습니다. 제요帝堯가 고요에게 리관理官이라는 직관을 맡겼는데 그 아들 백익伯益이 우禹의 치수 사업을 도와 공을 세워서 영성嬴姓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고요의 후손들은 리관理官이라는 직을 세습하면서 이씨로 성을 삼았습니다. 그러다 후대에 와서 이씨理氏와 같은 음인 이李 자를 성씨로 삼았다고 합니다.

오얏나무 아래에서 태어난 노자老子
노자의 성姓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노자가 이李씨라는 전설이나 내용에서 보면 노자가 오얏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이李씨를 득성得姓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한족漢族이 된 선비족의 성씨가 이씨李氏
그리고 이씨는 당대唐代 황족의 성씨입니다. 당대 중앙아시아 쪽에 있는 수많은 소수 민족이 한족이 된 후 성姓을 얻게 되거나 하사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중 대표적으로 한족漢族이 된 선비족이 이씨 성姓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④ 북위 효문제를 따라 들어온 고호高護가 하사받은 성씨姓氏
북위 시대에 고호高護씨가 효문제孝文帝를 따라 중원에 들어온 후에 이씨 성姓을 하사받았다고 합니다.


이씨의 주요 인물

이릉李陵 (? ~ BCE 74)
중국 전한前漢의 무장武將으로서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와 싸우다 항복한 이후 흉노 선우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우교왕右校王으로 봉해졌다. 이후 선우의 고문으로 활약하다 병사했다. 그리고 이씨의 주요 인물 중에 한대漢代 이씨 외에 당대唐代 황제가 많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황제를 배출한 성씨라고 할 수 있다.


이연李淵 (566 ~ 635)
당 고조唐高祖로 당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이백李白 (701 ~ 762)}]
당나라의 시인으로,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 추앙받으며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이광요李光耀 (1923 ~ 2015)
이씨는 해외에도 많이 진출해 있는데, 대표적으로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도 이씨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많고 베트남에도 이씨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는 총리들이 거의 다 이씨이다. 대표적으로 싱가포르의 전 총리인 이광요李光耀는 31년간 총리에 재임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소룡李小龍 (1940 ~ 1973)
절권도를 창시한 무술인이며 쿵후 영화를 혁신한 영화배우인데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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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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