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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의 민족독립운동입니다. 항상 독립후의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것이 보천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보천교는 여러분이 배우는 교과서에도 등장하지 않고, 어쩌면 보천교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도 있을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떤 일본인은 그런 말을 합니다. 당시의 1930년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 다수의 조선인들이 조선독립을 이야기하고, 보천교를 믿지 않으면 조선민족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천교의 역사는 100여년간 왜곡되고 숨겨져 왔습니다. 10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나서야 이제서야 이야기를 합니다.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에 대한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편견을 버리자! 는 겁니다.

3.1운동 100주년인데, 이제서야 이 보천교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수많은 활동 중,

김형렬의 활동 하나 정도 나와있지,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제대로 평가받기를 원하면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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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의 전신인 보천교!

당시 조선인구 2000만중에 일본문서기록 600만, 비공식기록 700만!

아주 시골 사는 분이나 노인, 아이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조선민족이 믿었던 당시 상황상 국교라고 봐도 무방한 종교였습니다.


우리 조상님들도 거의 모두가 신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항아리장독대의 청수모시고 빌던모습들 아시죠?
근데 왜 지금은 모르냐?

독립운동자금의 대부분이 이 보천교에서 보내졌습니다. 그래서 김구선생님이 광복하고 귀국하자마자 보천교의 성지 정읍에 내려와서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독립운동자금이 보내지니, 일제가 보천교를 극도로 탄압했고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해서 보천교는 와해되고맙니다. 그 후 바로 육이오가 터지고. 당장 먹고살길없이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살다보니 민족의 정신문화 신앙문화가 모두 잊혀지고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옛날 신라시대 최치원선생은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유불선, 기독교는 서선이라고 봅니다. 유불선의 뿌리가 우리나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종교의 뿌리가 9000년전 환국 배달국시대에 뻗어져나갔다가 우리나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 정신문화가 신교인데, 증산도는 바로 이 신교의 열매이자, 모든종교의 최종 결론입니다.

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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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찾도 TV '독립운동하다 쫄딱 망한 종교'?

 

얼마전 8.15 광복이 지났습니다. 올해가 광복 73주년이라고 하는데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 독립운동가 중 마지막 생존자인 이우석 선생님이 24년 전인 1994626,

8평짜리 무허가 단칸방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 쓸쓸히 눈을 감았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목숨 걸고 나라 지킨 분이 생활고라니요.

사실 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삶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독립운동사의 비하인드 스토리~! 독립운동하다 졸딱 망한 종교~!?

함께 보시죠.

 

# 민족종교의 독립운동

을사오적 처단, 무오독립선언, 3.1운동, 6.10만세 운동, 상해임정수립,

청산리, 봉오동전투 등 굵직한 독립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종교인들, 특히 민족종교인들 이었습니다.

 

당시 종교는 유교, 불교, 기독교, 천주교를 비롯해 천도교, 대종교, 보천교라는 민족종교가 있었습니다.

종교계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당시 조선일보 항일운동 기사를 보면 알 수 있구요,

특히 민족종교에서 많은 독립운동을 펼쳤는데요.

우리 민족의 혼과 정신이 그대로 담겨있는 민족종교는 당시 핍박받는 조선민중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민족통합에 큰 역할을 했죠.

 

# 독립운동의 중심, 보천교

이 중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항일운동건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 있어요. 바로 보천교였습니다.

유교, 불교, 기독교는 알겠는데 보천교는 좀 생소하죠?

보천교는 증산상제님을 모시던 차경석성도가 상제님의 후천개벽을 성취하기 위해

도세를 일으킨 민족종교입니다.

당시 인구 1800만 중 3분의 1 600만 이상이 신앙을 했어요.

인구의 3분의 1이 신앙했으니 엄청났죠.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의 조상님들 중 분명 보천교신앙을 하셨던 분이 있었을거예요.

보천교의 항일운동건수가 압도적으로 많을 수 밖에 없죠.

 

엄청난 교세를 자랑했던 보천교는 당시 조선민중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희망과

독립을 할 수 있다는 확신과 비전을 제시하며 그 어떤 종교보다도

주체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 보천교의 독립운동 1 - 무오법정사항일운동

그럼 보천교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을까요?

인구의 3분의1이 신앙했는데 조직력이며 경제력이며 엄청났죠.

보천교의 독립운동은 곳곳에서 진행되었는데요. 대표적으로 몇 개만 알려드릴게요.

 

먼저 무오법정항일운동이 있습니다. 1918년 제주도에서 엽총과 농기구로 무장한

사람들이 중문 주재소를 불 지르고, 주재소장과 일본경찰들을 구타한 사건입니다.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 항일운동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인데요.

불교에서 일으킨 운동으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보천교와 불교의 연합투쟁이었습니다.

이 일로 보천교는 지도자와 간부들이 구속, 수배되는 등 큰 탄압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보천교인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았죠.

 

# 보천교의 독립운동 2 물산장려운동

이에 보천교는 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국권상실 후 우리민족의 경제권을 살리기 위한 중요한 독립운동의 요소로서

보천교의 조직과 자금이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보천교는 대흥리에 유리공장, 직조공장, 농기구공장 등을 지어

물산장려운동을 촉진하게 됩니다.

 

# 보천교의 독립운동 3 독립운동자금지원

보천교는 특히 독립운동자금을 굉장히 많이 지원했습니다.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한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요.

1921916일 보천교의 재무담당이었던 김홍규의 집에서 열린

간부회의에 일본 경관들이 습격하게 됩니다.

 

김홍규를 비롯한 여러 간부들이 체포 되면서 가택수사까지 당하게 되고

이 때 마루 밑에서 10만 원가량이든 항아리가 발견되었는데 이 돈은 상해임시정부로

전달될 군자금이었습니다. 모두 압수당하게 되죠.

 

1924년엔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2만원을 지원했고,

자금이 없어 부대를 해체 할 상황에서 보천교의 지원 덕에 청산리 전투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보천교 본소를 자주 드나들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받았다는

기록들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김구선생님은 광복직후 보천교 본소가 있던 정읍에 방문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

 

 

(자료) 화폐가치 (쌀을 기준으로 환산)

1920년대 10만원 2017년 기준 약 8(791,349,250)

2만원 2017년 기준 약 12(122,954,363)

 

 

 # 일제의 민종종교 탄압 유사종교 정책

그런데 왜 우리는 보천교를 전혀 알지 못할까요?

일제는 1915년에 불교, 기독교를 제외한 조선의 모든 민족종교를

유사종교’, 사이비종교로 격하시켜 감시하고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 한민족의 정신을 담은 민족종교가 민족운동의 원천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일제에 의해 민족종교는 유사종교, 사이비라는 누명을 쓰고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민족종교라는 말이 생소하고 어색한 이유가 여기 있는 거죠.

 

# 일제의 보천교 탄압 - 보천교의 해체

그중에서도 보천교는 일제탄압의 1순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의 계속된 탄압을 받던 보천교는 교단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과 타협점을 찾게되는데요.

바로 시국대동단이라는 것을 함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국대동단은 일제가 보천교를 완전히 파괴하기위한 계략이었습니다.

시국대동단 취지 연설에서 모인 사람들 중 보천교 단원이 한 명도 없고

친일인사들만 모아놓은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보천교는 일본에 의해 유사종교로 뿐만 아니라 친일단체라는 오명까지 쓰고

단체가 해체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보천교 실제 사진과 평면도>

<보천교 십일전 해체당시 모습 실제 사진>

그리고 보천교 본소건물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어 전국 사찰들로 옮겨졌습니다.

십일전이라고 하는 보천교 본소는 규모가 경복궁 근정전보다 크고,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까운데요.

 

십일전의 본전 기둥을 사용해서 지은 것이 조계사 대웅전입니다.

뭐 독립운동하다 집까지 다 뜯겼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이후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신사참배압력에 굴복했지만

보천교 간부는 단 한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 마무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이였고 조선의 혼이고 희망이었던 보천교.

수많은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제의 탄압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부활하여 증산도로 맥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보천교를 신앙하시던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께서 광복이후

증산상제님 신앙을 부활시켰고, 후천개벽을 최종적으로 완성한다는 사명으로

탄생한 것이 증산도입니다.

 

요즘 사회곳곳에서 크고 작은 적폐청산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은페된 독립운동사가 바로서야만 뿌리부터 정의로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상으로 내찾도TV였습니다.

 

*내찾도 TV 영상볼 수 있는 사이트 : https://youtu.be/0uQ7hFYmc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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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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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표창하신 민영환의 충의, '혈죽'

 

민영환을 아시나요? {민영환(閔泳煥, 1861~1905)}

그는 조선말의 문신으로 명성황후의 조카입니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5년 11월 4일 새벽,

자신의 명함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자결한 인물입니다.

 

 

뒤에 충정(忠正)이라는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민영환이 죽은 뒤에 그가 자결할 당시 옷이 있던 자리에서 미스터리한 일이 발생해

당시 조선 전체를 떠들석하게 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 미스터리한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가 죽은 자리,

그의 자택마루에서 피묻은 옷을 두었던 자리에 혈죽이 돋아난 것인데요.

보통 대나무는 숲을 이루고 자라나는 특성이 있어 

대나무 한줄기가 집 안의 마루에서 자라나는 그와 같은 일은

불가능 하다고 하여 그 당시 나라전체가 그 혈죽이 민영환의 충의의 표상이라 하며 들썩였다고 합니다.

 

일제에서는 그 일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조작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열심히 조사하였다고 하는데, 증거를 발견하지 못해

대나무를 뽑아 던져버렸다고 합니다.

그것을 민영환의 가족이 수습하여 내려 온 것을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중이라고 하네요.

 

 

또한 그 혈죽의 잎의 갯수도 민영환이 죽을 당시 나이, 45개여서 더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이 일 이후 독립운동도 더 활발히 전개되었다고 하니

죽음으로써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민족이 깨어나길 염원하던

민영환의 충의가 놀랍고도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상제님께서 미리 아시고,

민영환의 충의를 기리셨습니다. 증산도 도전에 그 구절이 나오는데요.

정말 놀라운 그 구절, 함께 살펴보시죠.

 

 

을사년 늦가을에 김자현의 집에 계시면서 자현에게 이르시기를 
 
“이 방은 이후에 반드시 약방이 되리라.” 하시며 글을 쓰시니 이러하니라. 
 
 
大人輔國正知身이요 磨洗塵天運氣新이라
대인보국정지신       마세진천운기신
遺恨警深終聖意요 一刀分在萬方心이라
유한경심종성의    일도분재만방심

대인이 나라 위해 일함에 정히 자신을 알고
티끌세상 갈고 씻어내니 운수가 새롭구나.

남긴 원한을 깊이 경계하여 성상(聖上)의 뜻을 다하고
한 칼로 몸을 가름에 천하 사람의 마음이 있노라. 
  
 
이 글을 자현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민영환(閔泳煥)의 만장(輓章)이니라.

이 글을 암송하면 후일에 반드시 쓰일 곳이 있으리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시세(時勢)를 짐작해 보건대,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으로 세상일을 알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5편 114장]

 

상제님께서는 또한 민영환의 충의를 혈죽으로써

치하하셨는데요.

 

옷이 있던 자리에서 혈죽이 돋아난

미스터리한 그 사건이 사실은 상제님의 조화권으로

이루어 진 일이라는 것이죠. 그 구절도 증산도 도전에 나옵니다.
 

 

민영환의 충의에 혈죽을 내리심 

 
하루는 한 성도가 여쭈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자결하였는데 
 
 
벽혈(碧血)이 나오고 그 자리에서 청죽(靑竹)이 생겨났다 하니 이는 어떤 연고입니까?” 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의롭게 죽었으므로

내가 혈죽을 내려 그의 충의(忠義)를 표창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5편 140장]

 

 

140:2 벽혈. 푸른빛을 띤 진한 피.
 

140:2 청죽. 혈죽(血竹) 또는 절죽(節竹)이라 불린다. 원로 역사학자 최태영 박사는

“당시 혈죽은 잎사귀가 45개 있었으며 이 숫자는 민 충정공이 순절할 때의

나이와 같은 수여서 더욱 신비스러웠다.” 하였다. 
 

 

 

민영환 혈죽 동영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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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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