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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꽃' 신경수PD "동학운동은 배경, 지금 청년들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 - 전명숙(전봉준) 장군과 노비제도의 철폐 그리고 민족종교 동학.

 


http://sbsfune.sbs.co.kr/news/news_content.jsp?article_id=E10009463853&plink=COPYPASTE&cooper=SBSENTERNEWS

신경수 PD는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잡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동학농민운동은 그 정신이 임시정부로 이어져서 대한민국을 여는, 굉장히 중요한 한국 전·근·현대로 이어지는 굵직한 흐름이다. 드라마가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따라가긴 하지만, 정현민 작가와 제가 이 시대를 선택한 건, 2019년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이 겪는 분노와 좌절, 그리고 그걸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전했다.

불러오는 중입니다...

2019년 4월 26일, 지난 금요일부터 SBS의 새로운 드라마 녹두꽃이 방영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전설이 된 미완의 혁명, 동학농민항쟁에 대해서 다룬 드라마인데요.

시청자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2부가 방영되었습니다.

전설이 된 미완의 혁명, 동학농민항쟁!


1894년 조선 강토를 피로 물들인 동학농민항쟁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봉건의 한 시대를 마감하고 근대의 신새벽을 열어젖힌 전환기적 사건이었다.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믿음으로 자유와 평등, 민족 자주가 실현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미완(未完)의 혁명이기도 했다. 전봉준의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하던 혁명군은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조일연합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살아남아 3·1 운동으로, 항일독립투쟁으로, 4·19로, 6월 항쟁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고 믿었던 선조들의 우렁찬 사자후!


이 드라마는 ‘동학’하면 떠오르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일대기가 아니다.

항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궤도를 이탈해버린 민초들의 이야기다.

혁명군과 토벌대로 갈라져 서로의 가슴에 총구를 겨눠야 하는 이복형제가 써내려가는 애증과 영욕의 드라마다.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무명전사들, 혁명과 반혁명이 교차하는 와중에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았던 갑오년의 위대한 백성들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노비제도의 폐지를 불러온 동학혁명


이제는 없어진 노비제도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조실록에 실린 기사의 한 대목입니다.

 


"노비 가격은 대부분의 경우에 오승포(五升布) 150필을 넘지 않습니다. 말의 가격은 400~500필에 달합니다.

이는 가축은 중히 여기고 사람은 가벼이 여기는 것이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사람인 노비 가격이 가축인 말馬 가격의 삼분의 일 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을 사고 파는 것도 충격적인데, 그것도 짐승보다 못한 값어치가 매겨졌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을 통해보면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짐승'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비를 셀 때도 ~명(名)이나 ~인(人)을 쓰지 않고 가축이나 시체를 셀 때 쓰던 ~구(口)를 썼습니다.

노비문서

 


조선시대의 노비들은 한 평생 노동에 종사하며, 주인의 필요에 따라 물건처럼 팔려졌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로 가면 노비의 가격은 더 떨어져서 소나 돼지만도 못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자료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며 살았던 그들.

깊은 한의 멍울을 지고 살았을 설움은 여춘형의 만시에서 절절히 느껴집니다.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


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내세에는 그런 집에 나시오"

 


- 여춘형이 정초부라는 노비를 장사지내주고 지은 만시晩時

이러한 노비제도가 철폐된 결정적인 계기는 전봉준 장군이 이끌었던 동학혁명에 있었습니다.

 

물론 신분제를 철폐하라는 공식적인 요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농민군은 농민혁명 과정에서, 횡포한 양반과 수령을 비롯한 관속, 그리고 양반 지주에 대한 처벌을 단행했습니다. 또한 농민군 사이에서는 신분의 벽을 없애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경주되었죠. 이런 활동은 집강소 기간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농민군은 집강소기간 이전에도 서로 '접장'(원래는 서당에서 나이와 학력이 가장 높은 사람을 뽑아 선생을 돕도록 맡긴 사람)이라는 평등한 호칭을 썼는데 집강소 기간에는 그것이 일상화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평민 이하 계층의 참여가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농민군의 신분타파운동은 점차 격렬하게 전개되었죠.

 

농민군은 분명 양반도 상놈도 없는 그런 신분 없는 세상을 꿈꾸었습다.

비록 이를 글로 써서 공식적으로 요구하지는 못했으나, 농민혁명 과정에서 행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출한 것입니다.

신분제도의 폐지요구는 결국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신분제는 1894년 6월 28일 군국기무처의 의안을 통해 법적으로 철폐되었습니다.

출처 : www.cein21.net/donghak

 

우리 일은 남 잘되게 하는 공부니 남이 잘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우리 일은 되느니라.

전명숙(全明淑)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되어 조선 명부대왕(冥府大王)이 되었느니라. [증산도 도전 2:29:1~2]

동학은 상제님께서 인간으로 오실 것을, 앞으로 한반도에 상제님의 대도(무극대도)가 날 것을 최수운이라는 이름없는 선비를 통해서 선포하신 사건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최수운 대신사 사후의 이야기지요. 다만 녹두꽃 드라마가 나오면서 상제님을 제대로 모셔야 한다는 시천주 정신과, 우리의 위대한 정신문화가 드러나게 되어 기쁩니다.

증산도의 진리 세계는 그 이치와 포함하는 범위가 실로 광대무변하고 신도와 인사,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우르는 이야기이므로, 부족한 설명만으로는 일간 이해하기가 어려우시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정성과 열린 마음으로 무료로 보내드리고 있는 소책자를 탐독하신다면 어느 순간 ’이것이 진리구나‘하고 분명 깨달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증산도 도전” “이것이 개벽이다” 등 증산도의 진리서적 필독서가 있습니다. 이 책자들은 어느 서점에서도 구입가능하십니다. 또한 증산도에서는 TV로는 STB 상생방송으로 진리이야기가 나가고 있으며, 오프라인 상에는 각기 지역의 사는 도장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8관법 교육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교육 프로그램은 무료이므로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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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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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길을 찾다.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

 

정지운의 천명신도 사진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까요? 이런 의문점을 품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고전들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그 안에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던 성인들의 지혜가 고스란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예기치 않게 고전에서 삶의 지침을 얻기도 하지요. 요즘 퇴계록을 읽고 있는데,

서문에서 언급되는 정지운의 천명도의 한 대목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참 의미에 대해서 느껴볼 수 있었는데요.

먼저 정지운이라는 인물과 천명도에 대해서 잠깐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천명도란 조선전기 학자 정지운이 천명과 인성의 관계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여 서술한 유학서이다.

천명도()는 중종32년(1537) 정지운(, 1509-1561)이 《천명도설》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에서 ‘인물지성()’을 논하는 설을 취하고 그 밖의 여러 설을 참고하여 그린 그림이다. 그후 명종8년(1553) 퇴계 이황(, 1501-1570)이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의 《태극도설》, 소옹()의 《선천도》의 도설 등을 절충한 고증을 받아 새로 천명도()를 작성했는데, 정지운이 그린 것을 천명구도()라 하고 이황이 수정한 것을 천명신도()라 한다.

그림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현상을 본떠 위로 천명() 영역을 그리고, 아래로는 인체의 각 부위를 본떠 그렸다.

족자의 표구법은 중국 당나라에서 발달하여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래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중상류계층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천명도족자 [天命圖-] (e뮤지엄)

〈천명도설〉로 명제된 것은 1640년(인조 18) 이식(李植)이 우연히 민가에서 1책을 구해 전주부윤 한흥일(韓興一)의 도움을 받아 중간한 것이다. 이것은 규장각,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일본 도요문고[東洋文庫]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정숙공추만선생실기 貞肅公秋巒先生實紀〉·〈퇴계전서〉에도 〈구도〉와 〈신도〉가 실려 있는데 조금씩 다르다. 천과 인의 관계는 성리학의 기본개념으로 천명도의 변천과정은 16세기 한국 성리학의 발달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 브리태니커


 

 

이 내용은 제가 퇴계집 머릿말에 나오는 내용으로 제가 감명깊게 읽은 구절입니다.

정지운의 천명도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천명도에서는 인간이 천명을 부여받아 태어났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 자신이 부여받은 천명을 진실되게 알고 천명을 높이고 믿고 따르면 사람다운사람이 되고 자기완성을 이룬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성인이 되면 하늘과 땅의 사업에 참여하여 도울 수 있는 자가 되니 천지와 자격이 나란한 삼재三才가 된다고 한다. 퇴계의 도학은 인간 주체가 하늘로부터 받은 천명을 온전하게 인식하고 실천하는 데서 시작함을 알 수 있다."

 

 

과연 인간에게 부여된 천명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냥 생각해봐서는 알기가 어려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증산도 도전에서 이것에 대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상제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답을 찾을 수 있는데요.

도전 2편 23장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천지에서 사람 쓰는 이 때에

  •  
  • 1 하루는 형렬에게 일러 말씀하시니 이러하니라.

  • 2 形於天地하여 生人하나니

    형어천지생인

    萬物之中에 唯人이 最貴也니라

    만물지중 유인 최귀야

    하늘과 땅을 형상하여 사람이 생겨났나니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니라.

  •  
  • 3 天地生人하여 用人하나니

    천지생인 용인

    不參於天地用人之時면 何可曰人生乎아

    불참어천지용인지시 하가왈인생호

  • 천지가 사람을 낳아 사람을 쓰나니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 때에 참예하지 못하면

    어찌 그것을 인생이라 할 수 있겠느냐!

  • 4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선천 인간 중에 천지의 홍은(鴻恩)을 갚은 사람이 없느니라.” 하시니라.

  • (증산도 道典 2:23)


 

 

우주에서 사람을 길러내어 딱 한번 쓰는 때가 있으니 바로 우주의 가을인 개벽이 오기 전,

바로 지금입니다.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왜 살아가는지를 알지 못하면 인생이 허무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도 결국 허무해지죠.

사람은 자신의 천명을 깨닫고 그 천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에서 진정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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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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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은 어떻게 전해져 왔는가? 

 천부경 유래와 천부경 해석



<천부경>의 유래

 


 


<환단고기>에 따르면 <천부경>은 인류의 시원국가며 우리 민족의 뿌리인 환국으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글이다.
그 후 약 6,000년 전 배달국 시대에 환웅천황이 천부경을 신지혁덕에게 명하여 녹도문자로 기록하게 했다.
녹도문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자로, 사슴 발자국 모양을 따서 만든 것이다.

 

그런 이유로 환웅천황을​“<천부경>의 비조” 로 꼽기도 한다.

 그러다 단군조선에 이르러 전자篆字로 전하게 됐다.

<환단고기> 중 <천부경> 81자.

 


최치원이 전자를 한문으로 옮겨훗날 신라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이 옛 비석에 전자로 새겨진 천부경을 보고 한문으로 풀이하여 서첩을 만들어 세상에 전했다.

고운의 문집인 <최문창후전집>에 실려 있는 <고운선생사적>에는 “태백산에 단군의 전비가 있었는데 그 글을 읽기가 몹시 힘들고 해석하기가 어려웠다. 고운이 그것을 번역했다.” 라고 기록돼 있다.

 


<태백일사>와 묘향산 석벽본최치원 이후 천년의 세월을 지나 조선조 중종 때 일십당주인 이맥李陌(1455-1528)이 <태백일사>에 천부경을삽입하여 그 명맥을 이었다.

한편 1911년 <태백일사>를 포함한 5종의 사서를 망라하여 <환단고기>를 편찬한 운초 계연수(1836-1920)가 그 뒤 1916년 묘향산 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발견하고 이를 탁본하여 세상에 전했다. 최치원이 한문으로 번역하여 새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를 ‘묘향산 석벽본’ 이라고 통칭한다.

 



이상은 대개 <태백일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약술한 것이다.

 다만 최치원이 묘향산의 한 바위에 <천부경>을 새겼다는 말은 없다는 사실을 특기해 두어야 한다.

‘묘향산 석벽본’ 과 <태백일사>의 그것은 전문이 일치한다.

<최문창후전집>과 노사본<천부경>의 다른 본本으로는 고운의 문집인 <최문창후전집> 뒤편에 실려 있는 것과 노사蘆沙(기정진 1798-1876)본이 있다.

전자는 고운의 친필이 아니고 1926년 후손인 최국술이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소개된 것을 문집재편집시에 <고운선생사적>에 수록한 것이다.


 ‘묘향산 석벽본’ 과는 7개의 글자가 다르다.

그런데 일곱 자 모두음은 같아 누군가 암송하던 것을 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자인 노사본은 조선말의 유학자 노사 기정진 계통으로 전해진 것으로 지금도 적지않게 유포돼 있다.

석벽본과의 차이는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지地’가 ‘중中’ 으로 돼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 본이 그 출처를 최치원에 두고 있음은 공통적이다.

<농은 유집본>에 전하는 갑골문 <천부경> 

 



이밖에 한자의 초기 형태인 갑골문으로 기록된 <천부경>이 전한다.
고려 말 육은六隱 중 한 사람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1328-1401)의 ‘농은 유집본遺集本’ 이다.
역시 묘향산 석벽본과 다른 글자가 눈에 띄는데, ‘석삼극​析三極’에서 ‘석析’이 ‘신新’, ‘삼三’ 이 ‘기氣’, ‘운삼사運三四’에서 ‘운運’이 ‘충衷’으로 돼 있다. 그렇지만 모두 81​자인 것은 변함이 없고 전체적으로 뜻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가운데 <태백일사>에 실리고 묘향산 석벽에 발견된 ​<천부경>이 가장 많이 인용된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 <천부경>

<천부경>은 환국 이래 국가적으로 매우 중시된 경전이었다. 그것은 나라 다스림의 경전인 동시에 기도문이었으며 또한 삶의 규범이었다. <환단고기>에서는 여러 대목에서 <천부경>을 언급하고 있고 <단기고사>에서도 <천부경>이 언급돼 있다. 

* 환웅천황께서... 백성에게 교화를 베푸실 때, <천부경>을 풀어 설명하시고 <삼일신고>를 강론하여... 큰 가르침을 베푸셨다. <삼성기>
* (11세 단군은) 모든 유희가 끝난 뒤에 누대의 전각에 오르시어 <천부경>을 논하고 <삼일신고>를 강론하시고...<단군세기>
* (대진국 4세 문황제께서) 이듬해(738)에 태학을 세워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태백일사]<대진국본기>)
* 시조의 천부경을 참고하여 보면... 이것이 일시무시인데, 일이 무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제2세 단군 부루에게 석자장石子丈이 아뢰는 말에서, <단기고사> 제2세 부루)

또한 앞 기록의 출처인 <태백일사>에서는 목은 이색(1328-1396),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 등이 <천부경> 주해를 남겼다고 밝히고 있다.

 



김시습의 <징심록추기>와 <천부경>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과 거의 동시대 사람이며, 생육신 가운데 하나인 김시습(1435-1493)은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에서, 우리 역사상 왕권과 결부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금척金尺에 천부경이 새겨져 있음을 전한다.

 

금척이 <천부경>의 원리를 본 따 제작됐으며 <천부경>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금을 사용했고 무오류성을 지닌, ​우주 만물의 척도로서의 자(尺)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금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내가 일찍이 금척지를 읽으니, 그 수리가 매우 어려워 알수가 없었다.

 

대저 그 근본은 곧 천부의 법이다... 그형상은 삼태성이 늘어선 것 같으나 머리에는 불구슬을 물고 네 마디로 된 다섯 치다. 그 허실의 수가 9가 되어​ 10을 이루니, 이는 천부의 수다.



정조 때 삼성사 제문과 <천부경>

또 정조 때 구월산 삼성사에서 올린 치제문致祭文에는 “천부보전天符寶篆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실적 물증이없으나​, 그 신성神聖이 이로 인해 서로 전수한 것이 동국역사에서 일컬어지고 있음이 그 몇 해이런고.”(중요민속자료 제218-10호 치제문) 라고 기록돼 있다.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삼위 성조 위패가모셔져 있는데 고려와 조선의 역대 제왕들이 이곳에서 치제를 드렸다.

 

정조가 올린 제사 가운데 낭송되었을, 위구절에는 <천부경>을 천부보전으로 일컫고 있다. 보전은 존귀한 전문이란 뜻이다.

 

치제문은 천부보전의 사실적인 물증은 없지만, 신성이 서로 그것을 계승했다는 기록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수천 년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밝히고 있다.


천부보전에서 전篆 자는 ‘전자 전’, ‘글씨 전’ 으로 고대 한자체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데, 돼지 발자국같이 동글동글한 형태로 돼 있다. 큰 비석의 상부에서 이런 형태의 한자체를 자주 볼 수 있으며 도장, 도장 글에 쓰인다.

​이 점에 주목하여 정조 때에는 <천부경>을 바위나 석벽 등에 전자체 형태로 새겨져 전래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런 지적은 단군조선에 이르러 <천부경>을 전자篆字로 전하고, 최치원이 옛 비석에 전자로 새겨진 <천부경>을 보고 한문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매우 흥미롭다.

이상 <황경선, <천부경과 신교사상>, 19-32쪽 요약> 

<< 천부경 전문 내용과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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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개벽- 근대사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의 하얼빈 의거義擧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 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천지의 일등일꾼 출세 공사

무신년 겨울 상제님께서 대흥리에 계실 때 하루는 청수를 모시고 마루에 쪼그려 앉으시어 내성에게 명하시기를 “내 몸을 결박하라.” 하시니 내성이 겁에 질려 아뢰기를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감히 당신님의 몸을 묶을 수 있겠습니까?” 하매 말씀하시기를 “내가 명하거늘 어찌 망설이느냐! 단단히 결박하라.” 하시니라.

내성이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명을 받들어 옥체를 꼭 묶으니 상제님께서 다시 명하시기를 “내성아, 큰 몽둥이로 내 몸을 세게 치며 ‘일등방문(一等方文)이 제일이냐, 이등방문이 제일이냐? 일등방문이다!’ 하고 소리쳐라…

내성이 엄명에 눌려 “일등방문이 제일이냐, 이등방문이 제일이냐? 일등방문이 제일이다!” 하고 크게 소리치며 있는 힘껏 옥체를 세 번 내리치니 상제님께서 떼굴떼굴 구르시며 “아이고, 이놈이 나를 죽이네! 이룰 성(成) 자로 이름을 고쳐 줬더니 나를 죽이네!” 하고 비명을 지르시니라.

잠시 후에 상제님께서 껄껄 웃으시며 “이제 되었다. 이등방문이 넘어가니 일등방문인 네가 낫다.” 하시니라.

 

이등박문을 폐하심


다시 내성에게 명하시기를 “담뱃대를 들고 나를 향해 총 쏘는 흉내를 내며 꼭 죽인다는 마음으로 ‘탕탕’ 소리를 내라.” 하시니 내성이 명에 따라 총 쏘는 흉내를 내거늘 이에 한 성도가 여쭈기를 “이제 이등박문을 폐하시는데 어찌 내성을 쓰셨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안성(安姓)을 썼노라.” 하시니라.
【도전 5편 341장 1~14절】

 

천지 일등일꾼 내는 공사

상제님과 초대 조선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과의 만남은 1909년 봄, 이등박문이 통감을 사임(1909년 6월)하기 전에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 팔도에 상제님의 성예聲譽가 널리 퍼진 결과, 많은 지식인들이 상제님을 한 번이라도 친견하고 싶어 했다.

이등박문 역시 여러 차례 만남을 청했는데, 서울 통감부를 찾아가신 상제님의 용안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잠시 후 이등박문이 깨어나자 상제님의 성령을 받은 김형렬 성도가 그의 불의를 꾸짖는다. (도전 5편 365장)

이 만남이 있기 전 무신년(1908) 겨울에 상제님께서는 ‘천지의 일등일꾼 출세 공사’를 보신다. 이 공사에서 상제님은 안내성安乃成 성도로 하여금 당신님의 성체를 단단히 결박하게 하시고 큰 몽둥이로 세게 치게 하셨다. 당신님이 이등방문二等方文이 되시고 안내성 성도가 일등방문一等方文이 되어 상제님을 폐하게 하신 것이다.

충격적이고 놀라운 방식으로 행해진 이 공사는 상제님의 천지대권을 안씨 일꾼에게 전수하는 종통 전수 공사였다. 동시에 상제님의 후대 일꾼들에게 ‘천주 아버지를 이기는 신앙을 하라’는 심법을 전수해 주신 공사이다.

이 공사의 말미에 상제님께서는 안내성 성도로 하여금 총 쏘는 흉내를 내며 꼭 죽인다는 마음으로 총소리를 내게 하신다. 이 공사로 인하여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받아 쓰러진다.

하얼빈에 울려 퍼진 역사의 총성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기 위한 출영객들이 역사驛舍 안팎으로 들어차 혼잡했다. 신변 경호를 위해 러시아 군인들이 호위 삼아 경계를 서고 있었다.

오전 9시 일본 제국의 전 총리이자 제1대 조선통감이었던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왔다. 마중 나온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 일행이 열차 안으로 들어간 후, 두 사람은 약 20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

이어 코콥초프의 권유에 따라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기 위해 이토가 열차에서 내렸다. 그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의장대를 사열하고, 외국영사단 앞으로 가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 의사는 러시아 군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토가 안 의사와 10보 떨어진 지점에 접어들 찰나, 도열해 있는 군인들 사이로 이토를 겨냥한 안 의사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3발이 이토의 가슴과 흉복부에 명중하였다. 안 의사는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 것을 대비해 다시 3발로 주위의 수행 비서관 모리(森),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川上), 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田中)를 쏘았다.

저격 직후 러시아 헌병들이 덮치자, 힘에 밀려 넘어졌던 안 의사는 곧장 일어나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Корреа Ура!”(대한 만세)를 삼창하고 순순히 체포됐다. 이때가 오전 9시 30분경이었다.

차내로 옮겨진 이토는 피격 30분 뒤인 오전 10시경 사망했다. 이토 피살에 대한 일본영사관의 전보는 실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으며,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것은 개인 이토에 대한 단순한 테러가 아니다. 이것은 역사관 전쟁이다. 이토는 이웃 나라 조선을 병합하고 만주를 손안에 넣는 것을 일본 번영의 발판이라고 믿었다. 그는 탐욕스럽고 침략적인 일본의 역사관을 상징한다.

반면에 안중근은 각국이 독립한 상태에서 서로 상생하는 평화의 세상을 지향했다. 안 의사는 의거 후 일관되게 동양 평화를 해치는 원흉으로 이토를 지목했다. 동양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이토를 저격한 것이다.

 


옥중에서 드러난 안 의사의 진면모

안 의사가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이토를 처단한 동기는 그가 밝힌 이토의 죄악 15개조에 뚜렷이 나타난다. 안 의사는 하얼빈 일본영사관에 구금되어 일본 검찰의 심문을 받던 초기부터 일관되게 이토의 죄상을 설파했다.

 이등박문의 죄악 15개조
하나, 한국의 민비 명성 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 한국의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셋, 을사보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넷, 독립을 요구하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다섯,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 체제로 바꾼 죄요
여섯, 철도, 광산, 산림과 농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요
일곱, 일본이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한국의 경제를 교란한 죄요
여덣,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요
아홉,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요
열,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키고 식민지화한 죄요
열하나, 한국사를 말살하여 교과서를 압수하고 불태워 버린 죄요
열둘,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열셋,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열넷, 대륙 침략으로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열다섯,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다.

 

 

 이 내용을 보면 안 의사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사물事物의 본질을 꿰뚫는 깊은 혜안을 가진 인물임을 알게 된다.

 

안 의사는 거사 전, 천주교 성당에 들러 7발의 총알에 십자가 표시를 새기며 이토의 죄악상을 마음에 되새겼다. 자신이 신앙하는 천주님을 대신하여, 천주님의 마음으로 죄인 이토를 심판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안 의사의 정신과 상제님 천지공사의 정신이 정확하게 주파수가 맞추어졌다.

안 의사는 거사 전, 거사 당시, 그리고 거사 후에도 천주교 신자였다. 죽는 순간까지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안 의사가 천주교를 만난 것은 16세 때 중앙 관리의 모함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가족들이 천주교 교회당에 피신했을 때였다. 17세 때는 프랑스 선교사인 니콜라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lhelm(한국명 홍석구洪錫九)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얻는다. 이후 10년간은 홍 신부와 황해도 일대를 순례하면서 복음 전파에 힘썼다.

또 안 의사에게는 조선 선비의 기품이 짙게 풍긴다. 안 의사 역시 유소시에 여느 양반집 자제처럼 서당에서 9년간 한학을 수학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유묵遺墨들에는 국가에 대한 충忠과 대의大義를 강조하는 내용이 유난히 많다.

안 의사의 글은 지금의 우리들에게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투박한 듯 단정하고, 날카로운 듯 세련된 그의 글씨는 그의 인생과 정확히 합일合一하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대정치인으로서의 안 의사의 면모는, 그가 옥중에서 저술한 미완의 「동양평화론」에서 잘 드러난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미완의 동양평화론


‘일본이 빼앗은 여순항을 중국에 돌려주고 이곳을 영세중립지대로 만든다. 그곳에 아시아 각국에서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을 보내어 아시아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만든다. 각국은 여기에 일정한 재정을 제공하여 개발은행을 설치한다. 이 위원회가 동쪽 끝에 있는 점을 감안하여 로마 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파견케 한다. 한·중·일 3국의 청년들을 모집하여 연합군대를 만들고 이 군대에서는 2개 국어를 가르치게 한다.’

오늘날 유럽에 EU(유럽 연합)가 생기고 태평양 연안 국가들은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을 결성해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안 의사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이런 구상을 했던 것이다.

중화민국 초대 총통 쑨원孫文은 안중근 의사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높이 평가했다.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百世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千秋에 드리우리.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라.”

또한 시인 조지훈은 이런 찬시讚詩를 바쳤다.

“당신이 아니더면 누가 민족의 의기를 천하에 드러냈을까.
당신이 아니더면 하늘의 뜻을 누가 대신하여 갚아 줬을까.”


 

내 유해를 고국으로!

망국의 한으로 온 나라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안 의사의 의거는 나라 안팎 사람들에게 크나큰 경각심을 주었고, 항일 의식의 국민적 확산은 물론이려니와 뜻있는 분들의 독립운동을 가열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나라를 잃고서도 어쩔 줄 모르던 국민들 가슴속에 자주독립을 외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민족정기를 소생시켰다.

안 의사는 사형 집행 전 국내외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에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遺恨이 없겠노라.”

2천만 동포에게 남긴 이 유언은 안 의사 순국 전날인 1910년 3월 25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됐다. 그리고 사형 집행 직전, 두 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최후의 유언을 받아쓰게 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안 의사의 유해는 두 동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인도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안 의사의 유해가 밖으로 나갔을 때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해방된 지 74년째, 안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여순 감옥 죄수 묘지에 묻혀 있어 그 정확한 위치도 모른 채 여전히 고국으로 송환되지 못하고 있다. 빼앗긴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이 나라의 역사와 민족혼을 세계만방에 당당히 보여 준 안 의사의 정의의 총, 진실의 총을 기억하자.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하얼빈은 단군왕검이 나라를 연 곳이며, 옛 조선의 수도였다. 안 의사의 의거는 우리의 뿌리역사 복원, 민족정기의 부활을 상징하는 거사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중국과 일본 등에 의한 악의적인 한국사 왜곡과 더불어 그 허상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정신문화가 질곡에 빠져 있는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지금은 일제가 씨를 뿌려 놓은 식민사학의 밑동을 뿌리째 드러내고 진정한 광복을 향한, 진정한 통일을 위한 제2의 독립운동이 필요한 때이다. 역사를 잃어버리면 미래에 희망이 없다. 제2, 제3의 안중근이 나와야 하고 우리 모두 안중근 의사가 되어야 한다.

안중근安重根의 일생

1879년 9월2일 순흥 안씨 안태훈安泰勳 공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탄생하다.
1894년 16세 동학을 빙자하여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 폭도들을 진압, 김아려金亞麗 양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다.
1895년 17세 천주교에 입교하여 홍석구(빌렘Willhelm)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도마Thomas라는 세례명 받음. 이후 홍 신부와 함께 황해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다.
1906년 3월 28세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한 후 가산을 정리하여 삼흥三興학교와 돈의敦義학교를 설립하고 구국 영재를 양성하다.
1907년 가을(29세) 진남포를 떠나 북간도 각 지방을 시찰한 후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함, 이범윤, 김두성, 엄인섭, 김기룡 등과 의군을 양성,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이 되다.
1909년 2월(31세) 노령 ‘카리’에서 11명의 동지와 단지斷指혈맹, 이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 4자를 쓰고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로 천지에 맹세하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동양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의 원흉, 일본의 이등박문을 사살하다.
1910년 3월 26일 의거 후 152일이 되는 이날 상오 10시에 사형이 집행되다. 어머니(조마리아 여사)께서 보내온 한복을 갈아입고 여순 감옥 형장에 임하여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 일이니 한일 양국은 동양 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부탁을 남기고 순국하시다.

@ 월간개벽 2019.1월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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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북두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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